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자 김근태’ 동지로 ‘서울의 봄’ 겪어
전두환 신군부는 역사 되돌린 학살 세력
좌파, 주사파에 세뇌된 매국 세력으로 변질
검찰 쿠데타 프레임은 야당의 도덕불감증 방증
[영상] 윤여연 직설
“민주화 성취의 진짜 주역은 지금 정치권에서 활동하는 야당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학생운동 경력을 정치적 스펙으로만 이용했지 민주화를 위해 한 게 별로 없어요.”
설 연휴를 앞두고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을 찾은 윤여연 대동인쇄소 대표는 ‘진보·좌파·야당이 민주화의 주역이자 적자’라는 프레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맞받았다. 그러면서 “좌파의 의미가 오염되고 변질됐다”며 “현재 좌파는 주사파에 세뇌된, 대한민국 정체성이 모호한 매국 세력을 일컫는다”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기준은 구호나 주장이 아닌 존재와 의식, 실천에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사회 모순을 해결하려 했고 운동의 원칙을 존중하고 살아왔다는 측면에서, 소시민으로 살기 전인 2003년까지의 제 삶을 좌파의 삶이라고 봐야겠지요.”
아담한 체구에 부드러운 목소리, 서글서글한 인상까지 지금의 모습으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지만 대학생 시절 윤 대표는 늘 학생시위의 선봉에 있었다. 1974년 11월 3일 학생의 날 학생시위, 1975년 4월 10일 학생시위를 주동하고 1980년 4월 8일 숭전대학교(숭실대와 대전대 전신) 총학생회장으로 당선해 각종 학내외 시위를 이끌었다. 주요 대학 학생대표인 심재철과 유시민, 신계륜, 안숙, 형난옥 등과 공동 투쟁을 모색해 학생봉기를 주도했다.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검거돼 합동수사본부에서 80일 동안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다 포고령 위반으로 실형을 살기도 했다.
“비인간적 고문과 수형 생활은 역사를 되돌린 학살 세력을 비타협적 해방운동으로 응징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했어요. 그래서 1980년 이후에도 대동인쇄소 운영과 청년운동을 병행했죠. 1986년부터 2003년까지는 비정규직 조직 활동을 했어요. 정상적인 직장 생활은 못 했습니다.”
2004년부터 학생운동과 담을 쌓고 지낸 그를 ‘신동아’와 만나게 한 건 영화 ‘서울의 봄’이다. 영화 흥행 후 문재인 전 대통령,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야당 정치인이 관람평에 자신들이 민주화의 적통 계승자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을 모른 척 두고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윤여연 대동인쇄소 대표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회복을 시대적 사명으로 여겨 감옥 갈 각오로 학생운동에 앞장섰다”고 밝혔다. [박해윤 기자]
‘서울의 봄’에 편승한 악의적 선동
‘서울의 봄’을 본 소감이 궁금하다.“영화의 배경이자 역사적 변곡점이던 1980년의 시대정신은 ‘민주화의 봄’ 또는 ‘서울의 봄’이라는 서술처럼 대다수 국민이 염원한 민주주의 질서 회복이었다. 12·12사태는 전두환 등 하나회 세력이 주도하던 신군부가 이를 방해하고 군사정권을 연장할 목적으로 일으킨 하극상 군사반란이었다. 당시에는 철저하게 은폐돼 있었기에 군부의 정확한 동향은 알 수 없었지만 학생들로서는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역사적 사명감이 있었기에 신군부에 저항해야 했다. 그때의 경험을 기억하며 영화를 처음엔 혼자 봤다. ‘12·12사태로 서울의 봄의 좌절이 예고돼 있었다’는 메시지가 읽혔다. 두 번째는 당시 같은 경험을 한 동지들과 관람했다. 1980년 이후 2명의 대통령을 배출하고 사회 곳곳의 요직을 독점한 하나회 세력을 1992년 대통령 취임 11일 만에 청산한 YS(김영삼)의 용기에 새삼 감탄했다.”
