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김선학 장호원주재소 총검 절취 사건

단순 사기·절도범의 우발적 범죄가 불러온 참화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8-09-02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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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모를 코앞에 둔 일요일 밤, 8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순박한 시골 마을 장호원주재소에서 무기 탈취 사건이 일어났다. 100여 명의 무고한 양민이 경찰에 체포돼 고초를 겪고
    • 경기도, 충청남북도 3개 도의 경관 1000여 명이 일주일 동안 수색 작전에 동원됐다. 연말 상여금을 기다리던 장호원주재소 이영재 순사, 오산주재소 고종옥 순사 등 10여 명의 경찰이 파면되거나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범인은….
    김선학 장호원주재소 총검 절취 사건
    “이 녀석은 대체 어딜 간 거야?”1930년 12월8일 새벽 1시,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장호원주재소 숙직 순사 이영재가 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또 어디 가서 술 퍼마시고 있는 게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술이라면 사족을 못 써서 큰일이야.”

    함께 숙직을 서던 열일곱 살 난 사환 최봉애는 밤이면 길 건너 주점에서 술을 마시느라 자주 자리를 비웠다. 이영재 순사는 쯧쯧 혀를 차며 책상에 앉아 순찰 일지를 펴 들었다.

    ‘이상 무.’

    세모를 코앞에 둔 일요일 밤, 8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순박한 시골 마을에서 별일이 생길 리 없었다. 1926년 10월, 스물두 살 청년 이수흥이 장호원에서 100리가량 떨어진 백사주재소에 난입해 권총을 난사한 사건을 제외하면, 이영재 순사가 근무한 지난 10년간 장호원을 비롯한 이천군 일대에서 시국사건이나 강력사건은 발생한 적이 거의 없었다.



    두어 시간 추위에 떨며 순찰을 돌다 화로의 따뜻한 온기를 쬐니 갑자기 피로가 엄습했다.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에 위치한 장호원은 시골 마을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어서 주재소에 순사가 5명이나 있었지만, 소장인 무라타(村田) 경부보를 제외한 일본인 순사 2명과 조선인 순사 2명이 나흘에 한 번씩 교대로 서는 숙직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오일장이 열리는 새벽이 오기 전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이영재 순사는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숙직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감쪽같이 털린 무기고

    새벽 4시, 이영재 순사는 코 고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시큼한 술 냄새가 숙직실에 가득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최봉애가 술에 취해 연신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었다. 최봉애의 고개를 좌우로 돌려봐도 자동차 엔진 소리 같은 코 고는 소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다시 잠을 청하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사무실로 나와 소파에 기대어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 물었다. 며칠 후 나올 연말 상여금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흘렀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다가 책상 뒤편 벽면에서 시선이 멈췄다.

    “어라!”

    벽에 걸어둔 경관용 패검 2자루가 사라지고 없었다. 등골이 서늘해져 잠이 확 달아났다. 이영재 순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 안을 샅샅이 뒤졌다. 한 눈에 다 들어오는 비좁은 사무실을 몇 번씩 뒤졌지만 패검은 보이지 않았다. 아차 하는 생각에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 건물 왼편 무기고로 달려갔다.

    이영재 순사는 무기고 문 앞에서 맥없이 주저앉았다. 무기고 자물쇠는 둔기에 맞아 산산조각이 났고, 활짝 열어젖혀진 문은 매서운 북서풍에 흔들리며 삐거덕거렸다. 무기고 안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무기대장과 비교해보니 기병용 장총 1자루, 보병용 장총 4자루, 권총 1자루, 실탄 12발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무상자에 포장해둔 장총 탄환 2500발이 무사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재소 정문에 세워 둔 관용 자전거도 사라졌다.

    이영재 순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무실로 돌아가 수화기를 들고 맥없이 전화기 다이얼을 돌렸다.

    “이천경찰서 상황실입니다.”

    “장호원주재소 이영재 순사입니다. 창고가 털렸습니다.”

    “어느 창고 말씀이신지?”

    “……주재소 무기고.”

    월요일 새벽 이천경찰서에 비상이 걸렸다. 이천경찰서 간다(神田) 서장은 날이 새기도 전에 전 대원을 비상소집해 장호원으로 달려갔다.

