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296쪽 / 9500원
“우륵은 금을 무릎에 안았다. 우륵이 오른손으로 맨 윗줄을 튕겼다. 소리는 아득히 깊었고, 더 깊고 더 먼 곳으로 사라져갔다. 우륵의 왼손이 사라져가는 소리를 들어올렸다. 소리는 흔들리면서 돌아섰고, 돌아서면서 휘어졌다. 우륵의 오른손이 다음 줄을 튕겼다. 소리는 넓고 둥글었다. 우륵의 왼손이 둥근 파문으로 벌어져가는 소리를 눌렀다. 소리는 잔무늬로 번지면서 내려앉았고, 내려앉는 소리의 끝이 감겼다. 다시 우륵이 세 번째 줄을 튕겼다. 소리는 방울지면서 솟았다. 솟는 소리를 우륵의 왼손이 다시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았다. 내려놓고 더욱 눌렀다. 소리의 방울이 부서지면서 수많은 잔 방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다시 우륵의 오른손이 맨 윗줄을 튕겼다. 깊고 아득한 소리가 솟았다. 솟아서 내려앉는 소리를 우륵의 왼손이 지웠다.”
이 대목을 읽을 때 그 절제된 아름다움에 문득 숨이 멎는다. 금의 소리가 발화되는 그 대목의 묘사에 작가는 오래 공을 들이는데, 주인이 따로 없고 “본래 스스로 흘러가”며, 본래는 있되 눈앞에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이란 소리의 운명에 순응하며 가야에서 신라로 흘러온 일흔 노인의 복잡한 감회를 그 묘사에 실어나른다.
악기에 담긴 인간의 열망
이미 칼에 의탁해 사는 자의 고단함과 슬픔을 쓴 바 있는 김훈이 이번에는 악기에 의지해 제 삶을 견인하는 자의 비통함과 적요에 대해 쓴다. ‘현의 노래’가 그것이다.
하지만 악기와 그것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로써 생계를 세우고 제 생의 불우함이 지닌 무게를 덜어내며 한 시대를 건너가는 악사의 이야기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서사의 전면에는 전장에서 도끼와 칼에 으깨지고 베어지며 죽은 자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과 유혈의 비릿한 내음이 자욱하다. 악기가 꿈꾸는 세상이나 병장기가 꿈꾸는 세상이 하나라는 뜻일까?
작중인물이 이순신에서 우륵으로 바뀌고, 시대 배경도 다르고 이야기도 다르지만, 두 소설은 아름다운 것은 필경 소멸하며 소멸의 운명 속에서 산 자들의 삶은 덧없다는 한 주제에 맞닿아 있다.
악기(樂器)는 몸이 내는 소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열망이 낳은 도구다. 사람들은 악기로써 제 한 몸이 빚어내는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그것을 위로하려고 한다. 악기는 사람의 손과 입의 도움을 받아 소리를 울려내되 소리의 영역과 경계를 넓고 깊게 만들어 사람에게 되돌려준다.
우륵이 적막의 끝 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다가 “몸속의 소리가 이리도 아득하니……. 멀어서 들리지 않는 소리가 몸속을 흘러가는구나. 아, 나는 살아 있구나”라고 독백할 때 소리는 악기 이전의 것으로 몸에 부속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몸속의 소리를 받기 위해 악기가 뒤따른다. 소리는 악기에게 와서 비로소 울림으로써 그 존재를 드러내며 산 자의 생을 현재화하고 실감으로 살려낸다. 사람의 나고 죽음이 그러하듯 소리는 사라지면 가뭇없는 것이다. 소리의 발생과 사라짐 사이의 인과관계는 비교적 명료하지만 그 근원은 사람의 생의 근원이 그러하듯 아득하고 모호하다.
늙은 악사의 지혜에 의하면, 몸으로 된 생과 소리는 하나로 겹쳐지며 그 영고성쇠의 운명을 함께한다. “몸은 소리에 실려, 없었던 새로운 시간 속으로 흘러나갔고, 흘러나간 몸이 다시 돌아와 줄을 당겼다.” 이런 구절들은 불가피하게 소리의 발생과 그 덧없는 사라짐을 통해 산 것들의 생을 무한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허무를 각인하려는 소설가의 조급증을 드러낸다.
‘현의 노래’는 소리의 발생의 내력과 그 순환의 궤도를 따라가지 않는다. 비록 ‘현의 노래’가 소리의 현존과 그 울림이 지어내는 마음의 가역반응을 그리는 데 많은 공을 들이지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펼쳐진 넓고 두터운 관계망 위에서 홀연 솟아났다가 사라지는 개별자의 운명의 덧없음에 대한 소설가의 편애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난다.
소설가는 우륵이나 그의 제자 니문이 금(琴)에 의탁해 세상에 나아갔으나 금과 함께하는 삶의 굴곡과 음영을 그리는 데 태만하다. 그들은 소설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다. 소설의 전반부는 가야의 늙은 왕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비(侍婢)인 아라가 초점 인물이다. 아라는 늙은 왕이 죽으면 순장될 제 운명에 거역해 궁을 빠져나와 도주한다.
