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이후 중국·미국 시장에서 고전
- 환경·안전 규제 강화, 車 소유욕 없는 IT 세대
- 자율주행 시스템 다음엔 ‘스마트 시티’…美·유럽 기술 우위
- 정부 생각보다 변화 빨라…“국가 흥망 달린 문제”
두 차례 위기 극복
이에 현대기아차는 특단의 혁신을 단행한다. 과거에는 도요타 등 일본 회사를 벤치마킹했지만, 독일 폴크스바겐그룹의 성공 스토리로 과감하게 눈을 돌렸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어려움을 겪은 폴크스바겐그룹은 브랜드 간 플랫폼 공유를 통한 원가절감, 적극적인 신흥 시장 공략 및 현지형 모델 출시, 디자인 혁신, 역발상의 내연기관 투자 확대 등을 단행한다. 그 후 수년이 흐른 2000년대 중반부터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기아차는 폴크스바겐이 겪은 어려움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의 성공전략을 철저히 분석했다. 이에 따라 현대차와 기아차 간 플랫폼 공유로 원가를 적극적으로 줄여갔고, 폴크스바겐그룹의 아우디 디자인 책임자이던 피터 슈라이어 부사장을 영입하는 등 디자인 혁신을 꾀했다.
또한 경쟁이 치열한 선진 시장보다는 기회가 좀 더 많은 신흥 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현대차는 ‘미국형과 곡선 디자인’, 기아차는 ‘유럽형과 직선 디자인’이라는 정체성도 확립했다. 직분사 엔진에 대한 공격적인 개발투자도 단행했다. 이 엔진은 2008년 신모델부터 본격 적용됐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눈부시게 성장한 오늘날의 현대기아차는 이 시절 혁신의 결과물이다.
두 번째 위기는 2008년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인한 경기 급랭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된다. 현대기아차는 2000년대 중반부터 이미 신흥 시장 비중을 높여온 덕분에 미국 시장 의존율이 낮았고, 원화는 급격히 약세로 반전됐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엔고와 높은 미국 시장 의존율 탓에 고전했다.
이처럼 두 차례의 위기를 기회로 삼으며 현대기아차는 2013년까지 엄청난 속도로 성장, 글로벌 점유율 5위로 올라섰다. 2008~13년 연간 판매와 매출은 각각 74%, 32.3% 증가했고 글로벌 점유율은 6.4%에서 8.8%로 올랐다.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274%, 1198% 증가했다. 전 세계 자동차업계는 현대기아차를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5, 6년간의 괄목할 성장세는 2013년 이후 정체기를 맞는다.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쾌속 성장 후 정체
첫째, 경쟁사들의 시장 환경이 좋아졌다. 엔화 강세, 대지진, 태국 홍수, 미국에서의 대량 리콜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일본 업체들은 엔저, 구조 개혁, 브랜드 이미지 개선, 주력 시장인 미국 시장의 수요 증가 등으로 호기를 맞았다. 미국 업체들은 국유화와 매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상품성 개선과 자국 시장의 호조로 경쟁력을 회복했다. 중국 업체들도 내수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중국에서 현대기아차 점유율은 지난해 9.13%에서 올 9월 7.81%(누적 기준)로 하락했다.
둘째, 유가 하락으로 전 세계적으로 인기 차종에 변화가 생겼다. SUV와 픽업트럭의 판매가 급증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두드러져 SUV 및 픽업트럭 비중이 2013년 39%에서 2014년과 2015년(10월 누적)엔 각각 49%, 52%로 올라갔다. 반면 중형 이하 세단 승용차의 비중은 같은 기간 39%에서 35%, 34%로 하락했다. 이 때문에 대형 SUV와 픽업트럭 라인업이 약한 현대기아차는 불리해졌다. 현대기아차의 미국 점유율은 이 기간에 8.1%에서 7.9%, 8%로 소폭 하락했다.
셋째, 국가 간 ‘환율 전쟁’과 경제 불확실성이 심화하면서 현대기아차에 효자 노릇을 하던 일부 신흥 시장 상황이 비우호적으로 변했다. 러시아, 브라질, 아프리카, 중동, 호주 등 자원 개발국의 경기는 부진하고 유로화, 러시아 루블화, 브라질 헤알화 등의 환율은 크게 약세로 전환된 것이다.
최근 자동차 산업은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다. 아마 과거 50년보다 향후 10년이 훨씬 크고 빠르게 변할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민은 비단 국내 자동차 산업의 문제만은 아니다. 변화의 물결은 크게 환경, 안전, 소비자 인식 변화에서 비롯된다.
