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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표단, ‘모스크바 3상회의’서 소련 계략에 말려들다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④] 모스크바의정서 주역은 노회한 몰로토프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美대표단, ‘모스크바 3상회의’서 소련 계략에 말려들다

  • 우리는 제2회에서 미국의 초기 남한 점령정책의 대강을 살폈고, 제3회에서 소련의 초기 북한 점령정책의 대강을 살폈다. 이것을 통해, 대체로 1945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남한과 북한 각각에서 점령자에 충실할 단독정권이 배태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단독정권 수립에 앞장선 쪽은 소련인 것 같다는 가설을 소개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그것은 미국 정부 안에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이 소련과 협상을 재개해야 하며, 이 협상을 통해 코리아에 대한 미국·소련·영국·중화민국 등 4대 연합국 신탁통치안을 확정하고 신탁통치 과정을 거쳐 통일된 코리아임시정부를 세운 뒤 그 정부를 국제연합에 가입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구상이 논의되기 시작한 사실이다. 이 ‘국제주의자’들에 맞서, “소련이 북한에 친소적 단독정권을 세우려고 하는 마당에, 미국은 남한에 친미적 단독정권을 세우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구상이 제의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단 국제주의자들의 제의가 받아들여져, 미국 정부는 소련 정부를 상대로 협상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대국 외무장관회담이 열렸다. 중화민국은 국내 형편으로 말미암아 외무장관을 참석시킬 수 없었다.

    이 회담은 ‘코리아에 관한 의정서’를 채택했다. 이 의정서의 핵심은 “남북한을 통튼 코리아임시정부를 세우되 4대국에 의한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받게 한다”는 데 있었다. 소련에 매우 유리한 의정서가 성립된 원인은 미국 대표의 무지와 무성의에 있었다. 게다가 이 의정서에 관해 미국의 주요 언론매체들이 ‘오보’를 냈고, 그 ‘오보’가 국내에서도 반복 보도돼 큰 혼란을 일으켰다.

논점 1
미국 ‘국제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소련의 대응

1945년 12월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에 참석한 
번스 미국 국무장관, 몰로도프 소련 외무장관, 베빈 영국 외무장관(앞줄 왼쪽부터). [GettyImage]

1945년 12월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에 참석한 번스 미국 국무장관, 몰로도프 소련 외무장관, 베빈 영국 외무장관(앞줄 왼쪽부터). [GettyImage]

미국 국제주의자들의 구상 | 우리가 제1회~제3회에서 간헐적으로 살폈듯, 일련의 전시연합국회담에서 원칙적으로 합의된 ‘코리아에 대한 4대 연합국의 기본구상’은 “일제가 패망한 뒤 코리아를 4대 연합국의 신탁통치 아래 두고 일정한 과정을 거쳐 독립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원칙적 합의를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대한 구체적·실천적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가 패망하자 미국은 소련군이 북한에 진입하고 있음에 주목해 급한 대로 코리아를 38도선에서 분할하는 잠정적 조치를 취한 것인데, 그때부터 약 2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비로소 분할이 굳어지는 것을 완화하기 위한 방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첫 조치가 1945년 10월 13일 미국의 ‘국무부·전쟁부·해군부 3부 조정위원회’가 채택해 17일 일본 도쿄의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시달한 ‘초기 기본지시’였다. 다시 상기시키지만, 그때 남한주둔군 사령관 하지를 지휘하는 미국의 현지 상급 지휘관은 맥아더였던 것이다. 

