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시정부 덕에 대한민국 정통성 가져
- ‘복국(復國) 후 건국(建國)’이 임시정부 목표
- 이승만의 친일파 기용은 重用 아닌 活用
박해윤 기자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과 백범(白凡) 김구(1876~1949)는 우리 근·현대사의 두 기둥.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두고 논박이 일면서 이들 두 거인도 논쟁 대상이 됐다. 이승만과 김구를 해석하는 것은 두 사람이 산 시대를 읽는 것이다. 역사는 집단의 기억이다.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 격하다. 입으로 다투는 이들은 택일(擇一)을 강요한다.
대한민국의 두 國父
‘이승만과 김구’가 쓰인 서울 마포구 집필실은 근·현대사 보고(寶庫)다. 2만3000장을 써내면서 읽은 자료가 가득하다. 그는 눈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텍스트를 읽고, 뇌로 체계를 세우고 씨줄과 날줄을 엮은 뒤, 손으로 역사를 써냈다.
▼ 이승만을 강조해서 현대사를 읽는 이들은 김구를 깎아내리는 반면 백범을 강조하는 이들은 우남을 폄하한다. 이런 견해차는 현실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손 전 의원은 이 질문에 말로 답하지 않고 글로 대신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이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창건한 정치 지도자다. 그런 뜻으로 한 나라에 국부(國父)는 한 사람뿐이며 우리나라 국부는 이승만이라면서 자신이 국부로 불리기를 단호히 거부한 김구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두 국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이승만과 김구’ 1권 서설(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의 첫마디가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두 국부’라는 것이다. 책이 출간된 후 이승만 지지자들이 국부는 한 사람인데, 왜 김구를 거론하느냐고 항의했다. 이승만, 김구 지지자가 알력을 가질 요인이 있기는 하다. 백범의 불행한 서거가 그중 하나다. 두 진영이 사실이 아닌 것을 동원해 한 사람을 비판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두 세력을 화해시키는 게 내 임무다.”
▼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KBS 이사장) 등은 “백범을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자로서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남북합작정부를 도모했다는 게 이유다.
“백범이 어떻게 대한민국 건국과 무관한가. 김구가 없었더라도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시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백범이 있었기에 임시정부가 유지됐다. 임시정부 덕분에 대한민국에 적법성(legitimacy)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돼 있다. 북한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백범은 마지막 주석이다.
臨政 법통 강조한 이승만
“백범이 임시정부를 지켜내지 않았다면 정통성과 관련해 복잡한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세력이 연립 형태로 있다가 1920년대 중반부터 좌익들은 임시정부에서 떨어져 나갔다. 임시정부는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세월을 견뎌냈다. 백범의 지도력 덕분이다. 독립전쟁, 게릴라전이 어려운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의열투쟁(義烈鬪爭)을 벌였다. 이봉창, 윤봉길의 목숨을 건 의거도 백범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역사학계가 대립한다. 보수학자 다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본다. 임시정부는 사상적 기틀을 마련했을 뿐 근대국가를 세운 것은 1948년이라는 것이다. 진보학자 다수는 1919년 세워진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봐야 독립운동을 계승한 나라가 된다고 여긴다. 이승만은 분단정부를 ‘수립’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건국 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에서 건국 단계를 설정해놓았다. 강령에 따르면 광복군이 국경을 넘어 본국에 들어가는 것이 복국(復國)이다. 복국기를 거친 다음 일반선거를 실시해 의회를 구성한 후 헌법을 만들어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건국이라고 했다. 당시 ‘건국 작업’ ‘건국 과업’ 등의 표현을 썼다. 요컨대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건국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 김구가 이끈 임시정부의 강령대로라면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일’이라는 건가.
“그렇다. 이승만이 애매하게 한 잘못이 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강조하면서 연호도 임시정부의 것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헌국회가 이승만의 이 같은 주장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승만이 법통이라고 여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세운) 한성임시정부다.”
1919년 9월 설립된 상하이임시정부는 한성임시정부, 노령임시정부 등을 통합한 것이다. 명목상 한성임시정부를 승계했다. 제헌국회 때 우남은 한성임시정부→상하이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법통을 주장한 것이다. 정부 수립 선포식 때도 현수막에 ‘건국’이 아니라 ‘정부 수립’이라고 썼다.
“건국의 법통과 관련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들어간 데는 이승만의 주장이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표현됐는데,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가 법통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앞서 밝혔듯 김구의 임시정부는 정부 수립을 하는 단계를 건국이라고 했다. 정부 수립이 곧 건국인 것이다. 다만 건국이라는 낱말이 법률 용어가 아닌 것일 뿐이다.”
논란 끝에 추진이 결정된 국정 역사교과서는 진보학계의 반발을 고려해 ‘1948년 건국절’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철저한 反日”
올해 출간한 ‘이승만과 김구’, 1969~70년 ‘신동아’에 연재한 글을 묶은 ‘이승만과 김구’
“이승만과 김구는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대결한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자본주의를 지향했다.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은 국가를 더 중요시했고, 김구는 민족을 더 중요시했다고 평할 수 있다.”
▼ 백범의 남북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주장은….
