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호

“죽을 때 몸과 돈 누구에게 맡길지 생각하고 준비해야”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하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30년 염장이’ 유재철 씨가 전하는 삶과 죽음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2-05-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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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신에 염하면 영혼에도 무게가 느껴져

    • 마지막에 돈과 성공이 불행이 되는 경우

    • 가장 편안한 죽음으로 만난 어느 할머니

    • 生死 기로 서보니 삶에는 정답이 없더라

    신동아는 인문학재단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시리즈를 지난해에 이어 진행한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년 11월 설립된 국내 최초 인문학 지원 재단으로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 물음을 새롭게 전한다는 취지로 연구 지원, 대중 강연, 온라인 포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시즌2로 선보이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는 코로나19 이후 많은 것이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진행한다. 이번호 주인공은 ‘염장이’(장례지도사) 유재철 씨다. <편집자 주>

    장례지도사 유재철 씨는 “세월이 흐를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된다”며 “마지막까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돈과 성공이 가장 불행한 요소가 된다”고 말한다. [허문명 기자]

    장례지도사 유재철 씨는 “세월이 흐를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된다”며 “마지막까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돈과 성공이 가장 불행한 요소가 된다”고 말한다. [허문명 기자]

    2006년 서거한 최규하 전 대통령의 하관 광경. 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장례식과 제사를 어떻게 할지를 모두 유지로 남겼다고 한다. 그가 묻힌 대전 현충원 묫자리는 다섯 가지 빛깔의 오색토가 나온 흔치 않은 명당 자리였다. [김영사]

    2006년 서거한 최규하 전 대통령의 하관 광경. 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장례식과 제사를 어떻게 할지를 모두 유지로 남겼다고 한다. 그가 묻힌 대전 현충원 묫자리는 다섯 가지 빛깔의 오색토가 나온 흔치 않은 명당 자리였다. [김영사]

    역대 대통령, 재벌 회장에서부터 독거노인, 무연고자 등 30년 가까이 수천 명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한 장례지도사 유재철(62) 씨가 펴낸 에세이집 ‘대통령의 염장이’를 읽었다. 제목에서 강조한 전직 대통령 6명의 마지막을 묘사한 부분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눈길이 갔던 문장은 “세월이 흐를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된다”는 대목이다. 책에 나오는 글귀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죽지 않고서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빈번히 죽음을 접해 온 나로서는 영혼의 존재를 강하게 느낀다.”

    그가 느낀 영혼의 존재란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답을 듣고 싶어 그와 연락해 만났다. 봄기운이 완연한 주말 오후였다.

    산 자보다 죽은 자들과 일하는 것이 맘 편하다는 그의 표정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움이나 어두움은 없어 보였다. 맑고 밝은 인상이었다.



    큰 몸을 잔뜩 움츠리고 숨진 어떤 남성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결론부터 물었다.

    영혼의 무게라는 게 뭔가.

    “시신에 염을 하면 생전에 체중이 100㎏ 넘게 나갔던 거구(巨軀)였는데도 사뿐하게 몸이 들려 가볍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고 40㎏, 50㎏으로 비쩍 마른 사람인데도 너무 무거운 사람들이 있었다. 산(生)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용을 쓰면 몸이 힘들다. 장례식장에서 염불하던 스님으로부터 들은 말인데 ‘한을 품고 간 사람들한테는 염불도 잘 안 된다’고 하더라.”

    구체적 경험이 있나.

    “어느 날 연락을 받고 가보니 60대 남성이 큰 몸을 잔뜩 움츠리고 주먹을 꽉 쥔 채 숨져 있었다. 모든 망자(亡者)는 임종 후 3, 4시간이 지나면 경직 현상이 온다. 자는 듯 평화롭게 돌아가신 분들도 나중에는 몸이 약간 뒤틀리며 굳어진다. 그런데 이분은 잔뜩 몸을 웅크린 자세로 돌아가셨으니 이튿날 염할 때까지 그대로 두면 관 뚜껑을 덮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아들과 함께 겨우 몸을 펴서 모신 적이 있다.

    사정을 들어보니 서울에 빌딩 세 채와 집도 몇 채 갖고 있는 부자라고 했다. 말기 암이 진행돼 더는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돼 병원에서도 해줄 것이 없다고 했는데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있는 대로 화를 내고 욕설을 쏟아내 힘들게 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돈과 성공은 가장 불행한 요소가 된다. 결국은 다 놓고 가야 하는데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 편하게 눈 감을 기회까지 놓치고 되니 말이다. 온몸이 뒤틀려 경직된 그분의 시신에서 죽는 순간까지도 모든 것을 부여잡으려 했던 영혼의 무거움이 느껴졌다.”

    그는 또 세상에 대한 미련이나 욕심은 돈이나 부동산, 명예나 지위처럼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면서 이런 이야기도 전했다.

