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감독이 영화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 영화계는 세계 3대 영화제의 감독상을 모두 거머쥐게 됐다. 흥행의 마술사 강우석 감독과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대가 강제규 감독이 만든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1000만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영화의 성공 신화는 뛰어난 연출력과 탁월한 감각을 지닌 이들 영화감독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중 눈길을 끌었던 건 마지막으로 내세운 7번째 지표, 즉 영화력이었다. 여기서 영화력이란 그 나라 영화산업의 크기, 제작 편수, 관객 점유율 등을 근거로 산출한 말 그대로 영화의 힘이다. 영화력이 국력을 측정하는 지표가 된 것도 놀랄 만한 일이지만 다른 6개 분야에선 순위에 오르지 못했던 한국이 영화력에서만큼은 9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더욱더 놀라웠다.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 가운데 영화의 대외 신인도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높게 나타난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요즘 한국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영화 강대국인 것처럼 느껴진다.
증강된 영화력을 반영하듯 한국영화의 국제적 위상은 지난 수십 년간의 성과를 뛰어넘는 괄목상대(刮目相對)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영화는 불과 2년 사이에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칸과 베니스, 그리고 베를린영화제를 석권하며 세계 영화의 중심에 접근하고 있다. 이는 1950년대 일본영화나 1980년대 중국영화에 쏟아졌던 국제적인 관심을 상기시킨다. 공교롭게도 세 영화제 모두 감독상을 수상한 것도 이채롭다. 이들 영화제가 모두 감독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걸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 감독들이 부상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또 감독의 힘은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영화는 감독의 예술
종합예술인 영화가 전적으로 특정 개인에게 속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내려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한국영화가 국내외적으로 거두고 있는 빛나는 성과 역시 감독의 능력에 의지한 바가 크다. 특히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영화가 아닌 감독임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기예적 기질이 뛰어난 한국인이 거둔 쾌거 혹은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폭발적인 잠재력이 증명된 성과 등의 수사를 동원하며 흥분한다.
하지만 이 같은 상찬(賞讚)에는 다소간 거품이 끼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한민국의 문화적 역량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는 걸 부인하는 건 아니다. 다만 단기간에 혁신이 어려운 문화 산업의 본성을 감안할 때 한국영화의 욱일승천(旭日昇天)을 순수한 문화적 역량의 힘이라고만 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시스템의 뒷받침이 충일한 시너지가 돼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감독이 지니는 위치와 중요성은 어느 정도일까?
역사적으로 감독은 늘 문제적인 존재였다. 영화감독이 문제적이라 함은 음악에서의 작곡가나 회화에서의 화가와는 다른 의미다. 세계영화사에서 창작의 주체로서의 감독 혹은 작가에 대한 논란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감독의 존재를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영화의 종주국인 프랑스였다.
작가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오퇴르(auteur)는 영화감독을 다른 예술 장르에서와 같은 예술가로 추인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1950년대 일군의 프랑스 영화인들이 소위 작가주의를 주창함으로써 가능했다. 작가주의자들에게 있어 작가는 자신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영화 속에 일관되게 관철시키는 예술가를 의미했다. 작가주의는 영화감독을 단순한 이야기꾼이나 테크니션이 아니라 예술적 영감과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현하는 예술가로 간주했다. 그럼으로써 영화가 기능공이 만들어내는 상품이 아니라 정교하게 세공된 예술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출발한 작가 개념은 후일 텍스트에 작용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간과한 감상적인 노선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한 편의 영화가 태어나기까지는 감독 외에도 무수히 많은 요소들이 관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모든 결과를 감독의 것으로 귀속시키는 것은 감상적인 예술지상주의라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작가주의에 대한 맹렬한 공격에도 영화 제작을 관장하는 통제자로서 감독에 대한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작가주의자들이 부여한 신적 직위가 떨어지긴 했지만 텍스트의 주체이자 최종적 책임자로서 감독의 위치는 여전히 확고하다. 우리가 영화를 감독의 예술로 이야기하는 것 또한 전통적인 작가의식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영화감독 한 사람의 능력으로 영화가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의 역할은 모든 작업을 수행하는 만능 재주꾼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능력을 작품에 담아내는 조합과 총화의 기능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봤을 때 한국의 영화 현장에서 감독의 개념은 잘못 인식돼왔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감독이 신성화되고 권력화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과거 충무로에서는 예술적 비전이나 연출력과는 무관하게 현장을 장악하는 능력, 그 우월적인 지위에서 오는 맹목적인 권위로 감독을 수행하는 이들이 다수를 이루기도 했다. 이는 파시즘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최근 한국영화계에 등장한 감독(작가)들은 이런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든 장인이든 혹은 철저하게 시스템의 의해 활용되는 고용인이든 감독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을 구분 짓는 것은 최종 결과물에 드러난 감독 자신의 비전이지, 외적인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의 역할 또한 시대에 따라 변동을 겪었다. 감독은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전과정에 관여해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유일한 사람이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 과거 충무로에는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연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감독이 프로젝트에 따라 고용되는 경우가 많고, 별개의 직업작가군이 생겨나는 추세다. 따라서 작가와의 의견 조율은 감독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역할로 떠오르고 있다.