미국·유럽의 숨은 ‘야욕’
첫째, 환경 면에서는 이산화탄소와 유해 배기가스 배출 문제가 큰 화두다. 지구적으로 온실가스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연비 규제가 크게 강화되고 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 대부분은 2020년까지 자동차 평균 연비가 25~30% 향상되도록 규제를 강화했다. 2020년 이후 현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신(新)기후체제에 미국과 중국이 참여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향후 온실가스 규제, 즉 연비 규제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자동차업체들은 기존 내연기관의 성능 향상은 물론 하이브리드카, 전기차, 수소연료전지차 등 친환경차 판매를 더욱 확대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최근 폴크스바겐의 배출가스 조작 파문과 관련해 질소산화물, 미세먼지 등 유해 배기가스 배출 규제도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둘째, 안전규제 강화에 따른 스마트카 출현도 중요한 변화다. 미국과 유럽은 교통사고 감축을 위한 미래 기술의 적용을 하나둘씩 의무화하려는 준비에 착수했다. 이들 선진국은 궁극적으로는 차량과 차량, 차량과 사람, 사물 간 통신을 통한 ‘자율주행 시스템’을 유도한다. 이미 주요 자동차업체는 긴급 자동제동(AEB), 차선이탈 경고(LDWS), 사각지대 감시(BSD), 차선 유지(LKS),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SCC) 등을 차량에 장착하고 있고, 2017~20년에 제한적이나마 자율주행차를 상용화할 계획이다. 나아가 2025~30년에는 도로 인프라까지 구축된 자율주행 시스템을 완전 상용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셋째, 소비자 인식 변화도 주목해야 할 변수다. 자동차 내연기관이 충분히 발달하면서 대중카 성능은 모델별로 차이가 크지 않다. 이에 소비자는 다른 측면에서 차별화를 원하기 시작했다. 특히 IT 기기에 친숙한 젊은 세대에겐 운전 자체의 즐거움과 동경, 즉 ‘Fun to Driving’이 많이 퇴색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자동차 소유욕이 줄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3가지 변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동차 산업이 전통 기계공학에서 IT와의 융합, 소프트웨어적 제어 등의 중요성이 커지는 ‘메커트로닉스(Mechatronics)’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메커트로닉스 기술과 인적 인프라가 ‘우리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미국과 유럽, 특히 독일이 이 분야에서 경쟁우위에 있고, 따라서 시장의 표준을 선도할 수 있는 힘도 이들에게 있다. 이들 국가가 최근 들어 환경 및 안전 규제를 강화해나가면서 “환경보호와 교통사고 저감이 목표”라고 명분을 내세우지만, 솔직한 속내는 기술무역 장벽을 만들어 차세대 산업의 헤게모니를 쥐려는 것이라 하겠다.
다른 산업 끌어안아야
그리고 이들 선진국의 최종 계획에는 스마트 시티(Smart City)가 있다. 즉 스마트폰, 스마트카, 스마트그리드, 스마트 의료, 사물인터넷 등이 통합된 IT 네트워크 도시를 구축하려고 준비 중인 것이다. 실제로 미국, 유럽, 일본 등은 일부 지역을 시범도시로 선정해 거대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구글, 애플 등 대표 IT 업체들이 괜히 자동차와 사물인터넷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며, 앞으로 점점 더 많은 경쟁자가 출현할 것이다. 이러한 차세대 산업시대엔 자동차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에서도 한국 기업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매우 우려스럽다.
이상의 패러다임 변화는 1, 2년 내에 급격하게 진행되진 않을 것이다. 또한 경쟁력이 크게 향상된 현대기아차에 당장 큰 위협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4, 5년 후다. 2020년 이후에는 변화가 가속화해 대외 환경이 크게 바뀔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 자동차업계가 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첫째,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ICT 산업의 융합으로 산업의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고 있다. 기존 아날로그 중심의 전통 산업과 ICT 산업은 접근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개발 과정에서 기존의 공학적 관점의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인문학과 생태학적인 요소까지 고려한 창조적인 사고의 전환이 더욱 크게 요구된다.
둘째, 다른 산업과의 기술제휴, 인수합병(M·A), 합작회사(Joint Venture) 등을 통해 폭넓은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과거 전통 자동차 산업은 완성차의 기술 헤게모니 장악과 견제, 생산성과 원가절감 등을 위해 다소 폐쇄적인 협력관계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 자체가 IT, 전자, 화학 등 여러 면에서 타 산업과 융합이 불가피해졌고, 기존 자동차 산업에서 처음 접해보는 영역이 자동차로 편입됐다. 다른 산업과의 협력관계에서 더 적극적인 자세로 임한다면, 우리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셋째, 라인업을 확장해야 한다. 소비자의 욕구는 더욱 다양해졌고, 요구사항도 훨씬 까다로워졌다. 한자리에 여러 라인업을 구비함으로써 다양한 요구를 가진 소비자를 붙잡아놓아야 한다.
넷째, 전략적인 생산 유연성 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업체 간 내연기관 기술력이 비슷해졌고, 국가 간 경제 상황이 상이한 경우가 더 많아졌다. 국가 간 환율전쟁이 빈번해진 상황에서 지역 간 생산 유연성 문제는 과거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이것이 향후 기업의 운명을 가를 정도로 중요해질 것이다.
다섯째. 정부 차원에서의 인식 변화와 인적·물적 인프라 구축, 그리고 폭넓은 지원책과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 ICT 융합과 소프트웨어로 대별되는 차세대 산업으로의 변화는 현재 정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의 성패가 국가의 흥망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