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92년 필자와 아버지인 고(故) 장왕록 교수가 함께 찍은 사진.
다음날 신문에는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 영문학의 역사, 번역문학의 태두 장왕록 (張旺祿) 박사가 타계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날 신문 제목은 한 사람의 인생을 요약하기에 꽤 화려하고 인상적인 것이었지만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라는 단어 석 자만큼 위대하고 화려한 타이틀은 없을 것이다.
그해 여름 아버지와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편인 ‘스칼렛’의 공역(共譯)을 끝내고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공동집필하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두 시간 전쯤 아버지는 속초 시내에서 전화를 걸어 다음날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직접 출판사로 나오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 그럼 내일 3시에 출판사에서 만나자. 같이 11과 작업해야지”라고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내 귓가에 생생히 메아리치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되어버렸다.
영문학계의 두 가지 기록
영문학계에는 오랫동안 깨지지 않은 기록이 두 개 있다고 한다. 하나는 고(故) 장왕록 박사의 다릿심이고, 또 하나는 국내외 학자 80명이 대거 참여해 1294페이지에 달하는 책, 바로 아버지께 헌정한 회갑기념 논문집이라는 것이다. 70세에 작고하시기까지 20대의 몸무게를 그대로 유지하셨던 아버지는 주변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건강체질로, 계단을 눈깜짝할 사이에 오르내리시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3층에 있는 연구실을 단숨에 올라가다 보면 어느덧 4층이라 다시 내려와야 하는 게 다반사라고 하셨다. 워낙 성품이 선량하고 친구를 좋아하셔서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던 탓에 외국의 석학을 포함해 80명의 학자들이 기념논문집에 참여해 쉽게 깨지지 않을 기록을 남긴 것인지도 모른다.
1924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나 단신 월남, 가난하고 어린 가장이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을 거쳐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유학한 뒤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학과 교수가 되고, 미국문학 작품 60여권을 번역해 소개한 번역가로서 영문학계의 큰 별로 자수성가하기까지 아버지의 삶은 그 시대의 다른 아버지들처럼 역경과 환난의 연속이었다. 자식 여섯 명 모두 떳떳한 몫을 하며 살게 키우신 것뿐 아니라 1급 신체장애를 가진 딸을 이 사회에서 살아남게 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첫돌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밤, 고열에 시달리는 나를 달래는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시며 “아, 소아마비!”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셨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나와 아버지는 그 어느 부녀보다도 훨씬 더 끈질긴 운명의 동아줄로 꽁꽁 묶여버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는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내리셔야 했다. 나를 일반 초등학교에 보내야 할지 아니면 재활원 부속 특수학교에 보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만만찮은 재정적 부담에도 내가 지속적으로 물리치료를 받고 좀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아니 아마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일반 학교에 가서 혹시라도 다른 아이들의 놀림거리라도 되지 않을까 싶은 염려에 나를 연세대 재활원의 특수학교에 맡기기로 하셨다.
재활원 기숙사로 떠나던 그날 아침을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삶은 달걀 네 개를 손수건에 싸서 핸드백에 넣으셨고, 우리 세 식구는 택시를 타고 당시 가회동에 있던 우리 집에서 신촌으로 향했다.
나는 그저 엄마 아버지와 함께 간다는 것이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나만 누리는 특권인 듯싶어 의기양양했고 마냥 즐겁기만 했다. 나의 들뜬 분위기를 부추기기라도 하듯이 재활원으로 통하는 세브란스 병원 정원에는 화사한 봄햇살 속에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닥터 로스’라고 부르는, 아주 덩치 큰 미국인 의사에게 진단을 받은 후 곧 어머니 등에 업혀 신체장애 아동들이 수용되어 있는 방으로 안내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