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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한 짝

구두 한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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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가 신경을 건드렸으며 무표정한 액자도 이제 그만 나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두 한 짝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알 수 없는 생각들이 자석처럼 찰싹 달라붙어 그를 지치게 했습니다. 거기에다 해어진 밑창 틈새로 튀어나온 발가락이 시멘트 바닥에 닿아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깨진 보도블록 위에서 구두 한 짝은 녹색 신호를 기다리며 생각에 빠졌습니다. 땀으로 흥건히 젖어옵니다. 이윽고 구두 한 짝은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손수건을 빠뜨리고 나온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좋지 못한 버릇을 책망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총총걸음과 잰걸음을 하면서도 어깨를 부딪치지 않으려 서로 힐끗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극장과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그의 시야에 입을 벌린 채 껌을 씹고 있는 쓰레기통이 들어왔습니다. 구두 한 짝은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습니다. 집을 나온 후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고 더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도시에 가득 차 있고 정신없이 바빠서 자신들의 영혼을 보살필 수 없어. 봐, 황급히 입을 훔치고 식당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 ‘찌익 찍’ 사무실의 의자 끄는 소리, 저 걸음만 보더라도 저들이 깊은 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져보기나 했겠어?”



껌을 씹는 쓰레기통의 얼굴에 광대뼈 힘줄이 일어섭니다. “낚아채듯 택시를 잡아타고, 한 번에 두 계단씩이나 오르는 사람들이 사는 이곳은 전장이야.”

마침 그때 점퍼 차림의 남자가 쓰레기통의 코 위에 담배를 비벼 껐고 쓰레기통은 고개를 숙인 채 등을 돌려 두 팔로 코를 감싸는 바람에 구두 한 짝과 자연스럽게 등을 맞대게 됐습니다.

사람들의 입과 눈에는 프로펠러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구두 한 짝은 갑자기 도시의 수많은 굴레에 몸이 옭죄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녁노을이 자동차 클랙슨 소리를 붉게 물들이고 제과점 빵이 네온에 말라갈 때쯤 구두 한 짝은 그가 지금까지 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구두 한 짝은 보도블록 위로 걸어 집 쪽으로 되돌아갑니다. 눈먼 거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인형가게의 북 치는 곰이 멍하니 구두 한 짝을 내려다봅니다. 그는 지치고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려 하지 않았고 또 누가 보아도 그는 힘없고 초라한 행색이었습니다.

구두 한 짝은 신축 오피스텔 건물을 지나다 몇 사람과 부딪쳤고 그중 깡마른 사람은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했습니다.

구두 한 짝
朴柱澤
●1959년 충남 서산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현대시 작품상, 소월문학상 등 수상
●現 경희대 국문과 교수
●저서 : 시집 ‘꿈의 이동건축’ ‘사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사막의 별 아래에서’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시론집 ‘낙원 회복의 꿈과 민족 정성의 복원’, 평론집 ‘반성과 성찰’ ‘붉은 시간의 영혼’ 등


시계점의 시계들이 일제히 몸을 움직여 일곱 시를 알리고 레코드 가게에서는 노래가 울려퍼집니다.

“잠시 후면 도시는 저녁노을의 진지함에 못 이겨 어두컴컴한 밤이 될 거야. 그때는 새들도 붉은 몸으로 곧장 자신의 집으로 날아가지! 그리고 사람들은 빗나가버린 사랑과 피곤에 지쳐 잠이 들 거야. 그러면 이 도시는 모두가 잠들어 깨어나지 않는 미라의 도시가 되는 거지. 아침이 되어도 몸만 일으켜 세울 뿐 그들의 영혼은 깨어나질 않지.”

노을이 뾰족한 창이 되어 산 쪽으로 몰려가고 어둠이 도시를 덮을 때 별 하나가 구두 한 짝의 고적한 가슴을 어루만져줍니다.

신동아 200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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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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