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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 반도체 공장 지으면 참 이쁘겠재? 바란스 참 맞겠재?”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㉜]

2공장도 노는데 3공장 지으라던 호암, 그 반전 스토리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저기에 반도체 공장 지으면 참 이쁘겠재? 바란스 참 맞겠재?”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㉜]

  • ● 美日 반도체戰으로 캄캄하던 하루
    ● 인텔도 한 수 배운 삼성의 열정
    ● 3라인 세우지 않으면 중소기업 전락
    ● 착공 이후 일어난 기적 같은 일
    ● 美日, 삼성 반도체 독주 지켜보다
    ● 극적 반전 보지 못하고 눈감은 호암


삼성이 야심차게 64KD램 양산을 시작한 1984년은 불행히도 D램 시장이 대폭락기로 접어든 초입이었다. 그해 말부터 세계 반도체업계에는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된 대폭락 사태가 들이닥쳤다. 미국과 일본 업체들이 덤핑 경쟁을 하는 치킨게임이 시작됐다. 그해 초만 해도 개당 3달러였던 가격이 75센트까지 추락했고 31달러씩 하던 256KD램도 3달러까지 폭락했다. 반토막도 아닌 10분의 1 토막이 난 것이다. 업계 사람들은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2000년 12월 촬영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동아DB]

2000년 12월 촬영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동아DB]

‘피라미 신세’ 삼성… 재고가 복도까지 쌓였다

이는 급속한 성장이 낳은 공급 과잉 후과였다. 특히 일본의 고속성장이 한몫을 했다. 메모리 반도체는 인텔이 1971년 1Kb(비트) D램을 처음 개발해 시판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이 먼저 뛰어든 시장이다. 그런데 일본이 발 빠르게 국가 프로젝트로 키워 역량을 총동원하면서 미국을 맹추격했다. 미국이 차근차근 4K, 16K, 64K를 내놓으면서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일본은 256K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양산에 들어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국과 일본은 총성 없는 반도체 전쟁에 돌입했다. 이에 설비 투자 경쟁이 이뤄지면서 64K, 256K 공급 과잉이 시작된 것이다.

덤핑 경쟁에서 피해자는 미국 업체들이었다. 일본 업체들은 이미 개발비를 회수한 뒤라 손해 볼 게 없었다. 미국 업체들은 폭락 장세를 견디지 못했다. 페어차일드를 필두로 RCA, 시그네틱스가 무너졌고 GE(제너럴일렉트릭), 인텔, 웨스팅하우스도 D램 사업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1986년 반도체 전체 생산량과 매출액에서 일본은 처음으로 미국을 추월했다.

미일 간 고래 싸움에서 새우는커녕 피라미 신세에 불과하던 후발주자 삼성의 상황은 어땠겠는가. 재고가 창고를 넘어 복도까지 쌓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1985년 미국과 유럽에서 팔린 삼성의 64K는 대부분 원가 이하로 납품됐다.



야심차게 반도체 생산국으로 자리매김하자마자 닥친 거대한 쓰나미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보내야 했다. 자칫하면 그룹 전체가 와해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당시 전문 경영을 맡고 있었던 고(故) 강진구 전 회장은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반도체 개발은 순조로웠지만 경영에서는 엄청난 시련의 연속이었다. 1983년에 사업을 본격화하기 이전에도 반도체 부문 경영 상황은 좋지 못했으나 64KD램이 출하되던 1984년부터 적자가 늘기 시작하더니 이듬해인 1985년에는 3달러50센트하던 국제 가격이 불과 몇 달 만에 50센트로 곤두박질쳤다.

당시 제조원가가 1달러 70센트였으니 만들면 만들수록 개당 1달러 20센트씩 손해를 보는 거였다. 1985년 누적 적자는 무려 428억 원에 달했다. 1986년과 1987년에도 적자가 계속되어 1984년 이후 적자를 다 합치면 무려 1159억 원에 이르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반도체 사업부문이 통신부문에 속해 있어 통신부문의 흑자로 견딜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역시 호암의 탁월한 경영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마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던 듯 말이다.

강 전 회장은 적자의 늪에 허덕이는 상황에서도 연구개발을 놓지 않던 호암의 열정과 의지가 없었다면 삼성 반도체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다시 그의 말이다.

기흥사업장 완공 후 가동 중인 생산라인을 살펴보는 호암 이병철 회장.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완공 후 가동 중인 생산라인을 살펴보는 호암 이병철 회장. [삼성전자]

“지금의 삼성전자 규모로 본다면 (누적 적자) 1000억 원은 그다지 큰돈으로 여겨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이만저만한 거액이 아니었다.

