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성과 강진은 과(過)하다 싶으리만큼 여유롭다. 차밭도, 절집도, 포구에서도 여간해선 시끌벅적함을 찾기 힘들다. 일상에 찌든 나그네들이 곧잘 느낄 법한 객기(客氣)도 허(許)하지 않는다.
- 그래서 보성과 강진에 가면 과하다 싶으리만큼 푸근해진다.
남도땅엔 봄볕이 완연하다. 승용차로 6시간 남짓한 서울∼보성간 여정 내내 차창을 넘는 바람도 순풍(順風). 송광사 앞 ‘순천식당’에서 점심으로 산채비빔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니 이내 춘곤증이란 놈이 슬며시 몸을 비벼댄다. 영락없이 봄날이 익고 있다.
순천에서 보성은 지척. 18번 국도를 타고 30분만 가면 곧게 뻗은 해송(海松) 사이로 초록이 넘실댄다. 차밭이다. 보성을 말할 때 녹차를 빼놓을 수 없다더니, 다향(茶香)에 물든 보성은 그야말로 다향(茶鄕)이다.
‘차향 가득한 곳’ ‘몽중산다원’…. 널린 팻말을 못본 셈치고 ‘보성다원’부터 찾는다. 수녀와 비구니가 정겹게 자전거를 함께 타던 011휴대전화 CF의 무대다. MBC 드라마 ‘온달왕자’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구불구불한 차밭 고랑 사이로 관광객들의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봄꽃마냥 돋보인다.
보성이 차 재배지로 최적인 까닭은 해양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의 교차점이어서 해무(海霧)가 풍부해서다. 보성다원은 국내 최고(最古)의 차 재배지. 하지만 차밭보다 더 정겨운 건 관광객들의 평화로운 면면.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비번날, 아내와 5개월 된 아기와 함께 다원에 들른 광주시민 이병주(32)씨는 “두 번째 방문”이라며 ‘초록 예찬’을 펼친다. 모르긴 해도, 화창한 봄볕 아래 산바람 쐰 그들의 마음이 차밭보다 더욱 푸르러질 게다.
다원 입구 옆에 사열대의 장병처럼 늘어선 삼나무들도 볼거리. 20m를 훌쩍 넘는 큰 키를 자랑하는 이 삼나무숲은 여름이면 독특한 향을 뿜어내며 그늘을 이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는 게 현지인의 귀띔이다.
보성의 석양을 만끽하려면 ‘봇재다원’ 꼭대기에 있는 팔각정 ‘다향각(茶鄕閣)’(녹차시음장도 갖췄다)에 올라도 좋지만, 보성군 남단의 율포항을 찾으면 더 좋다. 나지막한 단층 반양옥들이 촘촘히 들어선 골목길을 200m쯤 걸으면 이내 바닷가. “찢어진 방충망 고친다”는 트럭 확성기 소음과 파도소리만 빼면 포구는 조용하기 그지없다. 아담한 갯벌에 닻을 박은 10여 척의 소형 어선과 바지락 캐는 아낙네가 풍광의 전부지만, 이곳 해수녹차탕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저곳 헤집고 다녀선지 허기가 몰려온다. 보성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는 녹돈(綠豚). 아무리 다향이라지만 돼지까지 녹차를 장복할 줄이야…. 보성읍내 ‘녹차골식당.’ 한우를 취급하는데도 손님의 70∼80%가 녹돈을 찾는다. 주인 안두섭(46)씨는 “진짜 고기 좋소이∼”하며 ‘모듬’을 권한다. 안심에서 추려낸 가브리살과 목살, 삼겹살, 항정살 등 4가지 부위를 고루 맛보는 세트 메뉴다. 몇 점 씹어보니 일반 돼지고기보다 느끼한 맛이 훨씬 덜하고 더 쫄깃하다. 누린내도 없다. 녹차 찌꺼기를 사료에 섞어 먹이면 지방을 분해하는 녹차성분 때문에 비계가 줄어든다고 한다.
‘서편제의 성지’인 보성에서 판소리 한 가락 아니 들을 수 없다. 이튿날, 서편제 보성소리전수관에서 만난 (사)한국판소리보존협회 보성군지회 장장수(67) 회장은 “국내 국창급 대다수가 보성을 거쳐갔다”며 “현재 회원 60여 명이 서편제의 맥을 잇고 있지만, 평균 연령이 70세 이상”이라고 전한다. 곁에 앉은 기자에게 전종근(76) 옹이 “내 소리 좀 들어보라”며 연신 실력을 뽐내는 것도 젊은층에 외면당하는 판소리의 안쓰러운 운명과 무관치 않은 듯했다.
