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땅문서에 이름표를 달아줘

  • 김상인

    입력2010-12-03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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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문서에 이름표를  달아줘

    일러스트·조은명

    “연무에 황사까지 궂은 날씨군요. 차장님 오늘 일정은 변경해야 할 것 같은데요.”

    2003년 어느 봄날, 2층 사무실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김훈병 차석이 던진 말이다.

    “어제도 기점(측량의 기준이 되는 지점)을 못 잡아서 경계측량 신청인에게 사과했잖아. 자꾸 미결업무가 늘어나면 안 되지. 측량 장비하고 마스크나 잘 챙겨.”

    지시는 했지만, 나 역시 바깥일이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 9시가 넘었는데도 햇빛이 보이지 않았다. 찌푸린 날씨는 오히려 점점 더 우중충해지는 듯했다. 봄 가뭄이 계속되고, 합천댐이 생기면서부터 안개 끼는 날이 많아졌다. 다른 팀들도 망설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마냥 사무실 형광등에 도면만 비춰볼 수는 없는 노릇. 소장님도 조바심이 났는지 1층 소장실에서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밟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문을 열리자 이내 하소연 소리가 들린다.

    “비가 오면 또 측량 못할 거 아닙니까? 봄이라 신축 건물은 늘고 측량 의뢰인들은 목 빼고 기다리고 있어요. 여기 5팀이 업무 처리를 못하면 내가 괴로워서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현장으로 나가세요!”



    반쯤은 쫓겨나다시피 나온 우리 팀 막내 윤환현이 차 트렁크에 경위의(經緯儀·측량에 사용하는 도구)를 실으며 한마디 던졌다.

    “지척에 있는 사람 얼굴도 못 알아보겠는데 무슨 재주로 측량을 하라는 거야.”

    나는 차 미등을 켜고 서서히 운전을 시작하면서 말했다.

    “네 얼굴에 점까지 보이는데 무슨 소리야. 차석과 막내, 내 말 잘 들어. 소장님이 나한테 불만이 많은 거야. 어제 일도 그렇고. 할 수 없지.”

    “그게 어디 차장님 잘못입니까? 수목이 울창한 산골짜기라 하루 만에 측량할 수 없었잖아요.”

    차석과 막내는 합창이라도 하듯 말했다.

    “나를 설득하려 하지 마. 다른 팀은 어떻게든 하루에 2건 이상씩 측량을 마치고 오잖아. 수석팀에서 그에 못 미치니 못 마땅한 거 아니겠어?”

    안개 속에서 미로를 헤매듯 운전하는 내가 염려스러운지 두 팀원이 동시에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는 모습이 운전석 거울에 비쳤다.

    “괜찮아, 이래봬도 운전경력 15년이야. 눈이 밝아 측량도 10년은 더 할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차석이 말을 좀 해도 되겠다 싶었는지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차장님 궁금한 게 있어요. 지적공사 거창출장소에 팀이 다섯 개 있잖아요. 그런데 소장님은 꼭 어려운 업무를 우리 팀에 맡기거든요. 그래 놓고 평균 처리건수로 다른 팀과 비교하잖아요. 오늘 측량할 성산마을만 봐도 도면이나 측량증거문서 같은 과거 자료가 전혀 없어요. 기점부터 잡아야 하는데 이렇게 시계(視界)가 맑지 않으니 대략 난감 아니에요?”

    버림받은 땅

    희뿌연 차창 밖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속도를 늦추며 전조등을 켜고 상향으로 불빛을 비춘 채 천천히 차를 몰았다. 비탈진 밭둑에서 고양이가 앙칼진 소리를 내며 잡은 쥐를 갈기갈기 물어뜯고 있다가 자동차 불빛에 앞발을 세운 채 눈알을 굴리는 게 보였다. 어디서 달려왔는지 개들도 흙을 파헤치고 뼈다귀를 핥으며 컹컹대고 있었다. 구린내가 진동을 하고, 날벌레와 파리떼가 희미하게 사라졌다 나타났다. 차창을 모두 닫았는데도 이토록 메스껍고 썩은 냄새가 차 속까지 파고들다니! 호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손으로 만지던 차석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우리 다 눈뜬 장님이 된 거나 다를 바 없군요. 차라리 돌아가서 소장님을 모시고 옵시다. 이런 날 리더는 어떻게 측량을 하는지 서툰 목수가 좀 배워야겠어요.”

    “조금 전에 못 봤어? 안개 속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꽃가루도 날리는 걸. 괜히 소장님 모시고 왔다가 날이 개면 낭패야. 오늘 우리가 배울 것은 경청이다. 거창읍 시가지 외곽엔 두 개의 마을이 있어. 동쪽은 동산마을이고,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서쪽은 성산마을이지. 마을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줘야 해. 듣다보면 봄 연무야 1시간 후면 개지 않겠어?”

    흰 장갑을 끼고 차창을 닦던 막내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며 손동작을 멈췄다.

    “동산마을이라면 나병 환자가 사는 곳 아닙니까? 그렇다면 성산마을 주민도 문둥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라고요? 마을 주민이 측량의뢰인은 아니잖아요!”

    “윤 대리, 앞으로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마. 한센인이나 특수피부 질환자, 혹은 소외계층 장애인이라고 불러야지. 차석도 내 말 명심해. 측량신청은 군청 사회복지과에서 대신 한 거지만, 이 땅에 살고 있는 건 마을 주민이야.”

    두 팀원의 얼굴은 금세 바깥 날씨만큼이나 우울해졌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내가 말을 걸었다.

    “우리처럼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가진 사람들은 무뚝뚝해 보이는 거 알지? 이미지 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 돼. 게다가 오늘같이 을씨년스러운 날씨엔 더 그렇지. 우리가 먼저 웃으면 해님도 얼굴을 내밀지 누가 알아. 거울은 절대 먼저 웃지 않는 법이거든.”

    소하천의 다리를 건너자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끝나고, 오래된 콘크리트 도로가 시작됐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정비된 듯한 진입로다. 이 길이 30년간 그 모양 그대로 머물러온 헌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양계장 축사의 지붕이 연무 사이로 조금씩 형태를 드러내는 걸 보며 마을 가까이 온 것을 실감했다. 점점 사방에서 찌든 때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중충한 색깔이 바람에 하수를 뒤집어쓴 들쥐처럼 떨고 있었다. 빛바랜 세상의 응달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한센인 거주 마을

    소름끼칠 정도로 외로운 전조등 불빛이 마을 입구 화강암에 각인된 ‘성산(星山)마을’ 표지석을 비췄다. 마을 앞 공터에 차를 세우고, 우리 일행은 마을회관 1층 출입문을 열고 들어섰다. 실내에서도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 같은 검은 안경을 쓴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남자 네 명이 의자에 앉아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명함을 꺼내 건네고 나머지 두 팀원도 소개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일어서더니 받은 명함은 보지도 않은 채 탁자에 놓고는 장갑 낀 손을 내게 내밀었다. 나의 오른손은 멀리 나가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자꾸 움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이소, 측량기사 양반! 우리는 지금 묵념과 기도를 올리고 있소. 이틀 전 우리 마을 원로 한 분이 돌아가셨소.”

    “조선시대 향교를 유지 관리하고 제사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밭과 논 등이 필요했고, 그 토지를 교전(校田) 또는 학전(學田)이라 했다. 군수, 현감이 이를 관리 감독했다. 그 뒤 향교부근의 교전은 유생과 소작인들이 자기 토지인 양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구한말 지방 유림의 폐단이 많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자연 향교는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이 틈을 타서 향교부속의 전토는 소작인과 향교 사무를 보는 종사자들이 제멋대로 분할 점유하기에 이른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구한국 정부에 지시해 ‘보통학교령’을 공포한다. 여기서 국민학교 교육이 시작됐다. 또 사립학교령을 시행해 교전의 일부를 사립학교재산으로 편입했다. 토지조사사업 당시 향교 재산과 학교재산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향교에서 유학의 훈육은 자연 폐지되었으나 공자 등 유교의 현인에 대한 제사는 계속 지냈고, 필요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향교전을 처분하는 예도 많았다. 향교전은 조선시대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 향교전, 교전, 교위 등의 명의로 등재됐다. 향교전은 정부로부터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았고, 관할 군수도 형식적으로만 감독했다. 그렇다 보니 사실상 해당 지방의 유림 또는 향교의 청직(廳直) 등이 관리했으나, 토지를 둘러싼 비리가 많이 발생되어 부득이 1910년 ‘향교재단관리규정’이 공포됐다. 향교 재산관리규정에 의하면, 향교 재산 전토는 매매를 금지하는 한편, 향교 재산의 관리는 부윤(府尹)·군수에게 위임하되, 관찰사의 지휘 감독을 받도록 했다.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시장 군수가 관찰사의 인가를 받아 특정관리인에게 관리를 맡길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성산마을 부지도 최초 작성한 토지대장을 보면, ‘대정 3년(1914년), 사정(査定)’으로, 소유자가 ‘거창향교 재산’으로 등재돼 있다.”

    광복이 되면서 식민통치시대는 끝났으나, 미군정과 6·25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 지적법이 제정되면서 소유자의 신고 없이도 ‘토지이동정리(면적, 지목 등이 지적공부상 변경되는 것)’가 가능해졌다. 성산마을 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립학교가 설립됐고, 미군정하 향교 재산관리법은 현지 실사를 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향교 재산과 학교 부지 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해졌다. 학교 부지의 울타리가 명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야의 무단형질 변경이 자주 일어나 도면으로는 제대로 된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향교 재산 일부가 학교법인 소유로 변경됐다.

    1962년 향교 재산관리법이 제정 공포됐다. 일제강점기하의 서당규칙법과 1948년 미군정하의 향교 재산관리법을 모체로 한 향교 재산관리법 제4조에는 “이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매매, 양도, 교환, 담보 제공, 처분을 할 수 없다”고 돼 있다. 이 법 제정과 더불어 뒤늦게 향교에서는 재산 관리가 허술했음을 알게 됐고, 토지실사를 통한 재산 파악에 들어갔다. 성산마을 주위 임야와 구릉지, 황무지 등이 중점조사 대상지였다. 이 과정에서 향교는 학교법인으로 소유자가 변경된 필지에 대해 소유권반환소송을 청구하기에 이른다. 학교법인이 성산마을 주민들에게 토지 불하를 약속했다가 외면하고, 도지사나 군수가 찾아와 점유자가 땅을 곧 취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 섞인 발언을 쏟아내던 시기, 마을 밖에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던 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은 토지불하를 믿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점유자들의 의지와 무관한 토지용도 제한의 금줄, 도시계획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도시계획법상 자연녹지선, 완충지역의 주거지역선이 복잡하게 그어져 현실적인 땅 분할 문제는 오히려 더욱 어려워지고 있던 것이다.

    “한번 해봅시다!”

