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욱의 과학에세이’ : 홍성욱 지음, 동아시아, 304쪽, 1만3800원
홍 교수는 벌써 10여 년 가까이 문과와 이과를 구별하는 폐해를 지적하면서 특정 학문의 구속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학문의 소통과 상호이해를 추구하는 잡종적 태도가 복잡한 현대사회에 유용하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지나치게 세분화된 학문 연구의 폐해를 지적한 논자는 꽤 있다. 그러나 홍 교수의 주장이 좀 더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그가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학문 대통합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지 않고, 구체적인 과학기술 역사의 사례연구를 통해 ‘잡종적’ 접근이 개별 학문의 발전에도 결정적 구실을 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잡종적’ 태도는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학제적 연구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이나 MIT에서 레이더를 만들어낸 래드랩의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주제에서 돌파구를 찾는 데도 큰 도움이 됐음을 지적한 것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사회적 이유 때문에 ‘순종성’에 집착하는 우리의 학문 풍토를 고려할 때 홍 교수의 이러한 노력은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책은 잡종적 지식인으로서 그의 지적 편력을 다양한 주제에 걸쳐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과학과 철학이 만났을 때
딱딱한 전문학술지에 실은 글이 아니라 주로 대중적인 매체에 실었던 비교적 짧은 길이의 글을 모아서 쉽게 읽히도록 엮은 책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제1장 ‘현대사회와 과학기술’에서 홍 교수는 일단 독자의 ‘상식’이 편향되어 있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적한다. 그는 우선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이 얼마나 과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과학을 ‘사랑’했는지 강조하고, 과학과 철학이 만났을 때 두 학문 각각의 발전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를 소개한다.
또 과학자의 연구가 시대 흐름과 대중의 지지에 얼마나 의존하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 얼마나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지를 초전도가속기와 같은 생생한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과학과 미술의 관계를 살피거나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와 근대과학의 영웅 뉴턴을 비교한 글도 흥미롭다. 기존의 과학과 사회,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일반인이 갖고 있는 상식을 깨뜨리는 신선한 글들이다.
과학과 창의성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연구를 여럿 담은 제2장을 지나면 ‘상식 깨기’를 넘어서는, 홍성욱 교수의 생각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제3장 “누구를 위한 과학기술인가?”에는 최근 논란이 된 광우병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관련 논쟁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포함해서 논의의 진중함이 한 단계 올라간 글들이 담겨 있다. 특히 홍 교수는 황우석 연구팀의 논문조작 사건이 터지기 전인 2004년 5월 이미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된 윤리적 고민의 필요성에 대해 글을 썼고, 황우석 교수에 대한 찬반 여론이 비등하던 2005년 12월9일에는 철저한 검증을 촉구하는 ‘용감한’ 글을 언론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의 종횡무진하는 사유를 발견할 수 있는 제4장에는 ‘문화, 사회, 역사에 대한 단상들’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과학소설 이야기, 과학영화 이야기, 동도서기(東道西器)론에 대한 비판, 국민배심원 제도에 대한 재미있는 분석 등이 맛깔나게 이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개인문집처럼 여러 주제에 대한 글들을 무작정 모아놓은 것은 아니다. 다양한 주제의 글을 관통하는 주제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과학이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편집도 깔끔하고, 내용상 중복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아서 여기저기 다른 시기에 쓰인 글을 편집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갖는 다양한 얼굴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적극 추천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