자유민주주의 회복은 역사적 사명
좌파 일각에서는 하나회 군부 쿠데타와 윤석열 검찰의 조국 장관 수사를 동일선상에 두며 ‘검찰 쿠데타’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생각하나.“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 전두환 정권은 하극상 군사반란을 일으켜 헌정 질서를 유린하고 이에 저항하는 국민들을 체포하고, 불법감금하고, 고문하는 등 인권유린을 자행하면서 집권했다. 반면 윤석열 정부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 절차를 통해 합법적으로 정권을 넘겨받았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대 법대에 다닐 때 형사 모의재판을 통해 1980년 민주화의 봄이라는 시대정신과 교감한 바 있다. 나와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민주화의 봄’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고 본다. 다만 민주당 지지자들이 대통령 취임 두 달도 안 돼 윤석열 정권 퇴진 집회를 시작한 것은 대통령선거 패배에 대한 정서적 불복 심리를 악의적으로 선동한 결과로 보인다. 이는 주사파의 영향을 받아 대한민국의 민주적 제도와 시스템을 인정하지 못하고 적대시해 온 활동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한다.
또한 검찰 쿠데타 프레임은 ‘범죄단체 조직죄’로 처벌해야 할 만큼 부패비리 집단이 된 민주당 관련자들이 도덕불감증에 빠져 스스로를 성역시한다는 것을 방증하는 예로 보인다. 특히 운동권 주변을 맴돌던 조국 전 장관은 사회적 불공정과 불평등을 확장한 범법자이고 위선자다. ‘금수저’라는 집안 배경과 서울법대 교수라는 본인의 스펙만 물려줘도 될 텐데, 국민의 역린을 건드리면서 편법과 불법으로 자녀를 변호사 시키고 의사 시키려고 했다. 조국 전 장관은 가장 정의로운 척 글을 써왔지만 국민의 보편적 법 감정에 비춰보면, 검찰의 조국 전 장관 조사는 타락한 지식인 출신 범법자를 수사한 정당한 사법절차의 집행이라고 판단된다.”
직접 운영한 대동인쇄소가 학생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들었다.
“광주민중항쟁 관련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검거돼 합동수사본부에서 80일간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다 포고령 위반으로 실형을 살고 석방됐다. 출소 이후 학생운동을 재건할 필요성을 느껴 1983년 6월경 신계륜, 이우재, 유시민 등과 모여 전국 복학생대책위를 조직하고 살인 정권을 타도할 때까지 복학을 미루자’고 결의했다. 그래서 신학기에 복학을 거부하고 1984년 4월 9일 을지로에 대동인쇄소를 설립했다. 이후 이곳은 불법 인쇄물 제작 전문 인쇄소로 발전해 학생운동의 비약적 발전을 도왔다. 그 때문에 15차례 이상 인쇄물이 압수되고 밥 먹듯 연행과 구류를 당했다. 그럼에도 이를 감수하면서 비합법 인쇄물의 60~70%를 공급해 ‘광주양민 학살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 문제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1985년 2·12총선에서 야당 세력이 약진하자 중앙정보부는 대동인쇄소를 학생운동 세력의 성장을 이끈 유인물 공급처로 파악하고 1985년 만화책 가게로 위장한 사무실을 압수 수색했다. 그때 400여 목록이 기재된 장부를 빼앗겼다. 고문 수사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피하던 끝에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담당하던 중앙정보부 직원과 협상해 대동인쇄소를 폐업하는 조건으로 1개월 구류처분을 받았다.”
진짜 폐업했나.
“1985년 6월부터 낮에는 민청련 사무국장으로, 저녁에는 비밀 대동인쇄소 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1985년 7월경 김근태 민청련 의장과 간부들이 연행되고 나도 수배돼 1986년 1월경 대동인쇄소를 직원에게 물려줬다. 1986년 11월 3일 검거돼 남영동대공분실 조사와 징벌방을 전전하며 수형 생활을 하다 1987년 초 건강이 악화돼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석방 후 대동인쇄소를 재건하고 6월 민주항쟁 기획회의, 6월 10일 시청 앞 시위에 참여했다. ‘가자! 시청으로!’라는 유인물을 300만 장쯤 납품해 6월 민주항쟁의 국민 참여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한 바 있다.”
