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라는 이름의 벌개미취
들국화라는 이름을 가진 꽃은 없다. 참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없듯이 들국화도 야생의 국화를 통칭하는 말이다. “들판에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라는 표현을 보고 소설가 이청준 씨가 “작가가 그 이름들을 모르는 것이지 세상에 이름 없는 꽃들이 있겠나?”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가을을 장식하는 들국화는 5종이 있다. 벌판을 누비는 벌개미취, 꽃필 무렵 약간 쓰러지는 쑥부쟁이, 꽃필 때면 줄기가 아홉 마디가 되는 구절초가 대표적인 연보라색 계통의 들국화다. 노란색 무리의 들국화는 꽃송이가 1~2㎝로 작으면 산국(山菊), 감 크기 안팎이면 감국(甘菊)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된 국화보다 왜소할 수밖에 없지만 야생이 이런 것이라고 시위하듯 향기는 짙고 깊다.
벌개미취는 연보랏빛 꽃잎과 노란 꽃망울이 크고 풍성한 데다 자생력도 강한 토종이다. 영어 이름도 코리아데이지(Korea Daisy)다. 장마가 끝날 무렵 삼복더위 끝자락인 7월 말경에 꽃을 피우기 시작해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봄이 왔음을 가장 먼저 알리던 상사화가 잎이 다 뭉그러진 자리에서 두 달 만에 화사한 꽃대를 빼어 올리는 것도 이 무렵이다.
내가 벌개미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여 년 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 주변에 살 때다. 늦여름을 꾸미는 청초한 자태에 단숨에 반해버렸다.
1971년 위수령으로 순수한 학생운동이 군부독재 권력의 칼날에 무참히 짓밟히면서 동지들의 진로는 여러 방면으로 엇갈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출판장이로 30년 넘게 살게 됐고, 김창렬 학형은 같은 세월 동안 야생화를 연구하면서 월정사 초입의 자생식물원을 훌륭하게 가꿔놓았다. 5년 전 나남수목원 운영을 시작하고 나서 이 분야의 고수를 발품 팔아가며 찾아다닐 때 김 형을 우연히 만났다. 수목원을 새로 열 것이 아니라 내 식물원을 인수하지 그랬느냐는 형의 푸념에 30년 내공의 외로움을 허허롭게 웃으며 마주했다. 1988년 올림픽 무렵 희귀했던 우리 야생화인 벌개미취의 씨를 지리산 자락에서 찾아 증식한 주인공이 바로 그이였음을, 야생화에 조예가 깊은 김민철 기자의 기사를 보고 최근에야 알았다.
10년 후 광릉수목원 옆 포천 내촌면에 집을 지으면서 과수나무를 심고 남은 500평(약 1650㎡)쯤의 휑한 공간에 이 꽃씨를 뿌렸다. 시작은 그렇게 미미했다. 3~4년이 지나자 뿌리가 절로 왕성하게 번지고 꽃씨를 떨어뜨려 머잖아 뜰의 주인이 됐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초가을은 집 안이 온통 벌개미취 꽃더미에 안기게 된다. 차츰 잔디밭의 경계를 부단히 넘어서는 이 녀석의 생명력에 조금씩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포천 신북에 수목원을 조성하면서 임도를 넓히고 산책길도 새로 만들었다. 벌겋게 속살을 드러낸 절개지의 놀란 흙이 안쓰러워 보였고 산사태도 걱정됐다. 이곳을 벌개미취로 덮기로 했다. 거친 거목들의 틈새에 꽃 궁궐의 화사함을 꿈꾸기도 했지만 뿌리를 깊게 내리고 다른 잡초를 일거에 제압하는 이 녀석의 왕성한 생명력을 10년 넘게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출판사 식구들의 현장학습 겸 내촌집에서 뿌리째 옮겨온 벌개미취를 이식했다. 한두 해가 지나자 군데군데 시뻘겋던 속살이 벌개미취의 꽃들 속에 감추어지면서 화사하고 평화로운 얼굴로 돌아왔다.
나남수목원에 1만 평(약 3만3000㎡) 가까운 공간을 새로 마련했다. 서울 우면산에 산사태가 났던 2011년 백 년 만의 집중호우에 수목원 산자락에도 산사태가 났다. 복구사업때 쏟아 부은 흙으로 헤쳐놓았던 산등성이 자락 하나를 매끈한 구릉으로 정리한 것이다. 13년생 반송 2400 그루를 열을 맞춰 심었다. 지금도 가슴이 뛰놀 만큼 장관인데 3~4년 후 전지한 가지에 솔밥을 새로 받으면 웅혼한 기상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강남의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을 이곳에 묻었다. 이곳은 20여만 평(약 66만㎡) 수목원 부지에서 유일하게 개마고원처럼 완만한 남향 볕이 드는 곳이다. 이곳에도 반송 사이사이에 벌개미취를 정성 들여 심었다. 아주 가까운 미래의 어느 늦여름쯤에는 벌개미취의 꽃구름 융단 위에 반송군락이 그 위용을 자랑할 것이다.
