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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_5

니키 바일의 세계 혹은 사라진 지평선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차원이동자(The Mover)_5

  • 역사 팩션 ‘고전환담’을 통해 ‘신동아’ 독자의 큰 사랑을 받은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들며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차원이동자(The Mover)_5
1
낙동강에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곽재우가 창녕현 망우정에서 숨을 거두자 이탈자가 조용히 그의 몸에서 벗어났다. 영혼을 잃은 몸은 차갑게 식어갔지만 마지막으로 들이켠 술잔은 손 안에 잡은 채 그대로였다. 추격자가 다가와 물었다. 

“마지막 죽음은 연출이었나?” 

한숨을 내쉰 이탈자가 대답했다. 

“난 숙주와 함께 삶을 살아낸 거야. 일종의 협동이랄까?” 

“숙주의 의식을 켜놓았던 건가?” 



“그래. 부수는 건 질색이거든. 이 아름다운 행성도 그대로였으면 해.” 

“어디로 이동할 건가?” 

“조금 쉬면 어때? 옛날얘기나 하며.” 

파동으로 긴 호를 그린 뒤 추격자가 물었다. 

“옛날얘기라…. 어떤 얘기인가?” 

“네가 날 추격하기 한참 전, 아주 한참 전에 에케이 녀석 몸에 달라붙었던 요괴를 만났어.” 

“미쳤다는?” 

“그래. 얘길 듣겠어?” 

“시공 좌표는?” 

“이 행성 시간 단위로 서기 2357년. 그 좌표에서 그 악마와 처음 부딪쳤어.”


2
오랜 세기 누적된 온실가스 효과로 기후가 극도로 악화되자 지구인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지상에 남은 인류는 혹독한 생존 환경을 극복해 가며 옛 문명을 사수했고 대기권 밖 인공 섬으로 이주한 인류는 새로운 진화를 준비했다. 

인공 섬의 과학자들은 뇌 기억을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에 업로딩함으로써 일체의 환경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영원히 격리하고자 했다. 소수의 지도자가 수명을 다하기 직전 이 기술을 통해 영생을 얻었다. 컴퓨터 안에 새로운 삶의 공간을 마련한 그들은 홀로그램 아바타를 통해 섬을 관리하며 수를 늘려나갔는데 이들을 ‘일렉트로노이드’ 혹은 ‘전자 인류’라 불렀다. 

섬 거주민 전체가 이른바 탈피 과정을 거쳐 일렉트로노이드가 된 게 2299년이다. 그해 12월 31일, 탈피를 미루고 있던 마지막 사람들이 24세기의 시작을 구식 몸으로 경축한 뒤 기계 속으로 옮겨갔다. 대기권 밖에 떠 있는 섬에 인간 육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거대한 컴퓨터와 이를 보호하는 방어 장치 그리고 이 모든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로봇이 그 세계의 전부였다.


3
흑인 여성 니키 바일은 한때 호주라 불린 대륙의 남부 제3구역 12번 벙커 자경단 소속이었다. 자경단은 해체된 기존 경찰 조직 대신 지역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2357년 여름, 그녀는 방독면을 착용하고 벙커 밖 오염된 세계로 정기 순찰을 나갔다. 외부 공기를 신선한 산소로 걸러 벙커 안에 공급하는 정화 타워 주변을 두 차례 돌고 난 뒤 간헐적으로 지상을 비추는 태양빛을 활용해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경 구역으로 이동하던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의식에 겹쳐지며 육체 안으로 잠식해 오는 정체불명의 힘에 저항하려 했지만 그녀는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4
인구 전체가 탈피를 마친 일렉트로노이드 세계에 문제가 발생했다. 지구 표면으로부터 생활 물자를 수송해 오는 일은 로봇 몫이었는데 육체에 더는 얽매이지 않게 된 일렉트로노이드들은 이 로봇 숫자를 너무 성급히 줄여버렸다. 낡은 로봇을 수리하거나 시스템 유지에 필요한 부품을 생산하려면 의외로 복잡한 작업이 요구됐다. 남은 로봇들은 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스스로 업데이트할 수 없었다. 