이 문서는 코리아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군사점령을 네 연합국의 신탁통치로 전환하고 그 과정을 거쳐 독립하게 될 코리아를 국제연합에 가입시킨다는 구상을 담았다. 같은 맥락에서, 이 위원회는 10월 20일 “코리아의 현재의 구역적(區域的) 군사점령은 가장 빠른 시점에 코리아에 대한 신탁통치에 의해 대체돼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국무부 극동국장 존 빈센트는 10월 20일 미국외교협회에서 연설하며 코리아에 대한 네 연합국의 신탁통치에 대해 언급했으며, 국무부 장관 제임스 번스는 25일 기자회견에서 코리아의 분할은 잠정적인 것으로 그것을 철폐하려면 미국과 소련 사이에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빈센트나 번스처럼 코리아의 장래를 미국과 소련의 협상을 통해,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서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통해 결정하고자 한 사람들을 ‘국제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소련 정부의 반응 | 미국 정부의 이러한 의사 표시에 대해 소련 정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까닭을 우리는 10월 24일 흑해 연변에 위치한 스탈린의 휴양지에서 교환된 스탈린과 주소련 미국대사 해리먼 사이의 대화에서 찾게 된다. 이 대화에서 스탈린은 9월 런던에서 열린 연합국 외무장관회담에서 소련이 제의한 ‘일본 문제에 대한 소련 정부의 참여와 발언권 행사의 보장’을 미국이 거부한 데 대해 거세게 항의하면서 이제 각 전승국은 각자가 점령한 영역을 자기의 방침대로 관리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이다. 신승권 교수가 이미 지적했듯, 이것은 스탈린이 북한을 자신의 기존 방침대로 통치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미국 정부의 재(再)제의 |
스탈린이 이러한 태도를 보였는데도, 미국 국무장관 번스는 11월 3일 소련 주재 미국대사 해리먼에게 코리아에 관한 소련 정부의 의사를 타진하도록 훈령했다. 해리먼은 8일 몰로토프 외무장관을 만나 미국 정부의 의사를 전달하면서, 동시에 (ⅰ) 남북한 사이 철도 및 연안해운의 연결과 단일세제(單一稅制)의 확립 및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주둔군사령관 협의의 개시, 그리고 (ⅱ) 소련이 11월 7일부터 압록강변에 위치한 북한 수풍수력발전소 시설들을 철거시켜 소련으로 가져간다는 정보에 대한 확인 등을 요청했다. 미국 정부의 목적은 코리아에 관해 두 주둔군사령부가 ‘작동할 수 있는 잠정적 합의’를 성립시키는 데 있었다. 



소련 정부의 회답 | 소련 외무부는 11월 21일 회답했지만, 내용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제1항에 대해서는 관련된 국(局)이 검토한 뒤 회답하겠다고 답변했으나 그 이후 실제로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제2항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만 답변했다. 

그러나 그 답변에 대한 반론은 꾸준히 제기됐다. 일제 패망 당시 서울에서 일본인의 귀국을 돕는 일에 종사했던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는 당시의 한반도 상황에 대한 자세한 관찰 기록을 훗날 책으로 출판했다. 학계에서 신뢰성을 인정받고 있는 이 책은 “11월 8일부터 12월 중순까지 소련군이 수풍댐의 발전기들과 수차(水車)들을 부분적으로 철거해 갔다”고 증언했다. 도쿄대학의 와다 하루키 교수도 이 자료를 인용하면서 소련의 회답은 거짓이었다고 단정했다. 

해리먼의 분석 | 해리먼 대사는 소련의 입장을 더욱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소련 신문들이 코리아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그 결과 당 기관지 ‘프라브다’와 정부 기관지 ‘이즈베스치아’는 사실상 완전히 침묵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해리먼은 자신이 가진 소련의 코리아 인식에 대한 지식, 소련 외무부와의 접촉, 그리고 소련 신문들에 대한 대사관의 분석 등을 토대로 11월 12일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첫째, 소련은 소련에 적대적인 국가에 의해, 코리아가 마치 핀란드와 폴란드처럼 소련을 공격하기 위한 도약대로 쓰일 수 있음을 경계한다. 따라서 소련은 코리아에서 우월한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할 것이다. 

둘째, 소련은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이 그러한 입장의 소련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그 구상은 소련에 네 표 가운데 한 표밖에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소련은 코리아가 독립한 경우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코리아의 정치체제에서 찾고자 할 것이다. 따라서 소련은 자국에 유리한 정치체제가 코리아에 수립되는 쪽으로 시도할 것이다. 

넷째, 그러한 맥락에서 소련은 어떤 다른 나라들이 코리아에 관해 문제를 제기할 때까지는 침묵하면서 북한에서 정치적 통합을 추구하고, 남한에서는 정치적 침투에 몰두할 것이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해리먼 대사의 이 분석이 대체로 정확하다고 평가했다. 와다는 소련이 남북한 전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북한에 대해 자신의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한 행동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분석한 것이다.