“김구의 판단 착오다. 북한이 같은 민족으로 협상해 얘기가 통하리라고 믿은 것은 실수다. 옛 소련 비밀해제 문서에 1945년 9월 스탈린이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연립정부를 만들라고 지시한 내용이 담겼다. 공산정부를 만들라는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좌익학자도 있으나 실상을 모르는 소리다. 협상으로 이뤄질 게 없었다. 백범의 오판이다.”
▼ 진보 진영은 정부 수립 이후 친일파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공산당의 당시 악선전이 그랬다. 이승만의 사상은 철저한 반일이다. 그가 쓴 ‘일본 내막기’는 요한계시록의 아마겟돈 개념을 가져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다룬다. 이승만에 따르면 일본은 ‘악(惡)’이다. 악과 싸우는데 반전이나 평화를 말하는 이는 제5열이라고 주장한다.
이승만은 친일파가 대한민국의 주류나 건국의 주도 세력이 되게 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는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이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은 인물이다.
친일파를 건국의 주도 세력이나 주류로 삼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다. 기술자로서 동원한 사람이 있긴 하다. 노덕술이 대표적이다. 공산당 잡는 기술자로서 공을 세워 자신의 죄를 갚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암살이 예사로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공산주의를 막는 기술자로서 이용한 것이지 나라의 주류나 근간이 되도록 한 것이 결코 아니다.
1951년 농림부 장관에 임명된 임문환도 친일파다.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일본에서 고급관리가 될 수 있었는데, 조선에 와 고등관 생활을 했다. 이승만이 그를 장관에 앉힌다. 임문환이 국회에 가서 망신을 당한다. 국회의원들이 ‘당신 같은 친일파의 절은 안 받겠다’면서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임문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일본을 보니 산꼭대기까지 물을 대 논을 만들었더라. 언젠가 일본이 무역이다 뭐다 해서 우리나라로 다시 밀려올 것이다. 일본이 다시 오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게 당신 같은 친일파다.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막아낼 수 있다.’ 요컨대 친일한 죄를 일본 막는 일로 갚으라는 거였다.”
김구의 판단 착오
▼ 현대사의 가정적 질문 중 하나가 ‘우남과 백범이 협력해 대한민국을 건설했다면…’이다. 왜 두 사람이 합작하지 못했다고 보나.
“신이 아니니까, 이승만도 김구도. 두 사람은 정치인이다.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 미군이 진주하는 순간 백범이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봐야 한다. 협상하러 이북에 간 것이 판단 착오였는데,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자유중국(타이완) 인사와의 인터뷰를 보면, 백범이 이북을 과대평가했다. 귀추를 지켜봐야 한다고 본 것 같다. 대한민국 정부의 장래에 대해 낙관하지 않은 것이다. 민감한 얘기여서 더는 안 하는 게 낫겠다. 책에는 자유중국 인사와의 인터뷰 전문을 실었다.”
▼ 우남이 백범의 남북합작정부 운동을 제치고 38도선 이남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이나, 공산세력과 싸워 이기고자 일부 친일파를 등용한 것은 역사의 불가피성에 해당한다는 건가.
“기술자로 이용한 것이다. 공을 세워 죄를 면하게 하는 취지였다.”
▼ 우남은 조선공산당 출신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발탁해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농지개혁이 공산화를 막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농지개혁사를 연구한 김성호 씨가 전국 각 지방을 돌면서 농민의 얘기를 듣고 내린 결론은 ‘이승만 덕분에 쌀밥을 먹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고문, 통신원 노릇을 하던 로버트 올리브 박사에게 편지를 써 ‘제일 먼저 농지개혁을 할 것이다. 보수정권이니 하는 소리를 일소할 것이다. 농민에게 땅이 돌아간다. 북한에서 실시한 것과 어떻게 다른지 보여줄 것이다’라고 밝힌다. 그러고는 공산당 하던 조봉암을 장관으로 세워 밀어붙인다. 대단한 정략가다.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서울만 점령하면 모든 농민이 궐기한다고 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박헌영이 라디오 연설을 하는데….”
그가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를 꺼내왔다. 박헌영의 라디오 연설문이 실렸다. 박헌영은 이렇게 호소했다. “엄숙한 시기에 전체 남반부 인민이 어찌 총궐기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무엇을 주저할 것입니까. 모두 다 한 사람같이 일어나 정의의 전쟁에 적극 참가해야 합니다. (…) 인민의 무기는 하나도 봉기요, 둘도 봉기입니다.”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북한의 토지개혁은 매매도 할 수 없고 담보로도 삼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토지개혁은 모두 실패했다, 공산주의가 망한 게 토지개혁을 잘못해서다”라고 덧붙였다.
▼ 3·15 부정선거와 독재는?
“이승만 책임이지. 정치권력에 대한 욕심인지, 국가에 대한 소명감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정치인에게는 누구나 공과 과가 공히 있다. 부정선거를 몰랐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랬더라도 책임져야 한다. 대통령이 모르기 어려운 일이고 설사 몰랐다고 해도 잘못이다.”
▼ 백범의 과(過)는?
“결정적 순간에 판단을 잘못한 것. 남북합작에 나선 것은 오판이다.”
최근 논란의 대상이 된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대한 질문도 했으나 그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답했다. 검정 역사교과서를 직접 검토하지 않았다는 게 비보도를 전제로 한 이유였다. 그는 “일부 언론에 보도된 대로라면 현재의 교과서가 문제를 갖고 있어 조치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하면서도 박근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