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6월 ○일
일요일이다. 하지만 채권추심원은 쉴 수 없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채무자의 주소지를 방문해 생활실태를 조사하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주중에는 채무자도 생업에 종사하느라 집을 비운다. 나는 채무자를 꼭 만나야 하는 경우, 일요일을 택한다.
채권추심원은 채무자에게서 돈을 받아 채권자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오늘은 그동안 미뤘던 채무자 김모씨의 주민등록상 주소지인 인천시를 방문하기로 하고 오전 10시에 집을 나섰다. 대부분의 채무자는 변제 능력이 없다. 이 때문에 생활실태를 파악하고 전화번호를 알아내 변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듯 채무자의 집을 찾아가는 것을 실사(實査)라고 한다.
김씨의 채무는 약 600만원. 48세 남자인데 채권자로부터 선금을 받고 납품하지 않았다. 출발 전, 그의 신용상태를 조사해보니 금융권에만 약 2000만원의 채무를 안고 있는 다중 채무자였다.
인천행 1호선 국철 안은 사람들의 땀 냄새와 구걸하는 사람이 틀어놓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 소리 그리고 젊은 남녀의 왁자지껄한 소리로 혼잡했다.
들고 간 약도로 주소지에 도착해 벨을 누르니 핼쑥한 얼굴의 청년이 문을 열고는 나를 멀거니 바라본다. 집에 사람이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김씨 댁이죠?”
“그런데요?”
“김씨가 아버지 되십니까?”
“무슨 일로 그러세요?”
“좀 들어가도 되지요?”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나?”
나는 청년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성큼 집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휙 둘러본다. 혹시라도 집안에 압류할 만한 가재도구가 있는지 재빠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다.
“아버지 집에 안 계신데요.”
“이곳에 살지만 지금은 집에 없다는 말이지요?”
“아니요. 1년 이상 연락이 안 되고 우리도 아버지의 행방을 몰라요.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 집에 오셨어요?”
“아버지가 남의 돈을 갚지 않아 여러 번 최고장을 보냈는데도 응답이 없어서 법적 조치하기 전에 급히 왔어요. 아버지의 납품관계 채무 사실은 잘 알고 있지요?”
“무슨 건인지 모르지만 아버지 채무 때문에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고 계셔서 저도 대강은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연락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어요.”
청년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버지가 없으면 생활은 어떻게 하나?”
나의 말투는 어느새 반말조로 변해 있었다.
“제가 공사장에 나가고 엄마가 공장에 나가 좀 벌어요.”
“오늘은 왜 일 안하고 집에 있나?”
“며칠 전에 등짐 지다가 넘어져서 못 움직여요.”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은가?”
나는 순간, 인간적으로 대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곤 경계한다.
“아버지가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아요. 아저씨, 이젠 우리 집에 오지 마세요. 제가 벌어서 갚을 때까지 연락하지 마세요.”
“네가 먼저 욕했잖아?”
“얼마나 갚을 수 있는데?”
“매월 10만원씩 보내줄게요.”
“안 갚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한 일이니 갚으면 되잖아요.”
“안 갚으면 저 TV나 냉장고 같은 것에 모두 딱지 붙이게 돼. 그리고 이 집, 전세인지 월세인지 모르지만 그 돈도 못 찾아가게 할 수 있어!”
“아저씨 맘대로 하세요. 벌써 다른 사람들이 와서 딱지 붙인 지 오래됐어요.”
청년의 야윈 다리와 그 위에 하얀 천으로 친친 맨 붕대가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오늘 실사는 허탕은 아닌 것 같다. 본인은 못 만났지만 아들을 만나 잔뜩 겁을 주었으니 언젠가는 채권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져간 최고장을 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 2004년 7월 ○일
출근하니 벌써 사무실이 욕지거리로 시끄럽다. 옆자리 김 선배가 어디엔가 전화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느라 얼굴이 시뻘겋다.
“야, 이 새끼야, 남의 돈을 떼어먹었으면 갚아야 할 게 아니야. 뭐라고? 이 싸가지 없는 새끼 봐라. 내가 언제 너한테 먼저 욕했냐? 네가 먼저 나한테 욕했잖아?”
추심원과 채무자 간의 욕설다툼은 항상 누가 먼저 욕을 했느냐로 시비가 확대된다. 아마도 저쪽 채무자는 김 선배가 먼저 욕을 했으니 가만히 안 놔두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경찰서에 신고하겠다고 나오는 것 같다.
“그래, 이 새끼야. 신고해라. 지금 경찰서 문 활짝 열려 있으니 가서 신고해. 남의 돈도 못 갚는 주제에 신고는 무슨 놈의 신고냐. 돈이나 빨리 갚아! 뭐, 이리로 온다고? 그래 와라 자식아, 그냥 오지 말고 돈 갖고 와라. 뭐, 여기가 어디냐고? 여기는 너도 잘 아는 네거리다. 너 같은 놈은 함부로 오지도 못해. 여하튼 이달 말까지 500만원 갚아. 그러지 않으면 네 집구석에 가서 가재도구고 뭐고 깡그리 차압해버릴 테니까 그리 알아.”
김 선배가 전화기를 탕 하고 내려놓으며 “에이,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하더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추심원 40여 명이 근무하는 이곳 L신용정보사 사무실에서는 고함소리가 자주 난다. 처음엔 조용한 소리로 빚 독촉을 하다가도 대화는 어느새 욕지거리로 바뀐다. 때론 조용히 채무자와 대화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올리는 추심원도 있다. 그러나 일부 추심원은 감정이 격해져 채무자와 서로 욕지거리를 주고받는다.
지하 셋방, 구부정한 노파
“어이, 오늘 월급날인데 왜들 그렇게 시끄러워? 좋은 날 소리들 지르지 말아!”
옆자리 이 선배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건넨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입사 후 열 번째 돌아오는 월급날이다. 경리가 건네준 월급명세서를 보니 이달 수령액은 162만원이다. ‘이 돈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하고 중얼거리는데 최 선배와 신 선배가 나 들으라는 듯이 한마디 한다.
“나이 50대 중반에 이만큼 벌면 잘 버는 거야. 당신 어디 가서 땅을 파봐. 10원 한 장 나오나.”
추심원의 월급은 실적급이다. 노력한 만큼 받는다. 통상 추심 의뢰 금액의 8% 정도가 추심원의 몫이다. 채권자가 의뢰한 1000만원을 다 받아냈다면 신용정보사가 이중 200만원의 수수료를 챙기고 추심원은 그중 80만원을 가져간다. 어떤 채권자는 채권액의 30%까지 신용정보사에 떼어주고 추심을 의뢰한다. 10%의 추심수수료만 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비교적 양질의 채권인 경우다.
▼ 2004년 8월 ○일
채무자 신모씨를 찾기 위해 오전 11시쯤 사무실을 나섰다. 그가 진 빚은 3000만원, 이미 신용불량자가 되어 채무가 과다한 자였다. 채권자는 그가 어디선가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며 돈을 꼭 받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회수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해 현지 실사를 미뤘다.
S동 뒷골목을 몇 번이나 오간 끝에 신씨의 주소지를 겨우 찾았다. 허름한 단독주택이다. 지하 셋방에 사는 것 같아, 지하 방을 찾아가니 입구부터 쾨쾨한 냄새가 난다. 문을 두드리니 12∼13세로 보이는 초등학생 두 명이 낡은 컴퓨터 앞에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다. 학교는 가지 않고, 웬 컴퓨터 게임일까? 어른이 없느냐고 물으니 낡아서 헐어진 방문을 열고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가 눈을 비비며 나를 쳐다본다.
500만원 갚는 데 10년?
이 생활을 하면서 성격이 조급해지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진 자신을 발견하곤 흠칫 놀란다. 사무실에 출근해 통화하는 전화의 대부분이 상대방에게 돈 갚으라는 독촉전화이기 때문에 마음은 늘 공격과 방어 자세를 취하느라 긴장되어 있다.
지난해 가장 인상 깊은 채무자는 P부인이다. 50세를 갓 넘긴 그는 나의 독촉전화에 한번도 싫은 기색 없이 온순하게 응대하며 미안해한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늘 탁하게 잠겨 있고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지치고 힘든 표정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무슨 질병을 앓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신체가 불편한 사람이 아닐까 상상도 해보았다.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23세 된 딸의 이름을 빌려 신용금고에서 200만원을 대출받았다. 그러나 이자를 갚지 못하자 신용정보사로 채권이 넘어왔고, 원리금의 합계가 500만원을 넘어섰다. 이 액수는 P부인에게 일생을 가도 만져보기 힘든 거액이다. 다른 채무자라면 변제를 거절하고 ‘법대로 하라’고 하면서 추심원을 상대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매달 5만원을 꼬박꼬박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정해진 날짜에 송금하면서도 액수가 적어 미안하다고 부끄러워한다. 무슨 일을 해서 5만원을 입금하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어쩌다가 날짜를 건너뛰는 것을 보면 생계유지 자체가 힘든 것 같다. 5만원씩 500만원을 다 갚으려면 10년 가까이 걸리겠지만 남의 돈은 꼭 갚겠다는 정신이 앞서 있기 때문에 언젠가 빚을 다 갚는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추심원에게 이런 채무자는 사실 달갑지 않다. 5만원이 회수되면 추심원에게 떨어지는 돈은 고작 5000원이다. 이 때문에 추심원은 되도록 고액의 채권회수에 매달린다. 올해는 P부인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겨 몸도 건강해지고 돈도 많이 벌기를 기원한다.
▼ 2005년 1월 ○일
채무자 장씨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동안 몇 번 전화로만 상담하다가 오늘은 꼭 나를 만나겠다고 해서 그를 기다렸다. 장씨는 처음에 나의 채무변제 독촉을 받고 변제 여력이 없다고 하면서 채무변제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채무에 연대보증을 서준 그의 장인이 내가 보낸 최고장을 받고 노발대발하면서 사위에게 찾아가 당장 해결하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사무실로 찾아와 대책을 상의하기로 했다. 사무실에 들어온 그는 수인사가 끝나자 대뜸 섭섭하다며 항의했다.
“제발 장인은 건드리지 마시오!”
“장인에게는 독촉하지 않기로 해놓고는 왜 독촉장을 보냈습니까.”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습니까? 장 사장께서 확실한 대책을 주기 전까지 최고장은 계속 발송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좋습니다. 오늘 이후로 장인에게는 최고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그렇다면 확실한 대책을 내놓으십시오. 난들 장 사장의 장인을 괴롭히고 싶겠습니까.”
내가 강하게 나가자 그는 말을 멈추고 한참 있다가 채무자가 된 사연과 그동안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소연하듯 했다.
그는 3000만원이 넘는 빚을 졌다. 그도 외환위기를 맞아 사업체가 부도나는 바람에 전 재산을 날리고 길거리로 나왔다. 사업이 잘될 때 여기저기 연대보증을 서준 처가식구도 함께 재산을 처분당해 집안은 몰락했다. 그의 장인은 그때부터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알코올중독자가 됐다. 장인은 장씨의 아내인 딸마저 보기 싫다며 자신의 집 출입을 금지했다.