때로는 프로듀서의 마인드로 제작 전반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주어진 제작비, 조건 안에서 최고 완성도의 작품을 뽑아내는 것이 곧 감독의 능력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또한 감독은 사전제작 단계에서 캐스팅에 관여하고 시나리오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에 대해 담당 스태프들과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 이 시기에 감독은 촬영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 CG를 담당하는 슈퍼바이저 등과 함께 촬영 장소 헌팅, 조명과 카메라의 운용, CG, 효과 등을 치밀하게 계획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배우들과의 작업이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감독은 배우들과 함께 작품 및 캐릭터 분석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 촬영은 경제적인 문제, 촬영 장소의 문제, 배우들의 일정 문제 등으로 인해 차질이 생길 때가 많으므로 감독은 늘 합리적인 스케줄을 짠 후 제작진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후반작업 단계에서는 편집기사와 편집을 함께한다. 편집과 색보정, 녹음, 음악 등 후반작업의 전공정에 감독은 최종적인 결정권자로서 관여해 작품을 완성한다.
상업영화는 예술영화의 토대
영화감독들이 각광받고 있지만 영화계 안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과도기다. 영화배우 한석규의 매니저이자 영화사 힘픽처스의 대표인 한선규씨는 “영화산업이 만개하기 위해서는 감독의 역할이 보다 분명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한 대표는 “한국영화계에는 자기 색깔을 내려는 작가 지망생은 많은데 프로페셔널한 직업감독은 드물다”고 지적한다. 근사한 상업영화를 만드는 기능인에 가까운 감독들과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을 만드는 신인감독들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얘기다.
해외에서 각광받는 것은 작가들의 예술영화이지만 날로 비대해져가는 영화산업을 이끄는 것은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상품들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닥터 봉’ 등을 제작한 황기성 사단의 황기성 대표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가 공존하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며 “상업영화가 없으면 예술영화도 없다. 산업을 이끄는 영화들은 예술영화들의 든든한 토대가 된다”고 지적한다. 영화산업이 튼실해지고 제작이 활성화될 때 비주류 영화가 설 땅도 넓어진다는 논리다. 요즘 충무로의 감독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이런 종류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충무로에서 감독이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 것은 언제일까? 1980년대에 시작된 일련의 뉴 웨이브 운동 시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의 뉴 웨이브는 서양이나 일본에 비한다면 한참 늦었지만 변화의 속도는 놀랄 만큼 빨랐다. 1980년대 초반은 뉴 웨이브 운동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장호와 배창호가 당대 최고의 흥행사로 대변되는 이 시기는 대중영화의 부흥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전기가 됐다.
뉴 웨이브가 일으킨 혁신적 변화
그후 본격적인 뉴 웨이브가 태동한 것은 사회 정치적 격변기였던 1980년대 말부터다. 박광수, 장선우, 박철수, 정지영, 이명세 등 1980년대 말에 등장한 젊은 감독들은 충무로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영화계에서 부동의 일인자로 군림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 역시 1988년 ‘달콤한 신부들’로 데뷔하며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사회파라 불린 이들 젊은 감독들은 당대의 정치적 이슈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현대적인 영화 언어로 그려냄으로써 폭압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침체를 벗지 못했던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시기 정치 의식의 성숙, 영화적 자각은 1990년대 찾아올 변화들의 동력이 됐다.
