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호

신평의 풀피리⑳

젊은 판사이던 나의 우울증 극복기

“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

  • 신평 변호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lawshin@naver.com

    입력2020-12-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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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석헌 선생의 ‘서풍부’(Ode to the West Wind)

    • 술에 의존하다 찾게 된 분황사 요사채

    • 그곳에서 만난 안형관 교수

    • 내려가면 반드시 올라가는 국면이 나타난다

    *19대 대선 당시 신평 변호사(64·사법연수원 13기)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중앙선대위에서 ‘공익제보 지원위원회’ 위원장과 ‘민주통합포럼’ 상임위원을 지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여권을 향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지식인의 본보기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경북 경주에서 농사를 짓고 시를 쓰며 산다.

    필자가 젊은 시절 기거한 경북 경주 분황사에는 국보 제30호 모전석탑(사진)이 있다. [동아DB]

    필자가 젊은 시절 기거한 경북 경주 분황사에는 국보 제30호 모전석탑(사진)이 있다. [동아DB]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헐벗은 아이의 사춘기는 톨스토이와 함께였다. 나는 톨스토이에 빠졌다. 무엇이든 그의 책자를 찾아 읽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장래희망을 써내라는 종이에 ‘중앙아시아의 바람 부는 평원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적은 기억이 난다. 다분히 톨스토이의 영향이었다. 

    톨스토이와 함께 함석헌 선생의 글을 열심히 읽었다. ‘함석헌 전집’뿐만 아니라 ‘씨알의 소리’도 거의 빠지지 않고 읽었다. 내게는 책 사볼 돈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신통한 일이다. 

    함석헌 선생은 영국 낭만파 시인 쉘리(Percy Shelly)의 ‘서풍부’(Ode to the West Wind) 마지막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 “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고단한 민주화 투쟁에서 선생의 정신을 지탱해주는 등불 같은 말이었다. 나는 지금도 사춘기의 고독한 영혼에 빛을 밝혀준 선생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꼭 이 시구를 떠올린다.

    겨울이 올 때 봄은 미리 준비한다

    생전의 함석헌 선생. [동아DB]

    생전의 함석헌 선생. [동아DB]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 우리는 살면서 반드시 시련의 과정을 지난다. 참기 힘들다고 고함쳐도 어느 누구 들어주지 않는다. 풍랑을 만나 부서진 배에서 헤엄쳐 뭍에 간신히 올라선 뒤 잔잔해진 바다를 보면 눈물겹다. 



    한국은 자살률이 무척 높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높다. 2019년 통계로 매일 38명이 자살로 목숨을 버린다. 10대에서 30대에 걸쳐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40대와 50대는 2위라고 한다. 

    6·25전쟁 당시 우리 형편은 극빈했다. 전쟁의 참화가 국토의 거의 전부를 휩쓸었다. 사상전인 만큼 다른 전쟁보다 더 처참한 살육과 보복이 행해졌다. 이상하게도 자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확한 논거를 대기는 어려우나, 서구 학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 현상을 흥미롭게 지켜봤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먹을 양식을 얻지 못하는 극빈층은 거의 없다. 물질적으로 6·25전쟁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내부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비참한 상황도 없다. 그럼에도 왜 지금 이렇게 자살률이 높을까. 

    정확한 원인은 그 분야의 학자들이 규명해야 한다. 다만 나는 함석헌 선생이 즐겨 인용하던 서풍부의 구절이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자살자의 상당수는 우울증을 겪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도 생명체인 이상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은 생존본능에 반하는 일이다. 자살을 결행하는 데는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유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자살은 어느 정도의 우울증 기간을 거의 반드시 거치는 게 아닐까 한다. 우울증이 심화해 더는 탈출구가 없다고 여길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련의 겨울이 와서 땅이 꽁꽁 얼고, 사위가 무표정하게 변하고, 오직 찬바람이 몸 안으로 파고들 때 우리는 절망한다. 그러나 겨울이 올 때 봄이 미리 준비하고 있고, 겨울이 맹위를 떨치면 오히려 봄은 한 걸음 더 우리 쪽으로 다가서며, 마침내 겨울이 물러가는 자리에 봄이 필연적으로 들어선다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면 겨울의 심한 멜랑콜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함석헌 선생이 엄혹한 독재정권에 맞서 오랜 기간 민주화 투쟁을 한 오기와 희망이 쉘리의 서풍부 시구에 녹아 있다. 내가 겪은 혹독한 우울증을 소개하려는 이유도 독자들이 그 글귀의 뜻을 되새겨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으로 심한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내 글이 작은 위안이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갖는다.