    이 문제를 정리하려면 일단 토지 소유자인 향교의 실무자를 만나야 했다. 그런데 그와 마주 앉기도 전 일이 생겼다. 날씨가 좋아 아침 일찍부터 측량 신청인들의 전화가 폭주하던 날이었다. 배정된 4건의 측량을 마치고 오후에 사무실로 돌아와보니 성산마을 이장과 주민 10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들에 따르면 이미 한 시간 전부터 자리를 지켰다고 했다. 이장은 이번 기회에 성산마을에 사는 주민 각자의 대문에 문패를 붙여달라고 하소연했다.

    “우리가 군청과 읍사무소 등 행정기관에 가서 다 알아봤는데 땅문서를 만드는 것은 김 차장 손에 달렸다고 하대요. 지적확정측량이라던가? 아무튼 이번 기회에 불쌍한 우리를 봐서 지적도에 선을 그어주시오.”

    “이장님, 일단 의자에 앉으시고 제 말씀부터 들어보십시오. 이장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무슨 권한이 있습니까? 읍사무소와 군청 담당자들은 지적공사에 책임을 떠넘기려고 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저는 지적측량사일 뿐입니다. 과거에 국회의원, 도지사, 군수, 학원이사장이 소유권 이전을 약속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분들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한 일을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지적은 호적과 같은 겁니다. 사람 이름이 호적부에 잘못 등재되면 쉽게 고쳐지든가요? 성산마을 주민들만 아우성이지, 정작 소유자와 법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실무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토지분할을 제한하는 법률 문제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땅도 마음대로 분할하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또 하나 문제는 축척이 작은 임야도에 등록한 토지를 큰 축척의 지적도 토지로 변경 등록하는 문제입니다. 지적법상 등록전환(登錄轉換)이라고 하는데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에요. 법률에 정한 절차를 거친 다음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선을 없애 토지합병을 하고, 그 상태에서 주민 각자의 몫을 떼어내야 합니다. 소유권을 찾아올 수 있는 기반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것은 토지 소유자인 향교재단이 먼저 스스로 등록 전환과 합병을 신청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향교의 실무자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장님이 향교의 변 총무를 직접 만나보십시오. 당사자끼리 얼굴을 보며 토지 문제를 상의해야 실마리가 풀리지 않겠어요? 아시다시피 측량 의뢰자는 군청 사회복지과고요. 저는 제3자입니다. 제가 향교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그 사람들하고는 이야기가 안 통해요. 우리를 독사 보듯 합니다. 만나면 불법 점유한 토지사용료부터 내라고 합니다. 향교의 장부책에 연도별 임대료를 외상값처럼 적어놓았어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법은 이렇다’ ‘향교는 자선 봉사단체가 아니다’ 하는데, 그 얘기를 듣다보면 내가 별수 없이 돈 없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이장님, 땅 문제로 이미 40년을 기다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제가 나름대로 소유자에게 조언을 해보고 연락하겠으니 오늘은 일단 돌아가십시오. 사무실 다른 직원들 생각도 하셔야죠.”

    “김 차장, 내가 요즘 부동산 책을 읽고 있는데 그중 한 구절만 들려주고 돌아가겠습니다. ‘지적측량사가 아닌 사람이 도면에 경계를 그리는 것은 물 위에 선을 긋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만큼 김 차장 역할이 크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답답하니 이렇게 불청객 짓을 했네요.”

    성산마을 주민들은 돌아갔지만, 동료 직원들은 사무실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거나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무언으로 원망하는 눈치였다. 차석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본다.

    “조금 전에 느낀 건데요. 우리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과 성산마을 주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을 구분하기가 참 어렵더군요. 그래서 대인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차장님이 첫날부터 이장님에게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대하기는 했어요.”

    “그래서 당신은 주민에게 목례만 하고 하던 일을 계속한 거야?”

    “옆에서 보기에 차장님이 너무 큰 멍에를 짊어진 것 같습니다.”

    나는 즉시 군청 사회복지과 장애인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측량 신청은 그쪽에서 해놓고, 성산마을 주민들을 우리 사무실로 보내면 어떻게 합니까?”

    “그분들 군청에는 더 자주 옵니다. 내가 다른 부서에 결재를 받으러 간 사이에 우리 여직원이 자세한 내용도 모르고 김 차장님을 찾아가라고 했답니다. 화 풀고 같이 좋은 방향을 찾아봅시다.”

    “그렇다면 군청 사회복지과에서 소유자와 협의관계로 성산마을 측량을 보류한다는 공문부터 보내주세요.”

    “기한은 언제까지로 하면 되겠습니까?”

    “소유자인 향교의 실무자와 통화해 결정하시죠. 아마도 시일은 상당히 오래 걸릴 겁니다.”



    불면의 밤

    나는 향교 실무자를 만나기 전 측량도면을 들고 군청 사회복지과장을 먼저 만났다. 측량 의뢰자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테이블에 배석자 없이 둘만 앉았다. 과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성산마을 측량문제는 소외계층 보호 측면에서 전임 과장이 역점을 두고 추진한 사업이에요. 올 초 인사이동으로 제가 이 자리에 왔습니다. 저는 얼마 전 김 차장에게 성산마을 대변인 역할을 부탁하는 걸 보고 알았겠지만, 솔직히 성산마을 부지 문제를 정리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아요. 지역사회 여론이 좋지 않을 겁니다. 필수(여러 필지의 합)가 많아 측량비도 부담이 되고요. 제 솔직한 심정은 지금이라도 측량 신청을 취소하고 싶다는 거예요.”

    “하지만 지금 포기해도 현장실측경비는 지급하셔야 합니다. 기술자 세 명이 나흘간 측량했어요. 또 토지연혁 자료조사비도 지급하셔야 합니다. 전임자의 생각이건 후임자가 꺼리는 일이건, 군수 명의로 보낸 공문 아닙니까? 우리 지역사회로 보면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주민숙원사업이기도 하고요. 향교에서는 무턱대고 주민들에게 토지사용료를 내라고 하는 모양인데, 비용이 부담 되시면 이번 기회에 향교에서 마을 현황을 파악하는 것으로 삼도록 하고 그쪽에 비용을 요구하시면 어떻습니까. 과장님이 향교에 협조를 구하면, 제가 필지수를 줄여 측량비용을 경감하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향교에 측량비용을 부담하라고 하면 그쪽에서는 정말 주민에게 토지사용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걸 겁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우리는 함께 거창향교를 찾기로 했다. 충혼탑과 학교부지에 둘러싸여 있는 향교 충효관에서 변 총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산마을 측량현장에서 오토바이 시동도 끄지 않은 채 잠깐 인사를 나눈 적 있는 그 사람이다. 동행한 과장이 전교(典校·향교의 대표자)가 있는지 물었다.

    “전에 부군수님으로 모시던 분인데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성균관에 출장 가셨습니다.”

    변 총무는 서 있는 나에게 의자를 권하며 사과부터 했다.

    “성산마을 측량현장에서 결례를 했습니다. 솔직히 말이 통하지 않는 주민들과 별로 접촉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이제 도면의 어지러운 선만 봐도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매일 개인의 재산권과 직결되는 머리카락 같은 경계선을 판단해서 그런지 김 차장도 흰 머리가 많군요.”

    “업무를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경계를 0.1㎜ 이하의 선으로 표시하고, 그 선만으로 소유권을 보호하려니 머리가 백색 도면을 닮아가는 모양입니다.”

    과장이 변 총무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애초 우리 군의 의도는 성산마을에서 점유하고 있는 토지의 총괄 면적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김 차장 말씀을 들어보니 지목별로 개인이 점유한 필지를 합산해야 통계가 나온다더군요. 향교 쪽에서 조금만 협조해주시면 측량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하니 김 차장 설명을 듣고 좀 협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향교 부동산은 경상남도 재단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상부에서는 왜 토지사용료를 제대로 받지 않느냐고 추궁하지요. 제가 나름대로 형편을 이야기합니다만, 연말에는 늘 미납 임대료를 공시지가로 계산해 결손처리하는 형편이에요. 이번 기회에 뭔가 해결책이 나왔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하지만 군청에서 빈약한 재정으로 우리 땅을 사다가 주민에게 주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주민들이 직접 자신들이 점유한 땅을 살 수밖에 없는데, 우리 쪽에서 이야기를 꺼내면 분명히 헐값으로 매입하려고 할 겁니다.”

    나는 어제 성산마을 주민들이 사무실에 온 이야기를 꺼냈다.

    “주민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것은 자기들이 점유하고 있는 땅의 면적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 땅을 소유하고 싶기 때문에 알고 싶은 거겠지요. 그런데 현재로서는 이걸 알아내는 게 쉽지 않아요. 주민은 78명뿐인데, 시설물이 기존 경계선 위에 걸쳐 있는 필지가 많아서 면적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작업을 중단한 상태지요. 보시다시피 도면도 굉장히 복잡해요. 축척이 다른 지적도와 임야도를 일원화하고 지목이 같은 필지는 합병해 면적을 구하면 필지수가 많이 줄어듭니다. 그러면 군청이 부담하는 측량 비용도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전교님이 출장에서 돌아오시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적공부상 내용을 바꾸려면 상부 승인을 받아야 해요. 청년유도회나 유림에도 사전에 설명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하죠? 단순히 군청에서 마을 현황을 파악하는 데 협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과장은 차를 다 마시고 잔을 받침대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과장이 고개를 앞뒤로 세 번 가볍게 흔들며 수긍하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읍장님이 사회복지과장 재직시에 성산마을 문제로 많이 고민했다고 들었어요. 아마 마을 이장과 잘 알고 지냈을 겁니다. 마을 주민들의 의중을 알아봐달라고 내가 부탁드리지요.”

    과장은 나의 어깨를 다독이며 내게도 말을 걸었다.

    “직원에게 보고받았는데 측량 연기 건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연기 공문은 몇 번이고 내드리겠어요. 전교님과 읍장님에게도 김 차장이 언제 한번 땅문서 전문가로서 이런 문제를 설명해주셔도 될까요?”

    “설명은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성산마을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사무실에 찾아오는 것은 자제시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동료들이 다 일손을 놓게 되거든요.”

    “그 부분은 제가 대신 사과합니다. 지금 보니 상황을 잘 정리하지 않고 무턱대고 측량 신청부터 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쯤 헤어집시다. 3자의 입장을 어느 정도 조율한 것으로 알고 말입니다.”

    모두를 위한 길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뒤에도 성산마을 주민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치 경위의로 그들을 보고 있는 듯, 눈앞에 마을의 형상이 흘러갔다. 봄빛이 완연한데도 겨울의 누더기 옷을 입고 있고, 정화조 시설이 없는 축사에서 흘러나오는 오물 냄새가 진동하던 곳, 오랜 세월 세상의 외면을 받은 그들의 눈빛, 병든 몸도 추스르지 못하는 가엾은 사람들, 죽어서도 갈 곳 없는 성산마을 사람들.