일렉트로노이드는 지상의 몇몇 로봇 기업을 끌어들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상황, 즉 지표 문명의 모든 변수로부터 분리돼 정신의 절대 자유를 만끽하려던 일렉트로노이드가 또다시 지구 문명에 종속되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지상의 로봇 기업은 기술 제공 대가로 섬으로의 이주권을 요구했다. 육체가 사라진 섬엔 여유 공간이 넘쳤으므로 일렉트로노이드들은 이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섬을 새롭게 차지한 이주민은 만족을 몰랐다. 그들은 탈피권까지 요구하며 섬의 시스템을 위협했다. 다급해진 일렉트로노이드들은 섬 문명의 코어인 중앙기억장치를 보호하고자 과격한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로봇을 이용해 이주민을 몰살했다. 

섬에서 일어난 대학살은 아시모프 박사가 20세기에 창안한 이래 수백 년 동안 지켜져 온 로봇공학 제1원칙을 위배한 것이었다. ‘로봇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 행동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음으로써 인류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는 근본 법칙이 그것이다. 일렉트로노이드들은 이 조항을 비껴가려고 자신들의 기억을 칩 형태로 다운로드해 로봇에 심었다. 원시적 형태였지만 최초의 육화가 시도된 셈이다. 

로봇에 육화됨으로써 살인을 금지하는 공학적 안전장치를 제거한 일렉트로노이드들은 대학살 직후 우주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와 로봇 공장을 장악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제1차 로봇전쟁이 벌어졌다. 

기계인간으로 변한 일렉트로노이드를 상대하기 위해 지상 인류 역시 로봇을 동원했는데 역시 문제는 로봇공학 제1원칙이었다. 각 대륙 지휘자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인류’를 정의하는 조항에서 ‘기계와 결합된 인간’ 항목을 삭제했다. 유기물로 구성된 몸을 소유한 존재만 인류로 인정하는 ‘인류헌장’이 이때 발효됐다. 

지상의 원격조종 로봇과 로봇화된 일렉트로노이드 간의 전쟁은 3차에 걸쳐 이어졌고 그 와중에 수많은 희생이 초래됐다. 이 참혹한 전쟁은 2355년, 즉 이탈자가 니키 바일에게 육화하기 2년 전에 끝났다. 열세에 몰린 지상 인류는 일정 경계선을 넘어오지 않는 조건으로 일렉트로노이드에게 로봇공장 절반을 떼어주고 휴전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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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사회에서 살인은 희귀한 일이었다. 로봇전쟁 이후 균등생산 균등분배가 강화돼 빈부 차이가 사라진 벙커 사회는 자경 조직에 의해 물샐틈없이 통제되고 있었다. 자경단 위로 구역행정부가 있고 각 행정부는 대륙지휘부의 지휘를 받았다. 지구의 악조건 속에 살아남기 위해 벌집처럼 조밀하고 섬세하게 구획된 삶을 선택한 지상 인류에게 범죄는 사치였다. 

제3구역 12번 벙커에서 살인이 벌어지던 날 니키 바일은 애인인 블루피의 집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니키 손목에 감긴 투명 밴드 위에 살인 경보를 알리는 붉은 사인이 뜨자 블루피가 이를 먼저 발견하고 그녀를 깨웠다. 호주 원주민 혈통인 블루피의 선량한 눈동자를 보며 깨어난 그녀는 잠시 멍한 상태로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로봇전쟁 이후 첫 살인 사건이었다. 

“니키. 너 요즘 약간 다른 사람 같아.” 

털이 부숭한 블루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몰아쉰 니키가 대답했다. 

“난 사람 냄새가 좋아.” 

기분 좋게 껄껄 웃는 블루피를 뒤로하고 니키는 서둘러 출동 준비를 했다. 경보 사인은 벙커 8번 출입구 인근 잡화점 위치를 표시하는 홀로그램이 돼 점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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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점 카트 레일 출발점에서 발견된 사망자는 웃고 있었다. 정교한 레이저 칼에 베인 시신의 목은 거의 몸통에서 떨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얼굴을 찌푸린 니키가 검시관에게 물었다. 