    수시로 내쉬는 한숨과 비명

    조금 늦긴 했지만 20대에 판사를 시작했다. 다들 ‘판사’라는 호칭 대신 ‘영감님’이라고 부를 때다. 내가 잘 아는 부장검사 한 분은 자신에게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호통을 쳤다. “내가 어찌 영감이요?” 어안이 벙벙한 상대에게 그는 “나는 대감이요, 대감!” 하고 내려 까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장검사는 아마 옛날로 치면 당하관인 영감이 아니라 당상관인 대감이었을 것이다. 판사나 검사는 온실 속에서 사람들이 떠받들어주는 존재였다. 

    나는 서서히 추락하고 있었다. 밑바닥은 얼마나 깊던지 내내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밝히기는 어려우나, 정상적 가정을 꾸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 근본 이유였다. 우울증은 매우 복잡한 기제를 갖고 발현된다. 유전적으로 그 소인이 따로 있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한 사람 누구든 우울증을 겪을 수 있다. 

    당시 내가 보내던 매일 매일은 그냥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이었다. 차츰 술에 의존했다.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생활은 절도를 잃었고, 희뿌연 안개 속에서 정처 없이 허적허적 걸었다. 

    그러다가 1988년 경주법원으로 발령이 났다. 분황사 요사채에 방을 하나 빌려 기거했다. 지금은 철거하고 없는 건물인데 옛날에 지어진 터라 여름에는 무척 덥고 겨울에는 한기를 잘 막지 못했다. 

    손기식 경주법원 부장판사가 절친한 친구인 지승원 목사의 부탁으로 내 방 바로 맞은편에 요사채 방을 마련했다. 이곳에 안형관 효성가톨릭대 교수가 여름방학을 보내러 왔다. 지 목사는 나의 서울대 법대 선배였으나 법학공부에 큰 애착을 느끼지 못한 채 긴 방황을 했다. 그때 안 교수가 큰 도움을 주었다. 지 목사에게 안 교수는 평생의 스승이 됐다. 지 목사는 평생 난지도 주민 등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목회를 했다. 

    안 교수는 서양철학 전공자로서 화이트헤드에 관한 연구가 깊은 분이었으나, 주역의 대가이기도 했다. 요사채 얇은 벽을 통해서 밤이면 내가 수시로 내쉬는 꺼져가는 한숨, 잠깐 잠이 든 사이에 가위눌려 지르는 비명이 그대로 안 교수에게 전해졌다. 심한 불면에다 소화 기능은 거의 정지 상태였다. 힘이 없어 걸음걸이가 비틀거렸다. 

    믿기 어렵겠지만 안 교수는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짐작하는 눈을 가진 분이다. 내 말이 거리낀다면 안 교수의 주변 사람들에게 문의해보면 된다. 나중에 들은 말이나, 그는 처음 나를 만나며 내 몸을 둘러싸고 있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고 했다. 사실 나는 당시 무엇보다 죽음을 갈망했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이 차가 사고가 나서 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밑바닥에서 올라오려 노력하면 상승한다

    연로한 부모님을 두고 차마 먼저 죽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죽은 뒤 판사가 자살했다고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광경이 숨을 막히게 했다. 아! 오직 죽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죽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노릇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연명했다. 안 교수를 만나지 않았으면 자살할 것도 없이 꺼져가던 생명력이 얼마 안 가 소진됐을 것이다. 

    안 교수는 가톨릭 신자면서도 매일 새벽 분황사 대웅전에 가서 나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세심한 배려를 내 주위에 베풀었다. 그가 나에게 끊임없이 강조하는 내용이 있었다. ‘인생에는 내려가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올라가는 국면이 나타난다.’ 쉘리의 시구와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해 오로지 정진의 자세로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려고 노력하면 서서히 상승하게 된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따랐다. 