    “혼자 지내던 암자에서 실족사한 스님 한분이 있었다. 감나무 가지를 치다가 발을 헛디뎌 절벽으로 떨어져 돌아가셨는데 추운 겨울이라 며칠이 지나서야 시신이 발견됐다. 스님의 시신도 한껏 웅크려 뻣뻣하게 굳어 있었는데 생전에 비쩍 마른 분이었다는데도 너무 무거웠고 도무지 펼 수가 없었다. 손에는 감나무 가지가 꽉 쥐어져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마지막 순간 손안에 쥔 것은 의외로 매우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죽을 날 고른 할머니의 경우

    시신의 몸 중에서도 손(手)을 눈여겨보는 것 같다.

    “손을 보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주먹을 아무리 펴려고 해도 펴지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삶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주먹 안에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반대의 경우는 없었나.

    “나의 마지막도 이랬으면 하는 한 할머니의 장례가 기억난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2남 1녀 자식들을 잘 키운 분이었다. 여든이 넘어 지병이 악화돼 가자 어느 날부터 갑자기 곡기를 끊었다고 한다. 자식들이 ‘제발 드시라’고 간청해도 ‘정신이 있을 때 떠나겠다’며 아무 말도 않고 누워만 계시다 일주일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 볕 좋은 어느 날 아침, 스스로 일어나 깨끗이 목욕을 하고 생전에 가장 아끼던 분홍치마 저고리를 꺼내 입더니 소파에 다시 누워 아들이 출근하는 것까지 보고 잠이 들었다고 한다. 설거지와 청소를 마친 며느리가 흔들어 깨웠을 땐 이미 세상을 떠나신 뒤였다.

    흔히 염습을 하면 입과 항문으로 이물질이 새어나오는데 할머니는 마지막에 곡기를 끊어서였는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목욕도 하셔서 몸도 깨끗했다. 당신 스스로 염을 하신 거다. 생전에 장례에 대한 언급이나 유언도 없었고 무학(無學)이라 글도 남기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차분한 마무리로 가족들도 차분하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장례도 있었나.

    “이 일을 시작하고 2, 3년 정도 지났을 때였는데 교통사고로 젊은 엄마와 어린 두 아이가 함께 숨을 거둬 장례를 치른 적이 있다. 오열하는 젊은 남편 앞에서 엄마와 아이들 시신을 함께 염습을 하는데 정신적으로 괴로웠다. 시신의 상태도 너무 좋지 않았다. 자원봉사로 나선 여자 염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무사히 마칠 수 없었을 장례였다. 지금도 어려운 장례를 맡으면 27년 전 그날을 떠올린다. 안타깝게 운명한 시신을 앞에 두고 울컥할 때면 엄마와 두 아이를 함께 떠나보내던 그날만큼 힘든지 자문하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처럼 사는 사람이 많다

    2010년 3월 13일 법정스님 운구 장면. 유재철 씨는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편안해 보여 흔들어 깨울 뻔했다”며 “생전에 ‘관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다비장까지는 어쩔 수 없이 운구가 필요해 평소 쓰시던 다나무 평상에 모셔 옮겼다”고 했다. [김영사]

    2010년 3월 13일 법정스님 운구 장면. 유재철 씨는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편안해 보여 흔들어 깨울 뻔했다”며 “생전에 ‘관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다비장까지는 어쩔 수 없이 운구가 필요해 평소 쓰시던 다나무 평상에 모셔 옮겼다”고 했다. [김영사]

    염습은 고인을 마지막으로 목욕시키고 깨끗한 옷을 입혀 관에 모시는 일이다. 장례지도사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절차다. 옛날에는 염장이라고 불렀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선뜻 일을 택하기 어려웠을 텐데.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심적으로 힘들 때 인연이 돼 일을 시작했다. 염을 하는 것 자체는 거부감이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도와 염을 해드린 적도 있고, 둘째 할아버지 염을 한 일도 있다.

    시신 하면 ‘좀비’나 ‘강시’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미디어가 만든 선입견이다. 나는 염습이나 산소 일을 완벽하게 해냈을 때 느끼는 뿌듯함이 돈을 만졌을 때의 만족감보다 크다. 유족이 위로받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

    지금이야 염하는 일이 전문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한동안 나 역시 가족한테조차 비밀에 부칠 정도였다. 시신을 만진다는 이유로 불결하다며 악수하기를 주저하는 사람도 있었고, 염할 때는 그저 ‘고맙다, 고맙다’ 하다가도 음식 나르는 일을 거들기라도 할라치면 ‘시신 만진 손으로 음식을 만지면 어떡하느냐’고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요즘 이 일을 해보겠다고 찾아오는 젊은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맞다. 관련 대학을 나오면 취업도 100%다. 하지만 절대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주변에 젊은이들이 내게 자기들도 해보고 싶다고 하면 ‘동네 장례식장 가서 무료로 청소부터 해보라’고 말한다. 염습을 포함해 모든 장례 의식은 고인의 인생을 잘 갈무리하고 떠나보내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이다. 그 일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나 같은 경우 처음 2년은 전국에 유명하다는 장의사들을 찾아다녔고 스님들을 찾아가 가르침도 받았다. 대학원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내일 무너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낡은 집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부터 역대 대통령, 재벌 회장들까지 수많은 죽음을 만났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몇 명이나 염을 했느냐’고 해서 4~5년 전까지만 해도 3000명이라고 답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세지 않는다. 모든 분의 죽음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가 있다. 늘 그 무게와 마주하며 살다 보니 하루하루 허투루 보낼 수 없게 된다. 고인을 보낼 때마다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래도 훼손된 시신을 이장하거나 수습하는 건 힘들 것 같은데.