    또 다른 화면이 스쳐갔다. 7년 전 황강 둔치에서 벌어지던, 꽃동네의 거창 이전을 반대하던 군민들의 시위 모습이다. 이마에 붉은 수건을 두른 시위대는 성난 말벌에 쏘인 것처럼 거칠게 함성을 질러댔다. ‘꽃동네 이전은 거창 발전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던 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를 울리는 듯했다. 결국 꽃동네 이전은 무산됐다. 지금도 군민 가운데 상당수는 거창시가지가 한센인이 사는 동산마을 때문에 김천 방향으로 뻗어가지 못한다는 데 불만을 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산마을까지 땅에 한센인의 이름표를 새긴다면, 그 일에 내가 앞장선다면 거창군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탄받게 되지 않을까.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다수에 대한 배반은 아닐까. 성산마을이 자립마을이 되면 무허가 양계장이 활성화돼 이웃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성산마을 주변 아파트 주민들이 ‘당신이 닭똥 냄새를 아느냐’며 내게 삿대질하는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하지만 ‘아픈 땅 돌보는 것’이 나의 임무 아닌가. 나는 그날 밤 베개에 왼쪽 오른쪽 머리를 번갈아 고이며 긴 번뇌의 시간을 보냈다. 정말 잠시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불면의 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성산마을 이장이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김 차장 잘 있소? 사무실에 찾아가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으니 목소리라도 들어야 하지 않겠소. 궁금해서 전화해봅니다.”

    “이장님이 사무실에 오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많은 주민이 한꺼번에 와서 아우성치지만 않으면 돼요. 지금은 여러 방면으로 소유자와 접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전에도 몇 번 말씀드렸지만, 그곳이 개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여러 달이 걸릴 것 같습니다.”

    “저도 거듭 이야기하지만 시일은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땅 문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김 차장만 믿겠어요. 우리의 소원은 오로지 한 가지, 김 차장도 잘 알지요. 땅문서에 이름을 남기는 거요.”

    “예, 이장님. 잘 알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먼저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소장이 나와 팀장들을 1층으로 불렀다. 상부에서 측량 완료 실적이 저조하다고 꾸지람을 들었다고 했다.

    “지사 산하 24개 출장소에서 우리가 23위입니다. 24등은 섬이 많은 통영이니까 사실상 우리가 꼴찌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게 뭡니까?”

    “차장이 업무처리 능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가가 상승하니 조금만 오차가 나도 민원이 발생할 수 있어서 조심스러워요. 3일 전에도 의뢰인이 과거 측량과 한 뼘 차이가 난다며 이번에는 정확한 측량을 했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하더군요.”

    “지금 그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차장도 언젠가 소장이 되면 내 심정 알 겁니다. 경쟁 사회에서 상부에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미결업무를 빨리 처리해달라는 거예요. 해결도 안 되는 성산마을 도면만 쳐다보고 있지 말고 다른 업무부터 하라, 이 말입니다.”

    나는 무작정 좀 걷고 싶었다. 축축한 가로수 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포도를 적신다. 빗물이 흘러 하수구로 들어가 황강으로 유입된다. 황강물이 흘러 합천댐에 모인다. 댐이 있는 곳에 안개가 잦다.

    안개가 자주 발생하면 일사량이 적어 원예작물에 지장이 있다. 얼마 전 강변 둔치에서 과수재배 농민들이 홍건을 머리에 두르고, ‘보상하라! 보상하라!’ 외치기도 했다. 그 함성은 우주공간으로 날아갔다. 다시 비가 내리고 황강둔치에는 아무도 없다. 성산마을 토지를 소유하려고 긴 세월 눈물 흘린 사람들이 지역 사회에 있다. 소장은 성과 없는 측량을 못마땅해하고, 나 역시 빨리 업무가 마무리되면 더없이 좋으련만…. 그때 휴대전화가 상의 호주머니에서 떨고 있었다. 차석의 목소리였다.

    “차장님 어디세요?”

    “머리 좀 식히려고 강변을 배회하고 있지.”

    “조금 전에 읍장님이 전화로 찾던데요. 1층 분위기도 오늘 날씨 같다던데 빨리 읍사무소로 가보세요.”

    평생에 가장 보람 있는 일

    거창읍장실 앞에서 나는 구두에 튄 빗물의 흔적을 휴지로 닦았다.

    “어서 와요. 오창윤 읍장입니다. 오후에 전화할까 하다가 혹시 날이 개면 김 차장이 출장 가서 못 만날까봐 지금 연락했어요. 바로 와줘서 고맙소.”

    “읍장님이 직접 불러주시고, 독대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자려고 누워도 천장을 보면 실타래처럼 꼬인 선들이 보여서, 저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하다가 백지도면같이 하얗게 밤을 지새웁니다.”

    “짐작했겠지만 성산마을에 대해 의논하려고 불렀습니다. 정년이 가까이 오니 과연 나는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았나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6개월밖에 없어요. 내가 공직에 있을 때 뭔가 보람된 일로 마무리를 하고 싶고요. 그래서 40년 동안 해결 못한 성산마을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볼까 합니다.”

    “무슨 좋은 방안이 있습니까? 저도 4일 동안 측량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봤는데, 그때 느낀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누구보다 공정한 저울의 추를 가슴에 달고 다녀야 하는 지적측량사입니다.”

    “나는 김 차장같이 토지 전문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성산마을 지적도를 보면서 나름대로 연구해봤습니다. 내 땅이다 생각하고 여러 각도로 방법을 모색했지요. 지금은 벌집처럼 복잡하더군요. 제가 생각한 1안은 현재 지적경계선을 바탕에 두고, 주민들이 점유하고 있는 면적을 구하는 겁니다. 크기는 지적도 축척으로 일원화됐다고 보고 구적기(면적 구하는 기계)를 돌립니다. 여러 필지라도 점유자가 동일하면 면적을 합산합니다. 하다보면 반 평짜리도 나오겠지요. 그래도 일단은 다 계산을 하는 겁니다. 2안은 소유자가 향교재단이고 지목이 같은 필지는 합병돼 경계선이 사라졌다는 전제하에 면적을 구하는 겁니다. 그 뒤에 1안과 2안을 비교합니다. 어떻습니까.”

    “읍장님, 그렇게 하면 수백 필지가 생길 겁니다. 우리나라의 면적 구하는 방법은 읍장님도 방금 말씀하시다시피 간접법(측량도면에서 구적기로 면적 구하는 방법)입니다. 도상에서 구적기로 면적을 구하지요. 수수료가 만만치 않고 시일도 상당히 오래 걸립니다.”

    “무리한 부탁인지 압니다. 이것은 비공식적인 부탁이고, 김 차장의 상사인 소장님도 모르게 진행해야 합니다. 김 차장과 조원말고는 절대 비밀로 하자는 이야기예요. 내가 성산마을과 향교 사이의 중개인 역할하는 데 필요해서 그래요. 좋은 기술로 무료봉사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앞으로는 비가 더 자주 올 것 아닙니까? 비 올 때 쉬엄쉬엄, 게임한다고 생각하고 구적기를 돌리세요. 도면의 경계선은 직선만 존재하지만, 이 세상은 곡선도 많이 있지요. 길을 가다보면 꼬불꼬불하고 울퉁불퉁한 미로 같은 험한 산길도 있고요. 그렇다고 산 정상에 오르지 않을 겁니까? 측량하고 지금까지 한 걸음도 못 나갔잖아요.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아닙니까? 정년이 되면 김 차장도 이 작업을 했던 걸 추억처럼 떠올리게 될 겁니다. 그런 의미로 내가 한턱내지요. 퇴근 시간에 두 조원과 함께 창거식당으로 오세요. 다른 직원들은 모르게 하셔야 합니다.”

    사무실을 나서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읍장님도 고민을 많이 한 것은 틀림없어. 사회 지위를 떠나서 나이 차이가 10년이 넘는 인생 선배에게 면전에서 매몰차게 대할 수는 없지. 아무리 공정하게 말목을 박아도 한쪽에선 색안경으로 말목을 바라보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읍장님의 말씀처럼 게임을 하다보면 끝이 있겠지….’

    나는 사무실에 돌아와, 두 팀원에게 저녁에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4팀의 직원들에게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항상 사유재산권 업무 처리한다고 늦게까지 퇴근 못하는 동료 여러분! 오늘부터 당분간 우리 조에서 최종퇴실할 겁니다. 출장이 없는 날은 칼퇴근하시기 바랍니다!”

    그날 저녁 동료직원이 다 퇴근한 2층 사무실에 성산마을 측량도 6장을 펼쳐놓고 차석과 막내에게 읍장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막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도면 위에 먼지만 쌓이도록 기다리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저야 싱글이니 괜찮은데 차석님이 걱정이 되네요. 또 한 가지 걱정은 소장님이나 직원들 모르게 그 많은 필지의 면적 구하는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요?”

    “그럼 필지가 3배 많은 1안을 윤 대리가 맡으면 되겠네. 그리고 토요전일제 근무 날 면적 구하면 그리 염려할 것은 없지?”

    “그러지요. 그저 바라보는 것보다는 일을 하는 게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길이겠네요.”

    차석도 그렇게 하겠다고 머리를 흔들어 수긍했다.

    “그래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팀워크지. 이제 가자 창거식당으로!”

    창거식당은 축협에서 직영하는 애우(쑥 먹고 자란 소) 전문식당으로 규모가 제법 크다. 제일 안쪽 조용한 방에 읍장이 먼저 와 있었다. 나는 팀원들을 소개하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정말 내가 사고 싶어서 초대했으니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들어요. 쑥 먹고 자란 한우라 이걸 먹고 나면 현장 뛰어다닐 때 힘이 솟을 겁니다. 건배 멘트는 내가 하지요. ‘한반도’를 위하여! ‘한반도’는 ‘한없이 반짝이는 도도한 술잔’이라는 뜻입니다.”

    “읍장님께서 저희에게 말씀을 낮추면 술맛이 더 나겠는데요.”

    “그러지 뭐. 김 차장의 제안을 내가 받아들이지.”

    차석이 읍장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성산마을 주민 개개인의 점유 면적을 구하면 그들이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이 열리나요? 임야도와 지적도의 면적이 차이가 나거든요. 그리고 토지 분할은 건폐율(건축법에서 정한 대지면적과 건물면적 비율), 용도지역별 대지면적의 최소한도 등 여러 규정의 규제를 받습니다.”