마침 통신 부분이 매년 200억 원 내지 300억 원 세전 이익을 올리는 호조를 보여 적자를 보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삼성반도체통신 전체로서는 1985년(적자 79억 원) 1987년(적자 48억 원)을 제외하고 이익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호암은 위기를 미리 예견이나 한 듯 일찍이 1983년 삼성전자에 속해 있던 반도체 사업부를 떼어내 통신 부문과 합쳐 ‘삼성반도체통신’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체제를 강화시켜 놓았었다.


이는 사업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참으로 위대한 전략적 포석이었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반도체 개발에 소요되는 막대한 투자와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파생할 가격 경쟁을 미리 통찰해서 취한 적정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도체를 기어이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호암은 엄청난 반도체의 경영손실 안에서도 천문학적 개발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호암께서 반도체와 관련되는 사람들과 점심을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다.


누적 적자가 1200억 원에 달하고 있다는 것과 1M(메가) D램 공장 착공을 당장 하지 않으면 출하 경쟁에서 후발이 될 것이라는 말들이 엇갈리고 있었다.
호암은 단호했다. ‘64K, 256K가 늦어서 얼마나 큰 고생을 했는데 1M 공장 착공이 늦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일 아침에 착공식을 하자, 내가 기흥 공장으로 가겠다’고 하셨다.”


앤디 그로브 인텔 회장이 보낸 메모

앤디 그로브 전 인텔 회장. [인텔]

앤디 그로브 전 인텔 회장. [인텔]

삼성이 지옥의 터널을 지나는 시절을 이윤우 전 부회장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어떤 때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닌가 하는 절망감이 엄습했습니다. 문제는 적자가 나더라도 희망이 있어야 되는 건데 64K, 256K, 1MD램이 과연 순조롭게 성공적으로 개발될 수 있을지, 가격이 폭락하고 있는데 반등할 수는 있는 건지, 이렇게 불안한 사업을 계속 끌고 가야 하는 건지,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굉장히 많았죠.

그런데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있기에는 닥친 일,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내일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오늘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닥친 일들을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는 절박감이 걱정과 두려움을 쫓아내 버린 시절이었습니다. 정말 먹고 자고 일만 했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는 ‘적자 시대’를 견디던 때 인텔에서 하청을 받아 일하기도 했는데 그게 오히려 자신감을 가져다주기도 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딱 1984년, 1985년 일이었죠. 한쪽에서는 2공장 착공이 진행 중이었고 이미 만들어놓은 1공장은 만들면 손해이던 시절이라 돌릴 수가 없었어요.

할 수 없이 인텔에 가서 ‘일거리 좀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피(EP)롬(※아래 편집자주 참조) 주문을 받았어요. 인텔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공정을 가르치러 왔다가 우리가 목숨 걸고 일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수율이 인텔보다 높았으니까요.

나중에 납품이 끝났을 때 앤디 그로브 인텔 회장이 제게 ‘YW Congratulation’(이 전 부회장의 영문 이니셜을 따 ‘윤우, 축하한다’는 뜻)는 메모를 보냈습니다. 그 분 성격이 아주 괴팍해서 부하들한테 절대 칭찬하지 않는 스타일인데 제게 그런 메모를 보냈다는 건 삼성 직원들의 근면함과 일 처리 능력에 매우 만족했다는 메시지였죠.

앤디 그로브 회장은 원래 학자였는데 그 사람이 쓴 ‘Physics of Semiconductor(※Physics and Technology of Semiconductor Device)’라는 책으로 제가 대학교 때 반도체 공부를 했어요.

나로서는 선생님일 뿐만 아니라 선망의 대상이었죠. 인텔 창업자들은 반도체 개발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이 창업한 회사 아닙니까. 앤디 그로브 회장은 저로서는 그야말로 신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그가 친필로 보내준 메모를 보고 감동해서 가보(家寶)처럼 간직하겠노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삼성 공장을 지도한 인텔의 밥 베이커라는 사람이 당시 우리에게서 배운 공정을 그대로 따라 해 인텔에서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열심히’는 기본이고 빈틈없이 치밀하게 협업해서 일하는 걸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갔습니다. 비록 적자로 허덕이고 있었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도 하면 할 수 있겠구나 자신감을 얻기도 한 시간이었습니다.”

<※편집자주>
메모리는 크게 램(RAM, Random Access Memory)과 롬(ROM, Read-Only Memory)으로 나뉜다. 램은 기억된 정보를 읽어내기도 하고 다른 정보를 기억시킬 수도 있는 메모리다. 카세트 테이프를 생각하면 쉽다. 롬은 읽기만 하는 메모리다. 레코드판을 생각하면 쉽다.

