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호

왕년 ‘주사파’가 본 조정래 ‘친일파 단죄’ 발언

[민경우 586칼럼③] 존재 의미 부각 위한 국내정치용 의제

  •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 소장 mkw1972@hanmail.net

    입력2020-10-20 10:4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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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유학 다녀오면 친일파 된다?

    • ‘태백산맥’ 염상진 “역사투쟁으로 인민해방”

    • 급진적 자주통일운동, 1990년대 말 종언

    • 제대로 운동한 김영환·구해우, 일찍 생각 바꿔

    • 北과 전화·팩스로 교류할 때 벽 많이 느껴

    • 2010년 이후 ‘반미 없는 반일’ 힘 얻어

    • 민족‧역사 들먹이며 끊임없이 현실 신비화

    *586세대 NL(민족해방 계열) 이론가이자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 출신인 필자가 문재인 시대에 표하는 유감.

    문재인 대통령이 1월 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문화예술인 신년인사회에서 조정래 작가와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월 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문화예술인 신년인사회에서 조정래 작가와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10월 12일 조정래(77) 작가가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꺼낸 발언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그의 발언이다. 

    “150~160만 헤아리는 친일파들을 전부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질서가 서지 않고는 이 나라의 미래가 없습니다.”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일본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됩니다. 민족반역자가 됩니다. 그들을, 일본의 죄악에 대해 편들고 역사를 왜곡하는 그자들을 징벌하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운동이 지금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적극 나서려고 합니다.” 

    우선 “일본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된다”는 그의 말이 문제가 됐다. 말이 되지 않는 황당한 주장이다. 논란이 커지자 조정래는 “토착왜구가 주어이기 때문에 범위가 딱 제한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반일 종족주의’를 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이와 같은 발언을 했다. 



    조정래는 친일파가 150~160만 명에 이르고 심지어 그들을 징벌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문제에 관해 이영훈 등의 주장을 놓고 논쟁할 수 있지만,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의 규모는 지식사회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 규모가 100만 명이 넘는다면 이는 하나의 정치세력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주장을 학문적 토론의 영역이 아니라 법률 제정을 통한 사회적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현실투쟁에서 역사투쟁으로 태세 전환”

    1986년 10월 28일 서울 건국대에서 열린 ‘애학투련(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시위. [동아DB]

    1986년 10월 28일 서울 건국대에서 열린 ‘애학투련(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시위. [동아DB]

    조정래는 1980년대 중후반 ‘태백산맥’으로 유명세를 탔다. 태백산맥 말미에 조정래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휴전으로 지리산에 완전히 고립된 빨치산들은 “현실투쟁에서 역사투쟁으로 태세를 전환”하는데, 작중 인물 염상진은 역사투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현실투쟁은 인민해방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눈앞에서 성취시키는 것이며 역사투쟁은 인민해방을 우리가 목숨을 바쳐 뒷날 역사 속에서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당시(1945~1950년) 빨치산 투쟁을 지금(1980년대 중반) 우리가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주장인데 실제로 1980년대 중후반 그런 일이 있었다. 1986년 북한과 소련을 모델 삼아 NL(민족해방 계열)과 CA(제헌의회파)라는 급진화된 학생운동이 정립했다. 주류였던 NL 학생운동은 1986년 10월 ‘건대 사태’ 즉 ‘애학투련(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사건으로 이어졌다. 

    애학투련 사건으로 서울대 84학번 운동권 상당수가 구속됐다.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의 주도권이 서울대에서 고려대로 넘어갔다. 고려대와 연세대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의 대중화에 대한 고민이 진행됐다. 그 뒤 학생운동이 김영삼‧김대중 양김 씨가 주도하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에 나서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6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자 NL은 조국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1988~1992년 일시적으로 남북 해빙기가 조성됐다. 1993~1994년에는 1차 북핵 위기가 발발했다. 1988년부터 진행된 8·15 대회는 1996년 이른바 ‘연대 사태(7차 범민족대회)’로 학생운동이 궤멸적 타격을 입으면서 막을 내렸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까지 대학 사회를 중심으로 진행됐던 급진적 자주통일운동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조국통일운동이 불가능한 까닭

    나는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으로 1985~1995년 조국통일운동에 참여했다. 때로는 조국통일운동의 주역이기도 했다. 나는 그 10년 동안 조국통일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학생 운동권 각 정파에서 민주화는 공통분모였다. 문제는 민주화 다음이 무엇이냐에 있었다. 학생 운동권은 민주화 직후의 국면이 통일이나 혁명 같은 더 큰 국면의 초기단계라고 봤다. 현실은 매우 달랐다. 특히 경제와 문화가 급변하고 있었다. 

    1983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반도체 중에서도 첨단 기술인 초고밀도집적회로(VLSI)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 유명한 ‘도쿄 선언’이다. 이후 삼성전자는 1990년대 들어 반도체를 발판 삼아 세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매판 자본이니 아니니 하는 논쟁이 무색해진 것이다. 