    “자네가 뭘 염려하는지 알아. 축척이 상이한 데서 면적을 구하면 나중에 도면이 일원화됐을 때 면적이 달라진다, 이거 아냐?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지금 면적을 재는 건 주민과 소유자를 협상테이블로 데려오는 데 참고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거거든. 그것도 나만 알고 있을 거고. 산에는 항상 약초와 독초가 동시에 자라지. 필요한 사람이 약초를 골라 쓰면 이로울 것 아닌가? 그리고 인생의 선배로서 한마디 더 하지.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뭔 줄 아나? 아마추어는 온갖 핑계를 갖다 대면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못 한다’라고 하지. 반면 프로는 어려운 현실이 산더미처럼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을 해낸다. 당신들은 토지 문제의 해결사, 프로들 아닌가.”

    뜨거운 여름

    여름에 접어들자 개인의 측량 신청이 확연히 줄었다. 그렇지만 봄에 경계 측량한 신축 건물들이 준공검사를 받기 위해 신청하는 분할 측량 건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었다. 대지 도로공제선(건축법에서 정한 도로의 폭을 확보해야 하는 경계선) 분할 측량을 하기 위해 옥상에 올라갔다. 시가지 옥상 위로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 탓에 두 시간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땅 소유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황급히 옥상 계단을 올라왔다.

    “내 땅인데 1m를 후퇴해 도로로 만들라고요? 보상도 해주지 않고, 측량비도 소유자가 내야 되고…. 이거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내려가서 그늘에 계십시오. 10분 안에 가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체구가 큼직한 막내는 연신 수건으로 땀을 훔치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주택 밀집지역이라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신세였다.

    “윤 대리, 도면에 땀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들고 내려와. 먼저 내려가서 신청인에게 설명하고 있을게.”

    “차장님! 차석한테 쭈쭈바나 4개 사서 가지고 오라 하지요. 땀을 식히고 대화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요.”

    소유자는 담장 그늘에서 부채를 부치며 살랑살랑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었다. 나는 폴대 끝으로 땅에 토지의 모형을 그리며 설명했다.

    “고객님! 여기는 골목길이 2m밖에 안 됩니다. 도로 중앙에서 양쪽으로 2m씩 후퇴해 4m를 확보하게끔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건축법에 그렇게 해야만 허가를 내 주게 되어 있고요. 준공검사를 받으려면 설계도면과 같이 도로 공제선을 분할해야 합니다. 분할된 필지는 지목이 도로로 바뀌어야 해요. 여기는 건물이 오래돼서 그렇지, 요즘 신건물 진입로들은 골목길이 여기보다 배로 넓지 않던가요? 저희는 측량만 할 뿐입니다만, 대지경계선에서 1m 안으로 후퇴해 담장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무허가 건물이 아닌 합법적인 건물이 됩니다.”

    “내 땅인데 분할된 1m는 지목이 도로로 바뀐다면서요? 국가에서 보상을 해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사유재산권 침해란 말입니다.”

    “개인 입장에서는 악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공공의 목적으로 토지를 사용할 때에는 사유재산권도 일정부분 제한할 수 있다고 보는 게 요즘의 추세입니다.”

    “내가 볼 때는 정부가 건물 준공을 담보로 나중에 도시계획사업을 용이하게 처리하려는 거 같아요. 내 땅이라 해도 지목이 도로가 되면 나중에 보상가가 제대로 나오겠어요?”

    “그 문제는 당초 설계사무소에서 충분히 설명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적공사에서는 분할측량을 하러 나왔을 뿐입니다.”

    항상 음지에서 토지 이해관계인과 부딪치는 것이 지적측량사의 일과다. 지적법의 목적은 ‘효율적인 토지 관리와 소유권의 보호에 기여함’으로 명시돼 있다. 등록하지 않은 필지는 국가나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성산마을 주민들이 그토록 토지 분할 등록을 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무실에 돌아와 당일 측량한 각종 토지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있는데 군청 사회복지과장이 전화를 했다.

    “오후 5시에 군청 소회의실에 와서 성산마을 현황을 설명해줄 수 있나요?”

    “토지 소유자 참석 없이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 아니겠습니까?”

    “향교의 전교도 참석할 겁니다. 나와 관련부서 과장들도 참석할 거예요.”

    “그럼 4시55분까지 가겠습니다.”

    나는 그동안 막내가 작업한 면적을 메모지에 기록했다. 도면을 복사해 한 장으로 넓게 접합한 뒤 복사한 도면의 점유 현황선을 붉은 펜으로 다시 그었다. 그리고 성산마을 주민의 이름을 필지에 적어 넣었다. 일련번호로 가(假)지번을 달아 그것도 도면에 적었다.

    땀냄새 나는 현장 근무복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군청 소회의실로 갔다. 참석자들도 나름대로 임야도를 확대해, 지적도 사본에 오버랩 시켜놓고 있었다. 나는 가지고 간 도면을 원탁 테이블 위에 놓고 성산마을 현황을 설명했다. 전교는 눈을 지그시 감고 눈두덩을 손끝으로 마사지하며 조용히 말했다.

    “마을 현황은 알아들었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안 오셨지만 읍장에게도 성산마을 부지 처분을 부탁받았네. 토지사용료도 받지 못할 바에는 매매가격만 적당하면 향교도 땅을 팔 생각은 있어. 나도 내년이면 고희네. 김 차장은 객관적으로 성산마을을 어떻게 생각하나?”

    “오늘도 땅문서는 만들어지고 있으며, 토지에 대한 규제의 법률 또한 입법을 통해 늘어나는 현상입니다. 성산주민들이 설사 토지를 취득하려 해도 법에 의해서 권리이전을 단독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나옵니다. 전문용어로 건폐율 초과, 도시계획 용도지구에 대한 대지면적의 최소한도 분할 금지, 도로와 연접해야 분할이 가능한 필지 등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필지를 최소화하려고 향교재단에 등록전환과 합병을 부탁드린 거고요. 경계는 땅에 대한 사람의 지배권이 미치는 장소적 한계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점유하고 있는 성산마을 주민에게 소유권이 하루빨리 넘어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땅은 우리 인간이 우주로부터 잠시 빌려 쓰다가 죽을 때 반납하고 가는 것입니다. 정복자의 쟁취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소수가 다수의 땅 사용을 제한해서도 안 됩니다. 소수가 절대권을 행사하는 땅에서도 꽃은 피지만, 그 향기가 공간으로 퍼지지 못하고, 결국 꽃도 시들고 어둡게 지고 맙니다. 땅은 다수가 공유하고 아름답게 가꿀 때 대지에 싹을 틔웁니다. 그리고 새들은 잃었던 지상의 낙원을 보금자리처럼 노래할 것입니다.”

    나는 읍장님이 이야기하던 제2안으로 토지문서가 만들어져야 성산마을 주민들이 땅을 관리하는 데 효율적이라고 설득했다. 이제 최종적으로 줄다리기할 것은 매매가격일 것이다. 변 총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읍장과 전교가 물밑 접촉으로 가격대를 조율한 듯했다. 나는 막내에게 더 이상 1안의 작업은 하지 말라고 했다. 차석을 도와 2안 면적 구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것이다. 그렇게 해서 9월 초에 면적측정이 거의 마무리됐다.

    내 집을 짓고 싶다!

    마을 점유지 현황을 파악한 읍장은 막후에서 성산마을과 향교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했다. 매매가는 또 다른 향교부지의 점유자들을 의식해서 비밀에 부쳤다. 9월10일 이장이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측량도면을 가지고 마을에 와서 주민에게 소유권 이전절차를 설명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김 차장. 주민들이 궁금해하는 사항이 있어 나 홀로 이렇게 다시 찾아왔소. 향교에서 지난 세월의 토지사용료는 받지 않기로 했고, 매매가는 읍장이 제시한 공시지가로 하기로 했답니다. 이번엔 정말 주민들이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을지 기대가 대단히 큽니다. 하늘은 땅을 위해 비를 내려줍니다. 땅은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을 위해 꽃을 피웁니다.”

    “이장님, 봄에 성산마을을 측량하면서 봤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핀 복숭아꽃을 말입니다. 이젠 8부 능선을 넘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지금 향교에 같이 가봅시다. 소유자가 먼저 합병과 등록전환을 신청해야 할 서류가 있거든요. 소유자가 향교재단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 그쪽에서도 모든 걸 상부에서 위임받아 신청해야 할 겁니다.”

    나는 군청 민원실에 들러 토지이동 신청서를 갖고 향교로 갔다. 변 총무는 이장과 나에게 공시지가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금 모 고등학교 운동장 한가운데도 향교 땅이 여러 필지 있어요. 성산마을 부지를 공시지가로 매도하는 줄 알면 학교에서도 당장 그 가격으로 팔라고 할 겁니다. 이장님도 주민들에게 이 문제만은 꼭 비밀로 해서 상호신뢰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해주세요!”

    나는 변 총무에게 임야를 토지로 바꿀 목록과 지목을 변경하거나 합병해야 할 지번 목록을 체크해주었다. 이장에게도 축사는 공지부분을 편입시켜야 1필지로 땅문서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이장은 그 부분을 성산마을에 와서 주민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개인별로 땅값을 알아야 하는데, 김 차장이 토지조서(지목, 면적 등 땅의 목록)를 작성해주면 좋겠어요. 토지분할의 법률적 문제도 점유자들과 개별 면담을 통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어야 주민들의 이해가 빠를 겁니다.”

    나는 향교의 토지대장 정리가 마무리되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나타났다. 9월 중순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한 것이다. 9월12일 남부 내륙지방을 타고 올라온 태풍은 성산마을에도 적잖은 해를 입히고 지나갔다. 주민 몇 사람의 가옥이 완파 또는 반파되었다. 주민들은 불행 중에도 곧 내 땅이 될 터전에 이왕 건물을 지을 것이라면 이번에는 합법적인 건물을 지어보겠다고 의욕에 찼다. 그러나 주민들의 요구는 설계사무소와 허가부서에서 모두 거절당했다. 현장을 답사한 설계사무소 기사가 위치 파악도 안 되거니와 기본적인 땅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건축설계가 불가능하다고 통보한 것이다. 건축부서에서도 ‘마을이 점유자별로 필지분할이 되지 않았다. 소유자가 성산마을 주민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설계와 허가를 해 주지 않았다. 이장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김 차장이 여러모로 수고하고 있는 건 아는데, 한 번 더 애를 써주셨으면 해서…. 조금 있으면 추위가 닥칠 터인데, 지체장애인들이 축사에서 생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건축설계 실무자들이 이제는 성산마을 사람들하고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우리를 상대조차 해주지 않는다고.”

    나는 결국 직접 설계사무소에 가서 그동안의 과정을 이야기했다. 지금 소유자인 향교재단이 토지이동정리 중인데 정리가 완료되면 바로 토지분할이 되니 우선 현황측량도면을 참고 삼아 설계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토지소유권이 향교에서 성산마을 주민들로 이전되는 것은 확실하다고도 했다. 그리고 읍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과 지역 선·후배 및 지인에게 성산마을 측량도를 펼쳐놓고 딱한 처지를 이야기했다.

