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학정(虐政)을 했다면 그 즉시에 난을 일으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일대의 백성이 참고 참다 못해서 끝내는 부득이 난을 일으켰다.”
“너는 피해가 없으면서 어찌하여 난을 일으켰는가?”
“일신의 피해를 면하려고 난을 일으키는 것을 어찌 남아(男兒)의 할일이라 하겠는가. 백성의 원한이 맺혀 있었기에 백성을 위하여 학정을 없애고자 했을 뿐이다.”
전봉준의 공초록(供招錄·진술서)에 따르면 심문관은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부임(1892년 4월)한 뒤 줄곧 탐학(貪虐)을 거듭했는데도 뒤늦게 난리를 일으킨 연유가 뭐냐, 너는 ‘아침 밥 저녁 죽’으로 살던 형편이어서 수탈(收奪)당할 것이 없었다면서 왜 난리에 앞장섰느냐, 물은 것이다. 전봉준은 답했다. ‘참고 참다 못해서, 백성을 위하여’라고.
용산 철거민들도 ‘참고 참다 못해서’ 망루에 올라갔을 것이다. 먼저 뉴타운과 재개발, 재건축 등 도심재생사업에서 밀려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이하 경향신문 2009년 2월2일자 ‘철거민 집담회’에서 발췌 인용)
“2002년 결혼하면서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에서 7년째 전세를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2003년부터 재개발 바람이 불었습니다. 세입자인 저의 경우 임대아파트 입주가 가능했습니다. 조합 측에서 이사를 가면 이사비용을 주고 아니면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살고 있는데 최근 갑자기 임대아파트 입주를 하려면 2~3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뉴타운이 너무 많이 조성되면서 임대아파트 입주예정자들이 넘쳐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려 했는데 갈 수도 없게 됐습니다. 방 2칸짜리 집을 2500만원에 전세 살고 있었는데, 주변 전·월세 값이 치솟아 이 규모로 이사를 가려면 보증금 2500만원에 따로 월세를 50만~60만원을 내야 합니다. 반지하에 수평도 맞지 않는 집 전셋값이 1억2000만원이나 합니다. 조합은 집을 비워달라고 하는데 나갈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지금 보증금으로는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죽나, 나가서 죽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주택세입자 L씨)
“저는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서 10년간 살고 있습니다. 재개발이 시작되자 처음에는 조합에서 1 대 1 맞교환이라고 했습니다.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철거 직전에 조합이 말을 바꾸기 시작하더군요. 대지 2평에 아파트 분양평수가 1평이다, 2 대 1이 안 된다는 둥 말입니다. 게다가 관리처분인가가 나오니 건평 24평짜리 집의 감정평가금액은 고작 1억원이었습니다. 32평형 아파트입주권이 주어졌는데 분양가가 4억2000만원입니다. 3억원이 넘는 돈을 더 내야 내 집을 장만한다니 말이 됩니까.”(주택소유자 L씨)
“저는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서 20년 동안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보증금 1300만원에 월세 100만원으로 25평 규모입니다. 뉴타운이 들어서면 이사를 가야 하는데 주변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 마땅한 사업장을 알아보려고 한 달 넘게 다녀봤는데 제일 싼 데가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300만원이었습니다. 왕십리도 용산처럼 그런 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르지만 대책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합니다.”(상가세입자 B씨)
“저는 1981년부터 29년째 서울 응암동에서 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4평짜리 작은 구멍가게지만 다섯 식구가 사는 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생계가 막막합니다. 한때 시세가 1억원이 넘었던 가게 보상비가 4600만원입니다. 구입할 때 치른 돈 6000만원에도 모자랍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셈법이 어디 있습니까.”(상가소유자 J씨)
주택이든 상가든, 소유자든 세입자든 말이 되느냐, 죽겠다, 살길이 막막하다는 하소연이다. 그렇다면 뉴타운, 재개발, 재건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다수 원거주민(이들의 입주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을 몰아내고 힘없는 세입자를 쫓아내는 이른바 도심재생사업을 이대로 계속할 것인가. 이는 원칙, 법치 이전에 생존권의 문제다. 사람을 살게 하면서 원칙도 따지고 법치도 내세워야지, 살려달라는 호소에는 귀를 막은 채 내몰려만 한다면 참고 참다 못한 이들이 ‘난’을 일으킬밖에 더 있겠는가. ‘용산 참사(慘事)’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부패하고 무능했던 왕조 말기의 민란에 오늘날 철거민의 문제를 빗대자는 것은 아니다. 불법 폭력적인 ‘난’을 부추기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번 참극의 본질은 뒷전에 밀어놓은 채 ‘엄정한 법치’만을 앞세운다면 ‘난’은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
그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인식은 틀리지 않다. 그는 1월30일 TV 원탁대화에서 “이 문제를 하나의 사건으로 취급하면 여러 곳에서 (유사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합의가 안 되는 10~15% 정도의 사람을 위한 협의기구를 정부가 법률적으로 제도적으로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지금의 재개발은 세입자 희생이 너무 커 분쟁을 조정하는 공적기구를 만들겠다”(2009년 2월9일자 중앙일보 인터뷰)고 했다. 현행 재개발은 세입자의 희생 위에서 지주와 시행사가 이익을 창출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서울시장 시절 뉴타운 개발을 주도했던 대통령이나 현 서울시장이 현행 도심 재개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대책은 없었다. 전·현직 서울시장이 미리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았더라면 ‘용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 과거 집권당이던 민주당도 큰소리 칠 자격은 없다.
