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尹 정권 ‘이념 戰士’ 박민식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비주류 소장파, 안보 보수 기수로 변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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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3-10-1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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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에게 직접 코멘트 주는 장관

    • “관계자 말고 내 이름 달아주세요”

    • 당선보다 낙선 경험 많은 정치인

    • 이승만 관련 저서가 가득한 책상

    • “이념 행보, 어떻게 보면 과유불급”

    • “민주당發 토착왜구 논란과 같아”

    8월 9일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신동아’와 인터뷰 중인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박해윤 기자]

    8월 9일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신동아’와 인터뷰 중인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박해윤 기자]

    “(기자들) 전화가 자꾸 와서 몇 군데 알려줬어요. 좀 빨리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확인을 해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아마 다른 데서 다 쓰려는 것 같더라고. 핵심만 이야기할게요. 대통령께서 뭐라 말하셨냐면…. (중략) ‘박민식 장관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기사에) 달아주세요. ‘관계자’(라고 표기)할 필요 없어요. 내가 책임질 테니까.”

    8월 9일 오후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인터뷰를 할 참이었다. 시작에 앞서 박 장관이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했다. 그는 대통령을 포함해 현장에 있던 주요 인사들의 발언을 옮겼다. 통화 상대는 일간지 기자였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오는 길에 “장관이 직접 전화로 코멘트 해주는 경우가 흔한가?”라고 물었다. 기자가 친분 있는 고위급 취재원에게 속사정을 전해 듣는 경우는 더러 있다. 그럴 경우 대개 출처를 숨긴다. 취재원이 익명을 원한다. 한데 박 장관은 자기 이름 석 자를 써달라고 했다. 그러니 흔치 않은 장면이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먼저 자신감이 느껴진다. 대통령의 발언을 전하면서 출처가 본인임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너서클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다. 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들렸다. “내가 책임질 테니까”라는 표현이 그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통령이 사적으로 “민식아”라고 부르는 최측근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언론 프렌들리(friendly)’한 면모도 드러난다. 그와는 대선 전날인 지난해 3월 8일 처음 통화했다. 일면식이 없던 때다. 윤석열 후보와의 인연, 대선 소회 등에 관해 비교적 꾸밈없이 말해 인상적이었다. 부산 사투리가 감칠맛을 더했다. 곡선보다 직선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해 6월 오찬을 겸한 인터뷰를 했는데, 에둘러 답하지 않는 화법이 흥미로웠다. 남이 써준 내용을 곧이곧대로 읊조리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인터뷰가 공개된 뒤 전화를 걸어와 “기사를 너무 웅장하게 썼다”며 짐짓 너스레를 떨기도 했고 말이다.

    “기분 더럽게 하는 거지”

    곱상한 외모와 달리 그에게도 심연 같은 유년 시절이 있다. 그가 전몰군경(戰歿軍警)의 아들이라는 점은 제법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부친인 고(故) 박순유 육군 중령은 육군 맹호부대 첩보부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1972년 6월 전사했다. 홀로 남은 모친이 부산 구포시장에서 장사를 해 6남매를 키웠다. 이에 관해 박 장관이 한 말을 윤문(潤文) 없이 그대로 옮긴다. 절절함과 분개의 감정이 동시에 느껴지는 회고다.



    “우리 엄마 별명이 ‘구포시장 월남댁’이에요. 남편이 베트남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야. 사람들이야 그런 거 이런 거 생각 안 하고 부르기 편하게 ‘월남댁’이라고 했는데, 가족들 입장에서는 또 어머니 당신 입장에서는 맨 처음에 들었을 때 얼마나 상처가 컸겠어요? 월남이라는 게 자기 남편을 저승으로 보낸 땅인데 그거를 별명으로 하면서 살았으니까. 엄마가 월남댁이면 나는 원호(援護) 대상자예요. 초등학교에서 원호 대상자 손 들라고 하면 엄청 부끄러워요. 극빈 구호 대상자 느낌이야. 이 사람들 불쌍하니까 도와준다는 시혜의 방식이야. 시혜라는 건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이잖아요. 미국에선 프라이드(pride)를 느끼는데, 우리는 나라가 불러 전쟁에서 청춘을 바쳤는데 와서는 뭐 기분 더럽게 하는 거지.”