    면전에서는 공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측량도면을 펼치기도 전에 선약을 이유로 자리를 피하거나, 머리로만 고개를 끄덕이고 속으로는 냉소를 짓는 사람도 있었다. 마을 현황도에 손때가 묻고 입이 바싹 말랐을 때야 비로소 파손된 주택 설계가 나왔다. 땅문서 기초 작업을 하다보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성산마을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 건축허가가 일사천리로 나와 주거지가 파손된 성산마을 주민들은 축사에서 긴 겨울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10월 하순 향교의 변 총무가 전화를 했다. 상부에 올린 토지이동 신청 서류가 내려와서 문서를 군청에 제출했다는 내용이었다.

    “김 차장만 알고 있어요. 상부에서도 성산마을 주민에게 토지매각하는 걸 승인했습니다. 토지매매가격은 전교에게 일임했고요. 그러니 이제는 주민 각자의 점유 형태로 토지분할 작업을 해도 됩니다.”

    ‘기쁜 자리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토지문서에는 반드시 토지소재, 번지라는 지번, 면적, 경계, 지목이 들어간다. 이것이 공적인 장부에 확정 등록된 것이 지적공부다. 소유권은 지주가 등기를 함으로써 이루어지지만 지적공부 없이는 등기를 할 수 없다. 나는 성산마을 측량도를 갖고 다시 마을을 방문해 필지를 하나하나 점유자별로 대조 확인했다. 토지조서와 측량도를 확대해 주민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성산주민들은 지번과 면적을 가장 궁금해했다. 몇 번이고 마을회관에 붙여놓은 도면을 보며 묻고 또 물었다.

    “측량기사 양반, 이젠 이장이 내라는 돈만 내면 이 땅이 정말 내 것이 되는 것인가. 여태 성모 마리아에게 매일 올린 기도가 헛되진 않았구먼. 달걀 판 돈이 조금 통장에 남아 있긴 있어.”

    성산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회갑을 넘긴 나이였다. 면전에서 또 다른 부탁이 추가됐다.

    “기사 양반! 우리는 눈이 안 좋아 내 땅 위치가 점으로 밖에 안 보이네. 내 것만 집처럼 크게 확대해서 설명 좀 해주게!”

    그래도 좋았다. 성산마을을 수십 번 방문했지만 주민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 웃음은 소유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안전지대에서 간섭받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자유를 기뻐하는 미소이리라.

    사실 성산마을부지 취득가격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공존을 위해 토지이해관계인이 화해했다고만 밝힐 뿐 정확한 액수는 함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불우한 주민의 처지를 고려해 향교에서 많이 배려했다는 이야기만 들린다.

    12월 마침내 봄에 현황측량과 함께 시작된 모든 법적인 작업이 마무리되고, 토지분할을 통해 주민 각자의 정착지 모양이 지적도에 그려졌다. 도적이 완성된 것이다. 봄부터 시작된 측량의 전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이듬해 4월 중순 나는 다음과 같은 한 통의 엽서를 받았다.

    ♡ 초대장 ♡

    『4월20일 정오에 귀하를 위천 수승대로 초대함.

    우리 성산마을 주민들은 땅문서에 이름표를 달고

    귀하와 뜻 깊은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자 함.』

    【2004. 4. 11. 성산마을 주민 일동】

    4월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그날 나는 오전에 측량 2건을 부랴부랴 마치고 거창군 위천면 수승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두 팀원에게 초대장을 보여주며 같이 가자고 했으나 두 조원은 점심을 근처 식당서 먹을 테니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수승대 입구에 가니 ‘경축 자립성산마을기념 신앙대회’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전국에서 온 300명가량의 한센인이 목사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고, 하느님은 그들이 선택한 길을 존중해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관계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줍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이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주만큼 크고 원대합니다. 흔들림 없는 신앙심으로 간절히 갈망하면, 대지에 은총이 내립니다. 성산마을이 오늘 땅을 갖고 자립마을로 태어난 것은 그분의 사랑 덕분입니다. 그분의 능력입니다. 아멘!”

    에필로그

    우리 사회는 이제 한센촌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다 같이 흙의 자식이라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파트너다. 독불장군이 없는 시대다. ‘나의 토지인 동시에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토지가 부의 축적 수단이나 내 소유물이라는 인식은, 지주들의 오만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혐오시설이 있어서 지역사회가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복지 차원에서 열악한 환경을 개선해주면서 성한 자들이 거동이 불편한 자들을 보듬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배려와 나눔의 향기로운 문화가 정토를 만든다고 한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다.

    상대방은 악수한 손을 놓으며 검은 안경과 마스크를 벗었다. 성산마을 이장 양영모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옅은 눈썹, 눈이 다소 들어간 창백한 얼굴, 말라붙은 눈물샘 등 말로만 듣던 음성(陰性) 한센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넝마주이나 상이군경들과 어울려 다니는 그들의 모습을 더러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정면에서 바라보는 건 처음이다. 그래서 나의 뇌리에 한센인은 환자보다는 걸인의 형상으로 남아 있었다. 두 팀원은 벽에 걸린 게시물을 보는 척하며 이들과의 인사를 외면했다. 이장은 불편한 손으로 의자 하나를 끌어오더니 내게 앉으라고 권했다. 장갑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 경청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마을 원로 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분을 모실 곳이 없어요. 묻을 곳을 찾기 어렵고 화장장에서조차 받기를 꺼립니다. 당신처럼 평범한 사람은 우리 같이 천형을 가진 사람이 마음에 안 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돌아가신 그분은 구릉지 가시덤불과 황무지를 개간해 성산마을을 만드는 데 앞장섰어요. 그런데 돌아가시자 어디 한 곳 몸을 둘 곳조차 없다니….”

    이장의 서러운 눈빛은 누구든 이런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듯 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이 대화를 마무리 짓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말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날씨가 개면 기점부터 잡겠습니다. 기준점이 정해져도 측량하는 데는 3일 정도 시일이 더 걸릴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군청 측량의뢰자에게 연락하지 않고 왔어요.”

    나를 제외한 두 팀원은 여전히 벽만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의향인지 의자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또 한 사람은 목발을 짚고 회관 문을 나섰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나머지 한 사람을 이장은 우리에게 소개했다. 성산마을 개발위원이라고 했다. 개발위원은 책상서랍을 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양 이장이나 나나 40년 넘게 이 땅에 살아왔소. 하지만 이 땅은 단 한 번도 우리 것이었던 적이 없죠. 인내의 세월이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뭘 바라는지 알고 있지요? 우리도 웬만큼 책을 읽어 무지한 사람은 아닙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세요.”

    개발위원은 불편한 손으로 서류뭉치를 풀어 필요한 도면을 찾고 있었다. 뭔가 나에게 하소연하려는 눈치였다. 이장은 탁자 위 전기포트에 물이 끓자 1회용 커피를 타 마시라고 권하며 그제야 탁자 위에 놓인 명함을 살폈다.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던 두 팀원이 그때 창밖을 보며 “차장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데 워밍업을 해야겠지요?”라고 말했다. 나를 개발위원의 긴 이야기에서 건져내주기 위한, 말하자면 팀워크였다. 나는 이장과 개발위원에게 일단 측량기점을 잡은 뒤 오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희는 시야가 좋으면 측량을 해야 합니다. 오후에 다시 만납시다.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은 그때 다 들어드릴 테니 좀 기다려주십시오.”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까닭은

    우리 팀은 마을회관을 나와 연무가 옅어진 성산마을을 둘러보았다. 거열산 자락에 위치한 성산마을 뒤로는 국도3호선 확장 공사가 한창이라 비산 먼지가 피부에 와 닿았다. 곳곳에서 축사의 폐수가 땅에 고스란히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출발점인 마을회관으로 돌아와 이번엔 2층 옥상으로 올라갔다. 성산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회관 뒤 언덕 아래쪽으로는 하얀 성모 마리아상이 보였다.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 앞에서 누더기를 걸친 두 여인이 얼굴을 반쪽만 보이며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작은 돌 위로 심지를 드러낸 초가 녹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가파른 숨을 내쉬며 두 사람이 성모상 쪽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 회관에서 우리에게 자리를 내 준 이들이었다. 먼저 올라온 사람은 호주머니에서 흰 알약을 꺼내 녹은 초의 심지에 알약을 하나씩 놓더니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다시 흰 알약을 모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성산마을 일을 도우면서 일부 색안경을 낀 사람들에게 야비하다는 말도 들었다.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불우계층에 도움을 줬을 뿐이다. 인간은 땅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 삶의 공간으로 잠시 활용할 뿐이다. 애향가(愛鄕家)는 누구며 매향노(賣鄕奴)란 말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를 비판하는 건 지역이기주의의 편협한 발로일 뿐이다.

    성산마을 주민들도 사춘기 사랑을 꿈꾸었을 것이고, 야트막한 성산촌의 땅을 일구는 데 청춘을 바쳤다. 푸르렀던 생애의 사랑이 생명처럼 혼으로 땅에 스며들었다. 성산마을 주민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지역민으로서의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나는 누구보다 땅을 많이 밟았고, 토지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애환을 눈앞에서 직접 봤다. 성산마을 주민들이 자기 몫으로 분할된 지적도 등본과 등기부 등본을 손에 들고 덩실덩실 춤추는 모습을 보았다. 주민들이 토지를 가짐으로써 ‘자연의 순수한 존재와 결별하고 역사의 단계에 들어갔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지금은 세상으로부터 티눈처럼 소외된 상처가 아무는 시간이다. 토지를 가지지 못했던 한이 눈물과 웃음으로 교차하는 순간이다. 하늘아래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마치 초등학교 입학생이 처음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기뻐하듯이 그들은 땅문서에 이름을 남김으로써 그렇게 좋아했다.

    지적측량을 통해 오랜 세월 국민의 소유권을 땅문서로 만드는 일을 하면서 나는 필지의 경계에 서 있었다. 성산마을 터전을 마련하는 데 일조한 것이 현장 체험 가운데 가장 보람 있는 일이면서 동시에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당시 주민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그 사이 땅문서가 없는 하늘나라로 가신 성산마을 주민들의 명복을 빌면서 삼가 이 글을 ‘성산 주민’에게 바친다.

    당선소감

    땅문서에 이름표를  달아줘
    김상인

    ● 1958년 경남 거창 출생

    ● 1978년 대한지적공사 입사

    ● 2001년 제1회 지적문예 수필부문 최우수상 수상

    ● 거창문학회, 한국지적학회 회원

    ● 現 대한지적공사 거창군지사장

    ● 시집 ‘경계인의 추는 흔들리지 않는다’

    카프카의 소설 ‘성(城)’의 주인공 K(토지측량사)처럼 끊임없이 성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지적측량업에 종사했다. 측판과 측량기계를 메고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른다.

