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음악 시작으로 한국 문화에 입덕
SM·사우디 협업해 중동 출신 K팝 아이돌 제작도 가능
한국 아이돌 부른 아랍어 노래 한 곡에 82만 구독자 모여
세심하게 중동 문화 신경 써가며 콘텐츠 개발해야
쿠란 표지와 비슷해 음반 7만 장 폐기한 사례도…
김창모 한국-아랍소사이어티 사무총장. [박해윤 기자]
4월 26일 만난 김창모(61) 한국-아랍소사이어티 사무총장은 같은 달 초 발표된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2024 해외 한류실태 조사’ 결과에 무척 고무된 표정이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중동 주요국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괄목할 수준으로 높아지고 있다.
1년 전과 비교해 한국 문화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증가했다’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이집트(67.7%)였다. 뒤를 이어 인도(67.1%), 사우디아라비아(65.1%), 아랍에미리트(UAE·63%), 말레이시아(58%) 순이었다. 상위 5개국 중 3개국이 중동 국가였다.
이집트, 사우디, UAE의 한국 콘텐츠 소비자들은 미래에도 ‘긍정적 기대감’을 나타냈다. ‘한국 문화콘텐츠에 대한 1년 후 나의 관심 변화’를 묻는 질문에도 ‘증가할 것이다’라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이집트(70.2%)였다. 사우디와 UAE도 각각 65.8%와 64%가 ‘증가할 것이다’라고 답해 3위와 4위를 기록했다. 이번 조사는 전 세계 26개국의 한국 콘텐츠 경험자 2만5000명을 대상으로 2023년 11월 온라인 설문 방식으로 진행됐다.
김 사무총장은 “최근 중동에 대한 관심이 커졌지만 여전히 중동은 한국에서 ‘미지의 세계’로 여겨지고, 편견도 많다”며 “그중 하나가 중동이란 성장 가능성 높은 미래의 시장을 건설 시장으로만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우디를 중심으로 주요국들의 개혁·개방 속도가 빠르고 한국의 경제산업은 물론이고 문화, 전통, 사회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어 이른바 K콘텐츠가 향후 영향력을 크게 키울 수 있는 시장이 중동”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에 관심 없던 중동, 2010년 이후로 상전벽해
그룹 방탄소년단(BTS) 정국이 2022년 11월 20일 카타르 알코르 알베이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에서 월드컵 공식 사운드트랙 ‘드러머스’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뉴스1]
김 사무총장에게서 한국 콘텐츠 산업의 중동 진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중동에서 대사로 근무했다. 한국 콘텐츠의 인기를 많이 체감했을 것 같다.
“처음 중동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을 때를 돌이켜 보면 당시 중동 사람들은 한국 콘텐츠에 관심이 없었다. 해외 공관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알리는 행사를 열어도 특별한 반응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010년 이후로는 정말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 콘텐츠가 많은 관심을 받았다. 카타르와 알제리 대사로 근무할 때 한국 콘텐츠와 관련된 행사는 말 그대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현지인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외교관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한국 드라마, 음악, 게임에서 음식과 관광으로 관심이 확대되는 것도 느꼈다.”
한국 콘텐츠 중 향후 중동에서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분야는.
“한국 콘텐츠의 경쟁력을 처음 알린 건 드라마와 K팝이었다. 여기에 영화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에는 중동에서 한국 게임에 대한 관심과 인기도 엄청나다. 아직 국내에는 덜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중동 지역은 전체 인구의 60% 이상이 꾸준히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세계에서 모바일 게임 앱 다운로드 수가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다. 중동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이슬람 신자)은 술을 안 마신다. 그러다 보니 실내에서 모여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며 하는 여가 활동으로 게임을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 계속해서 게임산업이 중동에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는 것이다.
특히 중동 사람들 사이에선 한국이 ‘e스포츠 종주국’이며 뛰어난 선수와 게임 개발사가 많다는 이미지도 있다. 한국 게임 기업이 메타버스 기술과 접목이 용이한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에 강하다는 점도 중동에 잘 알려져 있다. 한국 게임 기업이 현지에 게임을 수출하기도 좋고, 반대로 중동에서 투자를 유치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사우디 국부펀드인 ‘퍼블릭인베스트먼트펀드(PIF)’가 국내 대표 게임 기업인 엔씨소프트와 넥슨에 적극 투자하기도 했다.
