2004년 6월호

잠자리에서 즐기는 라운딩의 맛

  • 글: 최만립 대한올림픽위원회 고문·이낙반도체㈜ 회장

    입력2004-06-01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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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리에서 즐기는 라운딩의 맛

    호주 골드코스트 마스터즈 대회에서 아시아생활체육협의회(APOSA) 현지 관계자들과 함께 한 라운딩 기념사진.

    골프를 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대자연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공원을 산책하듯 멋을 즐기는 이도 있을 것이요, 험난한 인생살이의 축소판이라는 필드에서 극적인 역전의 묘미를 맛보며 교훈을 얻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 골프의 가장 큰 매력은 새로운 친구를 자연스럽게 사귀고, 옛 친구를 만나 우정을 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약속이라는 게 상황에 따라 변경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골프 약속만큼은 이제껏 한번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필드에서 만난 이들은 필자의 소중한 자산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필자는 아직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필드에 나가 우정을 다지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필자에게는 정기적으로 나가는 골프모임이 몇 개 있다. 우선 한 달에 한번씩 모이는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모임이 있고, 나이가 들어 알게 된 이들과의 친선모임도 서너 개쯤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즐거운 것은 단연 고교동창 모임이다. 같은 동창모임이라도 대학 동창들과는 그 같은 친화력과 즐거움이 없다. 역시 친구는 어릴 적 사귄 친구만큼 좋은 이들이 없는 것같다. 소년기에 허물없이 함께 뛰어다니던 동무들과 반세기 세월을 건너 같은 필드에서 ‘공치기’를 하는 즐거움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대한올림픽위원회를 비롯해 국내외를 오가며 스포츠계에서 봉사한 지도 어느새 30년이 넘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체육계 인사들과의 라운딩도 언제나 즐겁다. 88올림픽 유치를 비롯한 여러 중대사에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한 추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이들은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정몽준 회장. 두 분과는 예전부터 필드에 자주 나갔다. 특히 1997년 정몽준 회장이 FIFA 부회장에 출마하기 위해 동남아 축구협회 회장들을 방문했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방콕에서 태국축구협회장과 사무총장, 정 회장과 내가 조를 이뤄 라운딩을 할 때는 농담 삼아 “우리가 이기면 FIFA 부회장 선거에서 우리를 지지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결국 큰 점수 차로 이겼는데, 그때 태국축구협회장이 약속대로 정 회장을 지지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장타를 자랑하는 정 회장은 당시만 해도 샷이 정교하지 못해 티샷의 절반 정도는 오비를 내곤 했지만,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

    골프협회 회장을 지냈고 육상발전에도 큰 공헌을 한 코오롱의 이동찬 명예회장과는 20여년간 가깝게 지내며 같은 모임에 참가하고 있다. 한해 몇 차례씩 코오롱 소유의 우정힐즈에 내려가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골프를 치곤 한 지 10년째. 박성상 전 한은 총재, 남상수 남양나이론 회장, 이승호 동화그룹 회장, 김동희 전 KGA 부회장, 김태두 전 조흥은행 전무, 김종낙 전 야구협회장, 최인철 전 OB회장 등이 단골 멤버다. 한때는 세상일을 함께 논의하는 선후배였고, 이제는 함께 건강을 도모하는 컴패니언인 셈이다.

    놀랄 만한 사실은 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박성상 전 총재가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에이지슈팅을 하며 노익장을 과시한다는 점이다. 이승호 회장 또한 대한민국 챔피언 13번을 기록한 원조 골프 마니아답게 팔순이 넘어서도 80대 초반 스코어를 넘기지 않는 저력을 보여준다. 다들 원로에 해당하는 나이지만 필드에서만큼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경쟁을 벌인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골프를 할 때면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간다고.

    때로는 대구CC 우재봉 회장 초청으로 지방원정을 가기도 한다. 1박2일 일정으로 대구로 내려가 환경친화적인 지방 코스를 밟는 일은 늘 설레임이 가득하다. 1997년에는 때마침 이곳에서 전국고등학교선수권대회가 열려 박세리 선수의 우승을 지켜보았던 추억이 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아이언으로 그린 오버시키며 아슬아슬하게 파로 경기를 마무리짓던 박 선수의 묘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솔직히 나는 훌륭한 폼을 갖춘 완벽한 골퍼는 아니다. 젊은 시절 핸드볼을 한 덕분인지 운동신경이 있는 편이어서 프로의 도움 없이 혼자서 골프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매일밤 잠자리에 들면 꼭 골프를 치는 명상을 하곤 한다. 잠이 안 올 때면 특정 골프장을 떠올리며 티오프부터 시작해 보통은 12홀, 피곤할 때는 4~5홀 정도에서 잠든다. 내가 좋아하는 그린에서,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과 라운딩하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은 어느새 안도감과 행복을 얻는다. 골프는 나의 영원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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