    “누구세요?” “예 측량기사입니다. 선생님 옥상에 기점이 있어 올라가겠습니다.” “옆집 측량하는데 왜 우리 집 대문을 열어줘야 합니까?” “저희들은 도지사가 발행한 ‘토지건물출입증’이 있습니다.” “관청이 발행한 출입증이 있어도 담장 안은 사유재산입니다. 다른 데 가서 알아보소. 뚝.”

    막연한 거부감에서 오는 경계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한센인 마을인 성산마을을 측량하면서 주민에게 혐오감은 갖지 말자고 다짐했다. 40년 동안 토지 소유권을 확보하지 못한 주민들의 한을 내가 풀어줄 수는 없을까? 측량하면서 주민들의 불우한 삶에 동정심이 일었다.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을 기초 삼아 ‘땅문서에 이름표를 달아줘’를 썼다. 지적측량 없이는 공적인 ‘땅문서’를 만들지 못한다. 측량전문기술 용어가 있어 난해한 글임에도 우수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과 ‘신동아’에 감사드린다.


    조금 뒤 목발을 짚고 따라온 사람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성모상 앞에 섰다.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짚고 선 알루미늄 목발이 눈물겨웠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양초에 불을 붙이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저들의 기도는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원로를 위한 애도일까, 아니면 외형을 치유해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직립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일까. 살점의 검은 반점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일까. 알약을 먹고 나면 초처럼 하얗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까. 신의 응답을 받아 그저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촛불처럼 자신을 태워 뜨거운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염원일까. 그들을 보는 사이 복숭아나무 하얀 꽃잎이 성모상 주위로 하염없이 떨어졌다.

    거창시가지는 성산마을 쪽으로 뻗어나오려 한다. 국도3호선이 조만간 개통되면 거열산 자락의 땅값은 자꾸 올라갈 게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막내가 옥상에 기점을 표시했다고 산으로 가자고 한다. 나는 차석에게 될 수 있는 한 기점을 높은 곳에 잡을 것을 지시했다. 봄 날씨는 여우날씨라더니 아침에 우리가 오리무중을 헤맸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쾌청한 하늘이 우리를 안도하게 했다.

    차석에게 30분 후 무전기를 켜도록 지시하고 측량의 시발점인 삼각점(정밀한 측량을 위해 국가에서 설치한 측량원점)이 있는 산으로 향했다. 측량기계를 짊어지고 가던 막내가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바람의 강도는 마을이나 비슷한데 상쾌한 미풍이 코끝에 와 닿으니 살 것 같아요. 마을 안은 그렇게 냄새가 진동을 하더니…. 차장님이 기점을 잡고 나면 내일 바로 세부측량(일필지모형을 완성하는 측량)을 할 건가요?”

    “그래야겠지. 아침에 소장님 말씀 못 들었어? 어차피 우리 팀에서 할 업무인데 미룬다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측량신청자도 내일 9시 반에 현장서 만나기로 했다.”

    “오늘 아침 토지 내력을 조회해보니, 실제 땅 주인은 군청도, 마을도 아니고 향교재단으로 등록되어 있던데 실소유자가 입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측량할 번지수가 많은데 소유자가 다 향교재단이라고? 소유자 열람을 정확히 한 거야? 일단 우리는 측량의뢰부서인 군청에 연락할 수밖에 없어. 군청 담당자가 이해관계인에게 연락한다고 했으니 내일이면 다 만날 수 있겠지.”

    “소유자를 다 열람해본 건 아니에요. 몇 필지 조회해 보니 향교로 돼 있더라고요.”

    응달에도 찾아오는 봄

    삼각점을 찾기 위해 거열산을 오르며 표지가 온전히 잘 남아 있기를 기원했다. 과거에는 삼각점을 동판이나 구리판으로 만들었는데, 돈이 되다보니 뜯어가 고물상에 파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특히 6·25전쟁 무렵 삼각점이 많이 사라졌다. 그 후 삼각점을 복구하거나 새로 설치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파손 사고가 많다. 산꼭대기에 돌이나 쇠붙이를 묻어놓으면 산의 정기가 끊긴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도적으로 파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삼각점이 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산길을 걷다가 문득 나의 이 바람은 성산마을 주민들의 그것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작업의 편의를 위한 마음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계속 살 수 있기를, 그 땅이 자신들의 삶터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산에 오르니 거창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산마을 주변에 띄엄띄엄 자리 잡은 과수원에서 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흰 꽃잎은 바람에 눈처럼 날렸다. 다행히 측량원점은 온전히 보존돼 있었다.

    삼각점 주위에 측량기계를 설치했다. 경위의(고도, 방위각, 거리를 재는 측량기계)로 대지를 바라보니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벌써 땅의 기운이 공중으로 솟아올라 사물을 굴절시키고 있었다. 소외된 성산마을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는구나, 생각하며 경위의를 산 쪽으로 돌리니 큰 소나무가 시야를 가려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성산마을 주민들 중엔 시각장애인도 더러 있다. 한센병력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검은 안경을 쓴 사람도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기에 눈을 가린 이들도 있을 테다. 다행히 나는 측량 기계의 방향을 약간 트는 것만으로 다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벌써 산야에는 나물과 쑥을 캐는 사람, 씨를 뿌리는 사람이 가득했다. 사방 천지에 봄기운이 가득한 이 무렵에도 음지의 나무는 서럽게 큰다. 땅 위의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조금 전 마주한 놀랍도록 야윈 한센촌의 얼굴들. 다 같은 사람인데 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이렇게 천차만별인 걸까? 가련한 사람들이 척박한 구릉지에서 사회적 냉대를 받으며 사는구나, 생각하는데 차석의 목소리가 무전기 전파를 타고 흘렀다.

    “차장님 여기 옥상에 올라오니 보기보다 측량기점 내려놓기가 쉽지 않네요.”

    “그렇겠지. 전부 불법 건축물이라 온전한 옥상을 찾기 어려울 거야. 그래도 앞으로 후속 측량을 하려면 위치 선점(측량기점을 만들기 위해 표지를 부착하거나 각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니까 천천히 기점을 놓도록. 내가 알기로 성산마을은 지금껏 측량을 한 적이 거의 없어. 지금 기점 표시가 영구히 성산마을의 측량기준이 될 수 있다고.”

    경위의를 보면서 차석과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차석은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고, 막내는 후시(관측점에 측량대를 세우는 일)를 했다. 이날 우리는 성산마을 주위 10여 곳에 기점을 놓았다. 성산마을 집짓기의 골조를 마련한 셈이다.

    기준점 측량을 마친 뒤 두 팀원을 사무실로 보내고 나는 다시 마을회관을 찾았다. 이장과 개발위원은 탁자 위에 서류를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땅 소유자가 성산마을 주민이 아니라는 사실에 나도 그 사연이 궁금했다. 서류뭉치가 있으니 사연도 알 수 있겠지. 모자를 벗으며 실내에 들어서자 이장님이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측량장비를 짊어지고 산에 갔다 왔으니 시장하지요? 대접할 것도 변변히 없어 계란을 좀 삶았소. 들어보세요. 젊은 두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두 사람은 사무실에 들어갔습니다. 마을에 놓은 기점을 좌표로 계산해야 도면상 위치가 결정되거든요. 그 점을 기준으로 현황측량(지상의 물리적 현상을 지적공부와 대비하는 측량)을 하는 겁니다.”

    이장은 뜯지 않은 맛소금 봉지 위에 새 칼을 얹어놓았다. 생수 3병도 계란 옆에 뒀다. 내가 계란 두 개를 먹자 이장이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기사 양반! 어차피 여기 측량자로 왔으니 성산마을 내력을 들어주시오. 내일 지주가 여기 올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먼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소.”

    이장은 심호흡을 하면서 과거의 회상에 젖었다. 이야기가 길어져도 중도에 말을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달라고 애원하듯 당부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속으로만 삼켰던 울분과 한을 토해냈다.

    누구의 땅인가

    “우리가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초부터예요. 성한 사람들 돌팔매에 쫓겨 온 사람도 있고, 하늘 아래 갈 곳이 없어 비나 눈을 피하려고 이곳에 움막을 지은 사람도 있죠. 그때는 그야말로 척박한 땅이었소. 온통 임야와 황무지였으니까 세상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자리였던 거죠. 자연스레 움막촌이 형성되면서 더욱 외부와 단절되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는 임야를 밭으로 개간하고, 축사와 살 집도 지었어요. 1970년대 중반이 되자 비로소 이곳이 마을 형태를 갖췄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어요. 사람과 산이 호흡을 맞춰 함께 살아가면 되겠구나! 우리가 앓고 있는 병도 숲이 고쳐주지 않을까 기대도 했습니다. 자리를 잡고 보니 지리산, 가야산, 덕유산의 중간지점이라 명당 아닌가 싶었어요. 그래서 최소한 원형을 살리며 개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가 개간한 토지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틀림없이 여기가 무주공산은 아닐 텐데…. 땅 임자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등기부를 떼보니 땅 주인은 육영사업을 하는 덕봉학원이었어요. 마을 대표들이 물어물어 그 학교 이사장을 찾아갔죠. 그때 학원이사장은 5·16민족상을 받으면 우리에게 땅을 불하해준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막상 상을 받고 나자 다른 사업 확장을 핑계로 우리를 다시 만나주지 않는 겁니다. 아예 만날 수가 없었어요. 뭔가 잘못되어가는구나 싶었지요. 그나마 기대할 수 있었던 건 때때로 성산마을을 찾아오는 국회의원, 군수 같은 정치인이었어요. 그들은 우리에게 땅 불하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지요. 순진한 우리는 세월이 가면 해결 되겠구나,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던 사이, 덕봉학원과 향교재단이 토지소유권을 두고 소송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점유자는 우리인데, 우리를 쏙 빼놓고 말이지요.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동안 이어진 소송에 대해 우리는 까맣게 몰랐죠. 1심, 2심이 끝나고 대법원에서 ‘땅은 향교 재산이다’라고 판결을 내렸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어요. 성산마을 주위 필지가 덕봉학원에서 향교재단으로 등기 이전될 때 정말 눈앞이 캄캄했지요. 우리는 지금도 성산마을의 어디부터가 향교 재산이고 또 어디부터가 학교 재산인지 전혀 몰라요. 그 사이 거창시가지는 개발돼 우리 마을 쪽으로 많이 접근을 했죠. 심지어 국도3호선 확장공사를 성산마을 뒤편에서 한창 하고 있잖아요? 향교재단과 토지 권리문제를 논의했지만 ‘임의로 땅을 처분할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어요. 7년 전 다시 주민들이 군청에 찾아가서 호소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 땅을 주민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선처해달라고요. 추방당한 인디언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영혼이 뒤따라오는지 돌아보는 심정이었죠. 그때 당국에서는 시기가 좋지 않다고 했어요. 한센촌을 한반도에서 어느 누가 반기겠어요. 대표적인 혐오시설로 여기잖아요. 결국 세월만 흘러갔습니다. 애초에 학원이사장을 믿었던 우리는 지금도 문패를 못 붙이고, 죽지 못해 살고 있어요. 돌아가신 원로의 평생 소원이, 성산마을을 자립마을로 만들고 우리 한센인 이름으로 분할 등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뿐만 아니라 저희 마을 주민 78명 모두가, 땅의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싶다는 꿈 하나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사라진 지금, 무엇 하나 남은 게 있습니까? 올해 초에 군수가 우리 마을을 방문했을 때 주민들이 눈물로 애원했어요. 그 결과 ‘군청에서 마을의 현황이라도 파악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측량사 당신이 이렇게 오게 된 거죠.”