“아랍 사람들은 유럽과 아시아 간 오랜 중계무역 전통과 상인 기질로 인해 거래에 매우 능하고 돈이 될 것을 알아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들이 한국 게임산업에 투자하는 것은 그만큼 K게임의 경쟁력이 있다는 뜻이다. 특히 사우디와 UAE는 자국의 게임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도 정부가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사우디의 경우 세계 게임 시장의 허브로 성장하겠다는 목표까지 마련했다. 2023년 게임산업에만 약 49조9000억 원의 투자(넥슨은 이 중 1조 원, 엔씨소프트는 8000억 원 정도의 투자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UAE도 게임 산업 육성에 관심이 많다. UAE는 이미 2021년에 ‘아부다비 게이밍 이니셔티브’란 전략을 발표했다. 게이밍 허브라고 이름 붙여진 시설에 입주하는 게임 관련 기업에 세금 혜택을 주고 있다. 또 최근 현지 언론보도에 따르면 아부다비 인근 알 라하 해변 지역에 약 1조 원을 투자해서 ‘e스포츠섬’을 개발하고, 콘텐츠 제작 공간을 마련할 것이라고 한다.”
모로코인 유튜버가 K팝 앨범 내는 시대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2019년 10월 13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BTS는 11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킹파드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방탄소년단 월드투어 ‘러브 유어셀프: 스피크 유어셀프(LOVE YOURSELF: SPEAK YOURSELF)’를 개최, 사우디 스타디움에 오른 최초의 외국인 가수가 됐다. [뉴스1]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아랍 사람들의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카타르에서 근무할 땐 현지 정부의 고위 관계자가 ‘한국 사극에 나온 홍시를 먹고 싶다. 어떻게 구할 수 있느냐’고 문의해 오기도 했다. 카타르에는 이미 한국 음식점이 여럿 있다. 특히 중동 주요 산유국으로 소득수준이 높은 사우디, UAE,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같은 나라의 경우 오래전부터 비만이 중요한 보건의료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인 채소 섭취 같은 ‘건강식품 장려 정책’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한국 음식은 김치, 비빔밥, 나물같이 채소를 기반으로 한 메뉴가 유명하다. 특히 김치와 비빔밥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 한국의 스마트팜 기업들이 중동에 최근 많이 진출하고 있다는 점도 한국 음식을 알릴 호재다. ‘한국 기술로 사막에서 생산한 신선한 채소로 맛있고 건강한 K푸드를 만들어 먹는다’는 식의 스토리가 담긴 이벤트를 만드는 것도 장기적으로 K푸드를 알리고 위상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K관광의 성장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중동에서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아랍 사람들에게는 음식과 언어 측면에서 관광할 때 불편한 점이 많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에서는 할랄 음식(돼지고기 등이 들어가지 않고, 이슬람 율법에 맞게 도축된 고기로 만든 음식)을 접하는 게 매우 어렵고, 아랍어는 물론이고 영어도 다른 나라에 비해 잘 통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중동 관광객의 1인당 평균 지출액이 다른 지역 관광객에 비해 높다는 점이다. 그만큼 우리 입장에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중동 관광객 유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특히 소득수준이 높은 산유국 출신 관광객을 더욱 많이 유치할 수 있도록 체계적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한국 콘텐츠 업계에 외국인 아티스트도 과거보다 늘었다. 일본, 중국, 태국, 프랑스, 베트남 등 출신 국가도 다양해지고 있다. 아랍권에서 K팝 아티스트가 나올 수도 있을까.
“알제리 대사로 근무하던 중 KBS가 주최하는 K팝 국제대회의 예선전이 현지에서 열렸다. 그때 놀란 것은 많은 참가자가 한국에 가본 적이 없지만 유명 K팝 곡의 안무는 물론이고 가사를 완벽하게 발음하면서 불렀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모로코인 유튜버 김미소 씨의 경우 구독자 수가 131만 명에 달한다. 김 씨는 두 차례 K팝 싱글 앨범을 발매했고, 아랍 유튜브 음원 차트 1위에 오른 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아랍소사이어티가 2022년에 KBS World Arabic 채널과 함께 아랍인 대상 온라인 K팝 대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17개국에서 500여 명이 참가했다. 최종 심사에 참여한 SM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도 ‘실력이 기대 이상이고, 성장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놀라워했다.
아티스트 육성에 남다른 노하우가 있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아랍권 출신의 아티스트를 발굴해서 성장시키는 것도 충분히 기대해볼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아랍 출신의 K팝 아티스트가 나오는 건 시간문제라고 본다. 2022년 사우디 투자부가 SM 엔터테인먼트와 체결한 양해각서(MOU)에도 현지 아티스트 발굴과 육성 관련 내용이 있다. 아랍권 인구가 4억6468만 명(2022년 세계은행 자료)에 이르기 때문에 시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아티스트 중에서는 아이돌 그룹인 B.I.G(비아이지)가 아랍어로 노래를 부르며 현지에서 유명세를 탔다. 이들이 유튜브에 유명 아랍곡을 부른 영상을 올렸는데 구독자 수가 약 82만 명까지 늘어났다.”