한국 영화계를 이끈 대표적인 감독들. 왼쪽부터 강제규, 강우석, 임권택, 박찬욱, 류승완, 김기덕.
1990년대에는 영화 자본의 성격, 제작 시스템, 산업의 기반, 관객의 태도 등 영화를 둘러싼 전분야에서 동시다발적이고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문화계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 광범위하고 혁신적으로 일어난 변화 속에서 강우석과 강제규, 홍상수와 김기덕 같은 감독들이 나올 수 있었다.
21세기 한국에서 영화감독들의 위상 변화는 놀랍기만 하다. 대한민국은 영화감독 출신의 문화부 장관이 있으며 영화감독이 스타가 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영화왕국이라는 할리우드에서조차 소수의 스타 감독들만이 대중들의 기억에 남을 뿐 배우들에 비해 감독들의 존재는 미미하다. 최근 한국영화계에는 감독의 이름을 전면에 거는 작품이 많아지고 있다. 스타 감독의 등장은 영화감독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감독들 스스로의 태도 또한 바꿔 놓고 있다.
영화산업의 팽창과 다양한 장르의 개발에 따라 생긴 첫 번째 변화는 감독의 역할 모델의 분화(分化)다. 수십 년 전부터 고도의 분업화 시스템이 정착된 할리우드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전성기의 할리우드에는 본영화 상영 전 막간을 이용한 동시상영 시스템이 관례화돼 있었는데, 이 막간용 영화를 책임졌던 B급 영화감독들이 후일 영화 역사가들에 의해 중요한 존재로 재발견되었다. 이처럼 선진화된 영화산업구조를 지닌 나라에서는 기획영화, 작가영화, 예술영화 등 영화의 성격에 따라 감독 및 관련 기능인들이 고루 분포해 있다. 이에 비하면 충무로에서 역할모델의 다양화는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영화에서 기획의 역할이 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예술가 지상주의가 잔존하고 있다. ‘조폭마누라’(2001) ‘어깨동무’(2004)를 연출한 조진규 감독은 “한국에서는 여전히 모든 감독이 작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다. 일본에서는 작가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심지어 ‘밥 먹고 살 걱정이나 해라. 작가는 쉽게 나오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들었다. 작가는 수백 명 중 한 명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말대로 ‘영화로 밥 먹고 살 걱정을 하는 것’이 진정한 직업감독의 본무(本務)라 할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의 영화감독들은 과도기에 놓여 있다.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직업인으로서의 생존 전략,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야망이 어지러이 섞여 있는 셈이다.
산업적으로 본다면,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작가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로 인정하는 감독들조차 흥행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산업화는 이런 것이다. 영화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1000만명을 돌파하는 초대박 영화들이 연이어 나오는 것만이 산업화의 징표는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영화들이 관객과 만날 수 있고, 큰 영화와 작은 영화는 각기 나름대로 생존의 모델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영화산업의 모습이다.
2003년 출범한 예술영화관들의 공동배급망인 아트플러스 역시 이런 성숙화를 이루려는 움직임 중 하나다. 아트플러스의 공동배급은 예술영화 및 감독들의 운신의 폭을 넓히고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시도다. 이로 인해 과거라면 개봉 자체를 꿈꾸지 못했을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2003)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획영화의 힘
감독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능한 주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감독의 위상이 커질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소수의 예외적인 감독들을 제외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감독일지라도 기획과 시스템의 뒷받침 없이는 빛을 발할 수 없다. 거장 임권택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철석같이 믿고 뒷받침해준 제작자 이태원이 있었기 때문이고, ‘공동경비구역 JSA’(2000)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박찬욱 감독의 재능과 함께 당대 최고의 기획력을 지녔다는 명필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소위 기획영화들은 감독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은 것이었다.