    이장은 물을 마시며 장갑 낀 손바닥을 나에게 내 보였다. 긴 이야기를 들었으니 뭔가 반응을 보이라는 뜻인 듯 보였다.

    “저는 지적측량사일 뿐입니다. 국토를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현장과 지적도 경계가 일치하면 더없이 좋지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말로는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자고 하지만 우리는 40년 동안 빈껍데기로 살고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축사도 증축과 개축을 해야 하지만 땅 주인이 아니라 허가를 낼 수 없어요. 그러니 폐수가 모조리 땅으로 흘러드는 상황이지요. 여기는 우리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삶터요, 일터요, 쉼터입니다. 한순간 몸 부리는 간이역이 아니라 사후에도 뼈를 묻을 수 있는 영원한 정착촌으로 만들고 싶어요. 이번이 정말 내 생애에 마지막 기회지요.”

    “성산마을 주민들의 요구사항은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 측량해가면서 함께 의논합시다. 측량의 궁극적인 목적도 인간과 토지가 조화를 이루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마을회관 문을 나설 때 이장은 삶은 계란 9개와 생수 3병을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주었다. 나는 내일 다시 오겠다며 인사하고 성산마을을 나섰다.

    “다 알아서 해주세요”

    10여 분을 걸으니 거창향교 건물이 보였다. 주위엔 사립 중등학교가 4곳 있었다. 위치를 보니 이장이 ‘향교 재산과 학교 재산을 구별하기 어렵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창시가지에서 몇 ㎞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아침에는 왜 그리 멀게 느껴졌을까? 연무와 황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결한 환경 탓인가?

    내가 그들을 멀게 느끼면 인간관계는 한없이 멀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성산마을 주민도 자신이 살고 있는 땅 위에서 행복을 누릴 권리는 얼마든지 있는 것 아닌가. 무단점유든, 자주점유든, 그들은 오랜 세월 분명 성산마을에서 살아왔다.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찾다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겠지.

    이튿날 아침 일찍 출근해 측량준비도에 그려진 도면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동안 한 번도 마을 현황을 파악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과거의 측량자료는 전혀 없었다. 차석이 피로한 기색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차장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응, 은근히 걱정이 돼서. 성산마을 토지이해관계인들이 오늘 현장에 입회할 거야. 그들과 약속을 어기면 안 되지. 어제 늦게까지 고생했지? 측량기준점 계산은 법에서 정한 공차(측량 값에 대한 허용오차) 이내로 잘 들어오던가?”

    “삼각점 성과는 양호합니다. 그런데 차장님, 오늘은 마스크를 꼭 쓰세요. 어제 회관에서도 막내와 내가 마스크 쓰고 대화하시라고 계속 신호를 보냈는데 외면하시데요.”

    “오늘은 황사도 없잖아. 날씨가 쾌청한데 이런 날 마스크로 그들에게 거부감을 줄 필요는 없지 않겠어? 어제 두 팀원 모두 어찌나 방어적인지, 내가 다 민망하더구먼.”

    “그래도 그곳에서는 마스크를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을 텐데요. 그들의 체취가 덜 느껴질 것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 이장님은 차장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려는 모습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껄끄러운 관계가 좋을 때도 있어요. 오늘은 차장님이 미리 계란 삶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 간식은 다 챙겨왔다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되지 계란 삶는 것까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나. 그건 그들의 간식일 수도 있는데.”

    차석은 오늘도 성산마을을 측량하러 가는 게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도 측량 현장에서 마스크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마스크를 쓰고 대화하다보면 그들도 내게 경계심을 갖게 될 것 아닌가. 40년간 사람들한테 속았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쌀쌀맞고 정 떨어지는 모습을 또 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막내가 출근하자마자 측량도구 일체를 챙기고 일사불란하게 사무실을 출발했다.

    어제 아침과는 사뭇 다른 날씨였다.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측량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마을 안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만은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마을에는 담장, 울타리, 추녀 끝 등 경계가 명확한 곳이 있는 반면 현장 경계가 없는 곳도 많아 오물이 그대로 인접 대지까지 흘러들어갔다. 나는 측량의뢰 부서인 군청 사회복지과에 전화를 했다.

    “지적공사 측량기사입니다. 성산마을 현장에 나오셔서 형태가 애매한 곳은 측량할 지점을 정해주셔야겠는데요. 측량자가 임의로 경계를 정하기는 어렵거든요.”

    “곧 있으면 향교의 재산담당자가 현장 입회할 겁니다. 마을 주민과 상의해서 측량해주세요.”

    전화는 뚝 끊겼다. 측량비를 군청 예산으로 집행할 뿐,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해 달라는 반응이었다. 사실 측량신청인들은 늘 이런 식이다. 전문가가 알아서 해달라는 것이다. 입회를 약속해놓고도 막상 전화하면 ‘지금은 무지하게 바쁘다’며 현장에 나오지 않는다. 대지 경계측량을 신청하면서 ‘말목을 박아놓고 가면 된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놓고는 며칠 있다가 말목이 없어졌으니 다시 표시해달라고 한다. 풀이 무성한 땅의 경우, 말목을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말목이 보이지 않는다며 전화에 대고 고막이 흔들릴 정도로 고함부터 치는 사람도 있다. 현장에 가보면 물론 경계 표시가 온전히 있다.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으면 머리를 긁적이며 몰라서 그랬다고 한다. ‘알면 내가 직접 측량하지 왜 당신한테 돈 주고 맡겼겠느냐’는 식이다.

    조금 있으니 향교의 재산담당자가 마스크를 쓴 채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그는 마스크를 벗지도 않고 두 눈만 깜빡거렸다. 나는 명함을 꺼내 그에게 한 장 주었다.

    “지적공사 거창출장소에 근무하는 김상인 차장입니다.”

    그는 명함을 보지도 않고 호주머니에 넣으며 “네, 거창향교의 변 총무입니다”하고 인사를 건넸다.

    “현장 측정하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어요. 이럴 때는 원래 소유자가 지점을 정해 주어야 합니다. 지주가 토지의 윤곽을 잡아줘야 저희들이 땅 모양을 잴 수 있거든요.”

    변 총무는 나의 눈을 보며 말했다.

    “김 차장 보아하니 경륜이 오래된 것 같은데 베테랑답게 알아서 측량해주세요. 내가 여기 장시간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저기 마을회관 안에 있는 양 이장이나 주민과 상의하면 됩니다. 점유자들 요구사항대로 일단 재주십시오. 나는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오른손으로 내 어깨를 다독이더니 이내 오토바이 연기만 남기고 황급히 마을을 빠져나갔다. 오토바이 연기와 계분(닭의 배설물)의 악취가 한 공간에서 뒤섞였다. 물론 그가 측량을 신청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토지소유자를 대표해 왔으면 점유부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현장에서 조언하는 게 당연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마이크 방송 설비가 있는 마을회관으로 갔다. 이장에게 ‘경계가 애매한 부분이 많다. 주민끼리 협의해 서로의 경계를 표시해야 한다’는 취지의 방송을 부탁했다.

    “성산마을 주민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에…, 또…, 오늘 측량기사가 우리 마을에 측량하러 나왔습니다. 에…, 주민들께서는 각자 인접지 점유자와 상의해 자신이 점유한 부분을 말목이나 페인트, 래커로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잘하면 그곳이 후일 성산주민의 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 땅이 생길 수 있다!

    이장과 마을회관에 있는 사람들은 음성에 가까운 한센인이다. 거동이 불편한 양성(陽性) 한센인들은 집 밖 출입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잘하면 우리 땅이 될 수 있다’는 방송에 마을의 방문이 일제히 열렸다. 그들조차 경계를 재달라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남루한 겨울 누더기를 입은 그들은 측량을 위해 그해 들어 처음으로 오랫동안 방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 덕분에 비로소 방 안에서 겨울이 밀려나고 봄 기운이 새롭게 그 자리를 채운다. 누가 저들을 칩거해야 하는 움츠린 존재로 만든 걸까. ‘땅을 소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마디에 희망의 방문을 열고나서는 저들을 말이다.

    “토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는 듯 보였다. 나는 이장이 래커로 표시해주는 선을 따라 다시 말목을 박았다. 그가 서툴게 래커를 뿌리는 바람에 내 흰 모자는 군데군데 빨간색이 되었다. 그는 미안한 듯 내 모자를 바라보며 “측량 마치고 나면 기념으로 모자는 새것으로 사주겠소”라고 했다.

    “흰 모자가 지겨웠는데 빨간색으로 염색해주셨으니 오히려 고맙죠.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장은 한동안 집터 구역을 표시하다가 숨이 찬 듯 개발위원에게 업무를 인계했다. 이제부터는 임야에서 개간한 밭 부분의 영역을 표시할 차례였다. 개발위원은 가장 높은 구릉지 밭에 이르자 잠시 쉬자고 했다. 지그시 눈을 감으며 앞서 세상을 뜬 원로와 함께 했던 밭 개간에 대한 설명을 했다.

    “삐딱한 언덕에 제초제를 뿌렸어요. 아카시아나무 뿌리를 캐낼 때는 늑골이 아리게 울렸죠. 팔뚝에 괭이 자국이 났습니다. 처음엔 정말 가난했어요. 초근목피로 연명했죠. 차라리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서 화전을 일구었으면 이보다는 나았을 겁니다. 그 고생해서 이곳에 정착하고 40년을 살아온 우리가 지금 성산마을 아니면 어디 가서 살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땅 소유자는 우리가 이곳을 불법점유했다고 주장합니다. 성산마을 사람들은 귀찮고 하찮은 존재니 세상 밖으로 내동댕이치겠다 이거죠. 우리도 시가지의 높은 건물이 마을 가까이 접근해오는 걸 보며 늘 불안했어요. 이 땅이 성산마을 소유로 되어 있지 않으니 언젠가 쫓겨날지도 모른다 싶었거든요. 우리의 피와 땀, 젊음이 깃들어 있는 이곳을 정착 마을로 주지 않을 거라면, 그들은 우리에게 노역의 대가라도 줘야 할 겁니다.”

