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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1등 韓, 소재 장비 1등 日 뭉치면 美 두렵지 않다 下 [+영상]

[일본 반도체 부활 현장을 가다⑤·끝]

  • 도쿄=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3-09-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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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체 핵심 소재 불화수소, 日이 세계 수요 70% 생산

    • 고품질 지향하는 日 문화가 소재·장비 분야 1위 원동력

    • 韓 메모리 점유율 70%도 대단, 유지만 해도 잘하는 것

    • ‘무리한 파운드리 확장’ ‘소재 장비 국산화’ 도움 안돼

    • 미·중 갈등으로 시장 예측 어려워…日·대만과 협력 중요

    반도체 패권 경쟁이 국가 간 전쟁으로 번지고 있다. 미국은 정부가 직접 나서 산업 질서를 재구축하고, 게임의 룰(rule)을 바꾸려 한다. 동맹국에 보조금 당근을 내밀며 기술과 이익 공유까지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은 1980년대 반도체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으로 외국 기업 공장을 유치하고 무엇보다 미국·대만과 똘똘 뭉쳐 협업 체계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과연 그들만큼 절박하게 뛰고 있는가. 일본 반도체 부활 현장의 목소리를 전문가 인터뷰를 중심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美·대만과 뭉쳐야 산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② 원스어게인? ‘일장기 반도체’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③ “삼성에 뒤처졌는데 도요타까지 현대차에 밀린다”
    ④ 반도체 1등 韓, 소재 장비 1등 日 뭉치면 美 두렵지 않다 上
    ⑤ 반도체 1등 韓, 소재 장비 1등 日 뭉치면 美 두렵지 않다 下


    [+영상] 반도체 전쟁 중인 지금은 '이건희' 다시 읽을 때



    도쿄 도심에서 지하철로 1시간가량 떨어진 무사시노코스기 역 인근에 위치한 세계 최대 고순도 불화수소 회사 TOK. [도쿄=허문명 기자]

    도쿄 도심에서 지하철로 1시간가량 떨어진 무사시노코스기 역 인근에 위치한 세계 최대 고순도 불화수소 회사 TOK. [도쿄=허문명 기자]

    반도체 공정은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초미세, 초고순도, 초정밀 공정이다. 따라서 칩을 만드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반도체 공장에 가보면 사람은 잘 안 보이고 큰 장비가 움직이는 것만 보인다. 책 ‘현명한 반도체 투자’에는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반도체를 만들 때는 기계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화학 물질을 섞어 새로운 약을 만들 듯 물질을 차곡차곡 합성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약품 제조와 차이가 있다면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고진공 상태여야 한다는 거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초고진공 장비 안에서 극도로 순수한 여러 종류의 물질과 가스를 반복적으로 주입해 화학반응을 일으켜 새로운 물질을 만들거나 특수한 빛을 사용해 물질의 일부 영역만 화학적 성질을 바꿔주거나 형성된 물질을 원자 단위로 정밀하게 깎아내는 공정이 수없이 반복적으로 진행된다.

    이때 사용되는 소재는 우리가 일상에서는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또 원치 않는 원자가 몇 개만 들어가도 반도체 성질이 바뀌어버리므로 극도로 순수한 물질이 필요하다.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소재는 순도가 99.999%에서 99.99999999% 수준으로 9가 5~12개는 붙는다. 이런 고순도인데도 불량이 나온다.

    이런 정도 순도의 소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업은 세계적으로 굉장히 드물고 수준 차이나 경쟁력이 천차만별인 데다 이걸 만드는 사람들은 기초과학적 지식이나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반도체 소재 기술이야말로 첨단 기술인 것이다.”

    세계 최고 고순도 불화수소 회사를 가다

    지금은 풀렸지만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는 한마디로 ‘소재 전쟁’이었다. 반도체 소재에 문외한이던 일반 사람들에게도 이제는 귀에 익숙한 불화수소도 대상 품목 중 하나였다.