이런 와중에 최고장을 받은 그의 장인은 술이 만취한 상태에서 흉기를 들고 사위가 살고 있는 단칸방으로 찾아가 난동을 부렸다. 사실 장씨는 외환위기 후 대부분의 채권자가 빚 받는 것을 포기해 더 이상 채무로 시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때문에 내가 보낸 최고장은 그에게 날벼락이었다.
그는 사업체가 쓰러진 후 절망적인 삶을 살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다행히 그의 아내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함께 열심히 일했으며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도 학교가 끝나면 포장마차로 달려와 부모를 도울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외환위기를 겪은 상당수의 채무자가 이혼 등으로 가정이 파탄난 경우가 많았지만 그의 가족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쳤다.
연대보증을 선 장씨의 본가와 처가가 동시에 재산을 날렸고, 그 결과 장씨는 양가의 부모뿐 아니라 형제들에게조차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특히 그의 처남은 집안의 몰락이 분별 없는 매형 때문이라고 원망하면서 노골적으로 장씨를 핍박했다.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 그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한숨 돌리던 차에 나를 만난 것이다. 장씨의 채권자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추심원으로서 그와 연대보증인 그의 장인에게 최고장을 발송할 수밖에 없었다.
장인이 연대보증만 서지 않았다면 ‘맘대로 하라’며 배짱으로 나갈 수 있겠지만 그는 장인에게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이도저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추심원인 내가 그의 장인에게 최고장을 발송하지 않고 추심행위를 중지한다면 사태는 잠잠해질 수 있다. 그러나 채권추심을 수임한 처지에서는 아무리 변제능력이 없다고 해도 채무변제 독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가족 재산이 허공으로
장씨는 여기까지 얘기하면서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도 한때는 잘나가던 사업가로 많은 직원을 거느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형제에게서조차 따돌림을 받는 신세가 됐다. 오직 자기를 버리지 않은 처자식을 먹여살리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채무변제 독촉에 시달리게 됐으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그의 실패가 개인적인 잘못이었건 국가 부도사태라는 거대한 급류 때문이었건 그가 불행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그는 이런 운명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와 장씨는 채무변제를 위한 한 가지 방안에 합의했다. 나는 채권자에게 그의 채무를 50%로 감면해주도록 설득하고, 그는 매달 포장마차의 수입 중 50만원을 공제해 분할로 변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절대 그의 장인에게 최고장을 발송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500만원을 매월 50만원씩 변제하려면 3년 남짓 걸린다.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장씨가 채무를 청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위로했다. 엘리베이터 타는 곳까지 그를 배웅했지만 왠지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심정이었다. 씁쓸했다. 형편이 풀려 그가 옛 영광을 되찾기를 바랄 뿐이다.
채무자 중 상당수는 가족과 친척까지 연대보증을 선 경우가 많아 부모형제들까지 어느 날 갑자기 빚진 사람으로 전락한다. 보증을 설 때는 서로 좋은 감정이었지만, 사업에 실패해 채무자로 전락하면 관계는 험악해지고 결국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악화된다. 심지어 부자지간에도 돈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채권추심원은 이러한 상황을 자주 겪기 때문에 가능하면 친척간이라도 보증을 서지 말라고 권고한다. 성경에도 ‘보증서지 말라’는 말씀이 있지 않은가.
▼ 2005년 2월 ○일
윤씨는 낡은 중고 화물차를 몰고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화물운반을 하며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채무자다. 어떤 때는 일거리가 없어 며칠씩 수입이 끊기고, 여름에 장마라도 지면 거의 일손을 놓는다고 한다. 그는 화물차 안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잠도 화물차 안에서 잔다.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어갈까 말까. 지하 단칸방에서 부인과 세 자녀가 겨우 생활하고 있어 그로서는 차라리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서로를 위해 편하다고 한다.
합죽이 윤씨의 사연
그는 오늘도 고속도로 휴게실에 잠깐 차를 세워놓고 나에게 전화했다. 조금 전에 10만원을 송금했다면서 건강은 어떠냐며 나의 안부까지 물었다. 요즘 하는 일은 잘되느냐고 물으니 그는 “그냥 그렇게 살지요”라며 싱겁게 웃었다. 그 순간 생활고 때문에 이가 거의 다 빠져 합죽해진 그의 얼굴이 떠올라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원래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다. 성격이 괄괄한 그는 어느 날 영업사원의 관할구역을 놓고 상사와 심하게 다투다 멱살잡이를 하는 바람에 사표를 냈다. 그의 인생이 여기까지만 망가졌어도 어떻게든 재기해 새로운 직장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어느 날 할 일이 없어 공원을 맴돌다가 집에 와 보니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의 일곱 살 난 아이가 동네 아이들과 함께 화약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길가에 주차해놓은 차량에 불이 붙었고, 인근 주택까지 번져 길가의 집 1층에 피해를 줬다. 자동차 소유주들은 보험회사에서 보상을 받았지만, 주택 소유자는 그럴 수 없었다. 윤씨의 전세금을 압류해 단칸 셋방으로 쫓겨났으나 피해를 본 집주인이 아직 돈을 덜 받았다며 그를 힘들게 했다.
윤씨의 아들을 대신해 손해를 보상한 보험회사는 그 채권을 신용정보사로 이관했고 나는 담당자가 되어 그와 대면했다. 그와 만나기 전 나는 두 번이나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지하 셋방은 항상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만날 수 없었다. 세 번째 방문한 날도 그를 만나지 못해 채무변제를 요구하는 쪽지를 문틈에 끼워 놓고 왔다. 이틀 후 윤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마도 놀란 그의 가족이 그에게 급히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약속장소로 가니 그는 낡은 화물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의 합죽한 입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치아를 보여줬다. 위아래 치아가 거의 다 빠지거나 흔들거려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전세금을 차압당하고 보험회사에서 채무 변제 독촉을 받자 그는 심한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다 어느 날 흔들거리는 자신의 치아를 발견했다.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한 상태에서 다른 이가 함께 빠지거나 흔들거렸다. 이제는 몇 개만 남은 이로 간신히 음식을 씹으며 지탱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가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자식인데 어떻게 합니까. 그 아인들 무엇을 알고 했겠습니까.”
“그럼, 채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그마치 3000만원이나 되는데.”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날 벌어 그날 사는 형편인데. 꼭 받아야겠다면 매월 몇만원이라도 보내드리겠습니다.”
자식이 아니라 원수?
그는 채무변제를 거절하지 않았다. 상당수의 채무자는 이럴 때 화를 내며 ‘당신 마음대로 하라’며 추심원에게 소리치기 일쑤다. 채무자의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 보여도 그에게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채무를 빨리 갚아야 한다고 독촉하는 것이 추심원의 기본 임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윤씨는 매달 수입 중 10만원을 송금하기로 했다. 나는 차마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에게 송금 계좌와 나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고 헤어졌다. 화물차로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이 삶에 지친 모습으로 내게 투영됐다. 저 힘든 몸으로 화물을 싣고 서울과 지방을 오갈 때 문득문득 사고를 저지른 어린 아들이 생각날 것이라고 느끼니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도 왠지 무거웠다. 그는 다음 달도 어김없이 고속도로에서 나에게 전화할 것이다. “서 부장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방금 10만원 송금했습니다”라고 하면서. 나는 그가 치아라도 빨리 고쳐 고속도로를 쌩쌩 달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
윤씨가 겪은 유의 사고는 추심을 하면서 자주 들었던 것이다. 미성년자가 차량을 몰다가 사고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고 특히 어린 나이에 음주와 무면허 운전까지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땐 친권자인 부모가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 비록 성년인 자녀가 교통사고를 냈다 해도 당사자는 아무런 변제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의 장래를 생각해 채무를 그대로 떠안는다.
특히 대형 교통사고인 경우 부모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야말로 ‘자식이 아니라 원수’라고 고개를 흔드는 부모도 자주 만난다. 윤씨는 어린 아들의 사고에 대해 원망하는 소리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이 장성해 이 사건을 기억한다면 아버지에게 한없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까.
▼ 2005년 2월 ○일
며칠 동안 실사를 하지 않았더니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채권 서류를 보다가 황씨의 파일이 눈에 띄었다. 안양시로 출장 가기로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추심원은 오전에 사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거나, 채무자에게 독촉전화를 한다. 11시쯤엔 대부분 사무실을 나가 오후 3∼5시에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다. 실사를 자주 나가는 것은 어떻게든 채무자를 만나기 위함이고,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주거상황이나 채권회수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소주병, 라면봉지, 담뱃재
실사를 나간다고 곧바로 채권을 회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무실에 앉아서 추심하면 현장 감각이 떨어진다. 며칠간 실사를 나가지 않으면 하루가 몹시 지루하게 느껴지고 자꾸만 나태해지기 때문에 추운 날이든 더운 날이든 사무실을 나선다. ‘오늘은 꼭 돈을 받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시내구경이나 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와야지’하며 나는 안양행 전철을 탔다.
그의 집은 비탈길에 있었다. 몹시 추운 날 안양까지 와서 채무자를 만난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그러나 오늘은 어차피 유람 삼아 온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황씨가 사는 집의 초인종을 세게 눌렀다. 대부분의 채무자는 집에 없기 때문에 그도 없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면서 주위를 살펴본다. 그의 집 문 앞에는 낡은 자전거 한 대와 빈 소주병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흙 묻은 휴지가 가득히 쌓여 있는 것을 보니 그도 형편이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어 번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다. 초인종이 고장 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서울서 여기까지 온 시간과 교통비가 아깝다는 생각에 문짝을 거세게 흔들어댔다.
“누구세요?”
안에서 반갑지 않다는 듯 볼멘소리가 들린다.
“문 좀 여세요. 급한 일로 왔습니다.”
채무자에게는 될수록 추심원이란 말보다 다른 핑계를 대는 것이 좋다. 일단 만난 다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것이 상담에 더 유리할 때가 많다. 그가 열어준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비좁은 거실에 이부자리는 널려 있고 소주병 3개와 라면용기, 그리고 담뱃재가 수두룩한 재떨이가 어지러이 놓여 있다. 대낮에도 술을 마시고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말문을 열었다.
“H상사 채무 때문에 왔습니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방치합니까. 채권자가 이제 황 선생님 가재도구에 차압 딱지 붙여달라고 해서 내가 급히 왔습니다. 그동안 내가 보낸 최고장은 여러 번 받아보셨지요?”
그는 귀찮다는 듯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멍하니 창밖만 응시한다. 그의 표정엔 아무런 생의 의욕도 없어 보이고 술로 찌든 것 같은 암울함만 가득하다.
“대책을 말씀해주셔야죠. 가재도구를 차압당하면 아이들 보기에 민망하고 이웃들에게도 창피하지 않습니까. 일괄변제가 어려우면 소액이라도 분할변제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황 선생 성의가 없어 그런 것 아닙니까.”
‘우리 아빠 힘들게 하지 마세요’
내가 다그치자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신경질적으로 응대한다.
“지금 여기서 차압하고 가시오. 이미 다른 데서 다 딱지 붙이고 갔으니 당신 맘대로 하라고. 가져갈 것 있으면 다 가져가라고.”
그가 흥분하는 것 같아 나는 슬며시 겁이 났다. 그래도 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중고 TV 뒤로 가보았다. 그의 말대로 TV 뒤쪽엔 이미 모 회사에서 빨간 딱지를 붙여놓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대낮에 술과 라면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는 그는 이미 변제 능력을 상실한 자이고 남아 있는 중고가구 몇 개에 다른 채권자가 차압을 했다면 이런 채권은 빨리 손을 떼는 것이 상책이다.