“이 웃음은 뭘 의미하죠?” 

거구의 백인 남성 검시관이 땀을 훔쳐내며 느릿느릿 답했다. 

“이상하지? 나 역시 그래. 마약 성분도 검출 안 됐어. 미친 걸까?” 

고개를 저은 니키가 시신 목 뒤에서 거주 증명 바코드를 확인하며 말했다. 

“바코드 마지막 번호가 1이니까 유전자 검사를 통과한 출생자군요. 미치지 않았어요.” 

모든 벙커 거주민은 태아 단계부터 구역 행정부의 유전 정보 검사를 통과해야만 출생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의 실수로 출생 후 질환을 앓게 되면 바코드 뒷자리가 2로 바뀌어 별도 관리됐다. 피살된 자는 유전적으로 건강한 22세 백인 남성이었다. 

벙커 천장에 설치된 감시 장치로부터 데이터를 내려받은 니키가 이를 밴드 위 홀로그램으로 재생시켰다. 피살자는 살해당하기 직전 쇼핑을 위해 잡화점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 옆을 빠르게 이동하던 키 큰 남성이 레이저 칼을 휘둘렀고 목을 부여잡은 피살자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목에서 쏟아지는 피를 스스로 지혈하고 있는 피살자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게임을 즐기는 것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커다란 휠 하나로 구동되는 패트롤 바이크에 오른 니키는 살인자 동선 정보를 따라 추격을 시작했다. 살인자는 5번 출입구를 통해 벙커 밖으로 탈출한 상태였다. 방독면을 착용한 니키는 바이크 출력을 최대치로 높여 상대를 따라잡았다. 살인자는 방독면도 없이 10번 벙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정지! 손들고 머리 아래로!” 

니키의 외침에 뒤돌아선 살인자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재미없어지고 있었어. 날 어떻게 죽일 거지?” 

상대에게 다가서던 니키가 음파 충격기를 꺼내 조준하며 되물었다. 

“뭐라고 했지?” 

살인자는 대답 대신 니키를 향해 다가왔다. 두려움 없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가 속삭였다.
 
“어떤 방식으로 날 살해할 거냐고 물었어. 기왕이면 레이저로 여길 쏴줘.” 

자기 심장을 가리킨 살인자가 갑자기 뛰어오기 시작했다. 옆으로 몸을 비킨 니키가 상대 등에 음파를 발사했다. 땅에 나뒹굴던 살인자가 도로 일어서며 니키를 향해 웃었다. 

“이거 강인한 몸이야. 충격이 센 레이저를 쓰래도.” 

허리에서 레이저건을 뽑은 니키는 자신을 덮쳐 오는 상대의 미간을 겨눈 뒤 망설임 없이 발사했다. 쓰러진 살인자에게 다가간 그녀가 상태를 확인했다. 용의자는 게임을 즐기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죽어 있었다.


7
블루피를 뒤에서 안으며 니키가 속삭였다. 

“정말 이상한 사건이었어. 오늘도 자고 갈게.” 

요리하다 말고 뒤돌아선 블루피가 니키를 품에 깊이 안으며 물었다. 

“니키 바일이 이렇게 애교 많은 여자였나? 나 요즘 너무 놀라고 있어.” 

코웃음을 친 그녀가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 

“네가 좋아서 그래. 너랑 껴안고 잠들면 안심이 돼.” 

다가서는 블루피를 밀치며 서둘러 밴드의 홀로그램 장치를 켠 니키가 이어 말했다. 

“우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해. 내일 아침 보고할 게 많거든.” 

니키는 피살자와 살인자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는지 추적했다. 둘 사이엔 연관성이 발견되지 않았다. 출생지와 출신 학교, 직업과 취미 그 어느 것도 겹치지 않았고 심지어 가계 면에서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완벽히 무관한 사이로 살인 동기 자체가 생길 리 없었다. 마주 앉아 식사하며 사건 개요를 전해 듣던 블루피가 문득 말했다. 

“이봐 니키. 게임하는 아이처럼 웃었다고 했어? 죽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니키를 바라보며 블루피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진짜 게임을 한 거야. 목숨을 걸고.” 