    원호 대상자였던 소년의 앞날은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인 그는 1988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1990년 외무부(현 외교부) 사무관으로 일했다. 그러다 돌연 사직하고 나와 1993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1996년부터 10년간 서울중앙지검 등에서 검사로 근무했다. ‘불도저 검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대중 정부 국가정보원 도청 사건 주임검사였다. 2008년 정계에 입문해 고향인 부산 북강서갑에서 재선(18·19대) 의원을 했다. 당내 개혁 성향 의원 모임인 ‘민본 21’에서 활동했다. 당 주류에 입바른 소리를 많이 해 소장파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까지가 화려하기 그지없던 그의 공직 인생 1막이다.

    이후의 일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2014년 부산시장 선거, 2016년 20대 총선, 2018년 부산시장 선거, 2020년 21대 총선, 2021년 4·7 부산시장 보궐선거까지 연거푸 낙마했다. 오랫동안 부산시장을 꿈꿨지만 본선에서 벽보 한번 붙여보질 못했다. 그는 “정치에서는 고객인 유권자의 니즈(needs)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린 교훈으로 생각한 계기”라고 했다. 지난해 5월에는 경기 성남시 분당갑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다가 스스로 철회했다. 결과적으로는 당선보다 낙선 경험이 많은 정치인이 됐다. 권력을 잃은 뒤에 오는 상실감은 당사자가 아니고는 쉬이 가늠하기 어렵다.

    의전 서열 9위 부처의 수장

    그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건 2021년 7월이다. 야인이 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국민의힘에 입당하기 전 꾸린 선거캠프에 기획실장으로 합류하면서다. 윤 대통령과는 검사 시절부터 교유(交遊)했다. 여의도에 온 뒤에도 검찰에 남은 윤 대통령과 인연의 끈을 유지했다. 이때를 상기하면서 “내가 국회의원 할 때 한 번씩 통화할 때만 해도 정치에 전혀 뜻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대선 본선에선 선거대책본부 전략기획실장에 기용됐다. 으레 대선이 되면 허울뿐인 보직이 난무한다. 그중에서도 그가 맡은 전략기획실장은 실무 권한을 갖춘 요직으로 꼽혔다. 정치는 결국 말과 자리로 하는 것이다. 대선 전날 그가 선대본부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다. 거론되는 인물들 공히 윤석열 정부 출범 뒤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취재 노트에 적힌 내용이다.

    “나는 (윤 대통령과) 원래 잘 알기 때문에 초창기에 팀을 몇 명이서 꾸린 거지. 전략기획실이 일종의 작전실이잖아요. 선대본부장 권영세(전 통일부 장관) 밑에 윤재옥(현 원내대표), 박민식 이렇게 있으면서 모든 상황을 관리하고 공격이건 방어건 결정해서 홍보국, 조직 본부, 각 시·도당에 하달하는 거지. 작전 지침을 만들어 (구성원에게) 롤(role)을 부여하는 게 선대본부장의 역할이잖아요. 그러니까 (전략기획실장은) 선대본부장의 브레인이죠.”

    대선 직후 대통령 당선인 특별보좌역을 거쳐 국가보훈처장(장관급)에 지명됐다. 이후 보훈처가 보훈부로 승격하면서 장관급에서 ‘급’자를 뗐다. 승격된 보훈부는 단숨에 부처 의전 서열 9위로 자리매김했다. 수장의 위상도 달라졌다. 국무위원의 권한이 생겼고, 독자적인 ‘부령(部令)’ 발령권도 행사하게 됐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낙마를 거듭하던 그의 인생에는 반전 드라마다.

    ‘보훈부 장관 박민식’의 브랜드는 역사와 이념이다. 그가 쓰는 표현을 빌면 ‘국가정체성 확립’이다. 부처 성격을 고려하면 일견 당연한 행보다. 보수 정권이 할 법한 일이다. 그가 장관으로서 빈번히 언급하는 어젠다는 한미동맹과 이승만 전 대통령 재평가다. 가령 “푸틴의 길을 갈 것인지, 미국의 길을 갈 것인지는 70여 년 전 우리가 김일성의 길을 갈 것인지, 자유 대한민국 이승만의 길을 갈 것인지와 똑같은 문제”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그의 집무실 책상에는 이승만에 대한 도서가 빼곡히 쌓여 있다.