    오전 일과가 시작되자 경기도 경찰부 가노(鹿野) 경찰부장은 노무라(野村) 형사과장, 사에키(佐伯) 고등과장 등 수뇌부들과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숙의했다. 긴급회의를 마치고 가노 경찰부장이 자신의 방으로 출입 기자들을 불렀다. 월요일이면 으레 하는 대로 경기도 경찰부에 들러 무슨 기삿거리나 없을까 어슬렁거리던 출입 기자들은 별로 신통한 사건이 없어서 그냥 돌아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가노 경찰부장은 기자들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여러분도 다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 새벽 장호원주재소에 어떤 자가 침입해 창고 자물쇠를 깨뜨리고 들어가서 패검, 장총, 권총, 실탄 등을 훔쳐 가지고 자전거까지 집어타고 도망한 사건이 발생했소. 아직 더 자세한 보고가 없으니까 분명히 알 수 없는 일인즉 신문사에서 이것으로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대면 연말에 민심도 소란해지고 범인 수색에 방해만 되는 일이니 아무쪼록 주의해서 취급해주기 바라오.”
    신문사에서 으레 벌써 알고 있으려니 하고 주의를 주려고 한 말이었지만 사실은 신문사에서는 지국에서 아무런 보고도 없어서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 말을 들은 기자들은 “심심한데 잘되었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이건 대사건 돌발이라”고 생각하고 몇몇은 직접 본사로 뛰어갔고, 몇몇은 우선 급한 대로 전화로 보고했다. 기삿거리가 없어 하품만 하고 있던 각 신문사에서는 깜짝 놀라 호외를 간행한다, 택시를 대절해 장호원으로 사진반까지 대동한 특파원을 파견한다, 부산을 떨었다.
    (‘김선학 사건과 각 신문 호외 전’ ‘별건곤’ 1931년 1월호)


    오전 10시, 노무라 형사과장과 사에키 고등과장은 미와(三輪) 경부, 후타미(二見) 경부 등 정사복 무장경관 20여 명과 함께 9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 장호원으로 출발했다. 총검을 절취한 범인이 서울로 잠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로 곳곳에 검문소가 설치돼 서울 시내는 전시를 방불케 했다.

    미궁에 빠진 수사

    이천경찰서 간다 서장은 장호원주재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범인 수색과 증거물 수집을 독려했다. 이천경찰서 전 대원에다 경기도 경찰부에서 지원받은 대원으로도 수사 인력이 부족해 관내 소방관까지 총동원해 장호원 일대를 수색했다.

    범인의 행방은 묘연했지만, 도난당한 총검은
    김선학 장호원주재소 총검 절취 사건

    ‘김선학 사건과 각 신문 호외전.’. 별건곤, 1931년 1월호.

    속속 회수되었다. 사건 당일 오후에 장호원보통학교 부근 개천에서 보병용 장총 4정을 회수했고, 이튿날 오전 9시 등교하던 장호원보통학교 학생 조성진이 주재소에서 300m가량 떨어진 도랑에서 패검 1자루를 발견했다. 같은 날 오후 1시 30분에 장호원주재소 우물 속에서 기병용 장총 1정을 발견했고, 4시간 후에는 장호원보통학교 뒷산에서 패검 1자루와 창고 자물쇠를 깨뜨릴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식도 1자루마저 발견했다. 사건 발생 48시간이 지나도록 회수하지 못한 무기는 권총 1정과 실탄 12발뿐이었다.

    사용하지도 않고 버릴 것이었으면 왜 굳이 경찰의 총검을 훔쳐서 일을 키운 것일까? 경찰을 희롱하기 위해 교묘한 심리전을 쓴 것일까? 아니면 실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장총을 버린 것일까?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범인이 3명 이상이며,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서 파견한 인물일 것으로 추측했지만, 주재소로부터 반경 1km 이내 지점에서 무기 대부분을 회수한 이후, 독립운동과는 무관한 인물의 단독 범행이라고 보고 수사 방침을 변경했다. 사건 발생 사흘째 되던 12월 10일 오후, 장호원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경기도 경찰부 사에키 고등과장은 수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늘 내일 사이 범인을 체포하려고 애쓰고 있소. 하지만 이렇다 할 단서는 아직 잡지 못한 형편이오. 마침 사건 당일이 장호원 장날이어서 엄중히 경계한 결과 용의자로 3명을 유치하고 조사 중이며 수사 범위도 상당히 좁혀졌소. 머지않아 체포할 듯도 하오. 범인이 시국에나 또는 무슨 사상 단체 관계자가 아닌 것만은 명백하오. 범인은 유리창을 열고 주재소로 침입해 패검 2자루를 절취하고, 무기고 자물쇠를 식도로 깨뜨려 총기와 실탄을 챙겨 달아난 듯하오. 유리창에 지문이 남아 있으나 범인의 것인지는 분명치 않소.” (‘장호원 총검 사건’ ‘동아일보’ 1930년 12월 11일자)