1980년 숭전대 제1기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총학생회장이 돼야만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
“군 제대 후 1979년 2학기에 숭전대에 복학해 10·26사태와 12·12사태를 지켜보면서,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대변하는 것이 학생들의 역사적 사명임을 자각했다. 전국에서 민주화의 봄을 열망하고 있었다. 신군부의 집권 야욕에 맞서 싸우려면 대중투쟁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학도호국단 체제를 해체하고, 직선제 학생회를 부활했다. 그리고 역사적 책임을 감당하고자 감옥 갈 각오로 1980년 4월 8일 숭전대 총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정보 교환과 공동 투쟁을 모색할 학생회장단 연대 모임을 제안한 사람도 나다.”
군부독재 시절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당시 학생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었나.
“1980년 초에는 학원 사찰 중지, 어용 교수 퇴진, 이사회의 불법 퇴출 같은 학원민주화에 방점을 뒀고 그해 5월부터 점점 사회민주화에 힘을 실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군사정권의 폭압적 통치 연장을 종식하고 민주주의적 제도와 구조를 갖춘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자는 내용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주된 구호였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정의로운 이상적인 대동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어쩌다 시위를 하게 됐나.
“시골 촌놈이 서울에 와서 목격한 부의 불평등이 계기가 됐다. 대학 신입생끼리 다방에 갔는데 아무도 커피 값을 안 내더라. 그래서 내가 냈는데 같이 커피 마신 친구 집에 가보니 너무 호화스러웠다. 한 달 동안 쓸 돈을 커피 값으로 내버려서 어떻게 버티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니 짜증이 몰려왔다. 우리 사회 빈부격차가 얼마나 심한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때는 부의 양극화가 정말 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해서 거의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한 것도 그 무렵이다. 학생들이 저항하자 그걸 막으려고 데모를 한 번이라도 하면 사형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를 단행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것은 옳지 않기에 데모에 앞장섰다. 인간이 뚫린 입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는 줘야 한다는 게 평소 내 지론이었다.”
죽고 싶을 만큼 가혹한 고문 후유증
그 때문에 가혹한 고문을 수없이 당했다고 들었다.“1980년 전두환이 지휘하던 합동수사본부에서 80일 동안 고문당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손목에 찬 수갑에 쇠파이프를 끼워 통닭처럼 대롱대롱 매달아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고문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손목 힘줄이 심하게 늘어나 수술을 받았다.”
고문을 한 명분이 뭔가.
“처음에는 강성 데모 주동자들을 잡아다 행적을 캐려고 고문했는데 광주민주항쟁이 터지니 김대중 씨와 연결하려고 했다. 우리를 행동대로 만들어야 김대중 씨를 잡아넣을 설득력이 생기지 않나. 낮에는 김대중 씨를 만난 적도 없는데 만난 것처럼 허위 진술을 하도록 강요했다. 저녁에는 ‘청와대 목침’ 폭격을 당했다. 무술 3단 이상에 키가 176㎝ 이상이어야 선발되는 33헌병대 헌병들이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지점과 가슴을 손바닥으로 후려쳐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신음 한마디라도 나올 때까지 계속 그 짓거리를 했다.”
허위 진술을 어떤 식으로 유도하나.
“처음에는 북한에 갔다왔는지, 두 번째는 북학 공작원들과 만났는지, 세 번째는 광주에 갔다 왔는지 추궁해 김대중 씨와 엮으려고 했다. 잘못하면 사형될 수도 있고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최소 5년에서 10년은 감옥살이를 해야 하니 계속 부정했다. 나한테 뭔가 얻어야 고문을 관두겠다 싶어 심재철을 통해 김대중 씨에게 50만 원을 받았다고 허위로 진술했다. 수사관들이 김대중 씨가 살던 동교동 집을 어떻게 가는지, 지하실에 가면 뭐가 있는지 다 알려줬다. 심재철은 그때까지 검거되지 않아 증인으로 세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라 안 잡힐 줄 알았다. 나중에 재철이가 내 방에 왔는데 목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서 당한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1986년 김근태 선배와 끌려간 남영동 대공분실이 호텔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남영동 대공분실 내가 있던 방에서 두 달 뒤 (서울대생) 박종철이 죽었다.”
학생운동을 1970년대에 한 세대와 1980년대에 한 세대는 어떤 차이가 있나.