    이 시기 개인적으로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소방차가 유독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로 보면 남자 가수들이 춤을 추는 건 특이한 장면이었다. 소방차가 춤추는 모습은 어찌어찌 감당이 됐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1970년대 촌스럽고 농촌적이었던 한국은 1990년대가 오자 현대적이고 글로벌한 국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통일이나 민족 이슈가 더는 중요한 문제일 수 없었다. 1996년 연세대에서 1만 명이 연행됐음에도 정치적 반향이 없던 까닭은 당시 통일운동이 시대와 괴리돼 있었기 때문이다. 

    NL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점도 있다. 본격적으로 운동했던 사람일수록 생각을 바꾼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의 김영환이 그렇고, ‘자민통(자주민주통일)’ 그룹의 구해우가 그러하다. 나도 어느 정도 그렇다. 통일운동은 상대가 있는 법인데 막상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책 속에서 알던 사람들과 매우 다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다양한 집단이 남북을 오가며 행사를 치렀다. 나는 정부 승인 없이 이를 실무적으로 중개했다. 전화나 팩스를 통한 교류였지만 남북 사이의 벽을 많이 느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남과 북은 문화적‧정서적으로 많이 다르다. 책을 통해 민족을 말하고 통일을 논하는 것과 실제로 북한 사람과 만나 무언가를 도모하고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도 민족‧통일 담론이 갖고 있는 휘발성 때문인지 관념적으로 민족과 통일을 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급진적 자주통일운동은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정치적으로 와해됐지만, 문화의 영역에서는 관념으로 살아남았다. 조정래는 관념으로 자주통일운동을 논하는 대표적 문화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의외로 이런 사람이 많다. 대학생 시절 NL 운동을 했다가 졸업 뒤 교사나 학원강사가 됐는데도 여태 같은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이 적잖다. 그 중 상당수는 내가 듣기에도 섬뜩한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반미 없는 반일

    조정래 작가가 10월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조정래 작가가 10월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NL은 한국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하면서 인민 민주주의혁명 전략을 구사한다. 그 나름 정교한 논리 체계를 갖춘 혁명이론이다. 논리적 정합성이 무너지면 NL 전체가 무너진다. NL 이론은 2020년의 관점에서 보면 워낙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반면 민족이나 통일은 매우 추상적이고 애매한 담론이라 다양한 변종이 존재한다. 

    NL은 일본 문제를 ‘발견’하며 새로운 활력을 찾는다. 그들은 2010년대 변화한 상황에 맞게 새로운 형태의 반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첫째, 반미가 누락된 반일이다. 정통 NL의 관점에서 보면 반미가 중심이다. 반일은 반미에 결합되는 요소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혁명’을 시작으로 애플과 구글 등 미국 기술 기업이 경제 혁신을 주도하면서 반미의 대중적 지반이 와해됐다. 이에 NL은 반미 없는 반일 운동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둘째, NL은 반미 없는 반일을 부각하는 과정에서 구조적 맥락 대신 과거 청산과 같은 추상적 내용을 전면에 걸었다. 과거 운동권은 한일관계가 경제적 종속 관계라면서 날을 세워왔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성장사(史)에서 보듯 한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적 종속에서 상당 부분 탈피했다. 그러니 NL이 보기에 반일 이슈를 제기하려면 경제적 종속과 같은 구체적 현실이 아니라, 민족애나 ‘진심 어린 사과’처럼 추상적 문제를 제기하는 게 효과적이다. 독도와 위안부가 전면에 부각된 역사적 배경이 여기에 있다. 

    셋째, 반미가 사라지고 주변 동북아 질서와 관련된 구조적 해석이 제거된 채 일본 문제만 남았다. 다분히 국내용에 해당한다. 2010년대 들어 국제 정세가 격동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북핵 위기, 미국의 대중 압박,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는 날이 갈수록 급변하고 있다. 각국이 얽히고설킨 정세를 건드리기 시작하면 일본뿐 아니라 북한, 미국, 중국까지 연쇄적으로 거론해야 한다. NL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따라서 일본으로 시야를 한정할 수 있는 주제로 문제를 좁히는 게 유리하다. 

    조정래의 견해를 단순히 작가 한 명의 주장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까닭은 문재인 정권을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 조정래와 비슷한 생각의 궤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조정래의 관계는 언론보도를 통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박진영 민주당 부대변인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를 향해 “예전에 친일파 중에도 그런 선배가 있다. 조선 민족은 지저분하고 게으르기에 민족 개조론을 썼던 조선의 촉새 이광수”라며 “겨 묻은 민주진보가 미워서 수구의 스피커가 되겠다는 건가”라고 비판한 것도 이런 저간의 상황과 무관치 않다.

    현실의 신비화냐 구체적 현실이냐

    10월만 놓고 보더라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다시 요동치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10월 6일 방일한 뒤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을 거론했다. 문 대통령은 10월 8일 종전선언을 언급했다. 10월 10일 평양에서는 북한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렸다. 11월 3일에는 미국 대선이 치러진다. 각각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살아 있는 주제다. 반면 조정래의 토착왜구 발언 등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만든 국내 정치용 의제다. 

    민족‧역사와 같은 추상적 담론을 들먹이며 끊임없이 현실을 신비화시켰던 사람과 세력을 가려내고 구체적 현실과 마주할 때가 됐다.


    ●1965년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진보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저서 : ‘수학 공부의 재구성’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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