    사건이 발생한 지 사흘이 지나도록 범인을 체포하기는커녕 범인의 신원조차 밝혀내지 못하자 수사 과정에서 해프닝이 속출했다. 사건 발생 당일 오전 9시 안성경찰서 가와사키(河崎) 서장은 경기도 경찰부로부터 장호원에서 긴급 상황이 발생한 사실을 통보받았다. 장호원에서 서쪽으로 몇십리만 가면 안성이었다. 가와사키 서장은 대원 10여 명을 데리고 장호원과 인접한 죽산주재소로 출동해 장호원 쪽에서 넘어오는 사람은 모조리 불러 세워 검문했다. 범인 수색 도중에 그날 새벽 범인으로 보이는 수상한 사람 3명이 이죽면 칠장사에 잠복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7인 1대로 조직한 결사대 2대를 칠장사로 파견했다. 다카세(高瀨) 경부보가 지휘하는 14인의 결사대는 칠장사를 포위하고 범인들에게 자수를 권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순순히 손을 들고 투항하라!”

    범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란히 손을 들고 절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담배 조사를 나와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아 이곳에서 묶고 있는 전매국 직원이오. 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소?”

    결사대가 다가가 신분증을 확인하니 진짜 전매국 직원이었다. 결사대는 허탈한 표정으로 칠장사에서 철수했다.

    장호원 수사본부에서는 범인이 숙직 순사가 잠든 사이 창문을 열고 들어왔고, 무기고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주재소 사정을 잘 아는 자라고 판단하고, 주재소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수사했다. 사건 발생 이튿날 밤, 최근 주재소에서 처벌을 받고 풀려난 사람 5명을 용의자로 체포해 유치했다. 평소 경관 5명이 근무하던 주재소에 이천경찰서와 경기도 경찰부에서 파견된 경관 수십명에다 신문사 기자들까지 드나들자 주재소 안은 장터처럼 북적였다. 주재소 경관들은 밀려드는 업무에 경황이 없어 사건 발생 사흘째 되던 날 정오까지 체포한 5명의 용의자를 문초하기는커녕 식사조차 주지 못했다. 영문도 모르고 무작정 체포된 5명은 유치장 안에서 배가 고프다고 순사에게 애걸해 가뜩이나 시끌벅적한 주재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오산역에 나타난 검은 두루마기 사내

    12월10일, 사건이 발생한 지 사흘이 지나도록 범인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도난당한 무기 대부분을 회수했다곤 하나 범인은 여전히 권총과 실탄 12발을 지니고 있었다. 수색 범위는 장호원 부근에서 경기도와 충청북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사흘이면 만주로 탈출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오산주재소 고종옥 순사는 사흘째 경부선 오산역에 나와 경계를 섰다. 얼굴도 모르는 범인을 잡아오라는 상부의 지시가 어처구니없었지만, 먹고살려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 여기고 군소리 없이 오산역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때웠다. 장호원에서 권총과 실탄을 탈취해간 범인이 설마 자신이 근무하는 오산에야 나타나겠느냐고 생각했다. 선량해 보이는 사람은 그냥 보내고, 기분 나쁘게 째려보거나 험상궂게 생긴 사내만 골라 검문했다.

    오후 6시, 고종옥 순사 앞으로 30대 후반쯤 돼 보이는 깡마른 사내가 지나갔다. 검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지가다비(直足袋·일본 버선 모양의 작업화)를 신은 사내의 외모는 전형적인 범죄형이었다. 고종옥 순사가 단장(短杖)으로 사내를 가리키며 외쳤다.

    “어이, 이리 좀 와봐!”

    사내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안 들려? 이리 오라니까.”

    사내는 째려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사가 다가가 단장으로 가슴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눈 깔아! 경계 근무 중인 순사가 오라면 오는 거지 어디서 반항이야?”

    순사가 단장으로 사내의 두루마기 자락을 거칠게 걷어 올렸다. 순사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이거.”

    사내가 잽싸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들고 순사를 겨냥했다.

    “내 몸에 손대면 쏘아 죽인다!”

    “이, 이봐! 말로 해. 말로 하자고.”

    새하얗게 얼굴에 핏기가 걷힌 순사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정했다.

    탕. 탕. 으악.

    깜짝 놀란 순사가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양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다행히 가슴은 멀쩡했다. 눈을 떠보니 사내의 총구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순사가 몸을 틀어 역전을 오가는 인파 속으로 내달렸다. 한참을 달린 후 뒤돌아보니 사내는 자신과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거기 서!”

