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군 제2325부대 209파견대. ‘죽음의 섬’ 실미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전원 사망한 부대원 31명의 명단을 현대사의 제단에 바친다.
‘신동아’가 단독입수한 실미도 부대 공작원 명단은 사건 직후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한 장 짜리 문건이다. 이 문건에는 1971년 8월23일 벌어진 난동사건에 참가한 24명과 사건 이전 실미도에서 숨진 7명을 포함해 실미도 부대 공작원 31명 전원의 명단과 나이, 사망 장소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이 문건에 따르면 실미도 부대 공작원은 장선광(당시 28세) 조석구(당시 22세) 김용환(당시 23세) 전영관(당시 23세) 이석천(당시 32세) 임성빈(당시 23세) 임기배(당시 28세) 박응찬(당시 26세) 김창구 (당시 32세) 이명구(당시 27세) 황철복(당시 28세) 강찬주(당시 27세) 김종철(당시 29세) 박기수(당시 24세) 장정길(당시 34세) 박원식(당시 35세) 이부웅 윤태산(당시 28세) 전 균(당시 28세) 정은성(당시 26세) 김병염(당시 25세) 김봉용(당시 26세) 정기성(당시 24세) 장명기(당시 25세) 김기정(당시 25세) 이광용(당시 25세) 이영수(당시 34세) 심보길(당시 38세) 윤석두(당시 25세) 신현중 강신옥(당시 31세)씨 등 모두 31명이었다.
또 이 문건에는 8·23 사건 이전 실미도에서 사망한 7명과 사건 이후 사망한 24명의 시신, 안치 장소, 입원했던 병원 등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문건에 따르면 실미도 부대가 창설된 1968년 4월∼1971년 8월 사이에 모두 7명이 각종 사고로 인해 실미도에서 숨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익사 2명, 자살 3명, 도주 2명 등이다.
사망 장소도 모두 확인
부대원들이 실미도를 탈출해 인천으로 상륙하기 전 이미 실미도내에서 교전 중 2명이 사살당한 사실도 이 문건을 통해 새롭게 확인됐다. 이영수 전균씨 등 공작원 2명이 실미도를 빠져나오기 전에 이미 현장 교전 중 숨진 것이다. 전균씨는 인천 출신으로 폐결핵을 앓는 바람에 유독 몸이 약했고 토굴에 격리수용돼 식사도 따로 했다는 것이 기간병들의 증언이다. 그 후 22명의 공작원들이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인천 조개고개에서 2명이 사망하고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 16명이 숨지는 한편,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이 집행됐다. 이 문건은 공군 항공의료원, 수도육군병원 등 부상자 후송 장소가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사건 직후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을 소지하고 있다 ‘신동아’를 통해 공개한 실미도 부대 기간병 출신 이모씨는 “명단공개가 훈련병들의 유족을 찾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앞으로 실미도 기간병 출신 예비역들도 훈련병 유족들의 아픔을 함께 한다는 차원에서 진상 확인 작업에 적극 나서겠다”고 말했다. 기간병 출신 예비역들은 ‘실미전우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공작원들의 당시 사진 등을 근거로 유족들이 나타나고 당시 기간병들의 증언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이들의 명단이 알려진 적은 있지만 공식 자료에 의해 공작원 전원의 명단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국방부는 실미도 민간인 희생자들의 시신 처리 상황 등을 확인하기 위해 진상조사 활동을 벌여왔다. 그러나 공작원 명단 만큼은 실종자 가족들의 진정서가 접수되는 경우에 한해 실미도 사건 관련자인지 여부만 확인해 준다는 ‘소극적’ 방침을 세워놓았을 뿐 국방부가 먼저 공작원 명단을 공개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현재까지 확인된 실미도 사건 유가족은 모두 10명에 불과했다. 가장 먼저 충북 옥천에서 한꺼번에 실종된 정기성, 박기수, 이광용씨 등 7명 모두가 실미도 부대원으로 확인된 바 있다. 