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호

97세대가 민주당 콘크리트 지지층 된 이유

‘대가리 깨져도 문재인’ ‘조국 어깨처짐 방지위원회’… 놀이와 취향의 팬덤으로 86세대와 종속적 세대동맹

  •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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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2020-11-2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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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세대로부터 ‘교양’ 받아…1980년대 ‘승리’ 동경

    • 아스팔트 아닌 콘서트장서 집단 속 효능감 느낀 세대

    • 쇠파이프 대신 인증샷 찍으며 시위 참여

    • 문화 경험을 정치 팬덤으로 확장

    • 정치를 놀이로 바꾼 조용하고도 느린 정치혁명 주도

    지난해 11월 16일 서울 서초구 교대역 사거리에서 열린 '끝까지 검찰개혁, 서초동 시민참여 촛불문화제'. [뉴스1]

    지난해 11월 16일 서울 서초구 교대역 사거리에서 열린 '끝까지 검찰개혁, 서초동 시민참여 촛불문화제'. [뉴스1]

    97세대(1990년대 학번, 1970년대 출생)는 현재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가장 강력한 지지집단이다. 올해 4·15총선에서 40대 중 64.5%가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방송3사 출구조사). 11월 현재도 문재인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을 비롯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에 대한 40대의 호의적 태도는 일관된 경향이다.



    세대를 대표할 정치집단 부재

    97세대의 문재인 정부 지지 경향은 우선 자기 세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치집단의 부재에 있다. 한국의 정당은 좌우를 막론하고 후속 세대를 길러내는 기능이 매우 취약하다. 대신 학생운동이 정치인 인큐베이팅 기능을 수행했다. 1970년대 민청학련과 1980년대 전대협이 대표 사례다. 반면 1990년대 한총련으로 대표되는 학생운동은 달랐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민주화 이후 직선제 도입, 소련 및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 북한의 경제난 등을 목도하면서도 새로운 운동으로 재탄생하지 못했다. 대중을 설득하지 못한 운동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급진적 투쟁으로 경도됐다. 1991년 이른바 분신(焚身)정국과 정원식 국무총리 밀가루 테러 사건, 1996년 연세대 사태, 1997년 전남대와 한양대에서 일어난 프락치 오인 폭행 사건 등은 대중의 반감을 자극했다. 고립을 극복하기 위한 극단적 행위가 다시 고립을 불러오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또한 1990년대 학생운동은 담론 수준도 앞 세대보다 떨어졌다. 예컨대 1980년대 운동권 공통 교양이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비록 편향성은 있었지만 어쨌든 당대 지식인들의 집적물이었다. 반면 1990년대 운동권 내부에서 널리 읽힌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는 ‘해방전후사의 인식’보다도 시각이 편향적이면서 내용도 빈약했다. 



    1980년대 대표적 저항 시인이 김남주와 박노해라면 1990년대 운동권은 홍치산의 ‘바보 과대표’를 즐겨 읽었다. 전자는 적어도 ‘저항시’라고 할 수 있겠으나 후자는 ‘도덕적 동시’에 가까웠다. 비단 텍스트 몇 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1980년대까지 학생운동은 저항 담론의 한 축을 형성했지만, 1990년대 이후 학생운동은 그러한 지위를 상실했다. 

    즉 1990년대 학생운동은 현실 적응, 대중 지지, 담론권력 확보에서 모두 실패했다. 그 결과 후속 정치집단을 길러내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또한 97세대는 86세대처럼 2000년대 대거 제도권으로 입문하는 행운도 누리지 못했다. 대신 97세대 운동권은 진보정당으로 들어가 풍찬노숙을 했다. 예를 들면 학생운동을 거쳐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한 김종철(서울대 90)과 박용진(성균관대 90)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차세대’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김종철은 최근 가까스로 정의당 대표가 됐고, 박용진은 민주당 입당 이후 여의도로 입성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이들은 그 세대 운동권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다. 필자가 2000년대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할 때 지역구 후보는 86세대, 실무자는 97세대가 많았다. 97세대에게는 기회 자체가 적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86세대 정치인 보좌진은 대개 97세대이며, 시민단체 간부가 86세대라면 실무진은 97세대가 많다.


    97세대에게 정치는 문화의 연장

    ‘조국 수호’ 굿즈. 정치 팬덤은 정치인을 ‘아이돌’처럼 인식한다. [트위터 갈무리, 아마존]

    ‘조국 수호’ 굿즈. 정치 팬덤은 정치인을 ‘아이돌’처럼 인식한다. [트위터 갈무리, 아마존]

    더구나 2000년대 후반부터 ‘88만원 세대’를 필두로 청년정치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정당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이른바 청년정치에 편승했다. 더는 청년이 아니었던 97세대는 얼마 되지 않은 자기 몫을 후배에게 나눠줄 수밖에 없었다. 올해 총선에서 일부 정치인이 97세대가 정치권에 전면적으로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 세대 정치인의 성장이 지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97세대가 유력한 정치집단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민주당 지지와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의 상당수가 자신의 정치적 대리자로 86세대 운동권이 많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 1990년대 학번은 캠퍼스에서 86세대로부터 ‘교양’을 받았고, 그 세대의 ‘승리’를 동경하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40대의 콘크리트 지지는 다른 요소도 있어 보인다. 97세대의 문화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0대는 문화적 풍요 속에서 성장했다. 해외 애니메이션·만화·게임·대중가요를 즐겼고, 해외 스포츠 스타에 열광했으며, 청소년 시절이던 1980~90년대 한국 대중가요는 중흥기를 맞았다. 대중문화에 한하자면 이들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첫 번째로 글로벌한 세대였다. 