    고래고래 소리는 질렀지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오산역 사무실로 들어가 주재소에 전화를 걸어 지원을 요청했다. 고종옥 순사가 다시 역전으로 나왔을 때 사내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오산주재소로부터 급보를 들은 수원경찰서 다나카(田中) 서장은 전 대원을 비상소집해 오산으로 달려갔다.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서울 시내 각 경찰서로부터 5명씩을 차출해 오산으로 급파했다. 목격자들은 ‘사내가 수원군 성호면 정대련의 주막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박영효 후작 별장 뒷산 구금산으로 도주했다’고 한목소리로 진술했다. 자정 무렵, 다나카 서장은 수원경찰서와 수원소방서 전 대원 그리고 경기도 경찰부에서 파견한 지원 병력을 이끌고 구금산 주위를 겹겹이 에워쌌다. 방한복에 의지해 영하의 추위를 견디며 동이 트기를 기다려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벌였다. 밤을 새워 13시간 이상 지속된 경찰의 수색 작전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내는 오후 1시 30분 병점검문소를 지키고 있던 수원경찰서 순사 3명을 가볍게 따돌리고 유유히 경찰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순사 3명이 젖 먹던 힘을 다해 추격했지만 단거리 달리기하듯 수 km를 쉬지 않고 질주하는 사내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춤추는 대수사선

    밤을 새워 수색 작전을 벌이기는 했지만, 검은 두루마기 사내가 장호원 경찰서에서 총검을 절취한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수사본부는 사내를 추적하는 동안에도 숙직을 서다 총검을 도난당한 이영재 순사와 소사 최봉애를 불러 조사하는 한편, 장호원에서 주점을 하는 장추월과 그 집 심부름꾼 양만복, 자전거포를 하는 조남석과 그의 처 송수금, 처남 송수백, 송수천, 송수업, 그의 장모 차성녀와 자전거포 점원 홍수덕, 장추월 주점의 단골손님 김영수 등 9명을 체포해 강도 높게 문초했다. 이영재 순사는 곧 풀려났지만, 최봉애는 근무 시간에 김영수와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것이 발각돼 용의자로 구금되었다.

    김선학 장호원주재소 총검 절취 사건

    구금산 수사대의 활약상과 범인 출현에 놀란 오산주재소 상황을 전하는 신문기사. 1930년 12월13일자 동아일보.

    종로경찰서에서는 익선동에서 도난당한 자전거와 비슷한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이규항을 체포했다가 알리바이가 확실해 문초를 시작한 지 30분 만에 석방하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사건 발생 나흘째인 12월 11일, 경기도 경찰부 가노 경찰부장은 수사의 진행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원경찰서 순사에게 권총으로 공포(空砲)를 쏘고 도주했다는 사내가 확실한 진범인지 아닌지는 잡아보지 않으면 모르겠소. 그렇게 큰 권총을 두루마기 속에 넣고 다닌다는 것이 좀 이상한 듯도 하오. 하여튼 그 부근을 수원경찰서에서 엄중히 수색하고 있으니 곧 밝혀질 것이오. 아직 이렇다 할 단서는 없소. 단서를 잡는 대로 곧 발표할 것이니 기다리시오.”

    병점검문소를 비호처럼 내달려 빠져나간 검은 두루마기 사내는 그날 밤 11시 30분 용인군 고삼면의 한 물방앗간에서 목격되었다. 방아 찧던 사람들의 제보를 받은 수사본부는 사내가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안성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판단하고 안성경찰서에 급히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안성경찰서 가와사키 서장은 용인, 이천, 진위 경찰서의 지원을 받아 밤을 새워 용인과 안성 접경지대를 수색했다. 날이 밝자 안성 읍내에서 오일장이 섰다. 경찰은 장날을 기회로 범인이 읍내로 잠입하지나 않을까 장터 주위를 철통같이 경계했지만, 그날따라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많아 곤란을 겪었다.