    우리 기업들도 국산화에 빠르게 성공했지만 97~99% 수준의 비교적 저순도였다. 99.9999999% 수준의 고순도는 현재 일본이 압도적 1위다.
    불화수소는 웨이퍼 위에 회로 패턴을 만들 때 웨이퍼를 깎고(식각·etching) 표면을 닦는(세정·cleaning) 공정에 사용된다. 일명 ‘에칭 가스’로도 불리는데 일본 업체가 세계 수요의 7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기자는 올 초 도쿄에 있는 세계 1위 고순도 불화수소 회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TOK(동경응화공업주식회사)라는 회사였다. 이곳에서 만난 데쓰야 가와타 생산부장은 엔지니어 특유의 차분함과 성실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데쓰야 가와타 TOK 생산부장. [도쿄=허문명 기자]

    데쓰야 가와타 TOK 생산부장. [도쿄=허문명 기자]

    TOK 본사는 우리로 치면 경기 과천시 정도로 도쿄 도심에서 지하철로 1시간가량 떨어진 무사시노코스기 역 인근에 있었다.

    역에 내리자마자 신축 고층 주상복합 빌딩이 즐비한 신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곳에 과연 공장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층 아파트 숲 한가운데 자리한 TOK 공장은 건물 내외부가 매우 깨끗하고 첨단 시설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데쓰야 부장은 한국 기자를 만나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회사 소개를 좀 해달라.

    “1940년에 창업했으니 올해 83년 주년을 맞는다. 화학업체로서는 일본에서도 비교적 긴 역사를 가진 회사다. 처음에는 주로 무기 화학물질을 만들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재료를 생산했다.”

    초창기에는 주로 뭘 만들었나.

    “1차전지를 만들 때 납을 전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전해질로 쓰이는 수산화칼륨을 만들었다. 과거에는 전량 수입했는데 품질이 좋지 않아 전지가 금방 닳아 배터리 수명이 짧았다. 우리 회사는 꾸준한 연구개발과 기술 개발을 통해 국산화를 시도해 수명이 길고 좋은 전해질을 만드는 회사로 출발했다. 한마디로 수산화칼륨을 더욱더 고순도로 만들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탄광에서 쓰는 헤드램프 전지 회사 등에 납품했는데 이후 더욱 고순도가 되면서 흑백TV 제조회사 등에 납품하게 됐다.

    그러다 1960년대에 들어서 반도체가 신산업으로 등장했다. 점차 중요한 사업이 되면서 일본전기, 도시바, 후지쓰, 히타치 같은 대기업들이 뛰어들었다. 이들은 웨이퍼를 깎을 때 쓰는 세정제인 포토레지스트를 전량 수입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리 회사를 찾아와 포토레지스트를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사업 성장성을 검토한 끝에 개발과 생산을 시작했다.”

    데쓰야 부장에 따르면 반도체칩 첨단화에 따라 기술력이 올라갔다고 한다.

    “알다시피 칩이 미세화를 계속해 가고 있지 않나. 처음엔 집적도가 나노 한참 전인 10마이크로미터를 만들 때 쓰는 포토레지스트로 시작했다. 회로 선폭이 더욱더 미세화해 노광기 파장이 짧아지면서 현재는 극자외선(EUV) 기술에 적합한 재료를 만들고 있다.”

    연구 개발 과정은 어땠나.

    “포토레지스트의 원재료는 고분자 수지로 레이저 빛을 느끼게 하는 재료다. 처음에는 10마이크로미터로 시작해서 현재 3나노까지 왔다.
    그 과정에서 빛의 성분을 파악하는 노하우가 필요한데 케미칼 설계 분석을 해서 생산에 활용하고 있다. 파장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화학 재료를 어떻게 조합할 것인지가 핵심이다. 배합이 미세하게 다르기 때문에 항상 고도의 기술개발이 요구된다. 그때그때 고객이 요구하는 기준과 성능에 맞춰 기술개발을 하고 있다.”

    한국에도 공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판매 영업소 형태로 지사를 운영하다가 2012년 인천에 공장을 세웠다. 인천 현지에는 일본인 근로자도 많지만 한국인도 많이 일하고 있다. 길게, 오래 유지해 나갈 생각이다.”

    회사 전체 규모는.

    “도쿄를 중심으로 미국, 대만, 중국에도 공장이 있다. 도쿄 본사 직원은 2000명가량으로 연구개발 인력이 15%를 차지한다. 매출은 2021년에 1400억 엔(1조4000억 원)이며 EUV 세계시장 점유율 26%로 현재 세계 1위다. 2위 회사로는 제이에스아르(JSR), 신에츠, 스미토모화학, 후지필름, 한국의 동진세미캠, 미국이 듀폰 등이 있다.”