램과 롬의 가장 큰 차이는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사라지느냐(램, 휘발성) 유지되느냐(롬, 비휘발성)에 있다. 그래서 램을 ‘휘발성 메모리(Volatile Memory)’, 롬을 ‘비휘발성 메모리’라고 부른다. 램은 컴퓨터의 주기억장치, 응용 프로그램의 일시적 로딩(loading), 데이터의 일시적 저장 등에 사용된다.

앞에 언급된 EP롬이냐 EEP롬이냐 하는 것은 데이터를 지우는 방법에 따른 구분이다. EP는 자외선으로, EEP는 전기를 이용한다.

호암 생전 마지막 공식 일정

1985년 5월 21일 기흥 2라인 준공식. [삼성전자]

1985년 5월 21일 기흥 2라인 준공식. [삼성전자]

이 인텔 OEM 제작에 참여한 사람이 임형규 전 사장이다. 그의 말이다.

“인텔은 우리 제품을 판매가보다 25%나 싸게 구매하는 것은 물론 향후 삼성이 EP롬 사업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까지 내걸었습니다. 값을 후려친 것도 후려친 거지만 EP롬은 당시 비휘발성 메모리의 주력 제품군이었는데 이걸 개발하는 걸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매우 불리한 계약이었지요.

하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상황이 어려웠고 절박했으니까요. 게다가 우리가 당면한 더 큰 어려움은 팀원 대부분이 경력 3년 미만의 신입 사원에 가까운 기술 인력들이어서 모든 걸 처음부터 가르쳐가며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텔 같은 회사와 비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그러나 우리가 이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고 의기투합했습니다. 당시엔 모든 부서가 주말도 없이 매일 밤 10시까지 일했습니다. 만들면 만들수록 적자가 커지는 절망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생존 자체를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하던 때였습니다.

1986년경 어느 날 이병철 회장님을 뵙던 기억이 납니다. 새롭게 삼성에 합류한 박사급 연구원 5, 6명과 함께였습니다.

당시 일흔을 넘긴 회장님이 우리들 손을 잡아 주시면서 ‘젊은 박사들이 반도체 사업보국에 참여해 줘서 고맙다’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손의 촉감이 부드러웠지만 힘이 없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돌아가셨을 때(1987년 11월 19일 호암 별세)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호암의 기업가 정신에서 놀라운 사실은 앞서 강 전 회장 말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상황에서도 반도체 개발을 독려하고 막대한 돈을 들여 2공장(1984년 8월) 3공장(1987년 3월)을 계속 지었다는 것이다. 다들 이대로 가면 망한다고 아우성을 쳐댔지만 호암은 ‘올인하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백미가 3공장 건설이다. 2공장까지는 호암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던 삼성맨들이었지만 3공장은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김광호 전 부회장의 말이다.

“초유의 반도체 불황으로 2공장조차 1년 가까이 가동을 못하고 있었는데 3공장을 지으라니 정말 난감했습니다.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10년 넘게 적자를 보고 있었고 언제 흑자로 돌아설지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3공장을 지으라는 건 누가 봐도 너무 무모한 결정이었습니다. 주변에선 심지어 ‘이제 호암도 나이가 드셔서 판단이 흐려진 것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공장 건설이란 게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1공장은 달러로 1억5000만 달러, 2공장은 2억5000만 달러가 들었습니다. 누적 적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한계선을 넘어가고 있는데 3억4000만 달러가 들 것으로 추정되는 3라인을 세우라는 건 정말 비현실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호암의 모습을 그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1984년, 1985년 기흥 공장에 오실 때마다 저를 불렀습니다. 당시 기흥에는 1공장, 2공장, 용역동, 관리동이 있었을 때였는데 관리동 5층에 회장실이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가면 바깥 창문을 내다보고 계셨는데 ‘김군, 김군, 이리 와 저기 좀 봐라, 저기다 3공장 지으면 참 이쁘겠재?’ 하시는 거예요.

그런 말씀을 듣는 제 속이 어땠겠습니까. 비서팀이고 재무팀이고 눈만 껌뻑 껌뻑하면서 저를 향해 ‘노(No)라고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계속 눈치를 주는 바람에 저는 안 된다고 말씀도 못 드리고 “예, 검토하겠습니다” 한 뒤 계속 미적미적 미뤘습니다. 비서실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전부 뒤로 빼고 있었죠.”