논점 2
미국 ‘소련봉쇄주의자들’의 남한 단독정권 구상을 둘러싼 논쟁

1946년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회의. [미디어한국학 제공]

1946년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회의. [미디어한국학 제공]

해리먼의 보고서는 코리아에 대한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에 소련이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는데, 그 구상은 남한에서는 이미 격렬한 반대에 직면해 있었다. 빈센트의 발언이 보도된 뒤 남한에서는 좌우익 모두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미군정 고위간부들이 공감을 표시했다. 하지는 물론이고 국무부의 관리로 하지의 고문관이 돼 서울에서 일하던 메릴 베닝호프 및 윌리엄 랭든도 그러했으며, 정무 협의를 위해 잠시 서울을 방문한 전쟁부 차관보 매클로이도 마찬가지였다. 

대체로 이 무렵에 미군정은 남한만을 단위로 하는 ‘독자적인 군대’의 창설에 착수했다. 11월 13일 미군정 산하에 창군을 담당할 국방사령부를 설치했으며, 12월 5일 군사 요원을 양성할 군사영어학교를 개교했고,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며, 이른바 뱀부계획(Bamboo Plan)에 따라 1946년 4월까지 각 도(道)에 1개 연대씩 창설한다. 

이러한 조치와 병행해, 국무부가 미군정에 파견한 정치고문 랭든은 1945년 11월 20일 신탁통치 구상을 포기하고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남한에 ‘통치위원회 같은 것’을 세울 것을 국무부에 건의했다. 이 건의는 남한에 단독정권을 세우자는 구상이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됐다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그 밑에는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38도선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이미 늦었으며, 따라서 소련을 봉쇄할 발판을 남한에 확보해야 한다”는 발상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국제주의자들은 이러한 소련봉쇄주의자들의 구상에 거세게 반발했다. 국제주의자들은 소련과 협상할 공간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이 방법을 통해 코리아의 문제를 풀자고 주장한 것이다. 격론이 뒤따랐지만, 결국 국제주의자들의 주장이 관철된다.

논점 3
소련의 미·소공동위원회 구상을 둘러싼 논쟁

그러면 소련은 코리아에 대해 어떤 구상을 갖고 있었던가? 우리는 두 개의 문서를 분석함으로써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소련 외무부의 구상 | 소련 정부의 입장은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 부국장 에브게니 자브로딘이 1945년 12월 작성한 ‘코리아에 대한 단일한 임시정부의 문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서는 우선 “앞으로 세워질 ‘코리아의 단일 임시정부’는 소련에 이익이 되는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전제한 데 이어, “코리아는 극동에서 소련에 새로운 걱정거리를 안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부연했다. 

자브로딘은 이러한 큰 틀을 제시한 뒤 구체적 방안을 펼쳐놓았다. 이 문서에서 그는 “코리아 전체에서, 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한 채, 보통·비밀·평등 투표를 통해 인민대표를 선출하고 그렇게 선출된 인민대표들로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해 코리아공화국을 선포하게 하고 코리아인민정부를 구성하게 한다”고 제의한 것이다. 크게 보아 합리적 방안이다. 그러나 ‘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한 채’는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실제로 훗날 심각한 논란의 대상이 된다. 소련 그리고 소련의 결정을 추종한 북한의 집권 세력과 남한의 좌익은 ‘민족반역자’의 범위를 넓게 잡으려고 했고, 미국과 남한의 ‘우익’은 그 범위를 제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말리크의 구상 | 자브로딘의 제의보다 훨씬 구체적인 구상은 일본 주재 소련대사 야콥 말리크로부터 나왔다. 자브로딘이 보고서를 작성한 시점과 같은 시점에 그가 작성한 ‘코리아에 대한 단일정부의 문제에 대해’에서, 그는 대체로 자브로딘의 구상, 곧 외무부의 구상과 같은 방안을 제시한 데 이어, ‘북한주둔소련군사령부와 남한주둔미군사령부의 대표들로 공동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제시한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현재 전체 코리아에 걸려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자는 뜻이었다. 