    주요 고객은.

    “2021년 현재 일본(21%), 대만(38%), 한국(삼성전자+SK하이닉스11.8%), 중국(15.4%), 미국(7.9%) 순이다. 생산량의 절반이 넘는 56.8%가 포토레지스트이고, 이 중 20~30%가 고순도 제품이다. 총 생산량의 나머지는 신나 같은 고순도 화학제품이다.”

    2019년 이른바 ‘소부장 사태’에 따른 수출 규제 여파는 없었나.

    “판매량이 줄어든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한국에 수출하는 과정에서 수속이 약간 복잡했는데 다행히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EUV형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2022년은 전년도 대비 1.5배에서 2배로 늘었다. 현재 우리는 일본에서 시제품을 만들어 한국으로 보내면 인천에서 만드는 식이다.”

    일본은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활력을 잃었지만 소재 장비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회사가 많다. 이유는 뭐라고 보는가.

    “반도체뿐 아니라 우리 같은 화학 기업들은 일반 고객이나 기업에서 필요한 것에 따라 제품을 고도화한다. 굳이 말한다면 일본 기업들은 고품질을 지향하는 문화가 있다. 내가 스스로 말하기에는 송구하지만 일본 기업들은 장기적 관점으로 연구개발 투자를 하는 게 사실이다.”

    반도체 사업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은.

    “작년에는 호조였지만 올해는 좋지 않다고 하니 우리 같은 소재 생산 기업들도 힘들 것 같다. 또 감산까지 해서 더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올 하반기부터는 좋아질 것이라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앞으로 5G, 6G 시대, 메타버스 시대가 대세일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반도체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 역시 계속 시설 투자를 할 것이다.”

    일본 반도체 부활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당연히 모두 반기는 분위기다.”

    한국에는 TOK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반도체 소재 기업이 거의 없다. 어떻게 오랜 시간 버텨왔나.

    “80년이 넘은 회사라서 보수적이고 관료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시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혁신을 할까 늘 생각하고 있다. 그중에서 제일 주목하는 게 젊은 엔지니어나 영업맨들의 이야기다.

    불화수소는 로엔드에서 하이엔드까지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고객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지금까지 그렇게 발전해왔기 때문에 혁신과 변화가 중요했다. 고객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소재 장비 국산화에 대한 다른 생각들

    기자는 일본의 한 반도체 소재 업체에서 일하는 한국인 연구원과 만나 현황을 들어봤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대학으로 유학을 간 뒤 박사 학위를 받고 현지 반도체 기업에 취업했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온 1980년대 후반만 해도 한국은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긴 했지만 존재감이 없던 시절이었다. 반도체 선진국으로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일본에 왔다.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는 웨이퍼 위에 디바이스를 연결할 때 하는 미세 공정을 전공했다. 일본에서는 반도체 공정을 공부하다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반도체 대기업에 입사해 슈퍼 컴퓨터에 들어가는 CPU칩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내가 있던 회사는 1960년대 전화기를 만들다가 반도체 메인 서버나 슈퍼컴퓨터 같은 대형 컴퓨터 CPU를 개발하는 회사로 변신했다. 그러나 2009년에 반도체 사업을 접겠다고 하면서 나도 회사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

    반도체 첨단 기업이 업을 접은 계기가 있었나.

    “철강산업처럼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전 세계 몇 군데만 있으면 공급이 해결된다는 점에서 사양산업이라는 게 회사 측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설계만 하고 제조는 TSMC에 맡겼다.

    나는 회사에서 갑자기 사업부가 없어지면서 새 직장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일본이 소재 장비 쪽이 강하니까 후공정 쪽에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기업들이 반도체 사업을 접는 분위기라 반도체를 만드는 전공정 분야는 갈 곳이 별로 없기도 했다.”

    그는 반도체 재료 장비 회사의 경우 지금처럼 변화의 시대가 오히려 기회가 된다고도 했다.

    “일본은 메모리가 없으니까 오히려 이런 변화의 시대에는 움직임이 가볍다. 깔끔하게 미국으로 간다거나 장비나 소재 재료는 동남아·인도·유럽에 팔아도 된다.

