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풀꽃들을 위한 변론

  • 박병원│ 前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입력2010-12-03 09: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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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꽃들을 위한 변론

    전북 고창 선운사의 꽃무릇은 국내에서 본 꽃 중 가장 화려했다.

    중국 톈진 난카이(南開)대에서 공부를 하다가 일시 귀국해보니 우리 동네 도로 중앙분리대의 느티나무는 어느 해나 그랬듯 다양한 색깔의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느티나무를 가장좋아합니다. 대칭형의 단정한 수세(樹勢), 거목으로 자라 마을에 그늘을 선사하는 점도 좋지만, 노란색에서 갈색까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다채로운 빛깔의 단풍을 그 어느 나무도 따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붉은색 계열의 단풍만 본다면, 단색인 보통 단풍나무보다는 짙은 주황색을 중심으로 잎마다 조금씩 다른 색깔을 띠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떨기나무가 이런 것이구나 싶은 중국단풍을 더 좋아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일하고, 돈 벌고, 출세하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너무 허망하지 않을까요. 그러기에 세상에는 아름다운 경치, 맛있는 먹을거리, 감동적인 음악이나 공연,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가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을 향유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우리의 한정된 시간을 놓고 삶을 즐기는 일이 돈 버는 일과 다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필자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아직도 일하고 돈 버는 데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쏟도록 교육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악, 미술, 체육을 즐기는 능력을 키워주기보다는, 점수를 매기는 대상으로 삼는 우리나라 교육이 안타깝습니다. 자연 과목에서 꽃과 나무를 알고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합니다.

    꽃과 나무를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이 세상에 가장 쉽고 비용이 안 드는 취미입니다. 우리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드는 데에는 이 이상 좋은 방법이 없을 겁니다. 제가 꽃, 나무를 보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입니다. 아버지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 카메라를 들고 꽃 사진을 찍으러 다닌 것이 그 시작입니다. 필름 카메라를 쓸 때는 꽤 많은 돈이 들었지만, 이제 디지털 카메라의 세상이 되어 필름 값, 인화비가 안 들게 됐으니 좋은 세상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눈여겨볼 만한 수많은 나무가 있습니다. 플라타너스 일변도였던 가로수가 최근 들어 느티나무, 이팝나무, 모감주나무, 배롱나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청계천 공사를 하면서 이팝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하는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쌀밥을 덮어쓴 것 같은 이 나무의 꽃이 만개한 모습은 벚나무에 뒤지지 않는데, 이미 여의도 등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벚나무를 또 심었다면 얼마나 몰취미한 일이겠습니까?



    한국은 사실 산림녹화에 가장 성공한 나라이고, 근린공원도 많이 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본다면 특별히 어디를 가지 않아도 나무와 가까워질 수 있지요. 아는 것이 즐기는 능력을 키우는 첫걸음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아는 만큼만 보이기 때문이지요.

    나무는 꽃이 화려하지 않아도 잎이나 열매의 모양, 가지를 뻗는 모습, 나무껍질이 갈라지는 모양(樹皮) 등이 다 다르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각각의 차이를 알게 됩니다. 물론 공부하면 더 좋습니다. 그냥 즐겨도 좋지만 이름을 알면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 입문서로는 필자가 이 환상적인 취미를 주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이미 1000권 가까이 사서 친지들에게 나눠준 책 ‘궁궐의 우리나무’를 강력 추천합니다. ‘이 땅의 큰 나무’ ‘절집 나무’ 등도 좋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꽃을 보지 않았다면 헛살아온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함박꽃입니다. 목련과지만 우리가 흔히 보는 목련의 모습과 다른 이 꽃은 요강 모양의 흰 꽃잎 속에 암술 수술이 화려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목란이라고 불리며, 현재 북한의 국화로 지정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지만, 지금까지 필자는 이 꽃을 보았다는 사람을 주변에서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꽃나무의 키가 커서 일부러 고개를 들고 찾지 않으면 보기 어려운 탓도 있을 겁니다. 강원도 인제군 곰배령으로 가는 점봉산 등산길에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함박꽃나무가 많으니 참고하십시오.