    통치 엘리트 내부의 관심사

    특히 ‘정율성 논란’은 진행형의 이슈다. 정율성은 광주 출신 음악가로 항일운동을 위해 중국에 건너갔다가 193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했고, 중국으로 귀화했다. 광주에는 ‘정율성로’와 ‘정율성 거리 전시관’이 있다. 광주시는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과 ‘정율성 전시관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8월 27일 광주 동구 불로동 정율성 출생지 인근에 광주시에서 기념공원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광주=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8월 27일 광주 동구 불로동 정율성 출생지 인근에 광주시에서 기념공원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광주=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이 문제는 박 장관이 8월 22일 페이스북에 “북한의 애국열사릉이라도 만들겠다는 것이냐”고 쓰면서 논란으로 비화했다. 또렷한 전선을 구축하는 수사(修辭)다. 사흘 뒤에는 윤 대통령이 직접 “어떤 공산주의자에 대한 추모공원을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만든다고 한다”(국민통합위원회 1주년 성과보고회)고 말한 사실이 알려졌다.

    박 장관은 10월 11일 직접 브리핑을 열고 “정율성 기념사업은 헌법 제1조, 국가보훈 기본법 제5조,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3조 등에 따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과 그 유가족의 영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광주시에 정율성 관련 사업 일체를 중단하도록 권고했다. 또 “권고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지방자치법 제188조에 따른 시정 명령을 즉각 발동할 것”이라고 했다. 이튿날에는 행정안전부가 광주시에 ‘정율성로’ 도로명을 변경하라고 권고했다. 찬반을 떠나 모양새만 놓고 보면, 박 장관이 점화한 이슈를 정권 차원에서 동조하듯 따라가는 기류다.

    문제는 그것이 미치는 효과다. 정치는 우선순위로 다뤄야 할 갈등이 무엇인지를 놓고 펼치는 전쟁이다. 장관이 정율성 논란을 제기하자 금세 대통령이 힘을 실어줬다. 그러자 다른 부처까지 관여하기 시작했다. 자칫 이념과 역사가 통치 엘리트 내부의 주된 관심사로 비칠 소지가 있다. 동시에 ‘사회경제적 어젠다에 무심한 정부’라는 인상을 강화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 같다. 문재인 정부 역시 민생보다 검찰개혁 같은 권력기관 이슈에 몰입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광주 출신으로 ‘전라디언의 굴레’의 저자이기도 한 조귀동 작가 역시 ‘정율성 논란’의 확산을 보면서 기시감을 느낀다. 그는 “정율성은 광주에서 원래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아니고, 굉장히 ‘마이너한’ 입지의 인물”라면서 이렇게 부연했다.

    “정율성은 2016년 한중 우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발견된’ 사람이다. 문제가 된 ‘정율성로’의 경우 광주에서 가장 낙후된 거리다. (거기에 쓰이는) 예산 대부분이 땅 구입용이다. 보수가 ‘정율성 기념사업’을 정말로 문제 삼고 싶었으면 시민사회에서 얘기해야 한다. 그런데 장관이 나서서 공격하면 광주가 방어하는 포지션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박 장관 처지에서 보면 ‘당내 투쟁 어젠다’인데, 민주당이 보여주던 ‘선명성 경쟁’과 전형적으로 유사하다.”

    “서울에 오겠다고 하면, 음 글쎄….”

    박 장관은 10월 13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광주시민들조차 반대 여론이 훨씬 많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실시된 몇 차례 여론조사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한데 다른 각도에서 보면 광주가 찢어지고 갈라졌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광주 남구에 있는 정율성 흉상은 두 차례 훼손됐다.

    논란이 장기화하면서 피로도가 커진 기류도 읽힌다. 지역언론의 보도 뉘앙스는 바닥 여론을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 지표다. ‘무등일보’는 10월 12일 ‘반공 앞세운 박민식, 광주 때리기는 소신? 총선 길?’이라는 제하 기사를 통해 박 장관이 ‘색깔 공세’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날 사설을 통해서는 “보훈부 장관의 과도하고 자가당착적인 정율성 기념사업 쟁점화를 전면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총선에 미칠 파장도 관심거리다. 박 장관은 내년 총선에서 여당의 수도권 출마 후보로 분류된다. 출마 지역으로는 경기 성남시 분당갑 내지 분당을이 거론된다. 서울에 전격 출마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이에 관해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여권 고위관계자와 나눈 문답을 소개한다. 익명을 전제한 답변인데, TK(대구·경북)가 아니라 수도권 유권자들을 상대로 표를 얻어야 하는 보수 정치인의 시각이 오롯이 담겨 있다.