    고종옥 순사는 검은 두루마기 사내의 얼굴에 곰보 자국이 많다고 설명했다. 안성경찰서 수사대는 안성군 대덕면 진현리에서 검은 두루마기 사내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곰보를 발견해 체포했다. 범인을 잡았다고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지만, 문초해보니 사건과는 무관한 곰보였다. 경기도, 충청북도 각 경찰서에는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수상한 사내를 보았다는 제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장호원 수사본부는 범인의 계통을 사상 방면, 단순 강도, 주재소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사람 등 3방향으로 분류해 맹렬히 수사했지만 11일까지 아무런 확실한 단서를 얻지 못했다. 12일 오전 2시 여주군과 남면에 범인으로 보이는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제보를 받고 수사대 20명을 남면으로 급히 출동시켰다. 지금까지의 수사 방침은 오산주재소 동·북·서 3방면은 엄밀히 경계하며 추적했지만 면밀히 조사한 결과 오산주재소로부터 남쪽인 용인가도 방면으로 산을 넘어간 흔적이 있어 평택 일대를 수색했다. 비슷한 시간 용인경찰서 수사대는 범인이 나타났다는 제보를 받고 용인군 이동면으로 출동해 밤새 수색했다.
    한편 장호원 수사본부에서는 11일까지 유력한 혐의자로 검거한 9명 중에는 반드시 진범인이 있으리라고 확신했는데 엄중한 문초를 해본 결과 진범으로 간주할 만한 사람이 없어 낙심천만해 허둥지둥 수사 방침을 변경했다. 수사대가 개천, 지붕, 짚더미 등 으슥한 곳을 수색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 증거품 수집 차원에서 장호원 민가의 식도를 모아놓고 조사했으나 그 또한 뾰족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이미 40여 명의 혐의자가 문초를 받고 풀려났고, 지금도 10여 명의 혐의자가 문초를 받고 있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출몰 자재의 장호원 범인’, ‘동아일보’, 1930년 12월 13일자)


    사건 발생 이후 서울, 이천, 수원, 안성, 평택, 진위 등 경기도와 충청북도 일대 전 경찰이 총동원돼 추위와 졸음에 시달리며 범인 체포에 주력했지만 엿새가 지나도록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아산금융조합 습격 사건

    12월14일 새벽 2시 10분,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에 있는 아산금융조합에서 서기 정상득은 소사 성용환과 함께 숙직을 서고 있었다. 장호원에서 총검 절취 사건이 발생한 것은 신문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남의 집 불구경하듯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그날 신문에는 오산역에 나타난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사내를 찾기 위해 경찰이 수원, 용인, 안성, 진위 등지를 수색했지만 헛수고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경기도 사람들이 무서워서 밤잠을 설치겠거니 생각했을 뿐, 수백리 남쪽에 사는 자기 일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숙직실에 누워 한참 단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거칠게 몸을 흔들어 깨웠다. 잠에 취해 몇 번씩 뒤척이다가 마지못해 눈을 떴다. 누군가가 권총으로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 소사 성용환은 괴한 곁에서 벌벌 떨며 서 있었다.

    “누, 누구세요?”

    정상득은 잠이 확 달아났다.

    “나는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단원이다.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지난 달 조선으로 넘어왔다. 어서 독립자금을 내라!”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글쎄,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래도. 독립자금만 내면 돼!”

    “돈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요.”

    “요즘 출곡기(出穀期) 아냐? 출곡기엔 금융조합에 돈이 많을 것 아냐?”

    “돈이야 많지요.”

    정상득은 말을 멈추고 권총 괴한을 금고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 안에 들어 있어서 문제지요.”

    금고는 어지간한 연장으로는 뚫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육중했다. 괴한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열쇠는 어디 있나?”

    “이사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 나를 이사라는 작자의 집으로 안내해라.”

    정상득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이 시간에요?”

    “그래, 지금 당장!”

    정상득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괴한이 권총의 약실을 열어 천천히 탄환 6발을 장전하며 위협하듯 말했다.

    “소식은 들었는지 모르겠군. 그래, 내가 바로 장호원주재소에서 총검을 빼앗은 사건의 주인공이야. 지금도 경기도에선 무장경관 300여 명이 내 뒤를 쫓고 있어.”

    괴한은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해보였다. 정상득은 괴한이 권총에 탄환을 왜 이제야 장전하는지 의아해 하며 가와바타(川畑) 이사의 집으로 괴한을 안내하기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잠깐!”

    괴한이 정상득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정상득은 또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 불안해하며 돌아섰다.

    “만일 성공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하는 말인데, 너 수중에 돈 가진 것 없어? 여비가 부족해서 그래.”

    정상득은 지갑과 호주머니를 뒤져 3원 20전을 꺼내 내밀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 나머지는 넣어두라고.”

    괴한이 1원짜리 지폐 1장만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 나머지는 필요 없다며 선심 쓰듯 돌려주었다. 정상득은 별의별 해괴한 강도를 다 본다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가와바타 이사의 집에 도착하자, 괴한이 정상득에게 이사를 대문 밖으로 불러내라고 지시했다.