‘미력옹기’도 지나칠 수 없는 곳. 보성에 대규모 옹기도요지가 없는 데도 300년간 9대를 이어온 가업 덕에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그릇 자체가 숨쉬고 정화·방부기능을 갖는, 옹기의 3대 기능을 모두 갖춘 게 이곳 옹기의 자랑. 인간문화재로서 작고한 부친과 숙부를 이어 수작업을 고집하며 묵묵히 ‘민중의 그릇’을 빚는 대표 이학수(48)씨가 미덥다.
모처럼의 봄나들이인 만큼 보성만으론 미진하다. 불감증 환자마냥 강진으로 차를 몬다. 2번 국도를 타고 장흥을 거쳐 40분간 내달리면 바로 강진. 영랑(永郞) 때문일까. 왠지 질박한 산문조로 와닿는 보성과 달리 강진의 첫인상은 시심이 절로 우러날 만큼 시적(詩的)이다.
강진군청에서 150m 떨어진 영랑 생가는 ‘모란의 시인’으로 불리는 영랑 김윤식 선생(1903∼50)의 예술혼이 한껏 깃든 곳. 장독 열던 누이가 단풍 든 감나무잎이 떨어져내리는 걸 보고 “오매 단풍 들겄네”라 속삭였다던 1930년의 어느 날을 상상만 해도 정겹다.
23번 국도를 타고 마량항으로 향한다. 강진군 최남단의 마량항은 7∼8월이면 낚시꾼들로 성황을 이루는 곳. 가는 길 중간쯤의 갯벌에서 6명의 할머니가 꼬막을 캐고 있다. “많이 잡았냐구? 별로 없소이∼, 오염 때문에. 한 20∼30년씩 겁나게 (조개잡이) 했소이∼.”
인근 동네인 장계리 분들이란다. 초면의 이방인에게도 다정할 수 있는 법을 일찌감치 체득한 듯했다. 모진 바닷바람도 아랑곳없이 머리에 수건 질끈 동여매고 푹푹 빠져드는 뻘밭에 온몸을 담궈온 강인한 생명력 때문이리라.
물과 뭍을 고루 지닌 맛고을 강진에선 단연 한정식이 저녁식사로 제격. 멀리서 기차 타고 나주까지 온 뒤 관광버스로 갈아타고 먹을거리여행을 오는 외지인도 많다. 강진읍내 흥진식당은 4인 이상이 기본인 여느 집과 달리 2인 이상이면 사람 수대로 상을 차려줘 부담스럽지 않다. 그래도 20년째 한 자리를 지켜온 대표 김순자(55)씨의 후덕함 덕분인지 젓가락에 둘둘 만 낙지(강진 사람들은 ‘낙자’라고도 한다)구이, 대합탕, 숭어회 등 갖은 해물과 반찬이 30여 가지나 올라 양이 적은 사람이라면 질릴 법도 하다.
다음날 아침,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을 찾았다. 초당의 정자 천일각(天一閣)에선 강진에 유배된 다산 정약용 선생이 흑산도에 유배된 둘째형 정약전과 가족을 그리며 시름을 달래려 굽어봤을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서 깊은 절집도 강진의 또 다른 매력. 동백림에 둘러싸인 천년고찰 백련사도 좋지만, 벽화 ‘백의관음도’가 있는 무위사(성전면 월하리) 또한 고즈넉해서 좋다. 강진은 ‘청자골’로 통하는 우리나라 청자문화의 중심지. 시간이 허락한다면 물과 불, 흙과 바람이 어우러진 고려청자도요지와 청자자료박물관(대구면 사당리)을 둘러봐도 괜찮다.
귀경길에 잠시 전날의 뻘밭에 들렀더니, 조개잡이 할머니들의 남편들이 경운기를 몰고 와 ‘평생동지’들이 무사히 물밖으로 나오길 기다리며 담배 한 개비씩 피워물고 수험생처럼 초조함을 달랜다. 끈끈한 정을 온몸에 두르고 살아온 그들의 모습에 석양빛이 오버랩된다. 때론 버거울지라도 삶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