    박 장관은 어떤 사람인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다. 비주류 소장파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고 말이다. 다만 부산 지역구에서 두 번이나 졌다. 부산시장 당내 경선 나왔을 때도 제대로 힘도 못 썼다. 그것이 당내 평판에 영향을 미쳤다. 이 정부 들어 좋은 보직(보훈부 장관)을 맡았고, 마침 본인의 정치 마케팅과도 맞아떨어졌는데 중도층에는 소구력이 떨어진다. 지금은 이념 전사라고 봐야 한다.”

    이념을 강조한 박 장관의 행보가 윤석열 정부에 득인가, 독인가.

    “보수 정권에 꼭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보훈 가족들에게도 인기가 좋다. 하지만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다양하다. 부처마다 각자의 롤(role)을 하면 된다. 지금은 경제 부처가 성과를 내야 하는데, 오히려 유권자에게 보훈부가 경제 부처보다 눈에 더 많이 띄면 이 정부가 마치 오른쪽으로 특화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과유불급이다.”

    박 장관의 서울 출마설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욕심이 있으면 서울에 출마해 승부를 봐야 하고, 어려운 지역구에 나가야 한다. 수도권에서 뛰고 있는 선수 입장에서 봤을 때 저런 이미지로 서울에 오겠다고 하면, 음 글쎄….”

    6월 5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청사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6월 5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청사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어떤 반비례 관계

    흔히 보수를 시장 보수와 안보 보수로 나눈다. 윤 대통령은 ‘반국가 세력’을 부쩍 자주 언급하면서 이 정권에 안보 보수라는 라벨을 부착했다. 박민식은 이와 같은 집권 세력의 노선을 대표한다. 그를 한동훈(법무부), 원희룡(국토교통부) 장관에 버금가는 ‘뉴스 메이커’로 만든 8할은 바로 이것이다.

    조귀동 작가는 ‘박민식의 길’과 ‘수권정당의 길’ 사이에 반비례 관계가 성립한다고 본다. 박 장관의 이념 메시지에 힘이 실릴수록 호남을 겨눈 ‘보수판’ 서진(西進) 전략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거다. 서진 전략은 호남은 물론 수도권 유권자의 30%에 해당하는 호남 출향민을 겨냥하고 있다. 아울러 수도권에는 당파성이 약한 중도 유권자가 많다. 이들에게는 안보 보수보다 시장 보수가 소구력이 높다. 조 작가가 말했다.

    “박 장관이 총선에서 수도권에 출마하면 (박 장관의 주장에) 찬성하느냐 마느냐가 보수의 프레임이 된다. 다른 의제가 잠식당하는 것이다. (민주당발) 토착왜구 논란과 똑같은 모양새다. 일종의 거울상이다. 또 보수 내부의 분파 투쟁에서 강경론의 목소리가 커진다. 안보 보수의 주도권이 커지면서 중도파가 설 공간이 좁아진다. 보수에 대한 로열티가 강하진 않지만, 먹고사는 문제에 민감하고 가치관 면에서 보수 이념에 어느 정도 동조할 준비가 돼 있는 유권자층이 분명 존재하는데, 이들에 대한 (보수당의) 소구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효과가 나타날 거다.”

    정치인에게 브랜드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안보 보수의 기수는 ‘정치인 박민식’이 여의도에서 펼친 아귀다툼 끝에 취한 전리품이다. 그 덕분에 보수 울타리 안에서 그 나름의 지분을 확보하게 됐다. 대신 울타리 바깥일수록 매력적인 소장파 이미지가 옅어졌다. 딜레마는 여기서 발생한다. 선거의 성패는 울타리 바깥에서 갈린다. 오랜 세월 쌓인 데이터로 확립된 선거의 정석이다. 하필 지금의 보수는 중도와 연대해야 겨우 진보와 백중세 게임을 할 수 있는 처지다. 언젠가 장관 딱지를 떼게 될 박민식이 풀어야 할 숙제다.

    [신동아 11월호 표지]

    [신동아 11월호 표지]



    고재석 기자

    고재석 기자

    1986년 제주 출생. 학부에서 역사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 상아탑 바깥으로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통, 전자, 미디어업계와 재계를 취재하며 경제기자의 문법을 익혔습니다. 2018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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