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취존중과 싫존주의는 닮은 꼴
가볍게 취향 위주로 관계 맺는 ‘가취관’ 확산
학연•혈연 얽매이기보다 ‘스티커처럼 붙였다 뗄 수 있는’ 사이 선호
구매 의사결정 기준은 ‘자기만족’
‘덕질’로 나에게 집중하고 자존감 회복
데뷔 23년차 그룹 신화. 현존하는 최장수 아이돌 그룹으로, 10대 사이에서도 인기다. [동아DB]
#취향의 또 다른 이름 ‘자기 정체성’
2017년 3월 27일 페이스북에 개설된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대문 화면. 오싫모는 ‘싫존주의’ 현상의 대표 사례다. [페이스북 캡처]
박재은(27) 씨는 4월 페이스북 페이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오싫모)에 가입했다. 오싫모는 2017년 3월 27일 개설됐다. 현재 가입자가 10만 명이 넘는다. 가입한 날부터 박씨 페이스북 뉴스피드에는 오싫모 관련 게시물이 올라왔다. 그는 이 글을 공유한 뒤 “냉면을 주문할 때 ‘오이 빼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고 썼다. 그러자 몇몇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ㅇㅈㅇㅈ”(인정인정) “ㅇㄴㄷ”(야 나두) “니맘내맘”(니 맘이 내 맘이다) 등의 댓글로 공감을 표했다.
취향을 밝힌 뒤로 박씨는 식성이 비슷한 친구들과 더 가까워졌다. 간혹 식당에서 김밥이나 냉면을 주문할 때는 박씨가 부탁하기도 전에 누군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니 오이는 빼 달라”고 정중히 요청하기도 한다. 그는 이런 반응이 20대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라고 했다.
“한동안 ‘오이 싫어’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를 입고 다녔어요. 그 덕에 왜 오이를 먹지 않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애도 아닌데 왜 편식 하느냐’ 면박을 주는 어른들 잔소리를 들어야 했죠. 반면 또래들은 ‘나도 오이 싫어한다’ ‘오이 싫어할 수도 있지’ 하며 공감해주는 경우가 많아요. 20대는 오이를 싫어한다고 해서 ‘편식 프레임’을 씌우지 않거든요.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도 않고요. 선호를 넘어 불호까지 한 사람의 일부로 보고 인정해주려고 하죠.”
#싫존주의와 개취존중은 닮은 꼴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는 이처럼 ‘개인이 싫어하는 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싫존주의’라고 한다. 같은 의미로 ‘개취존중’이라는 용어도 널리 쓴다. 개인이 선호하는 것, 즉 ‘개인 취향’을 존중한다는 말의 축약어다.대학생 연구기관 ‘대학내일 20대연구소’는 2018년 5월 전국 19~34세 성인 900명에게 ‘최근 6개월 안에 가시적인 ‘불호 표현’을 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밝힌 적 있는지에 대한 이 질문에 25~34세(밀레니얼세대) 응답자의 74%, 19~24세(Z세대) 응답자의 83%가 ‘그렇다’고 답했다.
최근 온라인커뮤니티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는 자신의 선호 또는 불호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게시물이 넘쳐난다. 탕수육 소스에 고기를 찍어먹는지(찍먹), 아니면 소스를 고기 위에 부어서 먹는지(부먹)에 따라 그룹이 나뉜다.
요즘은 민트(박하)와 초콜릿을 결합해 만든 ‘민트초코’에 대한 취향을 얘기하는 게 인기다.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사람은 “상쾌한 민트가 초코의 텁텁함을 잡아준다”며 잘 먹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치약 먹는 기분”이라며 아예 입도 대지 않는다.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민초단’ 이라고 칭하고, 민트초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반(反)민초파’라고 명명한다.