이 대목에서 앞서 강진구 전 회장의 기록에 등장하는 ‘내일 3공장 착공식을 하러 기흥에 가자’고 한 대목이 소개된다. 김 전 부회장의 기억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갑자기 회장님이 ‘내일 아침 9시에 3공장 기공식 하러 갈 테니 준비하라’는 거예요. 한마디로 날벼락이었습니다.

정말 발칵 뒤집어졌지요. 3공장 터에 잔디를 쭉 심어놨었는데 그걸 하루 만에 다 걷어내고 경찰서에 발파 허가받는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꼴딱 밤을 새 난리법석을 쳐 가지고 겨우 준비를 마쳤어요. 웬 비는 그렇게 억수같이 쏟아지던지…. 호암은 기어코 내려오셔서 기공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전 마지막 공식 일정이셨습니다.”

기적 같은 호황 국면에서

이윤우 전 부회장은 기공식에서 호암이 여느 때와는 달리 비장감에 서려 말을 길게 이었다고 한다. 그의 기억이다.

“당장 내일 기공식을 하라는데 어떻게 합니까? 비가 와 가지고 땅이 진흙이 되어 있어서 밤새 모래를 실어다가 다지고 텐트 세우고 해서 겨우 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기공식에서 선대 회장님 말씀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아요.”

그는 “뭐라고 하셨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호암의 육성을 전했다.

“6개월 만에 기흥 1라인을 완성시켰고 1300억 원이라는 기회손실을 보았다. 부천 공장에서 이익이 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고 연구실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미국, 일본 기업들이 가장 이익을 많이 내던 1984년과 1985년에 우리는 제대로 된 생산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기간 중에 여유를 갖고 훈련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256KD램 개발에 성공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고 정말 다행이었다. 임직원들의 용감하고 희생적인 각오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3라인 착공은 1986년부터 생각한 거였다. 3라인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중소기업으로 전락한다. 정말 모험이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견고하고 질 좋고 아름답게 지어라.”

이 전 부회장은 “당시 호암의 모습을 보며 3공장을 지어야겠다는 당신의 결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호암의 판단은 신의 한수였다. 그의 별세 후 반도체 대호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려워도 기회가 반드시 온다, 그때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며 공장 건설을 독려한 호암의 판단이 탁월한 선견지명으로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다음은 삼성전자 사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두가 반대하면서 6개월 동안 첫 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선대회장의 의지는 한결같아 1987년 8월 3라인을 착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세계 반도체 시장이 3년여 불황기를 끝내고 호황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1985년 중반 30센트까지 떨어졌던 64K는 2달러30센트까지 치솟았고 1986년 1달러50센트였던 256K는 4~6달러까지 뛰어올랐다. 삼성은 생산라인을 모두 돌리고도 모자라 64K 전용라인인 1라인을 개조해 256K를 생산할 정도였다.

드디어 흑자가 시작됐다. 1987년엔 2862억 원으로 전년 대비 71%, 1988년에는 67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134%라는 경이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매출 대부분은 수출이 차지했다. 1987년 3억1500만 달러, 1988년 8억580만 달러로 전년보다 각각 74%, 155%가 늘었다.

1988년 한 해 동안 디램 부문에서만 올린 순익이 3200억 원이었으므로 그동안의 누적적자를 빼고도 1600억 원 흑자를 기록했다. 그제서야 경영진은 착공 지연으로 6개월이란 기회비용 손실을 후회했고 한편으론 호암의 선견지명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에 굴욕적인 美日 반도체 협정

호암은 정말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삼성 반도체가 적자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미일 간 반도체 전쟁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일본이 64K, 256K 덤핑 공세에 나서며 수익을 싹쓸이했다. 무려 80%까지 시장 점유율이 오르자 미국 언론은 ‘제2의 진주만 습격’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일대 반격이 시작됐다. 미국 기업들이 무역위원회(ITC)에 일본 기업들을 무더기 제소하고 나선 것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ITC는 ‘무역 보복’의 대명사다. 미국 업체들이 특정 국가의 덤핑이나 특허 침해 등 불공정 무역행위로 피해를 입었다고 제소하면 ITC는 조사를 거쳐 덤핑 방지 관세를 부과하거나 수입을 제한하는 등 제재 조치를 내릴 수 있다. 미국으로 물건을 수출하는 기업 처지에서는 가히 저승사자라 할 만하다.

1985년 6월 24일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는 NEC 등 5개 업체를, 인텔사는 히타치 등 8개 업체를 반덤핑 혐의로 제소하면서 역사적인 ‘미일 반도체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 반도체협회까지 나서 일본 반도체업체들을 상대로 덤핑조사를 요구했다. 대부분 일본 업체들이 이중 삼중의 제소를 당한 셈이다.

