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 변원림 지음, 일지사, 288쪽, 1만7000원
궈모뤄(郭沫若)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지난 20세기 중반에 펴낸 ‘10비판서’에서 유가사상은 인민해방의 대세를 좇은 진보사상이고, 공자는 당대의 혁명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공자를 당대 최악의 반동사상가로 낙인찍은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이내 묻히고 말았다. 지난 세기말 일본의 기무라 에이이치(木村英一) 등은 정밀한 고증을 통해 ‘논어’를 상세히 분석한 뒤 공자를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개혁가로 규정하며 캉유웨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필자가 지난 2003년에 ‘연산군을 위한 변명’(지식산업사)을 통해 연산군은 결코 황음무도한 미치광이 폭군이 아니었고, 중종반정은 반역에 불과했다는 창견을 제시한 배경도 사실 캉유웨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30년대에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광해군을 백성의 이익을 앞세운 조선조 최고의 외교수완가로 평가한 마당에 일각에서 전직 대통령을 연산군에 비유하며 지나친 이상론을 펼친 것이 필자의 기필(起筆)을 자극했다.
사료 비판 소홀한 학계에 일침
연산군을 폭군으로 매도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근인을 왕권(王權)에 대한 신권(臣權)의 도전에서 찾은 필자의 주장은 ‘훈구 대 사림’의 갈등구도로 파악한 기존의 통설에 대한 강력한 반론에 해당했다.
이에 대해 김범은 지난해에 펴낸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에서 양대 사화를 삼사의 월권과 능상(凌上)을 교정코자 한 연산군의 ‘폭력적 정치숙청’으로 규정하며 필자의 주장을 간접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연산군의 권력을 ‘절대왕권’으로 전제한 뒤 갑자사화의 배경을 연산군의 ‘패행(悖行)과 사치’, 폐위의 원인을 ‘광기 어린 폭정’에서 찾았다. 이는 중종반정을 ‘반역’이 아닌 ‘반정’으로 평가한 과거의 성리학적 견해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지난 1997년에 나온 김돈의 ‘조선전기 군신권력관계 연구’ 등과 마찬가지로 사료선택에 신중치 못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나온 변원림씨의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일지사)은 사료비판을 소홀히 하는 국내 학계의 잘못된 관행에 정문일침(頂門一鍼)을 가한 일대 쾌거에 해당한다. 그는 국내 학계의 통폐를 이같이 지적했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이 말도 되지 않는 ‘연산군일기’의 내용을 모두 사실로 믿고 있으니 이들의 무비판적인 학문 연구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국내 학계가 연산군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리고 있는 단서를 1962년에 출간된 이상백의 ‘한국사’에서 찾고 있다. 후대의 야사를 모아놓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안정복의 ‘열조통기’ 등을 근거로 면밀한 고증도 없이 반정공신들이 귀양 간 세력과 연결해 연산군을 몰아낸 것으로 기술한 것이 왜곡의 시작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는 반세기가 다 되도록 이상백의 결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국내 학계의 행태와 관련해 필자를 이같이 두둔하고 나섰다.
“지난 2003년에 이르러서야 신동준이 처음으로 반정공신들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아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연산군을 지나치게 변명하고 있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 변씨가 정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역저를 펴낸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듯싶다. 필자는 저자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독일의 에를랑겐 대학에서 ‘사상사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튀빙겐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한 재독 사학자다. 그는 이번 역저에서 고금동서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연산군일기’의 내용이 얼마나 두서없이 날조된 것인지를 정밀하게 추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