말리크 구상의 핵심은 바로 미·소공동위원회 설립에 있었는데, 그 의미는 컸다. 카이로회담에서 합의된 4대국 협의의 틀을 미·소 양대국 협의의 틀로 바꾸겠다는 뜻으로, 이것은 코리아 문제에 관해 앞으로 영국과 중화민국의 참여를 사실상 배제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만일 그렇게 되면, 소련은 미국을 상대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자브로딘과 말리크의 문서들을 종합한 뒤, 미국의 저명한 소련 전문가 캐스린 웨더즈비 교수는 다음과 같은 추론을 제시했다.
첫째, 소련은 코리아를, 또는 최소한 북한을 폴란드처럼 완전한 위성국가로 만들고자 하지는 않았다. 

둘째, 소련은 ‘핀란드 방식’을 코리아에 적용하고자 했다. 즉 코리아를, 또는 최소한 북한을 소련에 우호적이고 유순한 국가, 다시 말하면 소련의 ‘피보호국’ 비슷한 존재로 만드는 것에 만족하고자 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핀란드 방식’이라는 용어에 주목하게 된다. 흔히 영어로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고 하며 오늘날에도 때때로 쓰이는 이 용어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소련은 스스로의 반(反)나치 민족해방투쟁으로 독립을 성취한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하고는 동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를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핀란드는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핀란드는 1939~1940년 자국을 침공한 소련을 상대로 국민적 저항을 과시했다.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소련을 놀라게 했다. 이 전쟁을 제1차 소련-핀란드전쟁이라고 한다. 

핀란드와 소련의 전쟁은 1941년 6월 다시 시작됐다. 핀란드는 숙적인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차선책으로 나치독일과 제휴해 나치독일의 소련 침공에 가담한 것이다. 흔히 ‘계속전쟁’ 또는 제2차 소련-핀란드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에서 핀란드는 1944년 9월 패전했다. 그 결과 1947년 2월 10일 파리에서 열린 21개 연합국 대 핀란드를 포함한 나치독일 동맹국들 사이에 평화조약이 성립됐을 때 핀란드는 소련에 영토의 일부를 할양했어야 했다. 

소련은 핀란드의 뿌리 깊은 반(反)러시아 정서와 친(親)서방 정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를 위성국가로 만든 소련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유럽에 대해서도 ‘영토적 야심’을 갖고 있다는 의심을 약화시킬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소련은 핀란드를 자신의 노골적인 ‘위성국가’로 만드는 대신에 독립의 외양은 갖춰주면서 여러 장치를 통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철저한 친소국가로 만드는 방식을 선택했다. 

오늘날 핀란드는 러시아에 더는 순종적인 국가가 아니다. 조용하게 국력을 키우면서 친서방정책을 추구해 국가 이미지를 크게 향상시켰다. 그렇지만 한 강대국이 주변의 한 인접국에 독립국의 외양은 유지해 주되 실질적으로는 자국에 고분고분한 국가로 만드는 방식을 ‘핀란드화’라고 하는 전례가 성립됐다.

논점 4
모스크바회담에서 드러난 미·소 사이의 차이

미국과 소련이 코리아에 대해 이처럼 서로 다른 구상을 마련한 상태에서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미국과 영국 및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회담을 시작했다. 코리아 문제에 대한 토의는 17일 본격적으로 진행됐는데, 미국과 소련은 처음부터 상당한 차이를 나타냈다. 

미국 번스 국무장관의 제의 | 지면의 제약 때문에, 번스의 제의를 자세히 소개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의 제의의 바탕에는 (ⅰ)5~10년의 4대국 신탁통치에 역점을 두면서, (ⅱ)코리아 문제를 궁극적으로 유엔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뜻이 깔려 있었다. 

그때 유엔에서 미국은 ‘기계적 다수’를 확보하고 있었음에 반해 소련은 ‘영원한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유엔의 틀 안에서 코리아에 대한 신탁통치를 실시하면 결국 코리아에서 친미적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예견했던 것이다. 더구나 탁치국으로 지명된 나라들 가운데 영국과 중화민국은 미국의 입장을 지지할 것이 확실했다. 

소련 몰로토프 외무장관의 제의 | 번스의 제의를 살핀 뒤, 몰로토프는 소련의 안을 내놓았다. 그의 안은 말리크의 제안에 가까운 것으로 번스의 제안에 비해 코리아에 대해 훨씬 더 우호적이었다. 