소설의 전반부는 아라의 도주 동선(動線)을 따라 힘차게 굽이친다. 병 들고 노쇠해 죽음을 앞둔 왕과 쇠멸의 기미를 드러내는 가야 왕국의 꺼져가는 국운은 한데 겹쳐진다. 국가에 불복종하며 제 생을 저 낯선 시간 속으로 밀고 나아가는 아라는 생기로 빛난다. 그 생기는 산 자를 죽은 자와 함께 매장(순장)하는 전근대적 국가의 야만성에 맞서 산 자의 본능에 내장된 강령의 신성한 굳건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라는 우륵과 니문 일행과 우연히 만나 떠 있는 제 삶을 땅의 중력으로 끌어당겨 정착하려고 할 즈음, 돌연 붙잡혀 병들어 죽은 태자와 함께 순장됨으로써 소설 무대에서 퇴장한다.
소설의 후반부를 잇는 것은 신라 장수 이사부이다. 이사부는 군대와 병장기에 의존해 가야의 여러 고을을 쓰러뜨리고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쳐 신라의 영토를 넓혀간다. 많은 세월을 전장에서 보내지만 이사부는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변화 속에서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생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전장의 철학자다.
하지만 가야에서 신라로 귀순하는 악사 우륵은 살리되, 같은 처지에 있는 대장장이 야로 부자(父子)는 부하를 시켜 칼로 베어버리는 대목에서 칼의 진리에 제 생을 의탁하는 무신의 비정함이 드러난다. 왕이 중심인 국가에서 전장은 변방이며, 지리적 이격(離隔)의 소외감에 순응하며 전장에서 늙는 이사부는 운명적으로 변방의 인물이다. 이사부는 기질적으로 변방의 운명에 이끌리는 소설가의 편애와 지지를 받는다. 앞선 소설에서 그려낸 이순신의 현신이며, 그 변주라 할 만하다.
서사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끊겨 있다. 이 불연속적 단절을 가야의 늙은 악사인 우륵과 니문, 혹은 가야의 풍부한 쇠로 병장기를 제조해서 이사부의 군사를 돕는 야로 부자의 이야기들이 가까스로 접합하며 이어간다.
어쩌면 ‘현의 노래’를 이끌어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빛과 소리와 냄새인 것처럼 보인다. 빛과 소리와 냄새들은 그것들의 본디 있던 자리에서 질펀하게 번져나와 사람의 감각 기관에 비벼대며 이야기의 현전(現前)을 이끌고, 서사에 실감과 부피를 불어넣는다. 김훈은 이렇게 쓴다.
“비화의 날숨에서는 자두 냄새가 났다.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에, 비화의 입속에서는 단감 냄새가 났고, 잠을 맞는 저녁에는 오이 냄새가 났다. 귀 밑 목덜미에서는 잎파랑이 냄새가 났고 도톰한 살로 접히는 겨드랑이에서는 삭은 젖 냄새가 났다. 바람이 맑은 가을날, 들에서 돌아온 비화의 머리카락에서는 햇볕 냄새가 났고 비 오는 날에는 젖은 풀 냄새가 났다. 비화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비린내가 났는데, 그 냄새는 초승에는 멀어서 희미했고 상현에는 가까워지면서 맑았고 보름에는 뚜렷하게 진했고 그믐이 가까우면 다시 맑고 멀어졌다.”
우륵의 처인 비화는 냄새의 생생함 속에서 살과 피를 얻는다. 소리가 그러하듯 냄새 역시 한번 사라지면 가뭇없다는 점에서 생의 덧없음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덧없는 것에 실감을 부여하려는 소설가의 몸짓은 허망하다. 그 허망함을 글로써 증명하려는 게 소설의 운명이다.
김훈의 소설은 대체적으로 미학적 소명이 서사의 규범에 우선한다. ‘현의 노래’는 인물과 인물 사이에 인과론적인 핍진성이 희박하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종속과 대등절의 헐겁고 느슨한 이음이 독백의 넘침으로 읽힌다. 인물과 인물 사이, 혹은 이야기와 이야기의 단절된 틈으로 잠언들이 흘러간다. 이를테면 이런 잠언.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 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 덧없음으로 늘 새롭다.”
김훈 소설이 드러내 보이는 서사 구조의 불균형함에도 잘 읽히는 것은 잠언들과 문체에 구현된 소설가의 도저한 미적 자의식이 얼개의 성김을 넘치게 메우는 까닭이다. 독자들은 서사구조의 성김에 투덜거리기 이전에 김훈 문체의 놀라운 탐미성과 활력으로 보상받는다.
※‘책벌레 최성일의 논쟁적 책읽기’는 필자의 사정으로 중단하고, 이번 달부터 시인·문학평론가·소설가인 장석주씨의 칼럼을 시작합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