정부는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자진사퇴 날짜(2월10일)에 맞춘 듯 부랴부랴 재개발사업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상가세입자에게 분양권을 우선 부여하고, 휴업보상비를 상향조정하겠다는 것이다. 재개발사업과정에서 세입자와 조합, 조합과 조합원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시 군 구에 전문가,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분쟁조정위원회도 설치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인 격이지만 늦은 만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급한 불 끄는 식의 임기응변으로 철거민들을 다시 분노와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선 안 된다.
재개발 사업 중이거나 앞으로 할 예정인 지역의 여야 정치인들도 서로 삿대질이나 할 게 아니라 자기 지역구의 실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하물며 지난 총선에서 ‘뉴타운 바람’ 덕분에 의원 배지를 달게 된 상당수 한나라당 의원은 자신의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역 실태 파악과 문제점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정부 대책은 발표하자마자 실효성을 의심받고 있다. 언제까지 ‘도심 테러’ ‘체제 전복’ 하며 이념 공세에나 열을 올리고 있을 텐가.
정부나 정치권에만 맡겨놓을 일은 아니다. 언론도 벌어진 사건이나 발표된 것만을 보도하는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현장 탐사보도를 통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언론이 그동안 철거민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현장 실태, 예컨대 철거용역들의 폭력적 행태 등을 생생히 보도했었다면 ‘용산 참사’는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용산 철거민들을 망루로 올려 보낸 책임에서 언론도 자유로울 수 없다.
조선 정부의 심문관은 전봉준에게 “너는 피해가 없으면서 어찌하여 난을 일으켰느냐?”고 했다. 요즘으로 치면 왜 제3자가 개입했느냐는 얘기다. 반상(班常)의 신분제를 체제의 근간으로 하는 봉건왕조의 관리가 ‘약자들의 연대’를 인식했을 리 없다. 그로부터 114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의 몇몇 정부 여당 사람도 잠깐이나마 조선시대 관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용산 참화’ 직후 정부와 한나라당이 재개발 관련 제3자 개입금지를 추진했으니 말이다.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용산 사건의 핵심은 일종의 전문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단체가 개입하게 되는 틈새가 왜 생기는지 당에서 파악해서 제도적인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재개발 현장의 분규에 제3자인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이 개입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얘기다.
전철연이 철거민들에게 망루 짓는 방법을 가르치고, 거기에 시너와 화염병 등 위험물질을 갖고 들어가 격렬한 투쟁을 하도록 교사(敎唆)했다면, 그들의 행위를 용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일부나마 철거민들이 왜 과격한 전철연에 의존하게 되는지, 그 ‘틈새’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철거민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전철연만이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그 ‘틈새’부터 메워줘야 한다. 최소한 이해관계의 한 당사자인 철거민들의 하소연에 귀 기울이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공적기관이 있었다면 그들이 화염병을 들고 전철연 사람들과 망루로 올라갔겠는가. 결국 ‘틈새’는 제대로 된 제3자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생겨난 것이다. 관할구청장이 농성 철거민들을 ‘떼잡이’라고 비하하고, 관할경찰이 철거용역들과 한편으로 비치는 현실에서 ‘틈새’가 왜 생기는지 몰랐다면 집권여당 정책위의장으로선 부끄러워할 일이다.
원칙도 좋고, 법치도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연민(憐憫)조차 없는 원칙, 약자의 고통과 분노는 외면한 채 ‘고의 방화’네 ‘자폭범’이네, 모지락스러운 발언을 쏟아내는 저열한 법치로는 더불어 사는 사회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사람의 얼굴을 한 법치, 약자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법치가 정의롭게 작동한다면 굳이 엄정한 법치를 강조할 까닭이 있겠는가. 소통 없는 원칙, 연민 없는 법치가 지배하는 세상은 삭막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 필자약력
●1949년 서울 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現 경원대·한성대 초빙교수
●저서: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