기획영화는 감독의 고유한 스타일이나 주제의식이 아니라 제작자, 기획자의 아이디어가 중심이 되는 영화로 당대를 풍미하는 사회, 문화적인 트렌드나 기념할 만한 사건, 주제 의식에 따라 좌우되는 경향이 크다. 최근 붐을 이루는 실화 사건이나 실존 인물 소재의 영화 역시 기획영화의 한 갈래라 할 수 있다. 기획영화라는 용어는 감독의 취향이나 스타일보다는 기획자의 상업적인 의도에서 출발한 상품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하지만 기획영화는 시대와 관객을 읽어내는 기획자의 눈과 감독의 창작 능력이 만났을 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통상 기획영화의 모태로 보는 것은 신씨네의 ‘결혼이야기’(1992)다. 신세대 부부의 라이프 스타일을 다룬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의 주된 소비 계층인 20대 대도시 여성 관객을 타깃으로 했다. 즉 기획사인 신씨네는 20대 도시 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접 리서치를 통해 이야기의 뼈대를 추리고 에피소드를 만들어냈다. 기획의 힘으로 당대의 트렌드를 잡아내려 했던 이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후 ‘미스터 맘마’(1992) ‘닥터 봉’(1995), ‘접속’(1997)에 이르기까지 감독보다 프로듀서가 중심이 된 기획력을 바탕으로 영화를 성공시키는 풍토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최근 ‘엽기적인 그녀’(2001)를 필두로 한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 붐 역시 기획의 힘이 주도한 트렌드라 할 수 있다. ‘엽기적인 그녀’ 역시 1990년대 기획영화 붐을 주도했던 신씨네의 작품이다.
‘결혼이야기’ ‘엽기적인 그녀’ 등 기획영화의 성공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감독은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지기도 한다. 감독들이 잠재된 역량을 한껏 펼칠 수 있도록 영화 기획자들이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물론 기획자와 감독의 궁합이 잘 맞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2억원대 연출료와 러닝개런티
영화계에서 감독들의 지위는 크게 향상되고 있다. 이는 감독의 개런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충무로에서 통상 신인감독의 편당 연출료는 3000만원 선에서 결정된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이름이 조금 알려진 감독의 연출료가 7000만원∼1억원 선이었으나 최근 이런 ‘가격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올드보이’에서 박찬욱 감독이 받은 연출료는 2억원으로 알려졌다. ‘장화, 홍련’으로 흥행왕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간 김지운 감독은 그보다 조금 낮은 1억5000만원을 받았다. 김 감독은 다음 영화에서 너끈히 2억원대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봉준호 감독 역시 ‘살인의 추억’의 대박 흥행으로 2억원 이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
사실 연출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최근 영화계에서 관행화된 러닝개런티 계약이다.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에서 개런티와는 별도로 관객 한 명당 보너스를 받는다는 러닝개런티 계약을 맺었다. ‘장화, 홍련’의 김지운 감독 역시 제작사에 돌아가는 수익의 30%를 보장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두 감독 모두 개런티 외에 수억원의 부수입을 챙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관객 1000만명 시대를 연 ‘실미도’의 강우석 감독과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이 이들 영화로 벌어들이게 될 수입은 현재로서 산출이 불가능할 정도다. 두 감독 모두 감독 겸 제작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특히 강우석 감독은 연출, 제작은 물론 배급, 해외 세일즈까지 직접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의 개런티가 상승하는 것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배우들의 몸값에 비하면 감독들의 개런티는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다. 영화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을 때도 감독은 응당 대접받아야 할 존재다. 문제는 감독과 배우들이 받는 대우에 비해 다른 스태프에 대한 처우가 한참 뒤처진다는 데 있다. 영화와 같은 공동체적인 작업 시스템에서 이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개선이 절실한 상황이다.
강한 감독만이 살아남는다
오늘날 한국영화계에서 감독의 이름 석 자는 어느 스타에 못지않은 브랜드 파워를 발휘한다. 그 시발점은 강제규 감독이다. ‘쉬리’(1999)는 영화에서 감독의 역할이 어디까지이고 또 얼마나 중요한가를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 한국영화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입증했고 영화감독 강제규를 국민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쉬리’ 이후 영화가 성공하면 배우뿐 아니라 감독까지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올드보이’의 박찬욱, ‘친구’의 곽경택, ‘반칙왕’ ‘장화, 홍련’의 김지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류승완,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등이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감독들이다.