있어봤자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연히 벽을 보았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액자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액자 속 사진에는 15∼16세쯤 돼 보이는 그의 딸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좌우로 황씨 부부가 활짝 웃으면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피아노 앞의 여학생은 유난히 예뻤고 사진 속의 황씨와 그의 부인도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이 사람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과거를 회상하면 이 사람은 거의 미칠 지경일 텐데 나까지 와서 심사를 괴롭히니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나는 사진 속의 여학생이 ‘우리 아빠 힘들게 하지 마세요’하고 항의하는 것 같아 얼른 눈길을 돌린다.
그는 사업 실패 후 부인과 이혼한 상태이고 사진 속의 딸은 부인이 데리고 갔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황씨는 자기를 떠나버린 아내와 딸의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그리워하면서 술과 담배로 세월을 한탄하고 있는 것일까.
“황 선생, 용기 잃지 마시고 재기하세요. 좋은 날이 오겠지요.”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잘 가시오. 다음엔 좋은 일로 만납시다.”
그가 술이 덜 깬 표정으로 나를 배웅한다.
오늘 같은 날은 마음이 울적하다. 왜 세상에는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이렇게도 많을까. 나는 괜히 화가 나서 발에 차이는 돌멩이를 힘차게 걷어찼다. 돌멩이는 때그르르 굴러가서 앞서가던 사람의 신발 뒤꿈치를 맞추려다가 간신히 피해갔다.
그는 수산물 도매업자였다. 전국의 활어를 도매하며 열심히 일했지만 경쟁이 심해지면서 사업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국 부도를 내고 채무자로 전락했다. 가정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술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지자 그의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그는 만사가 귀찮고 세상이 싫어져 부인이 원하는 대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로부터 그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고, 살고 있는 집은 월세를 내지 못해 집주인으로부터 퇴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가 재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당신 도대체 몇 살이야?”
서울행 전철을 타기 위해 역 앞까지 온 나는 사무실로 들어가기 싫어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가 막걸리 한 병을 시키고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가니까 황씨가 먹은 라면 생각이 나서 라면을 시켜 먹었다. 배는 포만감으로 가득한데 마음은 어쩐지 허전하기만 했다. 한참을 앉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전철을 타기 위해 터벅터벅 발길을 옮겼다.
▼ 2005년 3월 ○일
채무자 명단을 뒤적거리다가 양씨의 이름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는 500만원의 소액 채무자로 변제 독촉을 할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미꾸라지처럼 피해가는 사람이다. 신용상태와 재산상황 등 뒷조사를 해보니 가진 것은 없지만 아직 신용불량자가 되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장소가 어디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전화를 하면 수신거부를 하지 않고 꼬박꼬박 받지만 항상 거칠게 대하는 스타일이라 자주 다투던 채무자다. 그의 이름이 적힌 채무자 명단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서 부장입니다. 통화 가능하지요?”
“말씀하시오. 웬일이시요?”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웬일이라니요, 몰라서 묻습니까?”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니요, 용건을 말하시오.”
“D금고 대출금 채무 500만원 언제 갚을 건가요? 이자는 날마다 늘어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계속 방치합니까. 며칠 내로 정리할 수 있지요?”
“이 양반아, 그건 당신이 걱정 안 해도 내가 다 알아서 하는 일이니까 쓸데없이 전화하지 마. 갚을 때 되면 갚는 거니까 간섭하지 말라고.”
대화가 이렇게 되면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자제력을 잃어간다.
“뭐, 이 양반이라고? 말 조심하지 못해?”
나의 말투도 어느새 반말조로 변한다.
“이 양반아, 그럼 당신이 양반이지 쌍놈이야? 당신은 왜 반말하는 거야.”
상대도 만만치 않다. 이럴 땐 말싸움과 기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래야 상대도 추심원을 쉬운 상대로 보지 않는다.
“당신이라니, 내가 당신 마누라야? 당신 당신하게, 당신 도대체 몇 살이야?”
나는 서류를 보고 그의 나이를 알고 있었지만 툭 하고 던져본다.
“남의 나이는 알아서 뭐해 이 양반아.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나이를 먹었다고 나한테 반말이야, 반말은. XX!”
피하는 게 상책
상대방에게서 드디어 욕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 갓 사십 넘긴 놈이 말을 함부로 하는군. 이 자식아, 내가 당신 동년배로 보이냐? 너보다 한참 위다, 어쩔래?”
“X같이, 나이 몇 살 더 처먹었다고 지랄하고 있네. 당신 나이 든 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XX!”
또 욕설이다. 나도 드디어 참지 못하고 욕설이 튀어 나온다.
“야 이 새끼야! 돈을 갚으면 될 것을, 왜 갚지 않고 욕이야! 너 이 새끼, 왜 남의 돈 떼어먹는 거야! 빨리 갚아 이 자식아, 안 그러면 네 집구석 가서 가재도구고 뭐고 다 압류할 테니까 이달 중으로 다 정리해! 알았어?”
나의 거친 말투에 그가 새롭게 반응한다.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그랬어? 지금 네가 한 말 전부 녹음되고 있는 줄 알지? 야 이 새끼야, 네 말 녹음한 것 경찰서에 신고할 테니까 그리 알아. X 같은 새끼가 아침부터 사람 열 받게 하네.”
“녹음 좋아하네! 야 이 자식아, 실컷 녹음해라. 경찰서 검찰청 문 다 열려 있으니 지금 당장 가서 신고해 이 새끼야.”
여기서 겁먹고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최대한 목소리를 높여서 몰아붙인다.
“좋아, 이 새끼, 너 거기 가만있어, 너 한번 당해봐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왕년에 ○○에서 근무한 거 알지? 너 같은 건 내 말 한마디면 끝장이야. 너 이 새끼 후회하지 말어!”
“왕년 좋아하네. 왕년에 한가닥 안한 사람이 어디 있어 자식아, 잔소리 그만하고 빨리 돈이나 갚어 짜식아, 능력도 없는 놈이 남의 돈은 쓰고 왜 안 갚아 임마! 전화 끊어 임마!”
저쪽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대드는 것 같아 나는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 돌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분명 그가 분을 못 이겨 거는 전화일 것이다. 내가 받지 않자 옆자리 강 부장이 대신 받는다.
“누구라고요? 서영호 부장이요? 잠깐 기다리세요…어떤 사람이 욕을 하며 서 부장 바꾸라는데 받아보세요.”
“자리에 없다고 하세요. 방금 전에 나갔다고 하세요.”
이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 그동안의 경험에서 터득한 노하우다. 더 이상 같이 욕을 해대며 싸워봤자 불리한 것은 내 쪽이다. 채무자도 고객이기 때문에 조금만 자기에게 불리하면 민원을 제기하기 일쑤고 그렇게 되면 감독 당국은 추심원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다. 저쪽에서는 몇 번 더 전화를 시도하다가 나와 연결이 안 되니 포기한 것 같다.
얄밉도록 푸른 하늘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사무실 옥상으로 올라가니 얄밉도록 푸른 하늘이 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다. 아침부터 채무자와 욕설로 다투었으니 오늘 일진은 뻔하다. 이렇게 욕설로 한바탕하고 나면 그날은 전화도 걸기 싫고 맥이 빠져버린다. 채무자가 아무리 험하게 응대해도 절대로 흥분하지 않고 좋게 대하려고 하지만 상대방이 거칠게 나오면 나도 모르게 흥분하게 마련이다. 추심원 생활 초기에는 멋모르고 전화할 때마다 감정적으로 대화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상당히 노련해졌다고 스스로 평가하는데도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지고 말았다.
‘후∼’하고 내뿜는 담배연기가 하얀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수놓는다. 나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담배 한 대를 더 피운 다음 사무실로 들어와 다른 채무자 명단을 살펴본다. 그래도 추심은 해야 되고 그것은 나의 수입과 직결된다. 오늘 나와 통화한 양씨도 기분이 엉망인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람인들 속이 좋겠는가. ‘다음에 전화할 때는 사과하고 미안하다고 해야지.’ 나는 속으로 그에게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 2005년 3월 ○일
문씨의 모친이 두 번째로 나를 찾아왔다. 75세의 고령인 그는 아들의 채무를 어떻게든 정리하기 위해 나에게 대폭적인 채무감면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노구를 이끌고 찾아온 것이다. 그의 요구란 채무 2500만원을 1000만원으로 감면하면 현재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단칸방의 전세금을 빼서 갚겠다는 것이었다. 아들의 채무가 다 정리되면 자기는 월 5만원짜리 사글셋방으로 가도 괜찮으니 아들의 채무변제를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남편의 학대, 자식의 가출
채권자인 A화재보험은 2000만원 이하로는 절대 감면할 수 없는 것이 내부규정이라고 했다. 내가 몇 번이나 그의 모친 이야기를 하면서 채무감면을 요청해도 승인을 얻을 수가 없었다.
“사정은 딱하지만 채권자가 승인해주지 않으니 방법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도와주시면 왜 안되겠어요. 나를 봐서 도와주시오. 그러면 내가 어떻게든 돈을 만들 테니. 우리 아들 살리는 셈치고 도와주구려.”
노인은 눈가를 훔친다. 자식에 대한 연민과 슬픔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가끔 전화는 오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나도 모른다오. 이것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돼 취직도 할 수 없으니 지가 어디서 무엇을 하겠어요. 노동이나 하면서 살겠지요.”
“내가 이 건을 할머니 원하는 대로 해드리면 아들이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이번 일만 정리되면 꼭 정신을 차릴 겁니다. 선생님이 도와 주시오.”
“전세금을 빼서 갚는다고 하셨는데 전세금을 다 내놓으면 할머니는 어디로 가서 사시렵니까?”
나의 애꿎은 질문에 한참이나 시선을 떨어뜨리다가 힘없이 대답한다.
“늙은 몸 하나 거처할 데가 없겠습니까. 사글셋방이라도 얻어서 나가야지요.”
“남편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나는 문씨의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서 조용히 물어보았다.
“남편 복 없는 여자는 자식 복도 없다고, 영감은 진즉 인생을 포기한 지 오래요. 그런 것 묻지 마시오.”
그의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도박과 술과 여자로 평생 그에게 짐이었다. 결국 전 재산을 날리고 지금은 병자가 돼 모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다고 했다. 그녀는 행상으로 외아들인 문씨를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나 그 역시 자기 아버지처럼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이제 늙어서 기운도 없는 어머니에게 큰 짐을 지운 것이다. 노인은 한숨을 깊이 쉬었다.