코리아가 독립국가로 회복돼야 한다는 것이 전제됐는데, 이것은 번스의 제안에는 없었다. 그리고 비록 임시적이지만 코리아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것도 약속됐는데, 이것 역시 번스의 제의에는 없었다. ‘임시적 코리아정부’를 세우는 데 코리안들이 참가한다는 것, 그리고 신탁통치 협정이 마련되는 경우 그 기간은 미국이 상정한 기간보다 훨씬 짧은 5년 이내로 한다는 것, 역시 코리안에게는 덜 고통스러운 제안들이었다. 

몰로토프 제의의 속셈 | 그러면 몰로토프는 왜 코리아에 대해 훨씬 우호적인 안을 제출했던 것일까? 학자들의 분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코리아 문제를 자신의 입지가 미국의 그것에 비해 월등히 불리한 유엔의 틀 밖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둘째, 코리아 문제를 다룰 때 미국의 입장을 지지할 것이 확실한 영국과 중화민국의 영향력을 사실상 크게 약화시키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1대 1 직접적 협상으로 유도하고자 했다 

셋째, 당시 코리아의 정치 상황에 비춰 이 방식대로 하면 친소 공산주의적 정부, 말하자면 핀란드식 정부의 수립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넷째, 이 방식대로라면 적어도 코리아 전체에 친미적 통일국가가 세워지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번스, 몰로토프의 제의를 받아들이다 | 번스는 약간의 자구 수정을 한 뒤 몰로토프의 제의를 사실상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면 그는 왜 그렇게 한 것일까? 

첫째, 번스는 코리아 문제에 대해 지식도 관심도 없었다. 이 점은 그때 주소련 미국대사관 대리대사로 이 회담에 참석했던 조지 케넌의 일기에서 확인된다. 케넌은 1945년 12월 19일 일기에서 “번스는 이 회담의 대상인 코리안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 코리안은 그에게 관심이 되지 않았다”고 쓴 것이다. 

둘째, 번스의 관심은, 다시 케넌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행적이 국내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이냐에만 집중됐다. 로버트 매시 교수가 지적했듯, 연방하원의원과 연방상원의원을 거쳐 연방대법관까지 역임하고 연방정부의 국무장관이 된 번스는 행정·입법·사법 3부 모두에서 고위직을 지낸 정치인은 미국 역사에서 자신뿐이라는 자부심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는 연방상원의원과 부통령 경력밖에 없으며 전임자의 사망으로 선거를 거치지 않은 채 대통령이 된 트루먼을 얕잡아보면서, 자신이 1948년 실시될 대통령선거에서 현직 트루먼을 제치고 민주당 후보로 공천을 받아 백악관에 입성하겠다는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9월 런던 외무장관회담이 결렬된 마당에 모스크바 외무장관회담마저 결렬된다면 자신의 진로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계산에서 어떻게든 합의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케넌의 일기에 따르면, 번스는 ‘명백하거나 확정된 계획 없이, 명백한 목적이나 한계 없이’ 회담에 임했을 뿐이었다. 이 점을 몰로토프는 잘 알고 있었으며 철저히 이용했다.

논점 5
모스크바 의정서를 둘러싼 논쟁①-트루먼의 반론

‘코리아에 관한 의정서’의 내용 | 번스가 몰로토프의 제의를 받아들임에 따라 합의가 쉽게 이뤄져 12월 27일 회의가 종결됐다. 합의된 내용은 코뮤니케 형식을 통해 모스크바 시간으로 12월 28일 오전 6시 발표됐다. 이것이 4개 항으로 구성된 ‘코리아에 관한 의정서’다.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첫째, 하나의 독립국가로서 코리아를 재수립하고 일제 잔재의 청산 등을 위해 ‘임시적 코리아민주정부’를 세운다. ‘임시적 코리아민주정부’는 “코리아의 산업·수송·농업 그리고 코리아 인민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둘째,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한주둔미군사령관과 북한주둔소련군사령관을 각각 대표로 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 

셋째, ‘임시적 코리아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는 코리아의 ‘민주적’ 정당들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하며, ‘임시적 코리아민주정부’를 미·소·영·중 4대국의 트러스트십(trusteeship) 또는 오뾰카(опе́ка) 아래 둔다. 그 기간은 5년 이내로 한다. 