    문화는 취향이다. 옳고 그름이 아닌 좋고 싫고의 영역이다. 97세대는 취향이 중요한 세대이자 취향으로 집단을 이루어간 세대이기도 하다. 이것의 극단적 형태가 아이돌 팬덤이다. 이들은 팬덤의 원형을 만들었다. 이들은 연예인을 통해 누군가를 공적(公的)으로 지지하는 최초의 경험과 집단에 속했을 때의 효능감을 만끽했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아스팔트가 86세대를 상징하는 공간이라면, 열광적인 콘서트장은 97세대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다. 

    정치와 문화의 관계를 놓고 보면 86세대와 97세대 사이에는 강한 단절이 존재한다. 86세대에게 문화는 정치의 연장이었다. 사물놀이, 탈춤, 민중가요, 연극, 즉 ‘민중문화’로 통칭되는 콘텐츠는 민족주의와 계급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였다. 반면 97세대에게 정치는 문화의 연장이다. 이들은 팬덤과 같은 자신의 문화 경험을 정치로 확장했다. 국내 최초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가 생겨났다. 이후 대형 정치인들은 대부분 팬덤을 통해 성장했다. 노무현뿐만 아니라 안철수, 문재인, 조국의 등장이 그랬다. 한국 정치의 문법이 바뀐 것이다. 

    시위 문화도 변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현장에도 97세대가 있었다. 1980년대 시위 현장에서 비장하게 울려 퍼지던 “학우여~!”와 민중가요는 이제 풍자와 패러디, 가벼운 노래로 대체됐다. 젊은 참여자들은 팔뚝질과 쇠파이프 대신 시위 인증샷을 찍으며 ‘놀았다’. 정치담론에도 이러한 경향이 뚜렷했다. 대표적으로 ‘나꼼수(나는 꼼수다)’를 들 수 있다. 나꼼수가 당시 민주당 지지층의 정치적 공통 교양이 된 것은 취향과 놀이의 요소가 강했기 때문이다. 정치 이념과 노선, 논리 정합성은 재미와 조롱, 음모론 등에 자리를 내주었다. 


    정치를 취향·놀이로 바꾼 조용하고도 느린 정치혁명

    ‘나꼼수’는 민주당 지지층의 공통 교양 노릇을 했다. [트위터 캡처]

    ‘나꼼수’는 민주당 지지층의 공통 교양 노릇을 했다. [트위터 캡처]

    노사모와 같은 정치 팬덤, 2008년 촛불집회, ‘나꼼수’에 일관되게 흐르는 특징은 정치가 문화 콘텐츠처럼 취향과 놀이의 영역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취향과 놀이는 정치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주었다. 이에 대해 당시 진보진영 지식인들은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다중지성’ 등의 용어를 써가며 상찬했다. 

    이러한 분석은 이제 기각돼야 한다. 그들의 주장처럼 10여 년 전 한국 민주주의가 한 단계 도약했다면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 위기는 오지 않아야 한다. 아니, 돌이켜 보면 문화의 연장으로서 정치는 오히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위기를 잉태하고 있었다. 

    2017년 대선 때 회자된 ‘대가리 깨져도 문재인’과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지난해 조국 수호 집회에서 볼 수 있었던 ‘조국 어깨처짐 방지위원회’ ‘미남보존협회’ ‘남친은 없어도 조국은 있다’와 같은 구호는 민망하고도 퇴행적인 모습이었다. 지금 정치 팬덤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넘어, 정치 아이돌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부족주의 수준으로 전락했다. 

    에이미 추아는 미국 사회에서 인종과 종교 등으로 뭉친 집단의 정치적 부족주의를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더 폐쇄적, 방어적, 징벌적이 되며, 더욱 더 ‘우리 대 저들’의 관점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꼬집었다(에이미 추아, ‘정치적 부족주의’). 인종과 종교 대신 정치 아이돌을 대입하면 한국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수많은 정치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일반 대중은 물론 정치평론가와 전문가까지 정치적 부족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현상이 모두 97세대의 잘못은 아니지만 적어도 현재 40대가 한국정치를 취향과 놀이로 바꾸는 데 핵심 역할을 해온 것만은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86세대는 참 ‘착한’ 후배를 두었다

    필자가 속한 1980년대생 역시 97세대가 정착시켜 놓은 정치팬덤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팬덤은 극복되지 못한 채 오히려 말폐(末弊)가 쌓여 결국 민주주의 후퇴를 불러오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를 거두지 않는 팬덤의 존재는 여권 인사의 안하무인과 비민주적 행태의 든든한 뒷배가 되고 말았다. 

    97세대의 민주당 지지는 일종의 종속적 세대동맹이다. 86세대 운동권 출신이 민주당의 주류로서 정치권력을 쥐고 있다면, 97세대는 이를 격하게 지지해 준다. 이것은 이념적으로 강한 결합을 뜻하지 않는다. 97세대는 집단적으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치를 취향과 놀이로 바꾸어버린 조용하고도 느린 정치혁명을 주도했다. 이들은 정치 영역에서 본인들의 문화적 욕망을 벌충하려고 했고, 여기에 편승한 86세대는 점차 권력을 쥐어갔던 것이다. 

    86세대 처지에서 97세대는 본인들이 누리는 권력을 탐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에게 권력을 선사해 준 고마운 존재다. 86세대는 참 ‘착한’ 후배를 두었다. 그런데 97세대가 좋은 선배를 두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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