이처럼 한국영화계에서 감독이 귀한 몸이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제작과 투자가 뚜렷하게 분리되기 시작한 1990년대 말부터 감독의 이름은 투자의 중요한 잣대가 됐다. 최근 한국영화의 외적 성장세와는 무관하게 영화 산업의 수익률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2002년을 기준으로 봤을 때 한국영화는 편당 4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몇몇 흥행작들을 제외한 나머지 영화들은 빛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부익부 빈익빈 구조는 소수의 흥행 감독들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투자가치가 있는 재화나 인력에 돈이 몰리는 자본의 속성이 그대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스타급 배우 개런티의 상승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투자의 첫 번째 결정 요인은 대중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스타, 즉 배우다. 하지만 배우들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감독이다. 강제규 감독이 연출한다는 사실 때문에 장동건과 원빈이라는 톱스타가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출연 결정을 내리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세계를 통해 스타가 된 감독들도 있다. 홍상수 감독은 독보적인 영화세계를 구축해 스타의 반열에 오른 경우다. 한국보다 해외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그는 신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비롯, 향후 제작할 작품 3편의 제작비 일부를 프랑스 굴지의 영화사인 MK2로부터 투자 받는 등, 이름 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김기덕 감독 역시 누구도 만들지 않는 영화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방법으로 만들면서 스타가 됐다. 김기덕은 현재 한국영화의 지형에서 볼 때 불가사의한 존재다.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의 5분의 1 규모로 한 달도 안 돼 촬영을 끝내버리는 속전속결, 초저예산 제작 시스템은 김기덕만의 생존 전략이다.
흥행사로서의 면모든 예술적 비전을 통해 대중들을 설득하는 것이든, 충무로는 이제 철저한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됐다. 존재증명을 한 감독들만 살아 남을 수 있는 시장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색깔의 감독들이 나오면서 출신성분 또한 각양각색으로 변하고 있다. 임권택 감독은 직업감독으로 시작해 무려 99편의 영화를 만든 현장형 감독이다. 1970년대 말까지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영화를 찍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예능인이라기보다 기능인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1930년대 영화 공장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던 직업감독들 중에서 앨프리드 히치콕, 오토 프레밍거 같은 거장들이 나왔듯이 임권택 감독 역시 허다한 현장 경험을 통해 연출에 눈을 뜬 케이스다. 직업감독에서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이력은 한국영화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입지전적이다.
도제, 아카데미, 독립영화계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감독들은 임 감독과 유사한 현장형 감독의 길을 걸어야 했다. 당시 충무로를 지배하던 관행은 도제 시스템이었다. 이때는 영화학교에서의 체계적인 교육보다 몸으로 익히는 현장 수련이 필수 코스였다. 창조적인 발상과 박식한 지식도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체화되지 않으면 실효성이 없다는 오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 경험을 토대로 연출의 감을 익히는 도제에 의해 연출부-조감독-감독이라는 신분 체계가 고착됐다. 이는 산업화의 싹이 자라기 전인 미성숙기에 감독 중심의 논리가 팽배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충무로의 도제 시스템은 서서히 붕괴돼갔다. 해외 유학파 출신 영화인들과 영화교육기관을 통해 배출된 감독들에 의해서였다. 영화교육기관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84년 영화진흥위원회 산하로 문을 연 한국영화아카데미였다. 12명의 신입생으로 출발한 실기 위주의 사설 영화교육기관이었던 영화아카데미는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화 제작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초창기의 시행착오를 거쳐 영화아카데미는 충무로에 재능 있는 감독들을 수혈하는 산파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김의석, 황규덕, 장현수, 이현승, 이재용, 허진호, 봉준호, 장준환 등이 바로 이 영화아카데미 출신이다.