그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가까스로 대학을 마쳤지만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10년이라는 세월을 실업자로 지냈다. 그의 어머니가 늦은 나이에 얻은 유일한 혈육이기에 남편의 학대 속에서도 온갖 정성으로 그를 키웠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기대엔 아랑곳없이 취직도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만취 상태에서 여자친구를 태우고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를 냈다. 상대방 차는 인명사고와 함께 차량이 크게 부서졌다. 그는 가까스로 살았으나 동승한 여자친구는 큰 부상을 당한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운전한 차는 책임보험만 들어 있어 자동차 보험회사에서 모든 손실을 보상할 수 없었다. 당연히 보험회사는 대신 물어준 손해금액을 문씨에게 청구했고, 금액은 2500만원이었다. 사고 후 그는 더욱 더 방황했고, 아예 가출한 후 어쩌다가 한 번 집에 들러 옷만 갈아입고 나간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씨의 어머니는 그래도 자식의 채무는 갚아야 된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다행히 문씨의 신용조사를 해본 결과 다른 채무는 없었다. 이 건만 해결되면 신용불량자의 족쇄가 풀려 취직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문씨의 모친이 돌아간 후 나는 채권자인 A보험회사를 방문해 다시 협조를 요청했고, 채무액을 1500만원으로 감면할 수 있었다. 그는 500만원을 더 변제하게 됐지만 나의 수정안을 받아들였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문씨의 모친은 그 후 전세방을 내놓았고, 보증금 1000만원과 친지로부터 빌린 500만원을 보태 아들의 빚을 모두 갚았다.
사랑하는 아들이 이제 신용불량자가 아니고 정상인이 됐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월세 5만원짜리 단칸방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마음은 훨씬 홀가분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추심을 하다보면 부모의 채무를 자식이 대위변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자식의 채무를 부모가 대신 갚는 것은 흔하다. 더욱이 자식이 장래가 창창한 젊은이라면 부모는 어떻게 해서라도 빚을 갚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부모는 자식의 채무 때문에 한숨을 쉬고 한탄하면서도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채무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자식이 여기저기 채무가 있는 다중채무자일 경우 부모도 두손 들고 마는 일도 자주 있다. 그러나 부모는 마지막까지 자식을 살릴 길을 찾아 노력한다.
젊은이들이 채무를 지는 경우란 대개 학자금이나 유흥비를 위해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거나 각종 교통사고를 일으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교통사고의 경우 어린 나이에 무면허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일으킨 일이 많은데 그럴 땐 본인은 물론 부모도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안게 된다. 채무액이 너무 고액이어서 집이 부유하지 않다면 평생을 채무정리에 시달리게 된다.
아들의 채무를 정리하기 위해 사글셋방으로 옮긴 문씨의 모친이 항상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이제는 문씨도 정신 차리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 2005년 4월 ○일
채무자 천씨에게 독촉 전화를 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전화를 걸어야 되는지 망설인다. 딱하고 답답해 몇 번이나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한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전화를 건다. 그는 엄밀히 말하면 채무자가 아니다. 손아래 동서가 사업을 하면서 그의 명의로 사업자등록증을 냈고, 사업이 부도로 넘어가자 명의 대여자인 그도 함께 채무자가 되고 말았다.
그의 동서인 고씨는 천씨의 명의로 신발 도매상을 하다가 파산했다. 우리나라 굴지의 신발업체인 채권자 Q사는 두 사람에게서 채권회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자 신용정보사로 채권추심을 의뢰했다. 나는 변제 독촉과 함께 두 사람을 사무실로 불러 변제계획서를 징구(徵求)했다. 실제 채무자 고씨가 매월 50만원씩 변제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명의상 채무자인 천씨의 주소지로 최고장을 발송함과 동시에 추심회사가 할 수 있는 모든 법적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겨우 가정을 꾸려가는 고씨는 변제 약속을 했지만 돈이 조달될 리 없었다.
자살 방조자?
그가 아는 친구에게서 일부를 차용해 첫 달 약속은 겨우 지켰으나 그 다음엔 아무도 그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사업이 잘될 때는 친구나 친지들이 그에게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나 한번 망하자 그들은 눈치껏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고씨는 과거 그가 잘 대해주었던 사람들이 자기를 피하자 더욱 움츠러들었고 이제 동서 명의로 된 채무까지 추심회사로 넘어오자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했다. 고씨가 두 달째부터 변제약속을 어기자 최고장은 당연히 명의를 빌려준 천씨의 집으로 발송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천씨의 아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여동생인 고씨의 아내를 찾아가 심한 모욕을 주었다.
명의 대여자인 천씨도 생활이 궁핍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특산품을 거래해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동서인 고씨의 채무 3000만원을 대신 변제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동서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 삶도 힘들고 피곤한데 뜻하지 않은 채무까지 지게 되었으니 심정이 오죽 복잡할 것인가. 나에게 시달리던 천씨는 월 30만원씩 몇 달을 갚다가 결국 변제 여력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다른 업무에 바빠 그들에 대한 변제독촉을 깜박 잊고 두 달이 지난 후, 나는 천씨에게 전화를 걸어 왜 변제가 중단됐냐고 항의했다. 그러자 천씨는 한참을 망설인 후 나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자기에게 피해를 끼쳤다고 괴로워하던 고씨 부부가 음독자살을 기도했는데 다행히 둘 다 목숨은 건졌지만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고 했다.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도 이제 더 이상 채무에 시달리고 싶지 않으니 독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를 떠나 이럴 때 추심원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추심원답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채무변제를 안할 수는 없지요. 한 달 여유를 줄 테니까 다음달부터 다시 처음 약속대로 변제하세요.”
나의 차디찬 음성에 천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서 생각해보았다. 고씨 부부 자살사건의 방조자는 혹시 내가 아닐까.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비록 채무가 있지만 내가 그렇게 심하게 몰아붙이지만 않았어도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 추심원 생활을 더는 계속하고 싶지 않다.
허풍쟁이 왕 사장
▼ 2005년 5월 ○일
W동 로터리에 있는 H골프상사 출입문 철제 셔터가 굳게 잠겨 있다. 채무자 왕씨는 만날 수가 없다. 그가 가산을 정리해 미국으로 도피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그가 운영하던 골프용품 가게에 가보았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해외도피설이 사실인 것 같다.
그는 내가 겪은 수많은 채무자 중 가장 재미있는 사람이다. 빚이 5억원이 넘는데도 만날 때마다 재력을 과시했고, 5억원은 돈도 아니라면서 골프장을 매각하면 일시에 갚겠다고 너털웃음을 짓곤 했다. 채무변제를 독촉하려고 그의 가게로 찾아가면 그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겼다.
“아이구, 서 부장님 오셨습니까. 제가 지금 막 전화드리려고 하던 참인데 뭐 하러 여기까지 또 오셨습니까.”
“왕 사장님, 6개월이 넘었는데 한푼도 안주면 어떻게 합니까. 채권자가 이 가게 골프채 등을 압류해달라고 합니다. 사장님이 자꾸 갚겠다고 해서 내가 보류하고 있는데, 이젠 일부라도 변제하셔야죠.”
“에이, 그까짓 것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한꺼번에 변제할 텐데 뭘 그리 신경을 씁니까. 어이 송 과장, 그 골프장 매각관계 서류 좀 가져와봐.”
그가 송 과장에게 큰소리를 치자 송 과장은 서랍 속에서 서류철을 찾아 그 앞에 갖다놓는다.
“서 부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골프장 매각 계약서인데 계약금 10억원을 받기로 한 것이 저쪽에 사정이 생겨서 계약금 수령이 보름 늦어지고 있어요.”
“매각 대금이 얼마나 됩니까?”
“100억원은 족히 되지요. 서로 사려고 아우성이라 내가 좀 튕기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냥 팔려고 해요. 서 부장님 담당건도 일시에 5억원을 드려야죠.”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으련만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왕씨가 변제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송 과장에게 이미 들었다. 그의 말이 허풍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포기하지 않았다. 송 과장은 “종업원의 임금도 6개월째 밀려 있고 가게 월세도 못내 보증금을 다 까먹은 상태”라며 “건물주인이 빨리 가게를 비워달라고 아우성을 친다”고 귀띔해줬다.
“서 부장님, 이번 매각 때문에 급히 나갈 일이 있으니 서 부장님은 천천히 놀다 가세요.”
가족만 두고 해외로
그는 황급히 일어나 문밖에 세워둔 고급 승용차를 몰고 휭 하니 가버렸다. 그가 타고 다니는 고급 승용차를 압류하려고 자동차 등록원부를 떼어보았다. 그러나 차 소유주는 B캐피탈 회사였다. 그는 매월 리스료를 납부하면서 자동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압류할 수는 없었다. 송 과장의 말에 따르면 그 자동차의 리스료도 몇 달 연체돼 리스회사로부터 납부 독촉을 받고 있다고 했다. 변제 능력이 없으면서도 큰소리치는 그나 뻔히 알면서도 혹시 채권회수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으로 그를 찾은 나나 모두 심리상태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며칠 후 나는 송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왕 사장을 바꿔달라고 했다. 그러나 송 과장은 뜻밖의 말을 했다. 왕 사장이 가족만 남겨둔 채 해외로 도피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송 과장과 나눈 대화로 짐작건대 그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왕 사장은 여러 군데서 채무 변제 독촉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골프장 매각 서류를 내보이면서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가 말한 골프장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고, 채권자 누구도 그의 골프장이 어디 있는지 묻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채권자들도 그가 허풍을 떨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왕씨는 골프용품 도매상을 하면서 돈을 제법 벌었다고 한다. 알차게 사업을 키워 나갔으면 사업은 더욱 번창했을 텐데 갑자기 골프장을 짓겠다고 하면서 자금을 끌어모으다 주저앉았다. 골프용품 가게도 문을 닫게 된 처지였다. 골프장 매각 서류라고 큰소리치며 보여줬던 서류는 그가 마지막까지 시도해 보려던 골프장 사업계획서가 아니었을까.
해외로 도피한 것이 사실이라면 골프장 매각 서류도 함께 가지고 갔을까. 어쨌든 그는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고 종적을 감췄다. 그러나 추심원인 나에게 늘 기분 좋게 대해준 사람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한꺼번에 변제할 것이라는 그의 말은 얄밉다기보다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 2005년 7월 ○일
채무자 서씨는 노점상을 하다 교통사고를 낸 사람이다. 오토바이에 음식재료를 잔뜩 싣고 경사진 내리막길을 내려와 대로로 진입하려다 마주 오던 차량과 충돌했다. 상대 차의 탑승객은 중상을 입었고 그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서씨가 피해를 보상하지 못하자 상대방 차의 승객이 가입한 보험회사에서 피해를 보상한 다음 그에게 구상권을 행사했다. 이 채무관계가 추심회사로 넘어오면서 그는 졸지에 채무자가 되고 말았다.
노점상 서씨의 두 딸
이 사고로 그는 50세가 넘은 나이에 잡은 유일한 생계수단, 노점상을 접을 위기에 처했다. 일찍이 30대에 부인과 사별한 그는 어린 두 딸을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했다. 두 딸을 키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별히 배운 것이 없어 그는 젊을 때부터 하던 노점상을 운영했다. 어렵게 어린 두 딸을 키우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교통사고 후 부상 때문에 노점을 제대로 열 수 없었다. 기를 쓰고 거리로 나가 노점을 연 날은 하루 수입이 고작 몇만원에 불과했다. 그에게 구상권을 행사한 보험회사는 그가 사는 형편을 본 뒤 채권회수를 포기하고 추심회사에 위임했다.
서씨의 서류를 넘겨받은 나는 어느 날 그가 사는 곳으로 나갔다. 동대문구 지하 사글셋방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새벽까지 노점에서 어묵을 팔다가 귀가한 탓이었다. 그는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후 오후 3∼4시쯤 거리로 나가 노점을 차린다. 방에 들어가보니 한 사람이 겨우 기거할 만한 방을 쓰고 있었고, 옆에는 20세와 22세 된 두 딸이 기거하는 작은 방이 있었다.