    왜 그렇게 안 교수의 말에 순종했는지는 역시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절망적 상황이었고 그의 말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내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막대기였다. 다른 사정도 있다. 나는 그와 같이 생활하며 그가 행하는 이적(異蹟)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실제 보고 겪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거의 절대적이고 맹목적 신뢰를 보냈던 것이다. 

    그의 치료는 몇 년에 걸쳐 이어졌다. 방학이 끝나 그가 분황사를 떠난 뒤에도 치료는 계속됐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대구·경북 지역 철학과 교수들을 인솔해 경주로 와서 나와 함께 산행을 했다. 좌장 역할을 한 분은 소설가 김동리 선생의 백씨(伯氏)이자 사상가인 범부(凡夫) 선생의 제자로, 진주 만석꾼 집안 출신인 고(故) 이종후(李鍾厚) 선생이었다. 

    과거 범부 선생이 문도들을 이끌고 명산대천을 찾아 가르칠 때 하루는 사과가 드시고 싶었다고 한다. 이종후 선생이 진주 집에 연락하니 기차 객차 몇 대 분량의 사과가 한꺼번에 당도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들었다. 

    나에게는 그분들이 경주로 오시는 날 외에는 기쁨이 없었다. 그분들과 함께 경주의 여러 산에 올라 점심에 소주 한 잔 기울였다. 내려와서는 목욕을 한 뒤 어둑어둑해진 경주 버스터미널에서 배웅했다. 가시는 모습을 보면 처연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지만 다음 달이 있었다.

    그를 그리워하며 치던 고스톱

    나는 서서히 절망의 깊은 구렁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도 살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다. 수련의 결과로 마음이 깨끗해졌을까. 지나가는 나비나 잠자리를 보며 ‘이리로 오너라’ 하고 말하면 내 몸에 와서 앉았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다시 살아났다.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 후 다시 지리멸렬한 일상에 포위돼 그때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날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내 본질을 이뤘다. 그것을 대체로 벗어나지 않는 삶이었다고 자신을 위로한다. 

    요즘처럼 본격적인 추위가 덮치는 날이면 안 교수가 분황사를 떠난 뒤 내가 그를 그리워하며 꽁꽁 언 겨울밤에 고스톱 치던 일이 생각난다. 난로를 희미하게 피워놓고 나와 분황사 주지 그리고 절에서 잡일을 하던 이, 이렇게 셋이서 자주 밤 깊도록 고스톱을 쳤다. 여전히 우울증은 나를 지배하고 있었으나, 다가올 봄에는 새 삶을 가질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분황사 키 큰 나무들과 모전석탑 그리고 우물에 사는 용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 나를 이끄신 당신

    먼동이 트기 전 어둠은 짙어지고
    쪼개진 허상들이 어지럽게 날더니
    이제사 환한 모습들 눈앞에 나타난다

    죽은 듯 살은 듯 미망 속 헤맨 한 생
    일상의 무의미 안 숨어있던 선한 의지
    못난 나 일으켜 세워 허리를 펴게 하시네

    당신은 약속을 언제나 미루잖고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이니
    날 향한 당신의 뜻은 영겁 전에 계셨도다

    개신교로 시작해 불교를 거쳐 천주교를 갖게 됐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내가 들은 생전 강연에서 당신의 인생관 전체의 60% 이상이 불교에서 연유한다는 믿기 힘든 말씀을 했다. 그런 말씀을 담대히 할 수 있기에 그분이 여태 추앙받는 것 아닐까. 오랜만에 서울을 찾아 서소문 역사공원에 들렀다. 역사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신평 제공]

    개신교로 시작해 불교를 거쳐 천주교를 갖게 됐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내가 들은 생전 강연에서 당신의 인생관 전체의 60% 이상이 불교에서 연유한다는 믿기 힘든 말씀을 했다. 그런 말씀을 담대히 할 수 있기에 그분이 여태 추앙받는 것 아닐까. 오랜만에 서울을 찾아 서소문 역사공원에 들렀다. 역사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신평 제공]


    ● 1956년 출생
    ● 서울대 법학과 졸업
    ● 제23회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 제13기
    ● 인천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 대구지방법원 판사
    ●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헌법학회 회장 역임
    ● 저서: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 ‘들판에 누워’(시집)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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