    매화도 매력적입니다. 일본에서 매실을 생산하기 위해 개량한 청매실나무 과원들이 요즘 관광명소가 됐습니다. 이들은 화려하기가 어느 꽃에도 뒤지지 않겠지만 우리 옛 선인들이 사랑하던 그 나무, 그 꽃은 아닙니다. 우리 매화는 백매(白梅)도 표백을 한 듯이 그렇게 희지 않고, 홍매도 그다지 붉지 않습니다. 화엄사 대웅전과 각황전 사이에 있는 고매가 유일하게 짙은 붉은색을 자랑합니다만, 그냥 붉은빛이 좀 도는 정도입니다. 이런 우리 옛 매화를 보기 위해서는 경북 안동 병산서원이나 도산서원, 경남 산청의 정당매와 남명매를 찾아가십시오. 전남 순천 선암사나 전남 장성 백양사도 좋습니다. 기왕 이곳들 중 한 곳에 가신다면 매화 철에 맞춰 방문하실 것을 권합니다.

    남해안의 경우 지심도나 거문도, 오동도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해안에 동백꽃 명소가 많습니다. 낙화하는 모습이 만개할 때 못지않게 아름다운 꽃이기 때문에, 낙화 사진을 더 좋아하는 제게는 소중한 꽃입니다. 요즘 차 농원 관광도 유행하는데, 차밭만 둘러볼 것이 아니라 차꽃을 볼 수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요?

    동백은 차나뭇과입니다. 그래서 차나무 꽃도 초겨울에 핍니다. 작은 흰 동백 같은 차나무 꽃은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을 향해서 피기 때문에, 제철에 관심을 갖고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모과나무 꽃은 세상의 분홍색 꽃 중에서도 가장 예쁘다고 생각합니다만, 보았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나무의 키가 크고 꽃이 많이 달리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 대신 요즘 많이 심는 명자나무 꽃을 보시면 꿩 대신 닭은 될 수 있겠습니다. 명자나무는 모괏과의 관목인데다 꽃이 나무를 덮을 정도로 화려하게 피고 색깔도 흰색에서 분홍색, 주황색, 짙은 붉은색까지 있어 보기가 좋습니다. 그래도 신이 아니면 감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모과 꽃의 신묘한 분홍색에 견주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풀꽃 얘기도 좀 해야지요.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책도 더 많은 종류가 나와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부터 올여름까지 미국 스탠퍼드대에 초빙교수로 머물며, 들꽃들을 열심히 보러 다녔습니다. 정말 부러운 것은 땅이 넓은 미국이라 그런지 풀꽃들이 살 수 있는 ‘그냥 풀밭’을 넉넉히 남겨두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을 공장이나 집을 세우고 농사를 짓는 데 쓰고, 나머지 땅은 너무 치밀하게 산림녹화를 해서 풀꽃이 살 공간을 별로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자연상태는 아니지 않을까요?

    한국에서 풀꽃을 보려면 곰배령, 금대봉, 노고단 등 높은 산 위의 얼마 안 되는 공간을 일부러 찾아가야 합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좋은 꽃나무를 계획적으로 심는 경우도 있고, 더 화려한 꽃들을 보여줄 수 있는 식물원, 수목원도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연 상태로 풀꽃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어쩌면, 사람의 손이 많이 간 곳보다 자연 상태의 풀밭이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훨씬 더 귀하니까요.

    꼭 한 번 보시길 권하고 싶은 꽃은 공교롭게도 모두 알뿌리에서 나오는 다년생들이네요. 그중 가장 화려한 것이 꽃무릇(石蒜)인데 전북 고창 선운사, 전남 영광 불갑사, 경남 함양 상림 세 곳에만 있다고 합니다. 저는 선운사 동백 숲 아래에 있는 꽃무릇을 봤는데 지금까지 국내에서 본 꽃 중 가장 화려했습니다. 함양 상림은 숲 중에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꼽히는데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풀꽃들을 위한 변론
    朴炳元

    1952년 부산 출생

    서울대 법학과·동 대학원 졸업, 한국과학원 산업공학과 석사(경영과학) 미국 워싱턴대 석사(경제학)

    前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前 우리금융지주 회장, 前 재정경제부 차관


    다른 꽃으로 제주도 동쪽 난섬의 문주란이 있는데, 문주란의 흰 꽃이 섬 전체를 덮고 있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섬이 바라다보이는 육지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주인에게 ‘배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해야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데, 꼭 한 번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수많은 꽃의 아우성이 들렸습니다.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더 많은 분과 나눌 수 있다니 감사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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