#가볍게 취향 위주로 관계 맺기, ‘가취관’
MZ세대는 대인관계에서도 취향을 중시한다. 학연, 지연, 혈연 등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보다는 ‘가벼운 취향 위주의 관계를 일시적으로 형성하는 것’, 이른바 ‘가취관’을 선호한다.최근 MZ세대 사이에서 ‘원데이 클래스’가 유행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기 취향에 맞는 강좌를 찾아 하루 수강하고, 강좌가 끝나면 미련 없이 다른 강좌를 찾아 떠나는 사람이 많다. 3개월·6개월·1년 등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취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소통하는 각종 프로그램이 유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직장인 한아름(31) 씨는 1년 넘게 원데이 클래스 강좌를 듣고 있다. 캘리그라피, 캔들, 수공예, 홈베이킹, 수채화, 외국어 등 그동안 들은 강좌만 30개. 최근엔 라탄(칼라마스 나무줄기에서 채취한 가볍고 거친 섬유)으로 바구니 만들기 강좌를 들었다. 비용은 회당 적게는 1만 원에서 많게는 10만 원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는 원데이 클래스를 통해 형성하는 인간관계가 “스티커 같다”고 했다. 한 번 붙였다 미련 없이 떼어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내 취향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아니다 싶으면 떠나 수 있는 단발적인 방식이 좋다”고 말했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만난 사람과는 원하지 않아도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취향으로 연결된 관계는 자기 결정권이 보장되는 게 매력이에요. 나이·직업·거주지·학교 같은 개인정보를 서로 알려줄 필요가 없는 것도 좋고요. 무엇보다 상대방과 갈등이나 분쟁이 생겼을 때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 감정을 소모할 일이 없습니다.”
한씨 얘기다.
#구매 의사결정 새로운 기준 ‘자기만족’
취향을 중심에 둔 소비 트렌드가 자리를 잡으면서 ‘덕질 라이프’를 즐기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 사진은 아이돌 덕질 세계를 실감나게 그린 tvN 드라마 ‘그녀의 사생활’의 한 장면. [동아DB]
한동우(32) 씨도 ‘덕질 라이프’를 즐기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4년차 직장인 한씨는 2018년 5월 서울 청담동 한 레스토랑에 방문했다가 독특한 식기를 발견했다. 손잡이에 금테가 둘러진 샐러드용 포크였다. 검색해 보니 식기업계에서 명품으로 통하는 포르투갈 회사 제품이었다. 가격은 4개에 13만 원. ‘포크가 거기서 거기지’ 정도로 생각하던 한씨에게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가격이었다. 박씨는 “이 일을 계기로 ‘포크의 세계에도 그 나름의 깊이가 있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독특한 포크를 발견하면 바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2년 만에 포크가 30개로 늘었다.
“복잡한 대학 입시를 거쳐 치열한 취업 전쟁을 치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이번 생에 안정적인 미래는 아예 없는 거였구나.’ 우리 또래가 건국 이래 가장 힘든 시기를 겪는 세대라고 하잖아요. 자연히 윗세대가 추구한 성공이나 승진에 집착하기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자는 생각을 갖게 되더라고요. 비교적 쉽게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벼운 덕질을 하게 됐고요. 마침 그 무렵 접한 것이 포크였죠.”
한씨는 MZ세대가 개취존중을 외치는 이유에 대해 ‘다른 가치관이나 스타일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스스로 무난하고 보편적이지 않은 취향을 갖게 된 이상 남이 나와 다르다고 뭐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덕질’로 나에게 집중하고 자존감 회복
자신의 독특한 취향을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이것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개취존중의 긍정적 효과다.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단 개취존중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다른 사람 권리를 침해하거나 위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상대가 내 취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억지로 존중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주의해야 한다. 그건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최근 유행하는 개취존중 트렌드는 한국 사회에서 어떤 함의를 가질까. 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과거 한국은 정답이 정해진 사회였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취향 폭이 좁았다. 기성세대는 중국음식점에서 일행과 다른 메뉴를 선택할 때 눈치를 봤다. 반면 MZ세대는 개성을 표현해도 무리 없을 정도의 포용력을 가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개취존중과 싫존주의는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가 과거보다 성숙해져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일 수 있다. 반면 젊은이들이 이런 용어를 드러내놓고 사용한다는 건 여전히 우리 사회가 개인 취향을 배척하고 몰아세우는 면이 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MZ세대 사이에서 나타나는 개취존중과 싫존주의 유행은 한국사회에 전하는 함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