김 사무총장은 인터뷰 중 “우리 콘텐츠를 중동에 수출하는 게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현지 시장에서 인정받으려면 우리도 그들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좀 더 체계적인 협력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동이 콘텐츠 산업에 진심인 이유
모로코에서 촬영한 영화 ‘모가디슈’의 한 장면. [롯데 엔터테인먼트]
“석유와 천연가스 판매로 재정이 넉넉한 걸프협력회의(GCC·사우디, UAE,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이 회원국) 국가들은 앞서 언급한 게임뿐 아니라 영화산업 육성에도 관심이 많다. 사우디는 2019년 ‘홍해국제영화제’를 만들었고, 사우디문화발전기금(The Cultural Development Fund)도 조성했다. 이 기금은 2023년 ‘칸 영화제’에서 영화산업 육성을 위한 1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카타르도 도하필름인스티튜트(Doha Film Institute)란 영화산업 육성 기관을 만들어 전 세계의 다양한 영화 기획 및 제작에 나서고 있다. UAE는 자국에서 유명 영화 제작을 위해 다양한 재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타트렉’과 ‘미션 임파서블’ 같은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한국 콘텐츠 기업들도 영화나 드라마를 중동에서 제작하고 이 과정에서 중동 산유국들로부터 투자나 재정 혜택을 받는 전략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많지는 않지만 중동에서 우리 드라마와 영화가 제작된 적도 있다. 드라마 ‘미생’은 요르단에서 일부 에피소드를, 영화 ‘모가디슈’와 ‘비공식 작전’은 모로코에서 촬영했다.”
중동 나라들이 자국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에 긍정적인 이유가 있나.
“사우디를 비롯한 GCC 나라들 모두 경제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고, 산업을 다각화하려고 한다. 또 공통적으로 정도 차이만 있지만 관광산업을 육성하고자 한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해 국제적으로 유명한 영상 콘텐츠가 자국에서 제작되면 자국민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로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국내의 유명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에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것과 같은 이치다. 또 현지 인력과 콘텐츠 기업이 영화와 드라마 제작 과정에 참여하면서 노하우도 습득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지속 가능한 긍정적 파급효과가 있는 것이다.”
중동에 콘텐츠를 수출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은 어떤 게 있나.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논란은 여러 번 있었다. 가령, 한국 드라마에서 아랍식 복장을 한 배우가 쿠란(이슬람 경전)에 발을 올리거나,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장면이 논란을 일으켰었다. 한 아이돌 그룹의 앨범 디자인이 쿠란의 표지와 비슷해 소속사가 초판 7만 장 전량을 폐기하고 다시 제작한 적도 있다. 모두 중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발생한 일이다. 중동 콘텐츠 시장이 중요해지는 만큼, 앞으로는 좀 더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중동 나라들은 정책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다. 지금은 중동 콘텐츠 시장이 계속 열리는 분위기지만 갑자기 비중동권 콘텐츠 유통이 제한된다거나 하는 식의 변화가 있을 가능성은 없나.
“가장 보수적 나라로 꼽힌 사우디의 경우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왕세자가 직접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비전 2030’(중장기 경제발전 계획으로 2017년에 발표됐음)에서 콘텐츠 산업의 육성 필요성을 비중 있게 강조한다. 그리고 2018년에만 사우디에서 음악 공연이 5000번 넘게 열렸다. 2019년에는 방탄소년단(BTS)이 비아랍권 가수로는 최초로 수도 리야드에서 대규모 콘서트를 열었다. 블랙핑크도 2023년에 리야드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단순히 형식적이건, 선언적인 의미로 콘텐츠 산업 육성을 언급했다면 이렇게 큰 변화가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우디에서 아시안게임·엑스포·월드컵·올림픽 등이 열릴 예정이거나, 열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사우디뿐 아니라 다른 중동 나라들도 콘텐츠 산업을 키우고, 한국을 포함해 경쟁력 있는 다른 나라의 콘텐츠를 수입하는 데 열린 자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본다.”
한국-아랍소사이어티가 매년 열고 있는 ‘아랍영화제’는 팬이 꽤 많다고 들었다.
“그렇다. 국내 유일의 아랍 영화제다. 대규모 행사는 아니지만 이른바 ‘팬덤’이 있다.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아랍 영화를 알리기 위해 2022년부터는 온라인 상영도 하고 있다. 또 영화를 본 관객들이 직접 감독이나 배우와 소통할 수 있도록 ‘관객과의 대화’도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모두 진행하고 있다. 반응은 아주 좋다고 한다. 최근 아랍 영화제를 둘러싸고 의미 있는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집트·모로코·레바논같이 대중문화가 발달하고, 세속주의 성향이 강한 아랍 국가의 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GCC 국가에서 제작된 영화가 많아지고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아랍 지역에서 제작된 영화가 소개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아랍소사이어티 사무총장 취임 1년을 앞두고 있다. 향후 계획은 어떤 게 있나.
“중동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문화, 학술, 교류 행사의 수요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비영리재단이다 보니 예산이 넉넉하지 못하다. 정부, 기업, 지자체 등에서 미래에 대한 의미 있는 투자라고 인식하고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