1990년대 중반 개원한 영상원은 최근 한국영화계에 나타난 젊은 감독들을 다수 배출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일단 뛰어’의 조의석, ‘ing’의 이언희, ‘빙우’의 김은숙 감독 등이 바로 그들. 전문적인 영화 제작 교육을 받은 감독들은 과거 구태에 젖어 있던 관행을 일신하고 제작에서부터 합리적인 시스템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독립영화계 또한 창조적인 감독들의 텃밭이 되고 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로 세상을 놀라게 한 류승완 감독이 대표적인 경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패싸움’ ‘악몽’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세 편의 단편을 이어 붙인 작품이다.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완성시킨 이 한편의 독립영화로 류승완은 일약 충무로가 주목하는 차세대 감독으로 도약했다. 독립영화는 자본이나 검열, 환경 등 창작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모든 요소들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창조적인 재능들이 발휘될 수 있는 청정지역이다. 그런 이유로 많은 독립영화 관련 영화제들을 통해 새로운 감독들이 발굴되고 있다.
아카데미나 독립영화계, 그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았던 감독들도 있다. 김기덕 감독은 정규 교육을 한번도 받은 적 없는 고졸 출신의 감독이다. 그는 독학으로 회화를 공부해 그림을 그리다가 감독이 됐다. 문화부 장관이 된 이창동 감독은 소설을 쓰다 메가폰을 잡았고 박찬욱 감독은 대학 재학 시절부터 숱한 서구 영화의 세례를 받았던 B급 영화광 출신이다.
감독들의 전공도 국문학, 건축, 미술, 철학, 사학 등으로 그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다양한 출신성분과 지식을 가진 이들이 감독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감독이라는 상징적인 권위보다 창작의 재능을 더 높이 사는 풍토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한국영화계에서는 혈기방장한 신인 감독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한해에 제작되는 영화 중 절반 가까이가 신인 감독의 작품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질투는 나의 힘’의 박찬옥,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 등 개성 넘치는 신진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두터운 신진층 가운데는 새로운 감각의 소유자들도 끼여 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경형, ‘ing’의 이언희, ‘위대한 유산’의 오상훈 감독 등이 그들이다. 이런 기류는 대중 영화의 소재 다양화, 급변하는 트렌드의 흐름과 관련이 깊다.
최근 한국영화는 주소비층이라 할 수 있는 20대 초반 관객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붐을 이루고 있는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기획 상품의 경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웰메이드한 상품을 만들 수 있는 신인들이 기용되는 경우가 많다.
아쉬운 점은 새롭게 나타난 세대들의 시장 장악력이 강력하지 않다는 것이다. 강우석, 강제규, 박찬욱, 곽경택 등 공인된 흥행 감독들에 비해 신인들의 폭발력은 크지 않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신인 감독들이 얄팍한 기획영화에 동원될 경우 일회용으로 쓰이고 단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인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전체적인 세대 균형이 깨진 것 또한 아쉬운 점이다. 충무로가 새 얼굴 위주로 재편되면서 관록 있는 중견 감독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실제로 1980년대부터 한국 뉴 웨이브를 이끌었던 기라성 같은 감독들 중 현재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배창호 감독처럼 독립 프로덕션과 상업 영화계를 오가며 생존을 모색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개는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로하는 조짐을 보여주었다.
급격한 산업의 팽창 속에서 영화감독의 역할 축소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 관객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이는 여전히 감독이다. 산업의 수직 성장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맹렬하게 이윤만을 추구하는 풍토 속에서 감독의 입지가 좁아진다면 그 역시 근심스러운 일이다. 감독은 자신의 세계관,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 영화 고유의 예술적 효과 등에 대한 확실한 자기 생각을 체화하고 시스템이 이를 지원해 주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다.
감독은 작가이자 장사꾼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능력이 집중되는 것이므로 한 개인의 역할 범위를 규정하기 힘들며 때로는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거기에는 시나리오 작가와 같이 상상력과 창조력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기술력을 갖춘 기능공들도 있으며, 투자를 책임지는 비즈니스맨도 있다. 감독은 그 모두와 소통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 그런 이유로 감독은 작가이자 장사꾼, 기능인인 동시에 또한 예술가다.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그 속에 숨결을 불어넣고 고유한 체취를 풍기게 하는 것은 오로지 감독의 몫이다. 영화가 아무리 고도의 산업화 단계에 진입한다 해도 감독의 이런 역할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또 한국영화의 가파른 성장과 진화는 이 같은 영화감독의 힘에 대한 신뢰를 뒷받침하는 지지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