블루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니키의 표정이 점차 진지하게 변해갔다.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선 그녀가 다시 홀로그램 화면을 띄웠다. 살인자와 피살자가 최근에 했던 게임 목록을 훑던 그녀는 마침내 연관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블루피, 넌 천재야. 두 사람은 생존 롤 게임에서 여러 차례 맞붙었어.”


8
첫 살인이 벌어진 뒤 3구역 벙커에선 비슷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행정부 방위 시스템의 토론 세션에 참가한 니키는 유사한 사태가 각 대륙의 거의 모든 구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방위 시스템 소속 발제자가 설명을 마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니키 바일 요원에 의해 밝혀졌듯 사건은 주로 게임광 중심으로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진행 양상을 보면 그건 사태의 핵심 변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발생하는 참극은 살인 게임 형태를 띠긴 하지만 게임 경력과 무관한 대중에게까지 확산 중이니까요. 뭔가 다른 요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벙커로 돌아와 순찰을 돌던 니키는 살인 가해자 가운데 생존자가 없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사건의 본질이 여러 유저가 참전해 서로를 죽이는 현실판 생존 게임이라면 승자까지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었다. 승자 베네핏이 없다면 그건 게임이 아니었다. 사건의 핵심에 게임 이상의 동기가 있음에 분명했다. 

자경단 본부로 복귀한 니키는 네트워크에 접속해 유사 사건 발생 지역을 지구 전체에 표시한 화면을 띄웠다. 특이점이 없었다. 이번엔 사건 발생 최초 3일 동안의 데이터만 다시 띄워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옆으로 다가오는 동료에게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번 사건은 숙주들 간의 싸움이야. 게임이긴 한데 진짜 유저는 따로 존재해.”


9
[GettyImage]

[GettyImage]

대륙 각 구역에서 일렉트로노이드에 의해 직영되는 로봇 공장은 출입통제가 철저했다. 니키가 남부 제2구역 모래벌판 중앙에 세워진 공장에 진입하는 건 행정부가 발급한 신원보증서만으론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세 차례 이상의 신분 테스트를 통과하고서야 관리센터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중앙관리 시스템을 관장하는 로봇과 대면한 순간 니키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전쟁 후유증이 만들어낸 본능적 동작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무장해제된 터라 케이스 안엔 레이저건이 없었다. 로봇이 기계음으로 웃음소리를 내더니 물었다. 

“왜 왔나? 이제 우린 너희를 공격하지 않는다. 목적을 말하라.” 

니키가 의자에 조심스레 앉으며 대답했다. 

“지구 전체 벙커에서 이상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게임하듯 서로를 사냥하다 결국엔 모두 죽지.”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감청색으로 빛나는 로봇 눈의 렌즈를 노려보며 니키가 되물었다. 

“나와 얘기하고 있는 당신, 칩 형태로 로봇에 이식된 일렉트로노이드가 맞나?” 

잠시 침묵하던 로봇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런 방식 말고… 이를테면 전파를 통해 로봇과 합체되기도 하나?” 

이번엔 더 긴 침묵을 거친 뒤 로봇이 대답했다. 

“당연히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원격조종이 왜 필요한가? 대기권의 교란 때문에 전파 신호는 쉽게 끊긴다.”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은 니키가 급히 말했다. 

“원격조종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전파 송수신을 통해 기억 자체를 로봇에 이식할 수 있느냐는 거다. 칩을 통해 하듯이.” 

로봇은 오래 침묵했다. 침묵하는 일렉트로노이드 로봇은 위험하다는 게 전쟁 시기 교전 수칙 첫 조항이었다. 니키는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그 순간 로봇이 입을 열었다. 

“우리 과학 수준을 의심하는 건가? 아까 그 질문에 답하겠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 전파를 통해 기억을 이동시키는 기술을 확보했다. 칩 따위는 더는 필요 없다.” 

“그럼 당신도 전파 형식으로 이동해 왔나?” 

“그렇다. 이제 돌아가 주기 바란다.”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던 니키가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칩이 필요 없다면 로봇에 다른 수신 장치를 달았겠지? 유기물로 된 수용기(受容器)를 발명했다는 거고. 그럼 정신 이동용 의식 수용체가 그 쇠붙이 안쪽에 들어 있겠군?” 