“딸들은 직장에 나갑니까?”
“직장이라기보다 그냥 용돈이나 버는 것 같습니다.”
“서 선생은 변제능력이 없으니 딸들 보고 좀 도와달라고 하면 안되겠어요?”
“어린 것들이 저희들 용돈도 궁한 것 같은데 무슨 돈이 있겠어요. 집안 살림 도와주는 것만도 고마울 뿐인데.”
“서 선생한테 1500만원이 있을 리 없고, 무슨 좋은 방안이 없을까요?”
서씨는 교통사고 때 입은 부상 후유증 탓인지 계속 허리를 만지며 고통스러워했다. 부엌도 있을까 말까 한 사글셋방에서 노점상 서씨와 마주앉은 나는 할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에게서 돈을 받는다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없이 노점을 하는 아버지와 살아가는 두 딸을 생각하니 차라리 뭐 좀 보태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 앉아 있기가 민망하고 불편해서 가져온 최고장을 건네주고 사글셋방을 나섰다. 부인과 사별한 이야기나 딸들이 속은 썩이지 않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대화를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척 힘든 일일 것 같아 그만뒀다.
채무감면 확인문서 받던 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가냘픈 목소리의 처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죄송하지만 서영호 부장님 좀 부탁합니다.”
“누구시지요?”
“저는 부장님에게 최고장을 받은 서씨의 딸 되는 사람입니다.”
“아, 그러세요. 그런데 웬일로?”
“저의 아버지가 갚아야 할 돈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어떻게 해볼까 합니다. 좀 찾아뵙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좋습니다. 이리로 오세요.”
나는 그녀에게 사무실 위치를 알려주었고, 그날 오후에 만났다. 서씨의 큰딸은 조그마한 체구에 눈망울이 초롱초롱해 참하게 생긴 여성이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아버지가 최고장을 받고 너무 상심한 나머지 날마다 한숨을 쉬는데 제가 어떻게든 정리하고 싶다”며 “하지만 액수가 너무 크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는 중소기업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한 달에 버는 돈을 전부 합쳐도 80만원 안팎이라고 했다. 동생도 같은 일을 해 60만원을 벌고 있으니 둘이서 힘을 합해 아버지 채무를 정리해보겠다고 말했다. 어린 처녀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아버지를 위해 채무를 정리하겠다고 하니 마음이 여간 착잡하지 않았다.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나의 말에 그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더욱 왜소해 보였다. 어머니도 없이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저 처녀에게 삶은 참으로 버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어디에서도 그녀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기색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즉시 서씨의 상황과 딸이 대위변제하게 된 경위를 장문의 문서로 만들었다. 여기에 나의 의견까지 첨가해 그의 채무를 대폭 감면해달라고 채권자에게 요청했다. 채권자는 나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서씨는 원금의 20%인 300만원으로 채무가 감면됐고, 딸의 노력에 힘입어 채무는 종결됐다. 서씨의 큰딸은 채무감면 확인문서를 받던 날, 참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이제 빚 때문에 더는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어린 그녀의 마음은 몹시 설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직 불편한 몸으로 노점을 열어야 하지만 이제 돈 갚으라고 독촉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만 해도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한가. 나는 서씨의 딸이 감사하다고 건네주는 양말 3켤레를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부모의 채무를 자식이 대신 정리해준 것은 추심원 생활 중 처음이었다. 서씨의 두 딸이 밝게 성장해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를, 서씨도 빨리 건강을 회복해 그가 운영하는 노점상이 잘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교도소에서 온 편지
▼ 2005년 8월 ○일
‘존경하는 서영호 부장님께. 그간 안녕하신지요. 저는 R렌탈 채무자 차○○입니다. 그동안 저 때문에 귀사에 많은 폐를 끼치게 되어 무어라 송구스러운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중략) 귀사의 채무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이렇게 수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도소에 수감되고보니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심정입니다. (중략) 장애인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일해왔으나 이렇게 수감되고보니 괴로움과 우울증으로 참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죄송스럽지만 본인의 채무는 내년 8월 이후에나 상환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만 참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인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간 귀사에 매월 얼마씩이라도 변제한 점을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서 부장님,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는 본인에게 용기를 심어주시기 바라며 금년 한 해도 좋은 결과 있으시기 바랍니다.’
수감 중인 차씨는 추심원인 나에게 ‘존경한다’는 말까지 써가며 자신의 심정을 편지로 알려왔다. 그는 이제 막 40세를 넘긴 장애인이다. 장애인 몇 명을 데리고 조그마한 임가공업체를 꾸려오다 납기를 제대로 못 맞추는 일이 벌어졌다. 채권자는 손해배상소송을 걸어 추심회사로 관련서류를 넘겼다. 그의 채무가 300만원 정도에 불과하고 몸이 불편한 것을 알았기에 나는 그다지 심하게 채무독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매월 20만∼30만원을 5개월가량 송금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중단했다. 처음엔 다음 달에 송금하겠지 하며 기다렸으나 그는 다음 달도 돈을 보내지 않았다. 궁금해서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착신금지 상태였다.
채무가 얼마 되지 않아 곧장 실사하지는 않았다. 마침 다른 채무 건으로 실사를 가던 길에 차씨의 사무실에 들렀다. 문은 잠겨 있었고, 이웃가게에 그의 근황을 탐문했으나 얼마 전에 문을 닫았다는 말만 들었다. ‘무슨 일로 가게를 닫았을까?’ 궁금했지만 채무 잔액이 워낙 소액이라 가져간 최고장을 문틈에 끼워놓고 돌아왔다.
얼마 후에 나는 차씨의 아들이라는 젊은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군에서 휴가를 나왔다가 아버지 가게에 들렀고, 내가 끼워놓은 최고장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가 당분간 돈을 갚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아버지가 교도소에 수감됐고, 나오려면 한참 멀었다고 했다. 자신도 곧 부대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에 돈을 갚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버지를 면회 가는 길에 최고장을 전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차씨는 아들로부터 최고장을 받고 괴로워하다가 교도소에서 이 편지를 쓴 것 같았다.
대학시절 꿈도 많았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교도소에 들어온 것도 억울한데 최고장까지 보낼 수 있느냐며 화를 낼 만도 하다. 그러나 차씨는 미안하다며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 교도소에 수감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뜻하지 않게 사고를 저지른 것 같았다.
불편한 몸으로 교도소 생활을 하는 차씨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내년 8월 이후에나 변제가 가능하다고 한 것은 아마 그때쯤 교도소에서 출소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잘 메모해두었다가 내년 8월쯤엔 내가 먼저 전화해 안부를 물어보고 싶다.
▼ 2005년 11월 ○일
날씨가 제법 차갑다. 사무실에 앉아 채권서류를 뒤적이다가 H동에 주민등록지를 둔 채무자 주씨의 서류에 눈길이 멈췄다. 그동안 그에게 최고장을 몇 번 보냈지만 아무 연락도 없던 채무자였다. 발송된 최고장이 반송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가 그 주소지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했다. 주씨의 주소지인 H동 308번지 일대는 내가 대학시절 하숙했던 동네 부근이다. 추억도 씹어볼 겸 부담 없이 다녀올 생각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여기가 신씨 댁이죠?”
“그런데, 뉘시오?”
“신씨가 아드님 되시나요?”
“그렇다오, 무슨 일로 오셨소?”
“집에 없습니까?”
“소식 끊어진 지 몇 년이오. 에미도 아들 소식을 모르니 댁네가 알면 좀 알려주구려.”
대낮에 소주 한 병
노파의 야윈 모습과 방안에서 풍기는 냄새로 신씨가 이 집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채권회수에 다년간 종사하다보면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 받는 첫 느낌으로 그 사람이 채무변제를 할 수 있는지, 그 집에 살고 있는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럼 며느리는 어디에 있나요? 저 아이들은 손자들인가요?”
내 질문에 노파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힘들게 말을 이어간다.
“며느리는 간암이 걸려 저 방에 누워 있고, 아이들은 학교에도 안 가고 저렇게 놀고 있다오. 여기 있어도 나올 게 없으니 어서 돌아가시오.”
노파의 말이 끝날 무렵 조그마한 옆방에서 미닫이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중년의 아주머니가 표정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순간 내 직업을 원망했다. 여인은 복수가 차서 불러오는 배를 주체하지 못하고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차마 그 모습을 마주할 수가 없다. 아이들은 다 고장 난 컴퓨터 앞에서 여전히 마우스를 놀리고 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신씨는 이런 상황을 알고 있을까. 안다면 어떻게 견디며 살아갈까. 내 머릿속은 갖가지 상념으로 뒤섞여 혼란스럽다. 채무자에 대한 동정은 금물이지만 이럴 때는 내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
“할머니, 생활은 어떻게 하세요?”
“동사무소에서 조금 보태주고 시집간 딸이 어쩌다가 조금 돈을 부쳐줘서 그냥 그렇게 산다오. 그런 것은 왜 물어보고 그러슈?”
“아닙니다. 나도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그럽니다. 아들은 전혀 소식이 없습니까?”
“어쩌다가 한 번 전화가 오는데 시골 친구 집에 있다고만 합디다. 자세한 것은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으니 나도 모르오.”
“아들은 부인이 저렇게 몸이 아픈 것을 알고 있나요?”
“모르겠소. 내 입으로 말한 적은 없으니까.”
나는 호주머니에서 1만원짜리를 한 장 꺼내 노파에게 건넸다.
“할머니, 이 돈으로 저 아이들 라면이나 좀 사다주세요. 다시 오지는 않겠습니다.”
“고마워서….”
노파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배웅한다.
오늘은 참 슬픈 날이구나. 수많은 채무자를 만나보았지만 병든 아내를 팽개치고 종적을 감춰버린 채무자는 처음이다. 그 사람에게 나는 못된 감정보다는 차라리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좁은 골목길을 내려왔다. 그인들 어찌 노모와 어린 자식들, 그리고 병든 아내가 생각나지 않겠는가.
‘오늘은 회사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나는 중얼거리며 골목 어귀 슈퍼에서 대낮인데도 소주 한 병을 사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추심원 생활을 몇 년 하다보니 지도 한 장만 가지고도 가고자 하는 곳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추심원 생활 초기에는 번지수를 찾지 못해 부동산업소나 파출소에 가서 물어보기도 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몇 번 해보니 요령이 생겨서 이제는 어지간한 번지는 머릿속에 그리면서 찾아갈 수 있다.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탄 다음 308번지 부근까지 찾아갔다.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 308-38번지는 찾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주씨의 주소지인 308-39번지는 찾을 수 없었다. 오르막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 모교인 S대학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30년 전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꿈을 키웠고 괜찮은 직장에 입사해 결혼하고 승진도 했다. 아름다운 인생의 꿈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채무자를 만나기 위해 모교 뒷동산에 와 있다. 젊음을 만끽했던 교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감회가 묘하다. 생각해보니 졸업 후 나는 한 번도 모교를 찾은 적이 없다. 그동안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면 내가 하숙했던 집이 나온다. ‘온 김에 옛 하숙집이나 찾아가볼까’하다가 그만두었다. 하숙집 주인이 지금까지 있을 리도 없겠지만 살아 있다 하더라도 불쑥 찾아온 나를 오히려 의아한 눈길로 바라볼 것 같았다.