    김선학 장호원주재소 총검 절취 사건

    출몰이 무상한 범인의 종적. 1930년 12월15일자 동아일보.

    “이사님! 이사님!”

    마침 가와바타는 경기도 재무과장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하느라 늦게 돌아와 아직 옷도 벗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정 서기!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가와바타가 대문을 열고 나오자, 괴한이 권총을 겨누며 다가왔다. 괴한이 유창한 일본어로 외쳤다.

    “목숨이 아깝거든 당장 금고 열쇠 내놔!”

    가와바타가 갑자기 몸을 틀어 괴한의 오른손을 잡고 비틀었다. 가와바타는 유도 유단자였다. 괴한이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오른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떨어뜨렸다. 가와바타가 괴한을 메어치려고 자세를 취하자, 괴한은 왼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가 숨겨두었던 식칼을 꺼내 가와바타의 이마를 찔렀다. 가와바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괴한은 예산 방면으로 달아났다. 가와바타는 중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괴한이 아산금융조합을 습격하는 동안, 장호원 수사본부는 80여 명의 무장경관을 동원해 수원과 평택 접경 진위면 일대를 수색하고 있었다. 범인이 출현했다는 급보를 듣고 수색 작전을 전개하고 있던 무장경관들을 급히 자동차에 태워 아산으로 내려 보냈다. 경기도와 충청남도 경찰부는 관내에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을 기필코 자기 손으로 잡겠다는 각오로 앞 다투어 범인을 추적했다. 괴한이 가와바타와 격투 도중 떨어뜨린 권총은 장호원주재소에서 도난당한 권총과 동일했다.

    만주 혈성단원 김선학

    아산금융조합 습격 사건이 발생한 지 13시간이 지난 오후 3시, 범인은 청주군 강외면과 연기군 전동면 접경 대로에서 조치원경찰서 소속 사복 순사 신경룡과 아베(阿部)에게 체포되었다. 신경룡 순사는 범인 체포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범인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수배 전단의 몽타주와 인상이 흡사해서 물었더니 당일 새벽 봉산리 주막에서 아침을 시켜 먹을 때 만나 동행하던 박로수와 같은 곳에서 같은 곳으로 간다고 했으나 미심쩍어 신체를 수색하니까 회중전등이 들어 있고, 조끼 한쪽 호주머니가 찢어져 있기에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조치원경찰서로 호송했소. 범인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잘 따라와서 포박도 씌우지 않았소. 처음 주소와 성명을 물었을 때, 범인은 충주 대수정에 사는 스물여덟 살 김병일이고, 올해 2월부터 군산, 보령, 예산 등지를 전전하며 막일을 했다고 얼버무렸소.”

    조치원경찰서 사법주임이 본격적으로 신문하자 범인은 자신이 만주에서 온 혈성단원 김선학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범인이 자백한 자신의 이력과 범행 동기는 다음과 같다.

    김선학은 1900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황해도 안악이었다. 1916년 평양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안악에 돌아와 농업기사로 1년 동안 근무했다. 그 후 안악 가라시마(辛島) 대서인 밑에서 3년간 소송대리사무를 맡아보았고, 토지조사국 기사로 강원도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만주로 건너가 북간도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무장 항일운동 단체인 혈성단(血成團)에서 활약했다.

    무장 투쟁을 위해 조선으로 들어가는 동지들이 무기를 가지고 국경을 넘다가 번번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것을 목도하고, 자기는 맨손으로 국경을 넘어 조선에서 무기를 구해 관공서와 공공시설을 파괴하기로 결심했다. 그해 11월 간도 용정을 출발해 회령 함흥 원산 서울을 거쳐 총검 도난 사건 4일 전 장호원에 도착했다. 그해 6월 용정에서 임종한 의형제 이청산이 죽기 전 “나는 장호원주재소에서 매를 맞은 뒤로 몸이 이렇게 상했다”고 말했는데, 기왕에 무기를 탈취할 것이라면 의형제의 복수도 할 겸 장호원주재소의 무기를 탈취하겠다고 결심했다.