    “합법 불법 여부를 떠나 일단 지금 실효적으로 땅을 점유하고 있잖아요. 어제 거열산에 올라가니 철 이른 뻐꾸기가 성산마을을 바라보며 울데요. 마을 주민이 이 땅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성모상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주민들의 모습과 숲 속 새들의 합창이 제겐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마 올해는 분명히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누구든 성산마을 주민을 쉽게 쫓아내지는 못해요. 마을 현황이 도면에 어떻게 표시되는지 일단 측량한 뒤 군청과 협의해봅시다. 이제 현장 경계 표시는 다 되었으니 저는 기점이 있는 옥상으로 가서 땅을 재겠습니다.”

    “사지가 불편한 사람은 어딜 가나 몸이 천근입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성한 사람은 모를 겁니다.”

    개발위원은 일어서려고, 손바닥으로 무릎을 짚고 있었다.

    “천천히 쉬엄쉬엄 내려오세요.”

    나는 앞서 길을 잡았다. 그때까지도 두 팀원은 옥상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될 수 있는 한 한센인과 멀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팀원들은 이 업무를 왜 하필 우리 팀에서 맡았을까 하며 속으로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무실에 다섯 개 팀이 있는데, 어느 팀에서도 성산마을 측량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차장인 내가 자청한 것이다.

    어쨌든 측량기점이 있는 옥상에 올라가 성산마을을 측량하기 시작했다. 전측수(전방에서 측량지점에 측량대를 세우는 사람)인 차석은 양계장 부지를 재다가 닭똥 늪에 빠져 신발을 갈아 신어야 한다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옥상에서 8H연필심을 가늘게 깎고 있을 때 이장 부인이 쟁반에 계란 10개를 삶아 내왔다. 생수 3병과 같이 옥상 입구에 조용히 놓고 내려갔다. 나는 그중 2개를 먹었지만 막내는 먹지 않았다.

    “차장님은 계란이 맛있으세요?”

    “우리 때는 초등학교 소풍 때나 계란을 맛볼 수 있었어. 전측수가 땀을 많이 흘렸으니 물을 갖다줘. 계란은 먹기 싫다면 굳이 강요하지 않으마.”

    차석에게 갖다 온 막내는 그가 벗어준 닭똥 묻은 양말을 옥상 난간에 걸치며, 얼굴을 찡그리더니 생수 한 병을 따서 손을 번갈아가며 물에 씻었다. 그때 차석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흘러 나왔다.

    “차장님, 이제부터 저지대라 폴대(측량대)를 높이 들어야 합니다. 광파조준의(거울 반사경을 지점에 갖다 대 거리와 방향을 측정하는 기계) 초점을 반사경에 신속히 맞추세요. 지금까지 계속 폴대를 드느라 팔이 힘들거든요.”

    “그렇다고 담장 위로 걸으면 안 돼. 보기보다 담장이 약해 허물어질 수 있다고. 여기는 개들도 이방인에게 곧장 공격 자세를 취하니 각별히 조심해야 해.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야 하네.”

    “차장님! 햇빛이 내리쬐어 아지랑이가 올라오니 옥상보다 한층 역겹습니다. 지금은 빨리 끝내고 찬물에 샤워하고 싶을 뿐이에요.”

    “측량 마치고 옥상에 둔 양말이나 잘 챙겨서 갖고 가게. 깨끗이 씻지 않으면 개한테 발까지 물릴지도 몰라. 막내가 대신 챙겨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겠지? 아까 와서 생수로 손까지 씻었다고.”

    이렇게 3일 동안 우리는 가옥, 축사, 마을공동시설물, 마을 안길 등 주민이 개간한 마을 부지의 형태를 측량했다. 점에서 선으로 다각형 필지를 그리고보니 벌집이 따로 없었다. 1200분의 1로 축소된 측량도가 개미굴보다 복잡해 개미도 제 집을 못 찾을 지경이었다. 측량장비를 차에 싣고 사무실로 출발하려는데 이장이 마을회관 문을 열고 나왔다.

    “다시는 상면도 하기 싫다 이기가? 내 서툰 손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죗값을 치러야지. 빨강으로 물들인 모자는 내놓고 가소.”

    “이장님이 회관에 안 계시는 줄 알았죠. 모자는 개의치 마세요.”

    이장은 모자를 측량 기념으로 마을에 보관해야 된다고 차를 막으며,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모자를 내주자 그는 만원짜리 지폐를 꼬깃 꼬깃 접어, 좋은 모자를 사라고 하면서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땅 문서를 만드는 까닭

    성산마을 측량을 했으니, 본격적인 업무는 이제 막 시작되는 참이었다. 복잡한 도면을 보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마을의 현황을 측정한 도면과 지적공부에 등록된 기존의 경계선, 용도지역선, 도시계획선을 오버랩하니 필지가 300여 개로 늘어났다. 기본 지적공도(지적도면)가 1200분의1 축척이니 마을 측량도도 거기에 맞춰야 했다. 그런데 전문가인 내가 봐도 개인별 점유 현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복잡하고 난해한 땅 지도였다. 공시된 도면의 경계선은 사유재산의 기준선이므로 없애거나 변경하지 못한다. 토지경계선은 영속성을 유지해야 하며 동시에 공신력이 내포되어 있다. 그 금줄의 영역이 사유재산권을 지키는 보루인 것이다.

    소설 ‘토지(土地)’의 작가 박경리는 이런 말을 했다.

    “흙, 땅, 대지 등의 단어를 놔두고 ‘토지’라고 명명한 것은, 토지라는 말 속에 ‘땅문서’라는 인간의 사유재산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며, 사유재산의 시작과 함께 인간은 자연의 순수한 존재와 결별하고 역사의 단계에 들어갔다.”

    사유재산의 개념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한 단어를 지칭하라면 나는 ‘필지’라고 생각한다. 나의 뇌리에는 ‘땅문서’하면 가장 먼저 필지가 떠오른다. 필지란 필기도구가 붓밖에 없던 시절, 우리 조상들이 토지기록이 필요할 때 붓에 먹을 먹여 토지모형을 그린 데서 나온 말이다. 필지는 지표의 땅덩어리를 인위적으로 구분하고 분할한 토지거래의 단위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지적도상 필지의 경계가 소유권의 범위를 결정한다. 토지 경계 또한 지적도에 그려진 1필지의 구획선(경계선)이다. 필지를 기초로 문권(文券·땅이나 집 따위의 소유권이나 그 밖의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이 작성된다. 문권을 공증한 게 지적공부, 즉 지적도와 토지대장이다. 필지는 지적측량으로 만들어진다. 측량은 천측양지(天測量地)의 준말로, 지구와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대상을 관측해 위치를 정하는 것이다.

    지적측량은 국민의 사유재산권과 직결된다. 지적측량을 통해 우리는 지상의 경계를 지적도에 저장해 토지 권리를 보호한다. 동시에 등록된 경계를 지상에 복원할 수도 있다. 이미 등록돼 있는 필지는 이후 측량을 구속한다. 지적측량사의 손은 그래서 화가처럼 자유롭지 않다. 지적측량사는 한 손으로 공정한 저울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땅의 권리를 지키는 사람이다. 우리에겐 토지질서 유지권이 있다. 나는 필지를 다루는 사람, 지적측량사다.

    이제 성산마을의 조감도는 완성되었다. 어떻게 집을 짓고 외곽 울타리를 잘 쳐서 주민 각자의 안전을 지켜줄 것인지가 문제다. 성산마을 주민들은 내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들은 나의 손이 자유자재로 움직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현재 그어진 지적경계선을 존중해야 하고, 향교의 소유권도 보호해야 한다. 성산마을 주민들은 등록된 공시선이 나를 구속하는 것을 모른다. 땅문서에 한번 그어진 경계의 금줄은 합병(여러 필지를 한 필지로 합하는 것)을 통하지 않고는 없앨 수 없다. 소유자만이 여러 필지의 등록된 경계선을 합병해 1필지로 통합할 수 있다. 아직 소유자는 합병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먼저 측량 신청 부서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측량 의뢰자인 군청에서는 ‘필지마다 점유면적을 확정지어 달라’고 했다. 나는 금줄이 너무 복잡해 시일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설명했다.

    “저희는 필지대로 측량비를 받으면 되지만, 아주 작은 필지의 점유면적은 땅값보다 측량수수료가 더 비쌀 수 있습니다. 전문가인 제가 봐도 이렇게 선이 어지러운데, 이건 좀 문제가 있어요. 지적경계선을 합병해 단순화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 성산마을 주민들도 쉽게 점유현황을 알아볼 수 있어요.”

    군청 사회복지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말에 동의했다.

    “예산도 별로 없는데 좋은 제안입니다. 그런데 등록된 경계를 없애는 것은 토지 소유자가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향교재단에서 합병 신청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측량 신청자에게 먼저 이야기할 수밖에요. 과장님이 향교 실무자를 만나 협조를 구하십시오.”

    과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차라리 내가 만남을 주선하겠으니 땅 전문가인 김 차장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직업상 저희는 공정한 땅 경계의 파수꾼이 돼야 해요. 직접 나서기는 어렵지요. 얼마 전 지인의 땅을 사심 없이 측량했는데도 상대방이 색안경을 끼고 째려보더군요. 저는 저울을 갖고 다니는 땅 경계인입니다.”

    “하지만 이번 측량 건은 개인 간 다툼이 아니잖아요. 성산마을과 향교의 문제 아닙니까? 토지관련 법, 측량기술, 토지 소유권 문제가 중첩된 사안입니다. 토지측량 분야의 기술자가 바라보는 시각도 있을 것 아닙니까? 나 같은 일반인이 다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나는 공무원이고, 실무적인 토지 문제에는 문외한입니다. 김 차장이 소외계층인 성산마을 사람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향교의 의견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건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하지만 과장님, 엄밀히 말해서 이게 마을과 향교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향교전(鄕校田)과 절차법

    나는 우리나라에 처음 필지가 만들어진 과정을 떠올렸다. 우리나라의 모든 토지문서는 약 90년 전 토지조사가 시작되면서 만들어졌다. 먼저 측량을 통해 필지를 정한 다음 면적 등 토지의 속성을 기록하는 ‘선 등록, 후 등기제도’로 제도가 확립됐다. 이때 필지는 세금 징수를 위한 것으로, 말하자면 국가의 밥그릇이었다. 동시에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땅을 전수 조사해 ‘사정(査定·토지조사 당시 조선총독부가 소유자를 확정한 것)’을 통해 소유권을 창설하고 소유자를 확정했다. 구한말 향교가 학교로 변화하는 과정을 알아야 성산마을 토지의 내력을 알 수 있다. 토지 소유자인 향교와 대화하려면 이제 내가 이 과정을 알아야 할 터였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도 성산마을 주민들의 얼굴이 방안에 둥둥 떠다녔다. 결국 스위치를 다시 올리고 원영희 교수가 쓴 ‘한국 지적사’를 펴 들었다. 향교전(鄕校田)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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