빚꾸러기들의 이중고
‘하숙집 주인에게 딸이 셋 있었는데. 다들 시집을 가고 나이도 많이 들었겠지. 남편 없이 하숙을 쳐서 생계를 유지하던 아주머니는 하숙생들을 정답게 대해주었는데.’
나는 회상에 잠기다가 문득 주씨의 채무가 생각나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인근을 뒤져도 주씨의 주소지를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한참을 내려가 복덕방 영감님에게 해당 지번을 문의하니 자기도 잘 모른다고 했다. 그 부근은 일제 강점기 번지가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 집배원도 잘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복덕방 영감님은 나에게 괜히 고생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오르막길을 몇 번 왔다갔다했더니 다리가 아파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주씨는 만나지 못했지만 대학을 졸업한 지 30년 만에 모교를 먼발치에서나마 보고 돌아가니 그것으로 만족하자고 자신을 위로한다.
▼ 2005년 12월 ○일
다시 한 해를 마감한다. 추심원 생활을 시작하고 세 번째 보내는 연말이다. 첫 해는 어떻게 연말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다. 경험 부족으로 마음이 어수선하기만 했다. 어떻게든 채무자에게 돈을 받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거칠게 행동할 때가 많았다. 입금 약속을 어기는 채무자에게는 심한 말로 모욕을 주기도 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어느덧 그렇게 길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상당기간 계속되다보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채무자 몇 사람은 나의 추심방법에 이의를 제기했고, 그중에는 감독 당국에 민원을 제기한 사람도 있다. 채무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사나흘에 한 번씩 전화로 돈 갚으라고 독촉하는 나를 곱게 봐줄 리 없다. 송금하겠다는 약속을 어기면 모진 말을 들기도 했으니 내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지금은 요령이 생겨 채무자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그들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일정기간 채권회수가 되지 않을 때는 다시 초조해지면서 채무자들을 들볶는다. 고압적인 방법을 써가며 나의 목표를 채우기도 했다. 채무자를 최대한 배려하려고 노력한 적도 많다. 그러나 적지 않은 채무자가 나에게 시달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모진 일을 한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다.
그들의 희망, 나의 기도
내년에도 나는 추심원 생활을 계속할 것 같다. 이젠 채무자들과 흉금을 터놓고 채무변제에 대해 상의하고 싶다. 그들에게도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을 것인데 내가 그들의 의욕을 꺾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짧은 겨울 해 때문에 창밖이 벌써 캄캄하게 어두워진다. 나는 가만히 혼자 속삭여본다.
‘나에게 시달리는 채무자들이 이 밤만큼은 추심원인 나를 절대로 생각하지 말고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기를. 그리고 내일부터는 신년연휴이니 이 기간엔 그들에게 어떠한 독촉전화도 하지 않겠다.’
신용불량자의 명절
▼ 2004년 8월 ○일
아침부터 내리던 여름비가 오후에도 그치질 않는다. 장마가 시작되는 것일까. 나는 몇 군데 채무자에게 전화를 걸다가 책상서랍 속에 두고 읽지 못한 조간신문을 꺼내본다.
‘신용불량자 400만명 시대 개막.’ 경제면 헤드라인 기사가 내 눈길을 멈추게 한다. 신용불량자 400만명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8.5%에 해당하는 숫자요, 취업인구의 18%다. 가구수로 따지면 25%. 직장인 5명이 모이면 그중 1명은 신용불량자요, 네 집 중 한 집은 빚을 갚지 못하고 살아가는 셈이다. 잠재적 신용불량자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난다.
전국 30여 개 신용정보회사에 근무하는 추심원은 대략 5만명. 추심원 한 사람이 500명의 채무자를 관리한다고 볼 때 줄잡아 250만명의 채무자가 매일 추심원들에게 시달리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나머지 150만명의 신용불량자는 채권자가 알아서 관리하거나, 돈을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400만명의 신용불량자 중 30%는 2∼3곳 이상에 채무를 안고 있는 다중 채무자다. 어떤 채무자는 무려 20∼30곳의 채무를 안고 있다. 10%는 주민등록이 말소돼 행방이 묘연하다. 추심원은 이런 사람을 ‘잠수 탄 사람’이라고 한다. 잠수함 타고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채무의 내용도 가지가지다. 상품대금이나 공사대금을 지급하지 못한 자, 카드대금 연체자, 대출금 연체자, 교통사고 후 손해배상금을 물지 못한 자 등 다양하다. 민법과 상법에 규정된 모든 채무가 채권 추심의 대상이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병원비를 내지 않고 밤에 줄행랑을 쳐 병원비를 받아달라고 추심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서글픈 일이다.
어쨌든 오늘은 종일 내리는 여름비 덕분에 실사를 나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내일 실사할 곳의 채권 파일을 정리한 후 사무실을 나섰다.
교통사고로 집안은 풍비박산
▼ 2004년 9월 ○일
추석 연휴 하루 전 토요일이다.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이 돌아오면 신용정보사의 채권회수 실적은 상당히 줄어든다. 채무자들도 명절은 쇠야 하기 때문이다. 추심원들도 이때는 채무변제 독촉전화를 덜 하고, 하더라도 좋은 말로 유도한다. 추심원도 양심이 있고 세상물정을 아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명절에 야박한 소리로 채무변제를 독촉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은 퇴근길에 채무자 홍씨의 주소지를 잠깐 들러볼 겸 Y동 주택가를 찾았다. 홍씨는 교통사고를 낸 후 피해자에게 치료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보험사가 대신 3000만원을 내주고 홍씨에게 구상권을 행사해 발생한 채무다. 사고를 내기 전 홍씨가 자동차 종합보험에 가입했다면 모든 손해배상을 보험회사에 위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책임보험에만 가입했다. 게다가 음주운전까지 해 피해자에게 지급해야 할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간의 추심 진행과정에서 홍씨가 이미 주소지에서 살지 않고 가족과도 연락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추석 명절엔 혹시라도 집에 돌아왔나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해보기로 했다. 특기할 것은 홍씨의 아내가 국내 굴지의 금융기관에 근무했다는 사실이다. 채무변제 능력은 있는 것 같았지만, 남편 홍씨가 카드대금을 수없이 연체하고 교통사고를 자주 내는 바람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다.
홍씨 부인은 처음에는 남편의 채무정리를 위해 발벗고 나섰지만 날마다 새롭게 터지는 남편의 채무에 결국 두손을 들고 말았다. 그녀는 최근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고, 달리 살 궁리를 하고 있다고 내게 밝힌 적이 있다. 나는 홍씨 가족의 변화도 궁금했다.
그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하니 전을 부치는 냄새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여자들이 깔깔대고 웃는 소리도 들려온다. 초인종을 누르니, 홍씨의 아내가 민망한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홍 선생 요즘도 집에 안 들어옵니까?”
“다 아시지 않아요. 그 사람이 올 리가 없지요.”
“명절이라 음식도 장만하시고 여유가 좀 있어 보이는군요.”
“어떻게 하나요, 친정 형제들이 우리 아이들 불쌍하다고 명절 준비를 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이자는 날마다 늘어나는데 해결책을 강구해야 되지 않나요.”
“방법이 없어요. 나도 이번 추석만 지나면 기도원으로 들어가고 아이들은 친정에서 맡아주기로 했어요. 아마 앞으로 저에게 전화해도 연락이 되질 않을 겁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좀 들어오셔서….”
생각 같아서는 집안에 들어가 부침개도 먹고 몇 마디 대화도 나누어보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파트 층계를 내려오며 한마디를 던진다.
“명절 잘 보내시고 무슨 좋은 일 있으면 연락 바랍니다. 채무를 탕감해서라도 정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오늘만 같아라!’
채무에 시달리면서도 명절이라 음식 장만하는 냄새가 나니 감정이 묘해진다. 저 여인은 삶이 얼마나 버거울까. 남편은 그에게 짐을 지우고 연락마저 끊었다. 직장도 그만두고 기도원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오죽 견디기 어려우면 그럴까 하는 생각에 내가 무슨 잘못이나 한 것처럼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로부터 10일 후, 홍씨의 아내는 내게 30만원을 송금했다며 기도원으로 들어가면서 집안의 가재도구를 처분한 돈이라고 말해주었다. 앞으로는 돈을 못 갚을 것 같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홍씨의 채권 파일을 문서고 깊숙이 넣어두고 가능하면 보지 않기로 했다.
▼ 2004년 10월 ○일
오늘은 추심원 생활 중 가장 보람 있고 기쁜 날이다. 오늘 하루에만 400만원의 수입을 올렸으니 말이다. 채무자 한 사람에게서 4000만원의 빚을 회수해 10%를 받았다. 더구나 그 채무자는 앞으로도 분기에 한 번씩 4000만원을 두 번 더 변제하기로 해 앞으로 800만원의 수입을 예약해놓은 셈이다.
추심원들은 이런 일이 1년에 한 번이라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 채권자는 손쉽게 회수할 수 있는 빚을 추심업체에 맡기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은 드물다. 내가 맞이한 행운의 사연은 이랬다.
채무를 변제한 홍씨는 42세로 5년 전 자기 이모인 김씨 명의로 단란주점을 운영하면서 R보험회사로부터 2억원의 운영자금을 대출받았다. 그가 대출받을 때 차주 명의는 사업자등록상의 경영주인 이모 김씨로 하고, 홍씨는 경영자로 연대보증을 섰다.
그런데 홍씨는 그 후 사업이 잘 되지 않아 단란주점을 폐쇄하고 대출 원리금을 갚지 않았다. R보험회사는 명의상 차주인 김씨에게만 대출금 변제를 독촉했고 홍씨에게는 채권 회수 활동을 소홀히 했다.
그러나 명의를 빌려준 김씨는 주부로 변제 능력이 없었다. 연대보증을 선 홍씨도 단란주점 폐쇄 후 신용불량자가 되어 연락이 두절됐다. R보험회사는 5년이나 서류를 묵혀뒀다가 신용정보사에 추심을 의뢰했다.
이 건을 배당받고 관계서류를 검토하던 중 나는 오래되어 희미한 홍씨의 인감증명서 한 귀퉁이에 그의 전화번호가 보일 듯 말 듯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채권소멸시효를 아시나요?
호기심과 추심원 특유의 감각으로 즉시 홍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홍씨 되시지요?”
“예, 접니다.”
“귀하께서 5년 전 단란주점을 운영할 때 R보험회사에서 이모 명의로 대출받은 것 기억하시죠?”
“예.”
“그런데 왜 여태 해결하지 않고 있습니까. 이번에 신용정보사로 넘어와서 저희가 긴급조치에 들어갑니다.”
“아니, 그게 지금도 해결이 안 됐습니까? 몇 번 독촉장이 오다가 그 후 전혀 연락이 없어서 다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예, G동에 있습니다.”
“우리 사무실하고 가까우니까 급히 좀 오시지요. 홍 선생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와 면담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손쉽게 변제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홍씨와 수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했다. 그는 어느 판매회사의 사장이었다.
이때부터 홍씨와 협상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그에게 회사의 최고 책임자답게 조속히 본 건을 해결하도록 하되 그의 현 위치를 생각해서 최대한의 예우로 자진 변제를 유도했다. 그는 보험회사에서 진작 자기에게 연락했으면 어떻게든 해결했을 텐데 이렇게 이자가 늘어난 상태에서 변제하라고 하니 너무나 억울하다고 했다. 이자가 보태진 그의 채무는 3억원에 육박했다.