    여관이나 하숙에서 머물면 수상하게 보일 우려가 있어 산중에서 낙엽 더미로 영하의 추위를 견디며 나흘 동안 노숙했다. 주재소 구조를 정탐하기 위해 거짓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주점에서 술에 취한 듯 가장하고 옆자리 취객과 주먹다짐을 벌여 일부러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장호원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던 12월 8일 자정 전후, 주재소가 비어 있는 틈에 사무실 창문을 열고 침입해 패검 2자루를 빼내고, 준비해둔 식도로 무기고 자물쇠를 깨뜨리고 들어가 총기와 실탄을 빼내 주재소 정문 옆에 세워져 있던 자전거를 타고 빠져나왔다. 주재소 주위에 장총과 패검을 버리고 안성군으로 넘어가 자전거를 버렸다. 평택을 거쳐 천안으로 달려가 산중에서 이틀 밤을 노숙했다.

    12월10일 오후, 오산으로 들어와 하숙집을 구해 하룻밤 자고 가려 했으나 적당한 하숙집을 구하지 못해 서울로 잠입하려고 오산역으로 향했다. 오후 6시 경계 근무 중이던 경관에게 발각되자 진위군 서탄면으로 달아나 산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오후 6시 수원군 양감면에 있는 조그만 주막에 들어가 오랜만에 밥 한 상을 사서 먹고 그날 밤으로 진위군 오성면을 거쳐 천안군 둔포에서 노숙했다.

    12월12일 오전, 온양으로 건너가 온양과 천안 사이를 기차를 타거나 도보로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군자금을 마련하기에 적당한 금융기관을 찾다가 아산금융조합을 털기로 마음을 굳혔다. 12월13일 온양 장터에서 단도 한 자루를 사서 이튿날 새벽 2시 10분 아산금융조합으로 침입했다. 가와바타 이사와 몸싸움을 벌이다 권총을 떨어뜨리고 가와바타의 이마에 식칼로 중상을 입히고 예산군을 거쳐 천안군 광덕면으로 도주했다. 새벽 5시 광덕면 한 주막에서 아침을 사 먹고 거기서 만난 청주 사람 박로수와 동행해 청주군 강외면 대로를 따라 걸어가다가 조치원경찰서 사복 순사 신경룡과 아베에게 체포되었다.

    김선학은 평소 권투로 몸을 단련했고, 학교에 다닐 때는 마라톤 선수로도 활약했다. 하루에 80~100km는 누워서 떡 먹듯 주파했고, 무기를 지닌 사람도 두세 명 정도는 단숨에 때려눕히는 장사였다. 문초를 마친 경찰은 김선학이 유치장에서 자살을 도모할 우려가 있어 밤새 불침번을 세워 감시했다. 김선학을 문초한 조치원경찰서 최 사법주임은 조사실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범인은 쾌활한 목소리로 서슴지 않고 낱낱이 자백했소. 얼굴빛이 조금도 변치 않았소. 도주하면서 줄곧 신문을 보았으며 그를 체포하려고 경찰이 애쓴 것도 잘 알고 있었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체포되었으나 경찰을 그 정도로 괴롭혔으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라며 뿌듯해 했소. 절대로 재판을 받거나 공판정에 나서지 않겠다고 호언했소.”

    김선학이 조치원경찰서 최 사법주임에게 자백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 필요 없는 장총과 패검은 무슨 까닭으로 훔쳤는가?
    답. 먼저도 말했지만 장호원주재소에 복수를 하자는 것이 한 가지 목적이었고, 무기를 빼앗기에는 경비가 허술한 시골 주재소가 성공 확률이 높을 것 같아 그곳을 선택했소.
    문. 대개 어떠한 곳에서 숙박했는가?
    답. 나는 간도를 떠난 지 1개월 후로는 여관에 든 일이 없소. 송림 같은 데서 노숙했소.
    문. 그러면 건강이 계속될 수 있을까?
    답. 나는 죽음을 각오한 지 오래오. 건강 따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소.
    문. 너희 일파는 한 사람뿐이 아닐 테지?
    답. 공범자는 없다. 실상은 혈성단원 48명이 침입할 계획이었으나 형편에 의해 10명은 단념하고 37명만 내가 출발하기 약 1개월 전에 함흥 방면으로 출발했으나 국경에서 경찰에 발각돼 총격전을 벌여 모두 부상하거나 체포되고 말았소. 그들 모두가 처음부터 무기를 가지고 입국을 시도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어서 나는 맨주먹만 쥐고 마음 놓고 들어온 것이오.
    문. 장호원 사건의 범행의 흔적을 보면 아무래도 한 사람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데 정말 공범은 없는가?
    답. 공범은 절대로 없소.
    문. 총기의 취급 방법은 알고 있는가?
    답. 나는 항상 모젤식 권총을 사용했고, 마적과 싸운 일도 있었소. 이번에 탈취한 권총은 구식이어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을 뿐이오.
    문. 언제나 그 복장을 하고 다녔는가?
    답. 그렇지는 않소. 하루에도 몇 번씩 변장을 했소. 간도에서 들어올 때는 조선옷에 붉은 낙타외투를 입고 중국옷은 싸 가지고 왔소. 장호원에서는 그대로 조선옷을 입고 거사를 치르고 그날 밤에는 중국옷으로 갈아입고 있었소. 9일에는 다시 새로 지은 조선옷을 사서 입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었소. (‘취조경관과 범인의 문답’ ‘동아일보’ 1930년 12월16일자)