“1970년대 데모를 한 학생들은 양심수라 불릴 만큼 자기 관리와 희생을 당연시하면서 학생운동을 실천한 세대다. 이에 반해 1980년대 데모를 한 세대는 주사파적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북한을 신성시하고 대한민국을 중심에 두지 않는 이적 세력이 됐다. 또한 개인의 사회적 성취를 우선하고 신분상승을 추구하면서 학생운동을 벌인 초심을 잃었다. 탐욕에 빠져 부패하고 타락한 길을 걷게 됐다. 특히 주사파 이론에 빠진 86세대(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1960년대 태어난 세대)가 들고나온 식민지 반봉건 사회구성체론이 운동권에 반미운동을 확산시켰다. 집권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반국가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 측면도 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을 정의롭게 만들려고 한 애국 운동이지만, 1980년대 일어난 학생시위는 민주화운동을 숙주 삼아 민족 대단결이라는 미명하에 북한을 이롭게 하고자 했던 매국 운동이었다.”
윤여연 대동인쇄소 대표는 “윤석열 정부가 3년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잘 운영하려면 집권여당의 안정 과반 의석 확보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박해윤 기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린 사람들
그는 “86세대 운동권은 북한을 찬양하고 당면 투쟁을 회피했다. 당면 투쟁보다 전국 조직 건설에 치중해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안타까운 죽음도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86세대 운동권의 선봉에 있던 이인영 고려대 총학생회장, 우상호 연세대 총학생회장 등이 주축이 돼 서울 지역 대학생 협의회인 서대협을 만들었다. 서대협의 목표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만드는 거였다. 서대협은 이한열의 장례식에 100만 인파가 몰렸을 때도, 이후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도 자신이 희생할 각오로 앞에 나서지 않았다. 1988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이 된 임종석은 수령 대접을 받았다. 사수대가 그의 주변 50m를 사수하고 임종석은 그 안에서 돌아다니는 수령놀이만 한 셈이다. 이들은 학생운동을 국회의원 출마를 위한 팸플릿 기재용 스펙으로 만들어놨다.”
그는 86세대 운동권에 정치판이라는 놀이터를 제공한 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DJ)라고 꼬집었다.
“DJ는 1989년 3월 학살 책임자 중 1인이던 노태우와 중간평가 연기에 합의했다. DJ의 잘못된 선택을 되돌려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던 평민연(이해찬, 임채정, 문동환 등) 재야입당파가 운동의 원칙과 대의명분을 망각하고 DJ의 영향력에 투항하면서 운동권의 지역 대중 지지 기반이 급격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신분 상승을 탐내는 이들을 위한 정치 놀이터가 됐다. 이후 민주당에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정치권 수혈 대상이 된 86세대 활동가들은 신분 상승을 위해 학생운동의 역사적 사명과 역할을 외면했다고 할 수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진보 진영의 대장답다고 평가하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이재명 대표가 성남시장 시절 관계한 대장동 비리 등 지능형 부패 사건에 대해 국민 대다수는 유죄라고 보고 있다. 주변의 관련자 여러 명이 자살한 것도 석연치 않다. 이런 사람이 인간 해방의 대동 세상을 희망하는 진보 진영의 대표가 될 수 있겠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대정신은 뭐라고 보나.
“세계 초일류 선진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특권과 반칙을 추방하고 불공정·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제도를 정비해 국가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정쟁으로 국력을 낭비하는 주사파 논리에 세뇌된 3류 매국정치를 추방하고 일류 애국정치로 탈바꿈해야 한다. 세대교체와 세력교체를 포함한 사회경제적 토대를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사회 대청소 운동이 필요하다.”
각계가 4월 총선에 거는 기대가 크다. 어느 쪽의 승리를 예측하나.
“대통령 취임 2년이 다 되도록 민주당은 다수 의석을 무기 삼아 정부조직법조차 통과시키지 않고 국정의 발목을 잡는 각종 정쟁을 제기해 온 국민을 피로하게 만들고 있다. 4월 총선에서 누가 승리할지보다는 대한민국이 정상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을지에 관심을 가질 때다. 이번 선거에서는 어느 쪽도 쉽게 이기긴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윤석열 정부가 3년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잘 운영하려면 집권여당의 안정 과반 의석 확보가 절실한 것은 분명하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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