    “무섭다기보다 안됐다는 마음이 들어 어떻게 하면 빨리 옷을 입혀드리고 눕혀드릴까 그런 생각부터 한다. 나는 내가 염을 하는 순간 만나는 망자에만 집중한다. 가끔 49재에도 갈 때가 있는데 영정 사진을 보고서야 내가 염해드린 그분이 맞나 할 때가 있다. 염을 하고 나오는 순간 고인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그는 수많은 죽음과 대면하며 삶에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젊을 때는 나도 내 생각이 옳다고 믿었다. 하지만 삶에는 정말 정답이 없더라. 남과 비교하며 더 가지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진정한 자기는 없고, 자기를 괴롭히는 괴물만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 답이 없지만 그래도 잘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있다. 바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처럼 사는 사람이 많다. 생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쏟을 때 생기가 돌고 살아 있는 사람이 된다. 내게는 고인이 어떤 사람이든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편안하게 보내는 일이야말로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그는 그러면서 무슨 일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 성찰하는 게 중요하다고도 했다.

    “묘를 이장하며 시신을 수습하는 일도 하고 있는데 어느 가족이 생각난다. 관에 물이 차서 시신 모습이 험하게 변했는데도 자식들이 ‘우리 아빠 목욕하고 나오셨다’며 밝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결국 삶의 질이 바뀐다. 그게 인격이 되고 그렇게 돼야 행복이 온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데 우리는 내일이 당연한 줄 알고 산다. 나 역시 큰 교통사고로 까딱하면 ‘내일’을 맞지 못할 뻔한 적이 있다. 후회 없이 산 인생이 잘 산 인생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우리는 매일 후회할 일을 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죽음이 임박할 때는 청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나도 생과 사의 기로에 서보니 매일 반성하지 않으면 죽기 전에 그 일을 청산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엔딩노트를 써보라

    요즘 웰 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다.

    “죽음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데 젊을 때부터 엔딩노트를 써볼 것을 권한다. 이를테면 마지막 순간에 내 돈과 몸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걸 생각하면 내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게 떠오른다. 세속적으로 이득이 되는 사람과의 교류도 중요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내 몸과 돈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맺는 교류는 또 다르게 다가온다.

    또 내게 중요한 물건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 마지막에 의료 행위를 어디까지 할 것인지, 화장을 할 건지 매장을 할 건지도 미리 생각하고 기록해 놓는 게 좋다. 어느 집의 경우 장례 기간 가족들끼리 화장이냐 매장이냐를 두고 다섯 번이나 바뀐 경우도 있었다.

    사실 어제 너무 속상한 일이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비구니 스님으로부터 친척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염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혼자 살던 분이라 가까운 친척도 없었고 친구도 없어 아파트 비밀번호를 몰라 애를 태웠다. 겨우 지문을 조회해 먼 친척을 찾았는데 장례도 안 치르고 화장을 하겠다고 해서 수의만 건네주고 돌아왔다.

    장례식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의 일이다 보니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처럼 느껴질 수 있고 막상 닥치면 누구나 다 어떻게든 치러내기 때문에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죽음도 평소 준비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조언해 준다면.

    “망자를 보내드릴 때에는 ①시신에 대한 처리가 있고, ②사회적 관계에 대한 처리가 있다. 우리나라 장례는 대부분 장례식장이나 상조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치러진다. 고인들의 인생은 모두 다른데 모시는 방식은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아 있다 보니 어느 장례식에 가도 비슷비슷하다. 나의 경우 2014년에 장모님 장례식 때 발인 전날 저녁 가족들이 모여 애도식을 했다. 아내가 어머니의 약력을 읊었고 시낭송 판소리까지 했다. 30분 내내 고인과 함께 있다가 떠나보내 드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친한 친구는 형식적인 조문을 받고 싶지 않다며 모친상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고인의 혼이 순탄하게 빠져나가길 기다리겠다며 가족들만 모여 망자와 8시간을 집에서 보낸 후 그대로 화장하고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형식적인 조문을 받고 싶지 않다면서 말이다. 형제들 종교도 제각각이었지만 아무도 자기 욕심을 내세우지 않았고 오로지 어머니를 위한 장례만 오랜 기간 준비해 왔다. 발인 전날 애도식만 했다. 부고를 받아 든 주변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며 고인이 속세를 훌훌 털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셨음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요즘은 정말 조문도 받지 않고 집에서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럴 경우 절차를 미리 알아놓는 것도 중요하다. 집에서 사망한 경우 119나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상적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경우 망자가 숨을 거두면 의사의 사망진단서가 필요하다. 미리 장례지도사와 상의해 놓는 것도 좋다. 사망진단서가 나오면 24시간이 지나야 화장을 할 수 있다. 더운 계절에는 냉장관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하루 사용료 약 20만 원가량 된다. 집에서 모셨다가 사망진단서 받고 화장장으로 이동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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