    약간의 변동은 있을지라도 원하는 곳에 팔면 된다. 오히려 이런 공급망이 붕괴하는 상황이 되니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관점이 있다. 반도체의 기술 변화 속도는 너무 빨라서 사실 정말 피 터지는 전쟁이다. 기술을 지키는 것도 너무 어렵다. 반도체 제조는 언젠가는 카피(copy)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소재 장비는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나.

    “그렇긴 하다. 전체 반도체 시장의 10% 정도 된다. 그중에 90%가 전공정이고 10%가 후공정이다.

    반도체 장비만 놓고 봤을 때 전 세계 톱5 회사가 전공정의 90%를 가져간다. 노광장비 선두 기업인 네덜란드 ASML, 장비업체인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리얼(Applied Materials)과 램 리서치(LAM RESEARCH), 검사 장비업체인 미국의 KLA, 일본의 장비업체 도쿄일렉트로닉 다섯 곳이다.

    기본적으로 미국 회사가 60~70%를 차지하고 나머지를 일본과 네덜란드가 차지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을 규제할 때 네덜란드를 꼭 끼게 하려는 게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때문이다.

    하지만 재료 쪽은 일본이 압도적이다. 웨이퍼 제조의 경우 세계 1위가 신에츠, 2위가 섬코(sumco)로 모두 일본 회사다. 시장점유율이 50~60%에 달한다. 3위가 대만의 글로벌웨이퍼(GW), 4위가 한국의 SK실트론이다.

    단지 순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첨단 제품에 들어가는 웨이퍼를 일본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다는 게 중요하다. CPU나 최첨단 반도체 웨이퍼의 경우 신에츠나 섬코에서 만든 게 최고다. 포토레지스트도 제이에스아르(JSR)가 최고다.

    이처럼 일본 재료 회사들이 없으면 반도체 자체를 만들지 못하는 회사가 많다. 반도체 녹색기판에 들어가는 기본 재료도 아지노모토라는 회사에서 만드는 게 하이엔드 제품이다. 로엔드는 다른 나라도 만들지만 첨단 재료는 아지노모토에서 만든다. 인텔도 이게 있어야 칩을 공급할 수 있다.”

    日 소재 장비 없이 반도체 만들 수 없다

    2023년 1월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린 ‘넵콘 재팬2023’ 현장. [도쿄=허문명 기자]

    2023년 1월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린 ‘넵콘 재팬2023’ 현장. [도쿄=허문명 기자]

    “일본은 왜 소재에 강한가”라는 질문에 그 역시 지난 호에서 소개한 이즈미야 와타루 산교타임스 대표가 지적한 ‘장인 정신’을 들었다.

    “몇십 년씩 손해를 감수하며 연구 개발하는 문화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일본에는 한쪽 분야만 파고드는 전문가가 많다. 포기하지 않고 돈이 되든 안 되든 연구개발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북돋워주는 분위기다.

    한국의 경우 3년 매진해서 싹수가 보이지 않으면 사업부 자체가 없어지지 않나. 모두 알고 있는 일본의 장인 정신, 오타쿠 문화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게 바로 소재 분야다.

    반도체 글로벌 수평 분업을 자세히 뜯어보면 각각 그 나라에 맞는 문화와 산업이 연결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서 봐야 할 대목이다. 이를테면 설계는 미국에서, 칩 제조는 대만에서, 후공정은 대만·말레이시아·싱가포르·한국에서, 조립은 인건비가 싼 중국에서 해왔다. 시장도 아시아가 크니까 70~80%는 바로 아시아에서 팔았다. 이런 판을 만든 것이 미국이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을 견제하면서 다시 미국 중심으로 판을 짜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지급하는 게 정부지원금, 미국으로서는 일종의 코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한국은 대만, 일본과 잘 지내는 전략이 필요하다. 파운드리 경쟁을 한다고 하면서 TSMC와도 싸울 필요가 없다고 본다. 어느 정도 가격 선에서 서로 이익을 인정하며 공생하는 전략이 중요하다고 본다. 경쟁은 좋지만 감정적으로 대립하면 서로 손해다.”