로봇이 양팔에 장착된 레이저 발사구를 열고 대답했다. 

“지상 인류 따위가 그 기술을 어떻게 알지? 유기물 수용기 제작은 우리로서도 초고등 기술이다. 정체가 뭐냐?” 

벽에 바싹 달라붙은 니키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수용기를 벙커로 반입해 인류를 상대로 실험했던 거지? 유기체를 숙주 삼아 자유롭게 이동하는 실험을! 너희들에겐 그저 재밌는 놀이였겠군? 내가 누구냐고? 바로 너희의 미래!” 

로봇 발사구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니키의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나선으로 회전하며 로봇에 돌진해 엄청난 파동으로 쇠로 된 동체를 박살냈다. 파편 더미 속에서 캡슐을 집어 올린 니키가 그 안에 담긴 용액을 따라버리고 신경망으로 집적된 작은 세포 조직을 꺼냈다. 그건 이식되는 즉시 해당 생명체의 의식을 숙주로 포획할 수 있는 일렉트로노이드의 차세대 이동 수단이었다.


10
대륙 지휘부 수반인 파라나이클 여사는 니키의 설명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무엇보다 니키 바일이라는 여성의 정체에 의문이 갔지만 상대의 진정성만큼은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여사가 입을 뗐다. 

“그러니까 일렉트로노이드가 새로운 이동 수단을 만들어냈다 그거죠? 유기체에 이식하기만 하면 해당 유기체를 송두리째 장악할 수 있는? 그렇게 숙주를 가지고 놀다 지겨우면 소멸시킨 뒤 다른 숙주로 옮겨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니키가 여사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최초 이식은 일렉트로노이드의 로봇 공장에 출입하던 지상 일꾼들로부터 시작됐어요. 첫 3일간 발생했던 사건이 그들 로봇공장 주변에서만 발생한 걸 보면 분명해요. 그리고 그 일꾼들이 게임 네트워크를 이용해 2차로 퍼뜨렸겠지요. 아마 대기권 밖 섬에서 내려온 최신 게임기로 착각했을 거예요. 그걸 차단하셔야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여사가 말했다. 

“코를 통해 수용기를 뇌에 삽입한다 그랬나요? 지금 광범위하게 수색 중이니 피이식자는 모두 색출될 겁니다. 그리고 일렉트로노이드가 운영하는 지상 공장과의 모든 거래를 중단할 겁니다. 부품을 납입하고 연료를 제공하는 서비스 일체를 끊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그들과의 인적 교류도 두절될 것입니다. 그 리시버 비슷하다는 수용기를 우리에게 이식할 루트 자체가 사라지겠지요. 하지만…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여사가 니키를 뚫어져라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저들의 과학은 우리보다 훨씬 우수해 더 빠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유기물 수용기지만 얼마 후 그조차 필요 없는 다른 고도의 이동 수단을 만들어낸다면 어쩌겠습니까? 결국 전쟁으로 저들을 내쫓을 수밖에 없습니다.” 

니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육화는 한번 진행되면 결코 멈출 수 없었다. 모든 행성 문명은 육체를 초월하려 했지만 결국 더 기괴한 방식으로 육체를 재건하려다 멸망하곤 했다. 그 때 니키를 지긋이 굽어보던 여사가 물었다. 

“묻겠습니다. 니키 바일, 당신은 누구입니까? 일렉트로노이드의 로봇 공격으로부터 살아 돌아오는 건 지상 인류로선 불가능합니다.” 

크게 한숨을 몰아쉰 니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아주 먼 외계의 존재입니다. 육체 없이 파동으로 존재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여사가 다시 물었다. 

“니키 바일은 숙주로군요? 우리 세계에 놀러 왔나요?” 

니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사가 다시 물었다. 

“우리를 공격할 의사는 없는 거지요?” 

니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빙그레 미소 지은 여사가 속삭였다. 