넷째, 미·소공동위원회를 2주의 기간 안에 소집한다. 

이 4개 항을 보면, 이 의정서가 미국이 카이로회담 이후 일관되게 제의한 신탁통치안을 뼈대로 삼되 소련의 제안을 거의 모두 수용함으로써 성립됐음을 알게 된다. 

트루먼의 불만 | 이 의정서가 발표되면서, 코리아에서는 물론 우선 미국 안에서 반론이 제기됐다. 반론은 어느 누구보다도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제기됐다. 트루먼은 귀국한 번스를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나는 신문 보도를 접하고 나서야 협정 내용을 알았다”는 취지의 말로 핀잔을 주었다. 이 발언은 번스가 트루먼과 협의하지 않은 채 몰로토프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만일 이 해석이 정확하다면, 모스크바회담에서 미국대표단은 대통령과 협의 없이 코리아의 운명에 매우 큰 직접적 영향을 주게 되는 합의를 성사시켰으며 따라서 무책임하게 처신했다는 비난을 받을만하다. 

트루먼의 불만은 다른 형태로도 나타났다. 1946년 1월 5일 번스에게 쓴 편지에서, 트루먼이 “귀관은 코리아에 강력한 중앙정부를 세울 것을 요구했어야 한다”는 취지로 나무란 것이다. 그러나 트루먼은 이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논점 6
모스크바의정서를 둘러싼 논쟁②-서구학계의 비판

모스크바의정서에 대한 비판은 그 이후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됐다. 몇몇 사례를 상기하기로 한다. 미국의 외교사학자로 조지아대 교수인 윌리엄 스툭 박사는 “미국과 소련이 본질의 해결을 외면한 채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비(非)구체성과 애매함을 남겼다”고 논평했다. 

이완범 교수 역시 그 점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모스크바의정서는 모든 문제의 해결을 우선 미·소공동위원회에 맡겼으며 이는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맡긴 것인데, 이 핵심적인 국가들이 핵심적 문제인 ‘신탁통치’에 대해 사실상 완전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것이다. ‘신탁통치’와 관련해, 미국은 영어의 ‘트러스트십’이라는 단어를 제시했고, 소련은 러시아어의 ‘오뾰카’라는 단어를 제시했는데, ‘트러스트십’은 글자 그대로 ‘신탁통치’를 의미하지만, ‘오뾰카’는 ‘후견’ 또는 ‘후원’을 의미한다. 동일한 한 협정 안에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두 개의 단어가 함께 들어간 것이다. 다시 이완범 교수에 따르면, 그리하여 “개념 규정마저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모든 번거로운 결정을 이후 개최될 미·소공동위원회에 떠넘겨 버렸으니 모스크바회의는 코리아문제에 관한 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회의였다.”

논점 7
미·소공동위원회 구성이 갖는 의미를 둘러싼 논쟁

거듭 말하지만, 모스크바 의정서는 모든 문제의 해결을 미·소공동위원회로 넘겼다. 즉 모든 문제를 미국과 소련이 합의할 문제로 넘겼음을 의미했다. 그러면 이 결정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이었을까? 

분단 현실의 고착화에 이바지했다 | 미·소공동위원회가 구성된다는 것은 결국 미국과 소련이 각각 거부권을 갖게 되며, 따라서 그들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한 분단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을 의미했는데, 이 시점에서 미국과 소련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합의를 성사시킬 개연성은 대단히 낮았다. 일본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로 게이오대 교수인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박사는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의정서가 발표된 시점에, 미국과 소련 사이에 협상을 위한 여지는 없었다”고 논평했다. 

이렇게 볼 때 소련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제안을 통해 자신이 코리아의 임시정부 수립과 그것에 근거한 독립에 매우 열성적인 듯한 외양을 갖추면서 사실상 거부권 확보를 통해 적어도 북한을 자신의 세력권 안에 확실하게 포함해 놓고 거기에 친소적 정부를 세울 장치를 마련해 놓은 셈이 됐다. 이러한 맥락에서, 네덜란드의 에릭 반 리 교수는 몰로토프가 ‘속임수의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고 논평했다. 