참나무라는 이름의 상수리나무
참나무라는 나무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요의 ‘(다람쥐가)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간다’는 그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총칭해서 참나무라고 한다. 나무 중에서 가장 재질이 좋은 진짜 나무(眞木)란 뜻의 ‘참’나무다.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6종이 그들이다. 참나무는 떨켜가 잘 생기지 않아 가을에 단풍이 들어 다음 해 봄까지 절반 넘게 잎이 나무에 붙어 있다. 대부분의 활엽수가 나신(裸身)인 채로 엄동설한의 장엄한 고독 속에 얼어붙는데 참나무만은 삭막한 추위 속에서도 가을의 추억을 고스란히 곱씹으며 봄의 새싹을 기다린다. 10여 년 동안 오가는 파주출판도시의 가로수 500여 그루가 모두 참나무다. 이를 기획한 이기웅 이사장의 혜안에 고맙다는 인사를 정식으로 하고 싶다. 가을이면 도토리를 더 줍겠다는 탐욕의 소인배들에게 ‘나무를 때리지 말라’는 경고문을 일일이 붙여야 하는 일도 물론 그이의 몫이다.
굴참나무는 표피에 골이 길게 깊이 팼고 두툼한 코르크로 덮여 있어 찾기가 쉽다. 강원도 산골의 굴피 집은 이 굴참나무 껍질로 지붕을 덮은 집이지, 굴피나무라는 나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계곡 주변에 많은 졸참나무는 가장 작은 잎을 가진 참나무다. 단풍이 가장 아름답고 도토리묵 중에서 가장 맛이 있다고 한다.
갈참나무는 가을 참나무로, 큰 잎이 물들면 가을의 전령사 노릇도 한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에서 ‘갈잎’이 갈참나무의 잎이라고 ‘우리 나무의 세계’를 쓴 박상진 박사는 말한다. 고갯마루 주변의 척박한 땅에 자라는 신갈나무는 늦봄에야 신선한 새잎이 난다. 옛날 짚신 바닥에 신갈나무 잎을 깔아 편하게 신었대서 신갈이다. 참나무 중에서 잎이 가장 큰 떡갈나무는 떡을 찔 때 잎을 같이 넣어 그 향기를 즐겼다. 겨울 내내 잎이 가장 많이 남는 나무도 떡갈나무다.
도토리 알이 가장 큰 상수리나무는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 가장 많아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나무다. 우리와 아주 가까이 살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온기로 겨울을 나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상수리나무 밭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쭉쭉 뻗은 거목이 안겨준 녹음(綠陰)은 ‘평화로운’ 전쟁놀이에 안성맞춤이었다. 심심해지면 상수리나무에 구멍을 뚫고 숨어 있는 집게벌레를 잡아 싸움시키며 노는 일도 재미있었다. 이 집게벌레가 나중에 곤충도감을 찾아보니 딱정벌레목의 사슴벌레였지 싶다. 떫은 도토리로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집에 돌아올 때 주머니에 가득 채워 와서 어머니의 손길을 거치면 도토리묵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하기는 16세기말 왜란에 쫓겨 의주까지 피난했던 못난 선조인 선조 왕께서 도토리묵에 맛을 들여 전쟁이 끝나고 가끔 이를 찾아서 수라상에 올렸다고 해서 ‘상수라’라고 하던 것이 ‘상수리’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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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이 지나 그 소년은 이제 초로(初老)가 되었다. 나남수목원의 상수리 군락지 앞에 참나무처럼 서 있다. 지난가을 ‘조림의 역사’를 쓴 배상원 박사가 탄성을 지르며 찾아준 거목의 상수리 숲이다. 수목원이 넓은 만큼 수종도 많다. 몇 년 동안 이곳을 지나치면서 수세(樹勢)가 범상치 않다고 늘 생각했던 군락지다. 곱게 늙는 것은 나무뿐인가. 이 나무처럼 나이 들고 싶은 마음은 과욕인가.
순진무구하고 초롱초롱했던 소년의 눈동자는 이제 세파와 탐욕에 찌들었다. 그걸 나무에게 들킬까봐 겁이 나고 부끄러워 상수리나무 앞에서 나는 지금 눈을 질끈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