“그럼 전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11
벙커 안 세계엔 비도 눈도 내리지 않았다. 니키는 오늘 같은 날엔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블루피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의 품이 간절히 그리웠다. 텅 빈 거실을 지나 침대로 다가가자 블루피의 커다란 등이 보였다. 약간의 한기가 느껴졌다. 침대 모서리에 앉은 그녀가 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뒤돌아 자신을 안아주었을 블루피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니키가 말했다. 

“블루피. 나 오늘 블루해. 안아줄래?” 

육중한 몸을 움직여 뒤돌아 누운 블루피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몸이 좋으냐? 지독한 중독 아니냔 말이지?” 

놀란 니키가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블루피는 어디 있지? 이미 소멸시켰어?” 

블루피가 벌떡 일어서서 대답했다. 

“당연히! 즐기러 왔으면 남의 일엔 간섭하지 말아야 했단 말이지. 파동을 그렇게 요란스럽게 쓰는 경우는 네가 처음이거든. 즐기더라도 좀 조심하며 해라.” 

블루피의 눈을 응시하던 니키의 눈동자에 서서히 습기가 차오르다 마침내 액체가 고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블루피 안의 존재가 물었다. 

“이게 뭐야? 눈물이더냐? 고작 이런 너절한 생명체 때문에?” 

니키가 상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내겐 특별한 사람이었어. 넌 실수한 거야.” 

니키가 만든 강한 파동이 집 안을 흔들며 블루피의 육체를 휘감았다. 블루피 안의 존재 역시 파동을 일으켜 맞섰다. 둘은 격렬하게 뒤엉키며 사투를 벌였다. 니키 속의 이탈자가 부르짖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일 셈이냐?” 

블루피 속 존재가 대답했다. 

“너나 나나 어차피 노는 거 아니더냐? 중앙기억장치 속 일렉트로노이드 리더로 육화했었단 말이지. 그게 가능하더라고. 맞아! 육화용 생체 수용기를 발명하도록 내가 도왔느니라. 행성을 만들고 파괴하는 이 즐거움을 아직 못 배웠단 말이더냐?” 

격노한 이탈자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상대를 공격했다. 그 탓에 시공간이 왜곡되며 틈이 벌어졌고 블루피 속 존재는 그걸 이용해 잽싸게 이동해 버렸다. 탈진한 채 바닥에 쓰러진 니키 속 이탈자가 옆에 널브러진 블루피의 육체를 바라봤다. 이탈자가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블루피. 널 정말 사랑했어.”


12
망우정 주변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멀리 낙동강 물살이 만들어내는 소리만 고즈넉이 들려왔다. 추격자가 물었다. 

“에케이 안에 있던 녀석이 그 요괴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 

공중을 부드럽게 순회하며 이탈자가 대답했다. 

“놈의 파동 궤적은 독특해. 절대 잊지 않아. 남강에서 녀석을 발견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 빨리 소멸시켜 버리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고.” 

강물 표면을 낮게 스친 추격자가 다시 물었다. 

“이 행성은 결국 멸망하나?” 

“그래. 요괴 녀석이 유발한 전쟁으로 초토화됐어. 지금 우리가 있는 이 행성은 다른 차원의 지구야.” 

“그런가?” 

“그런 요괴가 자꾸 간섭할수록 행성의 차원 유지력은 고갈돼. 나중엔 동일성을 잃고 아예 사라져버릴 거야. 흰 종이 위에 자꾸 그림을 중복해 그리다 보면 나중엔 까맣게 돼버리지? 차원이 축적되는 게 그것과 같아.” 

“그래서 네가 최소한만 개입하려는 건가?” 

“맞아! 난 그들처럼 시공 질서를 엉클어뜨리진 않아. 불필요한 차원이 더 열리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말하자면 난 겸손해.” 

추격자가 조용히 물었다. 

“이젠 어디로 이동할 건가? 그 악마 녀석 잡으러?” 

이탈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휴전 중인 거 아냐? 좀 돕지 그래?” 

추격자가 파동으로 일정한 리듬을 만들며 속삭였다. 

“니키 바일과 블루피를 애도하는 뜻에서. 아, 그리고 이 행성도.” 

“그래. 지구를 애도하며.”


차원이동자(The Mover)_5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0년 2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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