신승권 교수는 반 리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소련의 신탁통치안은 두 점령지역의 독자적인 존속을 허용하고 있다. 두 점령지역의 폐지는 코리아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야 가능했다. 소련안은 결국 소련의 완전한 동의 없이는 코리아에 대한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으며, 또한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데 우세한 좌익 성향의 정당·단체를 충분히 참가시킬 것을 내포하고 있어, 소련의 국익이 미국의 국익보다 우월하게 보장될 것을 예견하고 있다. 

반론 : 소련은 북한분단국가 수립 구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
이러한 해석에 대해, 김성보 교수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이 시점에 소련 정부가 북한에 ‘분단국가’를 수립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소련은 여전히)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이 유지되는 속에서 (코리아의) 단일정부의 창출을 모색했다”고 봤다. 그러나 김성보 교수는 “소련 (정부가 모스크바에서 합의된) 방안의 실현을 낙관적으로 인식하거나 또한 그 실현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라고 덧붙였다.

논점 8
소련은 코리아의 통일을 기대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소련이 코리아의 통일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코리아의 통일에 1차적 관심을 두지도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소련군 총정치국 보고서 | 첫째, 모스크바회담이 진행되던 12월 25일 소련군 총정치국장 쉬킨 중장이 몰로토프에게 제출한 비밀보고서다. 

우리가 지난 제3회에서 보았던 스탈린의 1945년 9월 20일자 지령에 대한 복명(復命)인 이 보고서는 그때 소련이 코리아에 대해 그리고 북한에 대해 가졌던 의도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이 중요한 보고서는 ‘한국일보’의 모스크바 특파원 이장훈이 러시아연방 외무부의 문서보관소에서 발굴했다. 

이 보고서는 우선 북한에서 스탈린이 지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이 ‘결정적으로 달성되지 못하고 있음’을 시인했다.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해, 이 보고서는 오로지 ‘소련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보장해 줄 친소적 정권을 북조선에 수립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 이 보고서는 그러한 목표의 달성을 도와줄 ‘민족민주간부 양성’과 ‘토지개혁’을 건의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1946년 3월 북한에서 실시되는 토지개혁의 정치적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 

반면 이 보고서는 미소 협조로 코리아에 통일적 임시정부를 세우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비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현수 교수는 “모스크바회의의 코리아 문제에 대한 결정은 통일독립정부 수립에 대한 미소의 공약과는 달리 분단의 현상을 승인한 것이지 그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종합적으로 말해, 그때 소련은 코리아에서 우익정부가 수립되는 것과 미국이 코리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막는 데 1차 목표를 두고 있었다. 소련에 중요한 것은 코리아에서 통일된 민족국가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소련은 통일된 코리아의 민족국가 수립을 희생시키더라도 자국에 불리한 정부의 수립을 막고 자국에 유리한 정부의 수립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전현수 교수가 적절히 지적했듯, “코리아에서 통일민족국가의 수립보다 소련의 국가적 이해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소련은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운동에서 극복해야 할 외세였다”라고 결론지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논설 |
둘째, 1946년 1월 1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국이 발행한 ‘공보’에 게재된 ‘일본이 항복한 이후 코리아의 상황’이다. 모스크바회의를 전후해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논설은 “(1945년 말 현재) 코리아에는 두 점령지역에 사실상 두 정체(政體)가 정해졌다”라고 파악했다. 이것은 결국 이미 1945년 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코리아에서 ‘두 개의 정체’가 하나로 통합되기 쉽지 않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볼 때, 소련은 코리아의 대내외 현실에 비춰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예견되는 안을 내놓았으며 끝내 관철시켰다고 하겠다.

논점 9
‘신탁통치’에 관한 오보를 둘러싼 논쟁

1946년 3월 열린 북한 토지개혁총결 경축대회. [미디어한국학 제공]

1946년 3월 열린 북한 토지개혁총결 경축대회. [미디어한국학 제공]

그러면 이 의정서의 내용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우선 이 의정서에 대한 미국 언론매체들의 오보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국내 언론매체들의 오보를 둘러싼 논쟁을 살피기로 한다. 