ITC는 보란 듯이 자국 기업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였다. 제소 접수 8개월만인 1985년 3월 일본 업체들에 최소 21.7%에서 최대 188%에 이르는 엄청난 덤핑 마진율을 확정한다.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미일 반도체 무역협정(1986년 7월 31일)은 일본의 백기 투항이나 다름없었다.

일본 기업들은 생산량부터 줄였다. NEC만 해도 한 달에 1500만 개씩 생산하던 256K를 거의 절반 수준인 800만 개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건 약과였다. 미국 기업들이 덤핑 제소를 철회하는 조건으로 반도체 원가까지 모두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제3국에서 조립해 수출하던 우회 수출 제품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에 굴욕적인 미일 반도체 협정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거대한 후폭풍을 가져다줬을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시장에서의 공급이 줄자 D램 값은 서서히 상승 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1986년 말, 1987년을 지나면서 64K가 1달러, 256K가 3달러까지 치솟더니 1988년이 되자 64K는 6달러, 256K는 12달러까지 올랐다.

일본의 후퇴에 기름을 부은 것이 또 있었으니 바로 ‘플라자 합의’(1985년 9월 22일)다. 플라자 합의는 일본의 부동산 거품 붕괴나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다. 쿼터제, 덤핑 관세 등 다양한 무역제재에도 대일 무역적자가 해소되지 않자 미국이 엔화 가치를 강제로 올려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킨 일이다.

미국의 보복이 부른 나비효과

이런 걸 하늘이 돕는다고 하는 것인가. 일본이 백기를 든 미국 시장을 잠식해 들어간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 삼성이다.

다시 김광호 전 부회장 말이다.

“급하게 3공장을 완공해서 1M 양산을 막 준비하고 있는데 64K, 256K 값이 마구 올라가는 거 아닙니까, 미국 업체들은 이미 D램에서 철수한 상태였고 일본 업체들은 256K를 버리고 1M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이제는 삼성 것이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미국과 일본 업체들이 삼성의 독주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 거죠.

돌이켜보니 호암께서는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되기 이전부터 기흥에 내려올 때마다 ‘미국의 보복이 빨라질 것이니 3공장을 빨리 지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몰랐습니다. 저희 같은 임직원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어려움 때문에 추가 공장 건설에 반대했던 거죠.

그때는 ‘내가 내 목을 걸고 삼성을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호암의 생각은 달랐던 겁니다. 그의 선견지명은 치밀한 상황 판단에 따른 것이었지만 우리로서는 이걸 알 수가 없었던 거죠.”

안타깝게도 호암은 이런 대반전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다시 김 전 부회장의 말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항상 죄스럽지요. 저는 정말 그때 그렇게 공장 건설을 독려하시던 회장님이 암 투병 중이라는 걸 까맣게 몰랐어요. 나중에 소병해 비서실장한테 ‘회장님이 항암치료 받고 머리가 빠져서 가발 쓰고 계시면 최소한 우리한테는 알렸어야 할 거 아니냐?’ 따졌을 정도였어요. 그랬다면 3공장 건설을 더 서두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아마 회장님 지시가 처음 떨어지자마자 3공장을 지었더라면 5000억 원은 더 벌었을 거예요. ‘저기에 공장 지으면 참 이쁘겠재? 바란스 참 맞겠재?’ 하시며 첫 지시를 내린 지 6개월 뒤에 착공했으니까요.

회장님께서 살아계셔서 ‘너, 내가 공장 지으라고 할 때 지었으면 돈을 얼마나 더 버는 건데,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니 대단한 손실 아니냐’ 목을 자르셔도 할 말이 없는 거죠.

참으로 대단한 양반이셨습니다. 동물적 감각을 가졌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어요. 비서실이고 뭐고 다 안 된다고 했지 된다고 보고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그걸 그냥 턱 결정하신 거 아닙니까.

그리고 타이밍이 아주 정확했어요. 3공장이 조금이라도 더 늦게 새워졌더라면 그렇게 돈을 못 벌었죠. 돌아가시고 바로 이듬해인 1988년 한해에만 1700억 원인가 흑자를 냈는데 10년 넘게 쌓여온 누적 적자 1300여억 원을 한꺼번에 다 없애고도 흑자를 낼 수 있었습니다.”



신동아 2022년 6월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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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 반도체 공장 지으면 참 이쁘겠재? 바란스 참 맞겠재?”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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