    지금 일본의 반도체 부활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변수가 너무 많다. 래피더스가 2030년에 2나노를 하겠다고 했는데 삼성과 TSMC는 2025년이 목표다. 이미 삼성과 TSMC가 2나노를 한 뒤 하겠다는 거다. 그때 가서 미·중관계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굳이 일본에서 해야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지금은 디시전 메이킹(decision making)이 너무 힘든 시대다.”

    한국 업체들에 조언한다면.

    “너무 많은 것을 다 하라고 요구받고 있다. 메모리 70% 점유도 정말 대단한 건데. 메모리는 진입장벽이 매우 높다. 시장의 전체 파이가 커지니까 파이를 키워가면서 비율만 유지해도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을 예로 들면 메모리는 가격도 싸고 대량으로 지을 수 있는 아파트를 잘 만드는 건설회사다. 이에 비해 파운드리는 단독주택이다. 방은 몇 개로 할지, 창문은 얼마나 크게 할지 주문하는 업체마다 다 다르다. 고객 이익에 맞춰서 만들어주는 회사라고 할 수 있다.

    대만이 파운드리를 잘하는 건 엔드유저랑 싸우지 않는 독특한 문화가 있어 가능했다고 본다. 기존에 대만 기간사업을 보면 완성 제품이 별로 없다. 이를테면 LCD 패널, 컴퓨터 기판은 만들어도 PC는 만들지 않았다. 삼성이 파운드리로 성공하려면 문화와 의식을 바꿔야 하는데, 파운드리 사업부가 메모리 사업부 출신이라 양립이 쉽지 않다.

    한국은 스피드와 도전 정신이 강점이다. 대만은 고객이 원하는 걸 확보하되 고객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커왔다. 최종 제품도 없지만 재료 장비도 안 했다. 모든 걸 다 하면 지금까지 관계를 맺었던 고객들과 불편해지니까. 그래서 일본이랑 대만이 잘 맞았다. 경쟁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다. 대만인들은 메이드인 재팬을 지금도 좋아한다. 일본에서 똑같은 프레젠테이션을 해도 대만 사람들은 계속 와달라고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이거 말고 더 없냐고 한다. 위에서 누르려고 하는 측면이 있다.

    대만은 함께 잘해 보자는 파트너십이 강하다. 옛날 화상들의 적을 만들지 않는 장사 마인드가 있다. 수요 공급 관계에서 적대감이 형성되지 않도록 한다. 반면 한국은 상하관계를 확실히 규정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하긴 이런 문화가 있으니까 K팝이 나온 측면도 있다.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더라도 죽을 때까지 가보자는 정신이 있다.”

    한국은 소재 장비 국산화 움직임도 크게 불고 있다.

    “필요에 의한 국산화가 아니라 삼성이나 SK가 외국 기업에 주는 돈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 정말 글로벌 장비 회사로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지가 없다면 어느 순간 기술개발을 멈출 수밖에 없다. 괜히 일본, 미국 회사들과 협력 수준이 떨어질 수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 이른바 ‘소부장 사태’는 어땠나.

    “한국을 겨냥했지만 오히려 일본의 소재 부품 장비 분야 반도체가 악화됐다. 한국의 반도체 업체가 일본으로 진출하기는커녕 한국으로 직접 수출을 못 하게 된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공장을 세웠다. TOK 같은 회사가 대표적이다. 이 밖에 간토덴카공업 같은 중소업체도 2019년에 한국 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했고, 반도체 초미세 패터닝 공정의 핵심 소재인 솔더 레지스트 분야에서 80~90%를 점유하는 세계적 기업인 다이요도 한국에 진출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일본 업체들의 피해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고순도 불화가스나 EUV형 레지스트 같은 특정 분야가 조금 피해를 보았다. 어떻든 수출 규제처럼 반도체 생태계를 깨는 조치는 앞으로 없어야 한다.”

    한국은 소부장 국산화 바람이 일어 자생력을 키웠다는 여론도 있다.

    “그런 측면도 있지만 국산화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반도체가 웨이퍼에서 칩을 만들어 패키징이 끝날 때까지 1000개에서 1500개 공정을 거치는데 이는 다 연결되는 공정이다. 중간에 새로운 걸 넣어버리면 원자의 세계를 다루는 반도체 공정에서 다음 공정에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하기 힘들다.