    김선학 장호원주재소 총검 절취 사건

    김선학 호송 광경. 1930년 12월17일자 동아일보.

    김선학의 자백대로라면 조선인의 관점에서 장호원주재소 총검 절취 사건은 범죄라기보다는 일본 경찰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 ‘기념비적 의거’였다.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하면서 김선학이 ‘조선일보라면 얼마든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발언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보도했고, 동아일보는 김선학을 조치원경찰서에서 충청남도 경찰부로 이송하는 자동차에 동승한 특파원의 르포를 ‘범인과 동승 80리’라는 제목으로 12월17일자부터 연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3번으로 예정된 연재기사는 딱 1번 실리고 중단되었다. 김선학이 조치원경찰서에서 자백한 내용이 새빨간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사기 전과 5범 김병일

    조치원경찰서에서 김선학의 신병을 넘겨받은 충청남도 경찰부는 그를 독립운동 관련 사상범으로 분류하고 강도 높게 신문했다. 김선학의 진술에는 일관성이 있었지만, 문제는 황해도 안악 출신 김선학이라는 인물이 민적에 올라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고등계에서 파악한 자료에도 혈성단원 중에는 김선학이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경찰이 지문을 조사해보았더니 뜻밖에도 김선학은 본명이 김병일이었고 사기와 절도 전과 5범이었다. 경찰에 늘어놓은 독립운동 관련 지식은 절도죄로 6년간 함흥형무소에 복역할 때 함께 복역하던 독립운동가에게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것이었다. 김선학이 두만강을 건넜다고 주장한 그해 11월3일은 함흥형무소에서 출옥한 날짜였다.

    김선학은 절도, 강도 및 상해죄로 기소되었고, 1931년 1월29일 경성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개정한 공판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재판장은 주소와 성명을 물은 후 사실 심리에 들어갔는데 피고인의 답변은 간간이 공판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을 웃겼다.

    “무기를 절취한 목적은?”

    “강도할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수의 무기는 무슨 필요가 있었나?”

    “기실은 장호원금융조합을 습격할 작정이었습니다. 그곳 주재소의 무기를 전부 없애버려야 뒤가 안전하지요.”

    “장호원금융조합을 습격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무기를 절취해가지고 나오니까 금융조합 앞으로 두세 사람이 지나가서 그만두었습니다.”

    “강도질할 마음은 언제 생겼는가?”

    “원산에서 인쇄소에 취직했는데 전과자라고 배척이 심했습니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에 인쇄소를 그만두고 강원도 주문진에 가서 기선회사에서 일했습니다. 기선회사 사원이 현금 수천원을 헤아리는 것을 보고 돈 생각이 부쩍 나서 그만 강도할 생각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정당하지 않은 생각인 것을 몰랐는가?”

    “그때는 술을 먹었습니다. 장호원에서 무기를 절취할 때도 술을 먹었고, 아산금융조합을 습격할 때도 술을 먹었습니다. 모두 제정신으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산금융조합에서 독립자금을 내라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독립자금을 내라면 순순히 돈을 내줄줄 알았습니다.”

    “조치원경찰서 신문에서 사상 관계로 그리했다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신문하는 경관에게 대우를 받기 위해 그리했습니다.” (‘김선학 사건 공판’ ‘동아일보’ 1931년 1월30일자)


    김선학 장호원주재소 총검 절취 사건
    全峯寬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 경성’ 등


    1931년 2월5일 개정한 선고공판에서 김선학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100여 명의 무고한 양민이 경찰에 체포돼 고초를 겪고, 경기도, 충청남북도 3개 도의 경관 1000여 명이 일주일 동안 수색 작전에 동원되고, 연말 상여금을 기다리던 장호원주재소 이영재 순사, 오산주재소 고종옥 순사 등 10여 명의 경찰이 파면되거나 징계를 받은 장호원주재소 총기 도난 사건은 단순 사기·절도범의 우발적 범죄로 최종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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