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지옥의 왕 하데스를 만나러 간다. 하데스는 아내를 돌려주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것. 동물의 음울한 울음소리가 가득한 동굴을 빠져나오는 그들, 지옥의 왕은 온갖 소음을 지어내 오르페우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는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 되뇌고 또 되뇌지만 결국 출구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고 만다. 이에 아내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뒤돌아보지 말라”
목숨을 걸고 아내를 구하러 갔지만 결국 자신의 실수로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 그는 상실감과 자괴감을 시와 노래로 부르며 지긋지긋한 여생을 견뎌낸다.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른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노래는 상실의 노래이기에 더 매력적이었다. 그렇다면, 이후 오르페우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흥미롭게도 결국 오르페우스는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원한을 품은 여성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 죽는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상실감이 아니라 질투와 원한이었던 셈이다. 상실감에 빠진 오르페우스가 만든 허무의 노래는 수많은 여성과 님프를 유혹했다. 실패한 사랑의 이야기가 더 매력적이듯이 그는 점점 더 매력적인 남자로 부상한다. 하지만 그의 무관심이 짙을수록 그를 사랑하는 여성들의 조급함 역시 깊어갔다. 매력적인 남성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만큼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가 어디 있을까?
아름다운 아내와의 사랑, 이별, 후회, 반추, 순결한 죽음으로 이루어진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한 여자를 끔찍이 사랑한 남자의 드라마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오르페우스의 이야기 자체는 첫사랑의 서사와 꼭 닮아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머릿속에, 아니 가슴속에 원본으로 남아 있는 그녀, 그래서 다른 누구를 만난다 할지라도 지금의 그녀를 남루하게 만드는 그녀, 기억 속에 언제나 순결한 채 봉인되어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지는 그녀, 바로 남성의 로망 첫사랑 신화 말이다. 남자들은 곧잘 실패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무기처럼 장착한 채, 그때의 순수를 찬양한다. 지금의 ‘당신’과 비교도 안 되는 순수하고 순결한 ‘그녀’가 있었노라고 되뇌면서 말이다.
이쯤 되면 ‘뒤돌아보지 말라’라는 격언은 오래된 과거를 그저 묻어두라는 조상들의 지혜에 가까워진다. 과거에 집착한 오르페우스가 늘 뒤돌아보다 목숨을 빼앗기듯이 어쩌면 추억은 현재를 발목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첫사랑을 기억하되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실패한 사랑은 뒤돌아볼 때 추억으로 완성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한다. 실패한 사랑이기에 더욱 더 되돌아보고 싶다. 한편으로는 되돌아보기 때문에 추억은 완전해진다. ‘뒤돌아보기’, 사랑과 인생에서 그것은 독일까, 약일까? 평생의 선물이 되어 되돌아온 과거, 하얀 눈과 입김이 그 무엇보다 먼저 기억되는 작품, ‘러브레터’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얼음 속에 곱게 빙장된 추억
‘러브레터’는 이와이 지를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감독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 작품이다. ‘러브레터’가 유명해진 데는 그것이 처음 불법이라는 이름과 함께 전파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러브레터’는 밀교처럼 한국에 상륙했다.
당시 일본 영화는 공식 수입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영화는 불법 복사본으로 대학가를 떠돌았다. 앞 세대 선배들이 멕시코 혁명사를 몰래 돌려보던 것과는 달리 10여 년 전 대학가에는 일본 영화와 하루키가 접속코드로 떠돌아다녔다. 소프트렌즈를 사용해서 워낙 과다 노출된 장면이 많았지만 불법 복제의 조악함 때문에 화이트 아웃 현상은 훨씬 더 심했다. 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마치 서리 낀 유리창 너머의 마을처럼 고즈넉하게 해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