미국 언론매체들의 오보 | 이 의정서의 내용은 공식 발표가 있기에 앞서 잘못된 정보로 매우 단순화된 채 12월 25일부터 워싱턴에서 국내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첫째, 1945년 12월 25일자 AP통신의 ‘지급’ 보도다. 그때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 통신은 “모스크바회의에서 미국은 (ⅰ)코리아에 즉시 독립을 줄 것, (ⅱ)카이로선언에 맞춰 코리아의 독립정부 형태는 국민투표로 결정할 것 등을 제의했음에 반해, 소련은 코리아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점령되고 있는 터에 국민투표는 불가능한 만큼 남북을 일괄해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제의했다”는 취지로 보도한 것이다. 

둘째, UP통신의 보도다. 그때 미국에서 AP통신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이 통신사 역시 비슷한 취지로 보도했다. 

셋째, 이튿날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의 보도다. 이 신문은 UP통신을 인용해 비슷한 취지로 보도했다. 

넷째, 도쿄에서 발행되던 미군의 ‘성조지’ 태평양판의 보도다. 12월 27일자 1면에서, UP통신의 기사는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랄프 하인젠 기자가 쓴 것이라고 밝히고, 이 기사를 포함한 외신을 종합해 보도한다고 부연한 뒤, 소련이 신탁통치 실시를 제의했다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 기사들은 모두가 완전한 오보였다. 미국이나 소련이 모스크바회의에서 그러한 안을 내놓은 일도 없었고 더구나 카이로선언이 코리아의 독립정부 형태를 국민투표로 결정하기로 한다고 규정한 일도 없었다. 

국내 신문·방송의 오보 |
이 보도 가운데 AP통신의 보도는 서울의 ‘합동통신’에 의해 12월 27일 오전 국내의 신문사, 방송국에 배포됐고, 자연히 신문과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국내 학계 일각에서는 이 기사를 “우익계열의 신문들이 반소반공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러한가? 그 주장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함의를 담았으므로 다음에서 자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첫째, 문제의 기사, 곧 AP통신=합동통신이 워싱턴에서 발신한 이 기사는 12월 27일 좌익계 신문과 우익계 신문을 합쳐 다섯 신문에 전재됐다. 우선 좌익계인 ‘서울신문’과 ‘신조선보(新朝鮮報)’ 및 ‘중앙신문’이 보도했다.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해방일보’를 논외로 하면 당시 대표적인 좌익계 신문이 ‘서울신문’이었는데, 이 신문 역시 1면에 ‘워싱턴 합동통신 지급전보’를 인용해 보도했다. 1945년 12월 29일 주한미군사령부가 본국 정부에 보고한 문서 ‘정치동향보고’에 따르면, 12월 27일자 ‘성조지’의 기사를 이튿날 KPP통신사가 남한 사회에 확산시켰다. KPP는 Korean Pacific Press의 약자로, 당시 ‘합동통신’의 영문 제호였다. 

더구나 워싱턴의 양대 국제적 통신사가 경쟁적으로 보도했고 ‘성조지’도 그 통신사들의 기사를 보도한 사실로 미뤄 보았을 때, 국내 언론매체로서는 민족의 장래에 큰 영향을 주게 될 내용의 외신이 입전(入電)됐을 때 그것을 당연히 보도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기사를 국내의 어떤 특정 신문사나 “우익계 신문들”이 특정한 목적으로 “조작”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둘째, 그렇다면 미국의 국제적인 양대 통신사는 어떤 배경에서 그러한 오보를 내게 된 것일까? 혹시 모스크바3상회의에 관계된 미국 정부의 정책입안자들 또는 정책집행자들로부터 부정확하고 심지어 고의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입수했던 것은 아닐까? 

이 물음과 관련해 상기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이미 살폈듯,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미국대표단을 이끈 국무장관 번스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관심도 지식도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또 소련 외무부는, 우리가 제2회에서 이미 보았듯 1945년 9월 초 코리아에 대해 신탁통치를 실시할 경우 소련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구상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스크바3상회의에 참석한 소련대표단은 12월 20일에 코리아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번스를 비롯한 국무부 관리들은 기자들에게 소련이 코리아에 대해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제공했던 것은 아닐까? 어떻든 이완범 교수가 적절히 지적했듯, “사실을 정반대로 왜곡한 책임은 통신사나 미국 관리가 져야 한다.”



신동아 2020년 11월호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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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표단, ‘모스크바 3상회의’서 소련 계략에 말려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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