몇 번에 걸친 협상 끝에 나는 그의 채무를 감면해주고, 3회에 걸쳐 분할 변제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문제는 채권자가 채무를 감면해줄 것인가 하는 점, 그리고 홍씨가 월급쟁이 사장이지만 아직도 신용불량자인 상태에서 거금을 마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채권자는 채무를 감면하자는 내 의견을 받아들여 채무를 1억2000만원으로 조정하는 데 동의했다. 홍씨는 회사의 오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가 받을 몇 년치 임금을 미리 받는 조건으로 1억2000만원을 준비하기로 합의를 봤다.
그를 처음 만나 4000만원이 입금되기까지 불과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운이 좋았다. 만약 홍씨가 채권소멸시효를 주장하며 채무변제책임이 없다고 항변했다면 채권회수는 불가능했다. 대부분 채무자는 법률상 존재하는 채권소멸시효 제도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신용정보사는 10년이 넘은 채권도 계속 추심하고 있다. 민사상 채무는 소멸시효가 10년, 상사(商事)상 채무인 대출금은 5년이면 시효가 만료된다. 홍씨의 경우 채무 발생 후 5년이 지났으니 변제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분하고, 허망하고…
어쨌거나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날마다 오늘만 같아라! 하루 400만원 수입이면 10일이면 4000만원, 한 달이면 1억2000만원. 나는 엉뚱한 환상에 사로잡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하루 400만원이 아니라 하루 10만원도 못 버는 날이 많은데 웬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냐고 자신을 핀잔하면서….
그래도 좋다. 나는 휘파람을 한번 휙 불고 오늘 일과는 이것으로 마쳐도 된다고 중얼거리면서 퇴근 때까지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 2004년 10월 ○일
채무자의 변제약속을 그대로 믿었다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실망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액수가 큰 채권이라면 기대마저 커졌다가 어느 날 채무자가 소식도 없이 잠적하면 그에게 분노까지 품게 된다.
채무자 이씨는 빚 2억원을 1억원으로 탕감해주면 어떻게든 변제하겠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채권자를 수차례 만나 설득한 끝에 이씨가 원하는 대로 빚을 탕감받게 해줬다. 이씨는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정말 고맙다”며 “2개월 안에 전액 변제할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나는 큰 기대를 갖고 그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물론 수시로 전화하며 진행과정을 확인했고, 그때마다 그는 걱정 말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드디어 약속한 날, 이씨는 내 전화를 받자 일정에 좀 차질이 생겼으니 한 달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고 한 달 정도 더 기다리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1억원을 변제한다면 나의 수입은 1000만원이 된다. 이 한 건으로 수개월치 봉급을 벌게 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 내 통장에 1000만원이 입금되는 꿈까지 꾸었다.
그러나 그는 6개월이 흐른 뒤에도 갚지 않았고, 소식마저 두절됐다. 그의 주민등록지를 다시 추적해보니 관련 없는 사람의 주소지에 위장전입한 것이 드러났다.
그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니 분하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했다. 그를 몇 번 만났던 나는 처음부터 그가 나를 속이려고 작정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는 진정 채무를 변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고, 또 변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해 빈털터리가 된 사람이 1억원이라는 거금을 일시에 만든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처음에 채무 탕감을 원했을 때 나는 자금출처를 물었다. 그는 사업이 번창했을 때 그의 손아래 누이에게 큰 도움을 준 적이 있는데 이번에 채무가 감면되면 그 누이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그 여동생은 지금 중국에서 사업을 크게 하고 있다고 하면서 오빠를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들쭉날쭉’, 추심원 월급
그러나 한두 번 약속이 깨지고 변제기일 연기를 요청할 때마다 내가 이유를 묻자 그는 동생의 남편(매제)이 아직 동의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간곡히 사정하는 그를 나는 믿고 싶었다.
하지만 여동생 남편이 거절했는지, 그것이 핑계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끝내 빚을 갚지 않았다. 그 후 연락조차 끊어졌다. 약속을 위반한 것이 부끄러워 소식을 끊어버린 것일까. 나는 지금도 그의 약속을 선의로 해석하고 싶다.
이씨는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 불확실한 정보를 듣고 고속도로가 개통된다고 하는 지역에 대규모 종합레저시설을 지었다. 자금이 부족하자 차입금에 의존했고, 부채규모는 불어났다. 고속도로는 종합레저시설을 한참 우회해 개통되는 바람에 이씨는 결국 부도를 냈다.
채권자인 A리스회사로부터 이씨의 빚을 받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의 주민등록지상 주소지를 추적했다. 그곳은 50대 중년 여인이 살고 있는 단독주택의 사글셋방이었다. 그녀와 몇 마디 나누면서 이씨의 사정을 들었다. 그는 사업이 실패하자 부인과 이혼했고 전 부인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 중년 여인은 이씨의 사업이 번창했을 때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받은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설득해 이씨의 연락처를 알아내 그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뜻밖에도 나와 면담 약속에 순순히 응하고 사무실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인연은 시작됐지만, 그는 결국 신의를 지키지 못하고 떠났다. 그는 고혈압과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미국으로 떠난 아내와 아들과는 한 번도 안부를 주고받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한 인간으로서 연민을 느꼈다. 채무는 변제하지 못했지만 그가 언젠가 사업을 재개해 성공하기를 기원했다. 건강도 빨리 되찾기를 빌었다.
▼ 2004년 11월 ○일
“오늘도 허탕치는 날이네.”
추심원 A가 투덜거리며 퇴근 준비를 한다.
“나도 마찬가지야, 제기랄. 일주일째 공치고 있어.”
추심원 B가 옆에서 장단을 맞춘다.
추심원의 수입은 들쭉날쭉하다. 추심 실적에 따라 자기 몫을 챙기기 때문이다. 몇백만원의 수입을 올리기도 하지만 통상 150만∼200만원이다. 때론 100만원도 못 가져가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각자 나름의 채권 회수 기법을 개발한다.
17억 챙긴 전설의 추심원
나도 고정 수입이 없어 매달 집안 살림을 꾸려가기가 난감한 적이 많다. 어떤 달에는 150만원을 받았다가 어떤 달에는 100만원도 못 가져갔다. 운이 좋은 달엔 300만원을 받기도 했다. 문제는 생활비를 가늠해 쓰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수입이 좋은 달의 월급을 비축했다가 수입이 적은 달에 나누어 쓰고 싶지만 미래는 알 수 없는 법이다. 마음 한 곳이 늘 불안하다.
금융위기가 이 나라를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1998년 이후 3∼4년간 신용정보사 직원들의 수입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수많은 기업과 개인이 쓰러졌고 채권자는 신용정보사에 추심을 의뢰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부도채권이 소화된 지금은 채권자도 나름대로 채권을 회수하는가 하면, 신용정보회사에 넘어온 채권도 경기가 악화돼 전처럼 빚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다.
신용정보사 직원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한 추심원의 이야기가 있다. 한 건의 채권회수로 그는 17억원의 거금을 챙긴 뒤 미련 없이 추심원 생활을 그만뒀다.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S신용정보사에 근무하던 추심원 T는 1999년 국내 굴지의 기업체인 A프라자의 공사 미수대금 270억원을 회수해달라는 수임계약을 B기업과 체결했다. 당시 A프라자는 지급 여력이 없었고 채권자인 B기업은 채권 회수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는 신용정보사에 채권을 넘겼다.
행운의 여신이 T에게 눈짓을 보냈을까. A프라자는 우여곡절 끝에 법정관리로 넘어갔고, 3년 후 회사가 거의 정상화돼 채무를 변제할 수 있었다. 물론 그동안 T는 끈질긴 노력과 인내로 채권회수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고 마침내 270억원을 돌려받았다.
T의 몫으로 떨어진 돈은 무려 17억원. 추심원의 연봉은 통상 2000만∼3000만원, 그가 받은 액수는 추심원 10명이 10년 동안 벌어들인 돈이자, 신용정보사가 1년 동안 버는 수입과 맞먹는다. 추심원이라면 언젠가 자기도 T와 같은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런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금융위기를 겪은 후 국내 기업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과학적으로 채권을 관리하고, 회사 내부에 채권관리팀을 두고 있어서다. ‘그래도 혹시 내가 T의 기록을 깰지 누가 알아?’ 나는 맥없이 피식 웃어보고 내일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궁리해본다.
“이것도 못해 먹겠다!”
▼ 2004년 11월 ○일
오늘은 채무자 임씨의 집에 있는 가재도구에 대해 강제집행을 실시하기로 예정된 날이다. 채권자인 A상사 양 사장은 임씨에게 납품한 물품대금 3000만원을 받지 못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승소 판결 후 임씨에게 수차례 채무변제를 독촉했지만 사업 실패로 가산을 탕진한 그에게 변제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양쪽을 설득하면서 최악의 상황은 피하려 했지만, 양 사장은 결국 임씨의 가재도구를 압류해달라고 요청했다. 임씨의 가재도구라고 해보았자 낡은 냉장고와 구형 텔레비전 한 대, 그리고 빛바랜 농짝이 전부였다. 양 사장은 돈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것 같았다.
사실 강제집행은 추심원들도 가능하면 피하려고 한다. 몇 푼 안 되는 생활용품에 압류 딱지를 붙이고 경매로 처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예컨대 냉장고에 딱지를 붙이는 것을 채무자의 자녀가 본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는가. 누군들 이들로부터 쏟아질 원망을 받고 싶겠는가.
집달관에게서 임씨의 집에 유체동산(가재도구) 압류 절차가 끝났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나는 혹시 임씨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오후 늦게 그의 집을 찾았다. 그를 만난다면 압류된 가재도구를 매각하기 전, 다시 한 번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그의 집은 산중턱 밑에 있는 허름한 연립주택이었다. 80세가 넘어 보이는 노모와 40대 후반의 부인이 집에 있었다.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허리를 다쳐 힘들어하는 부인이 “그렇지 않아도 법원에서 집달관들이 딱지를 붙이고 갔다”면서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안쪽 좁은 방에는 노모가 이불을 덮고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누워 있고 중학생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표정 없이 나를 쳐다보는데 괜스레 민망해진다.
“임 선생은 어디 계십니까?”
“가게에 있을 거예요.”
가게란 그의 가족이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조그마한 김밥집이다. 나는 그를 만나러 몇 차례 김밥집을 가보았고, 그때마다 그는 “월세가 6개월이나 밀렸다”며 “이것도 못해 먹겠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전화를 받지 않던데요.”
“나하고는 좀 전에 통화했는데요.”
“그럼 전화해서 좀 바꿔주시죠.”
“우리 아들 한번만 살려주이소”
전화로 신용정보사에서 직원이 왔다는 말을 하자 전화기 저쪽에서 임씨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부인을 통해 집달관이 가재도구를 차압(압류)하고 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돌아가라고 그래. 무엇 때문에 남의 집에 와 있는 거야!”
“여보세요, 임 선생. 나 서 부장이오.”
나는 임씨의 아내에게 전화기를 넘겨받아 급히 말을 걸었다.
“당신 맘대로 해. 만에 하나 법을 어긴 것이 있으면 그땐 당신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는 자기가 법을 잘 아는 것처럼 나에게 대들었다.
