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드라마를 50년간 쉬지 않고 제작하는 방송사도, 그리고 그 드라마를 50년간 보고 있는 시청자 모두 참 대단하다. ‘코로네이션 스트리트’는 전세계 방송 역사를 통틀어 최장수 드라마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세계 어느 나라 방송사가 한 드라마를 50년간 개편 없이 계속 방송하겠는가. 그리고 설령 그렇게 오래도록 방송한다 해도 어느 시청자들이 50년이나 같은 드라마를 줄기차게 보고 있겠는가. 뭐든지 바꾸는 건 죽도록 싫어하고 ‘안 하던 현명한 행동보다는 늘 해오던 바보짓을 계속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영국 사람들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1등 비결은 일상성과 평범함
이 드라마는 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정답은 우습게도 ‘간단히 말할 수 없음’이다. 드라마 속 ‘코로네이션 스트리트’는 맨체스터 외곽에 있는 가상의 동네 이름이다. 드라마의 기본 구조는 코로네이션 스트리트에 이웃해서 사는 버로 일가, 오그돈 일가, 돕스 일가, 블랑쉬 헌트, 샐리 웹스터, 제드 스톤, 토니 고든 등 수많은 인물이 얽히고설키며 만들어내는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굳이 요약하자면 ‘보통 사람들의 보통 사는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주제다.
늘 시청률 1위라는 이 드라마의 정체가 좀 궁금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 시청한 적이 있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스토리인지, 누가 드라마 주인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연구실 동료인 영국 아가씨 코트니에게 물어보니 “10년 이상 본 사람이 아니면 내용을 알 수 없을걸?” 하고 대답한다.
‘코로네이션 스트리트’가 묘사하는 스토리는 영국의 중산층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소한 일상들이다. 재미있게도 이 드라마는 1961년 처음 시청률 1위에 오른 이래 시청률 1위를 놓친 적이 거의 없다. 1961년에는 무려 75%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 드라마의 주요 등장인물인 힐다 오그돈은 1982년의 한 통계에서 퀸 마더(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뒤를 이어 영국에서 네 번째로 유명한 여성에 선정되기도 했다.
‘코로네이션 스트리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은 특이하고 과장되기보다는 영국 중산층의 평균적 성격에 가깝다. 이 같은 일상성과 평범함은 이 드라마가 50년 이상 시청률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으며 영국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강력한 요인으로 손꼽힌다. 다시 말해 영국 시청자는 ‘코로네이션 스트리트’를 TV에 등장하는 가상의 상황과 인물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이웃이나 친구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참 어렵다, 영국 드라마
‘코로네이션 스트리트’와 시청률 수위를 다투는 BBC의 ‘이스트엔더스(Eastenders)’는 ‘코로네이션 스트리트의 가난한 사람들 버전’쯤 된다. ‘이스트엔더스’의 역사는 ‘코로네이션 스트리트’만큼 오래지 않아 겨우(!) 25년밖에 안 된다. 1985년 시작돼 지금까지 4000회쯤 방송된 ‘이스트엔더스’에는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에 있는 가상의 동네 알버트 스퀘어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코로네이션 스트리트’가 평범한 영국인의 일상을 담담한 시각으로 보여준다면 ‘이스트엔더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노동계급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중요한 차이점.
사실 ‘이스트엔더스’라는 드라마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상징성을 띤다. 템스 강의 동쪽을 의미하는 이스트엔드는 런던이 세계 제1의 대도시로 급부상하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1837~1901)에 형성된 런던의 서민 지역이다. 이스트엔드-웨스트엔드는 말하자면 서울의 강북-강남 같은 지역구분인데, 런던에서 웨스트엔드와 이스트엔드의 빈부 격차는 서울 강남과 강북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의 이스트엔드는 콜레라가 창궐해 수많은 아이가 죽어나가던 빈민가였고, 유명한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가 흉기를 휘두르던 치안 부재의 지역이었다. 요즘도 이스트엔드엔 파키스탄, 인도, 동유럽 등지에서 온 이민자가 많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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