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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채권추심원의 일기

어느 채권추심원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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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채권추심원의 일기
▼ 2004년 6월 ○일

일요일이다. 하지만 채권추심원은 쉴 수 없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채무자의 주소지를 방문해 생활실태를 조사하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주중에는 채무자도 생업에 종사하느라 집을 비운다. 나는 채무자를 꼭 만나야 하는 경우, 일요일을 택한다.

채권추심원은 채무자에게서 돈을 받아 채권자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오늘은 그동안 미뤘던 채무자 김모씨의 주민등록상 주소지인 인천시를 방문하기로 하고 오전 10시에 집을 나섰다. 대부분의 채무자는 변제 능력이 없다. 이 때문에 생활실태를 파악하고 전화번호를 알아내 변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듯 채무자의 집을 찾아가는 것을 실사(實査)라고 한다.

김씨의 채무는 약 600만원. 48세 남자인데 채권자로부터 선금을 받고 납품하지 않았다. 출발 전, 그의 신용상태를 조사해보니 금융권에만 약 2000만원의 채무를 안고 있는 다중 채무자였다.



인천행 1호선 국철 안은 사람들의 땀 냄새와 구걸하는 사람이 틀어놓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 소리 그리고 젊은 남녀의 왁자지껄한 소리로 혼잡했다.

들고 간 약도로 주소지에 도착해 벨을 누르니 핼쑥한 얼굴의 청년이 문을 열고는 나를 멀거니 바라본다. 집에 사람이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김씨 댁이죠?”

“그런데요?”

“김씨가 아버지 되십니까?”

“무슨 일로 그러세요?”

“좀 들어가도 되지요?”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나?”

나는 청년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성큼 집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휙 둘러본다. 혹시라도 집안에 압류할 만한 가재도구가 있는지 재빠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다.

“아버지 집에 안 계신데요.”

“이곳에 살지만 지금은 집에 없다는 말이지요?”

“아니요. 1년 이상 연락이 안 되고 우리도 아버지의 행방을 몰라요.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 집에 오셨어요?”

“아버지가 남의 돈을 갚지 않아 여러 번 최고장을 보냈는데도 응답이 없어서 법적 조치하기 전에 급히 왔어요. 아버지의 납품관계 채무 사실은 잘 알고 있지요?”

“무슨 건인지 모르지만 아버지 채무 때문에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고 계셔서 저도 대강은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연락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어요.”

청년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버지가 없으면 생활은 어떻게 하나?”

나의 말투는 어느새 반말조로 변해 있었다.

“제가 공사장에 나가고 엄마가 공장에 나가 좀 벌어요.”

“오늘은 왜 일 안하고 집에 있나?”

“며칠 전에 등짐 지다가 넘어져서 못 움직여요.”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은가?”

나는 순간, 인간적으로 대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곤 경계한다.

“아버지가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아요. 아저씨, 이젠 우리 집에 오지 마세요. 제가 벌어서 갚을 때까지 연락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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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호 / 일러스트·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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