“이것 봐요, 임 선생. 당신이 소송에서 져서 압류했는데 무슨 놈의 법은 법이요! 사흘 여유를 줄 테니 채무액의 일부라도 준비해서 변제하면 압류한 물건에 대해 매각하는 것은 보류할 수 있어요. 100만∼200만원이라도 구해봐요.”
“돈 없어! 그러니까 당신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우리 집에서 나가란 말이야.”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아 전화기를 건네주자 그는 부인에게 나를 빨리 내보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부인께서 저녁에 임 선생하고 상의해서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대책이 없으면 며칠 후 압류한 물건을 매각신청하고, 그러면 다시 집달관이 와서 바로 물건을 경매해 가져갑니다. 동네사람들과 아이들에게 무슨 창피입니까?”
나는 어떻게든 마지막 파국을 막아보려고 조용히 부인을 설득했다.
“갚을 돈도 없지만 바깥양반이 고집이 세서 내 말은 잘 듣지를 않아요. 아이들 학비도 없어 큰애는 휴학 중인데 어디서 돈을 구하겠어요.”
부인이 한숨을 쉬며 죄인인 양 나를 바라본다.
“할 수 없군요. 내가 채권자가 아니니 어떻게 합니까? 양 사장에게 매각을 보류해달라고 부탁해보겠지만 힘들 겁니다.”
나는 되도록 감정을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을 나가기 위해 현관문을 막 열려고 할 때 나를 힘없이 붙드는 노인을 보고 흠칫 놀랐다. 임씨의 노모가 비틀거리며 내 허리를 꼭 껴안았기 때문이다.
“선생님, 우리 아들 한번만 살려주이소. 이 에미가 죄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나를 봐서 한번만 봐주구려. 내가 일어나면 어떻게든 갚아줄 테니까. 조금만 더 여유를 주시오.”
돈 때문에 원수가 되고…
주름이 논두렁처럼 깊이 팬, 야윈 얼굴의 노파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허리가 부러져 신음하는 부인과 쿨룩거리며 비틀대는 노모, 그리고 무표정한 중학생 사내아이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노파를 보니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도 나처럼 불효를 저지르고 있구나. 내용은 달라도 어머니 마음을 슬프게 해드린 것은 그와 내가 무엇이 다르랴! 나는 그냥 노모의 손을 한 번 잡아드리고 쫓기듯이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이 순간 나는 추심원 생활을 후회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가재도구 압류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다.
양 사장과 임씨는 원래 친구 사이다. 임씨는 양 사장으로부터 납품받아 전국의 주요 상회에 물건을 도매하면서 꽤나 재미를 보았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임씨는 도박과 경마에 빠져들었다. 사업이 기울면서 양 사장에게 납품대금을 지급할 수 없게 됐다. 임씨는 잃어버린 본전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조달했지만, 결국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힘들게 하는 패가망신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다정했던 친구는 원수가 됐고, 돈 앞에서는 우정도 필요 없었다. 친구의 가재도구까지 압류하지 않는가.
▼ 2004년 12월 ○일
채무에 시달리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채무자가 됐을 때를 가정해보았다. 내가 만일 추심원으로부터 돈 갚으라는 시달림을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나도 추심원이나 채권자를 기분 좋게 대하지 못할 것 같다. 다행히 변제 능력이 있다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추심회사로 넘어온 채무자들은 99%가 재산이 거의 없다. 돈 갚으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형벌과 마찬가지다.
채권자가 신용정보사에 빚을 받아달라고 의뢰하면 추심회사가 먼저 실시하는 것은 채무자의 신용상태 조사와 현거주지를 파악하기 위한 주민등록초본 발급 신청이다. 추심원들은 채무자의 신용상태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어차피 변제능력을 상실한 신용불량자들을 상대로 채권을 회수하는 것이 주 업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채무자의 주소지다. 주민등록초본을 발급받아 보면 10%는 주민등록이 말소돼 있다. 10%는 남의 주소지에 주민등록만 해놓은 위장 전입자들이다. 따라서 나머지 80%의 채무자를 상대로 빚을 받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들과 연락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렵게 연결된 채무자를 상대로 채무변제를 독촉하면 그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이 네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한 부류는 채무 자체를 부인해 추심원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귀하가 C회사에 채무가 있어 신용정보사로 넘어왔는데 빨리 갚아야 됩니다.”
“뭐라고요? 내가 채무가 있다고요? 이 양반아 똑똑히 알고 말해, 채무는 무슨 놈의 채무야. 오히려 내가 그쪽에서 받을 게 있는데.”
채무자가 일단 채무를 부인하며 발을 빼면 추심과정은 복잡해진다. 어떤 땐 민원까지 발생하기 때문에 추심원은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대개 채무를 완강히 부인하던 채무자도 몇 번의 추심과정을 거쳐 결국 빚을 시인하지만 그중 일부는 정말로 채권자와 채무자 간 분쟁이 있는 것으로 파악돼 법정으로 가기도 한다.
또 한 부류는 채무를 시인하되 변제능력이 없다며, 맘대로 하라고 배짱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속칭 ‘배째라’들이다.
“당신 맘대로 해. 있어야 갚지, 내게 돈 생길 때까지 기다리든가.”
“자꾸 그러면 법적 조치합니다.”
“법 좋아하네, 좋을 대로 해.”
이런 채무자는 뒷조사를 아무리 해도 재산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빚을 받으려면 장기간 기다려야 한다.
또 한 부류는 채무를 솔직히 인정하고 변제에 협조하는 채무자들이다.
“대금 얼마를 변제하지 않아 신용정보사로 넘어왔으니 즉시 변제해야 됩니다.”
“결국 그렇게 됐군요. 여하튼 변제할 테니 시간을 좀 주십시오.”
이런 채무자는 채권을 회수할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물론 채무를 순순히 시인하고 변제약속을 해도 중간에 사정이 여의치 않아 채권회수가 중단될 수도 있다.
추심원을 가장 맥 빠지게 하는 부류는 독촉할 때마다 변제한다고 해놓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뻔뻔스럽게 버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화도 내지 않는다. 독촉하면 항상 변제한다고만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왜 지난번 약속을 또 어기고 송금하지 않습니까?”
“아이구, 미안합니다. 다음번엔 꼭 보내드릴게요.”
이렇듯 능청스럽게 대꾸하지만 다음번 약속도 어김없이 어긴다. 결과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원점이다. 화도 내보고 욕설도 하지만 추심원만 지칠 뿐 진전이 없다.
화려했던 추억은 가고
채무자들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추심원도 잘 알고 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돈 갚으라는 독촉에 시달릴 때 그들의 삶은 리듬이 깨지고 불쾌해질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추심원은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채무변제가 완료될 때까지 끊임없이 최고장을 보내고 전화로 다그친다. 인간적으로는 미안하고 안된 일이지만 채권을 위임한 채권자의 요구에 부응하고 추심원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할 수밖에 없다.
‘언제쯤 이 세상에 채무자가 한 명도 없는 때가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상념에 빠져본다.
▼ 2004년 12월 ○일
연말 회식을 하자며 사무실이 약간 들썩거리는데, 후배 추심원 B가 내 자리로 인사를 왔다.
“서 선배님,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볼까 합니다.”
“왜 갑자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나는 추심원의 이직이 워낙 잦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아닙니다. 특별히 할 것은 없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궁리 좀 해야겠습니다. 40이 넘어 갑자기 무엇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일이 적성에 맞는 것도 아니고요.”
“다른 추심회사로 가는 것은 아니지?”
나의 질문에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기 위해 자리를 뜬다. 그 또한 나처럼 금융기관에 있다가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구조조정당했다. 그 후 이것저것 하다가 추심회사에 몸담은 지 6개월이 안 된 사람이었다. 평소에도 말이 없고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추심업무가 그에겐 상당히 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매월 받아간 월급도 100만원 안팎이어서 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다.
금융위기는 이 나라의 수많은 직장인을 거리로 내몰았지만 그중에서도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 종사자들이 가장 많이 직장을 잃었다. 수많은 기업이 부실화하면서 대출과 지급보증을 섰던 금융기관이 동반 부실화했다. 구조조정의 칼날이 이들을 겨눴다. 금융업무밖에 모르던 그들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상당수가 신용정보사에서 추심원으로 근무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업하지 못해 추심원으로 뛰는 젊은 직원도 있지만 얼마 못 가 퇴직한다. 이 때문에 추심원 대부분은 전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때때로 전 직장의 화려했던(?) 추억에 잠기기 쉽고, 추심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생활이 어려워 갖가지 갈등에 시달린다.
연초의 독촉전화
신용정보사에 취업한 뒤 처음 석 달을 ‘마(摩)의 3개월’이라고 부른다. 입사 후 3개월 동안 끈기와 노력으로 버티는 사람은 추심원 생활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포기하는 사람은 결국 또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선다. 일부는 다시 추심회사로 들어와 한 번 더 추심원 생활에 도전하기도 한다.
3개월이 중요한 것은 추심원이 채무자를 접촉한 후 이 기간은 지나야 채권회수의 효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수한 채권에 대한 검토와 채무자 추적 등 기초 작업을 하면서 채권회수가 가능하게끔 하기까지 최소한 3개월은 걸린다. 대부분의 추심회사는 신입 추심원에게 첫 3개월의 식비와 교통비로 몇십만원을 지급한다. 일종의 정착금이라고 할까. 유능한 추심원을 양성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이기도 하다.
추심원 이직률은 50% 정도 된다. 10명이 입사해 5명이 정착하면 정상인데, 그 5명이 몇 년이나 근무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추심 전문가로 단련돼 다른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한다. 내 경우, 6명이 함께 추심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나를 포함해 두 사람만 남았다. 우리나라 추심회사 종사자들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직업적 한계에 대한 회의와 만족스럽지 못한 수입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
연말은 다가오고 새로운 해가 시작될 텐데 내년에는 얼마나 많은 추심원이 들어오고 나가려나. 나는 후배 추심원 B의 퇴사를 보며 쓸쓸한 상념에 젖었다.
▼ 2005년 1월 ○일
연초부터 채무자에게 돈 갚으라는 전화를 걸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채무자라도 연초부터 돈 갚으라는 독촉전화를 받고 기분 좋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채무자의 특성을 파악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고정적으로 돈을 입금하는 채무자에겐 늘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에도 잘 부탁한다면서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목적은 돈 받는 것이니까. 어느 땐 정말 채무자에게 고마운 마음과 함께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에도 어떻게든 빚을 갚아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액수가 많든 적든 꼬박꼬박 정해진 날짜에 입금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채무자는 이와는 정반대다. 변제 능력을 상실한 것도 원인이고, 일부는 변제할 수 있는데도 회피하려고 한다.
지난 1년을 회고하니 나와 통화하고 만난 많은 채무자의 얼굴이 스쳐간다. 그들 중 일부는 올해도 나로부터 채무를 변제하라는 독촉을 받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겐 마음의 상처까지 받겠지만 가능하면 내 감정을 다스리면서 채무자와 교류하고 싶다. 하지만 돈 갚으라는 전화를 주고받다보면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커진다. 어느 한 쪽이 욕이라도 하면 대화는 험악해지다가 결국은 얼굴을 붉히며 쌍소리까지 튀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