    공정에서 새로운 소재를 사용한다고 했을 때 바로 사용 가능한 게 아니다. 소재의 성능을 평가하는 데에만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이 걸린다. 새로운 소재를 쓴다는 건 이처럼 큰 리스크를 감수하는 일이고 손해를 보면 누군가 또 책임을 져야 한다.

    요즘 같은 때는 제품 주기가 워낙 짧아 최신 장비를 써서 빨리 출하해야 하는데 국산화에 매진하다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다.

    게다가 리버스 엔지니어링 기술이 워낙 발전해서 카피가 쉬워졌다는 점도 어려운 점이다. 옛날에는 감으로 했는데 3D로 다 측정해서 비슷하게 빨리 만들 수 있다. 맨땅에 헤딩식이 아니라 소재 안에 어떤 성분이 있는지 분석 능력도 발달돼 있다.

    AI가 발달하니까 시뮬레이션할 수도 있고 말이다. 국산화라는 게 잘하면 20~30% 원가절감을 할 수 있지만 리스크는 크게 보면 몇천 %다. 이런 리스크 요인을 감안한다면 과연 국산화만이 정답일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중 반도체 전쟁 더 격화될 것

    그는 엔지니어이지만 기술뿐 아니라 변화하는 바깥 환경에 대해서도 식견이 있었다. 그에게 미·중 전쟁의 본질과 미래를 물어봤다. 그의 말이다.

    “삼성, SK는 IDM 설계 양산 최종 제품(SSD) 파운드리까지 다 하는 회사다. 이 대목에서 반도체 회사 종류를 알아보자면 설계만 하는 애플·퀄컴·엔비디아 등이 있고, 웨이퍼만 만드는 파운드리 회사가 있고, 패키징만 하는 대만 ASE, 한국 앰코, 미국 마이크론 같은 회사가 있다. 패키징된 제품을 사서 완성 제품으로 만드는 게 폭스콘, 홍하이(대만·종업원 100만 명) 같은 회사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컴퓨터나 스마트폰, TV를 싸게 살 수 있는 것은 글로벌 수평 분업 때문이었다. 옷에 비유하면 파리에서 디자인하고 제조는 방글라데시 같은 곳에서 하는 식이다.

    그런데 미·중 갈등으로 이 체인이 깨진 거다. 지금은 한마디로 ‘글로벌(global) 서플라이 체인’이 ‘리지오널(regional) 서플라이 체인’으로 바뀐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일본, 대만이 리지오날 서플라이 체인에 들어간다. 트럼프 때 시작된 거다.

    화웨이 제재가 글로벌 수평 분업에서 지역 분업으로 가는 신호탄이었다. 미국은 중국을 시장으로 생각했는데 중국이 칼날을 드러내면서 패권을 위협하니까 안되겠다고 본 거다. 지금은 반도체가 무기, 미사일, 인공위성 같은 국방 자산이 돼버린 상황이다.

    이전까지 반도체 시장은 비즈니스 논리였다. 이걸 팔고 사면 얼마나 이득이 되냐, 얼마나 신뢰관계가 있느냐, 무조건 싸고 좋은 것이라는 기준에서 사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거래할 때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 중국 기업들이 돈을 더블로 주고 칩을 사겠다고 해도 팔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비즈니스가 아닌 거다. 매우 복잡한 상황이다. 변수가 너무 많아서 예측도 힘들다.

    비즈니스에 정치 논리가 들어가니까 기업 입장에선 시장을 읽기가 힘들다. 미국이 양쯔메모리(YMTC)까지 제재하고 저사양 반도체까지 추가로 제재하는데 이건 정말 예상을 뛰어넘은 조치였다. 화웨이를 제재한 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다. 반도체 중에서 기지국에 들어가는 게 가장 하이엔드다. 슈퍼컴퓨터, 우주산업, 바이오산업에 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쯔메모리는 노트북,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메모리 제조 회사다. 군사 용도로 쓰이는 반도체를 만들 가능성이 전혀 없다. 단순 데이터 저장 범용 반도체 회사인데 지난해 12월 이 회사까지 제재 대상에 넣었다. 미국이 얼마나 전방위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려 하는지 한마디로 싹부터 잘라버리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미·중 전쟁은 더 격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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