그 후 전북 익산 출신의 김종철씨, 인천시 산곡동에서 실종된 윤석두씨, 충남 부여 출신의 조석구씨 등에 대해서도 실미도 부대원 여부를 밝혀달라는 진정이 접수돼 국방부로부터 확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신동아’의 확인 결과 군 당국은 최근 들어 실미도 사건이 국민적 관심을 모으기 전에도 이미 유족들의 진정을 접수받아 실미도 부대원 여부를 확인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공작원들에 대한 훈련을 담당했던 한 관계자는 “이미 2년 전쯤 이부웅씨, 신현중씨 등 2명의 실종자 가족이 국군 정보사에 진정을 해 와 이들이 실미도 부대원인지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부웅씨와 신현웅씨는 68년 부대 창설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탈영 사건에 연루돼 현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두 사람의 시신은 섬 안에 매장돼 있다 그 후 부대 내 하극상 사건에 연루된 다른 공작원의 시신을 화장할 때 함께 화장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작업을 벌이고 있는 군 당국이 의지만 있다면 2년 전의 진정 기록 등을 확인해 얼마든지 이씨와 신씨의 유가족을 찾아줄 수 있는 상황이다.
또한 이 문건은 훈련 기간 중 사망한 7명에 대해 자살 3명, 익사 2명, 도주 2명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기간병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익사한 사람은 충남 부여 출신의 조석구씨 한 명에 불과하고 윤태산씨는 기간병을 폭행하는 바람에 하극상이라는 이유로 공작원들의 손에 넘겨져 구타당한 후 숨졌다. 공작원들에 대한 훈련을 담당하던 기간병이 공작원에게 구타당한 사실을 상부에 숨기기 위해 익사로 보고한 것 같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윤씨의 사체는 현지에서 화장 처리됐고 유골은 그대로 바다에 뿌려졌다. 윤씨의 사체를 화장하면서 이미 부대 창설 초기 탈영 사건으로 인해 구타 사망 후 매장됐던 이부웅씨와 신현중씨의 시신도 함께 태워버렸다는 것이 기간병들의 증언이다.
나머지 자살로 분류된 3명은 당시 강간 사건에 가담했던 강찬주씨, 강신옥씨, 황철복씨 등이다. 이 중 강찬주씨와 강신옥씨는 현장에서 자살했고 황철복씨만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부대로 복귀한 뒤 나중에 숨을 거뒀다.
공작원 명단과 관련해 열린우리당 김성호 의원은 국방부 관계자를 통해 71년 8월23일 사건 발생 이틀 뒤인 25일 작성된 ‘8·23 난동사건 작전 상황일지’를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김 의원이 밝힌 작전 상황일지에는 박원식씨가 35세가 아닌 24세로 되어있고 ‘김기정’씨가 ‘김기성’씨로 되어있는 등 ‘신동아’가 입수한 문건과 일치하지 않는 곳도 있다.
‘신동아’의 문건 역시 한두 군데서 잘못된 이름이 눈에 띄고 있다. 예를 들어 충북 옥천 출신의 김병염씨는 ‘김정염’으로, 충남 대전 출신의 이석천씨는 ‘이서천’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사건 직후 시신 안치 장소와 부상자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급하게 작성한 듯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결국 문서 작성 및 관리 체계가 엉성하던 당시 시스템으로 볼 때 진상조사 작업을 공식적인 기록에만 의존하는 데에는 한계가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사건의 수사 및 뒤처리에 관여했던 관련자들의 증언이 뒷받침되어야만 공작원들의 시신 처리 등 핵심 쟁점들이 밝혀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관계자는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중 쉽사리 당시 상황에 대해 입을 여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또 입을 연다고 해도 본인이 관여했던 분야에 관해 부분적인 내용만을 파악하고 있을 뿐, 전체 상황을 한꺼번에 파악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35년만에 발견된 무덤
우선 사망 기간병 및 공작원의 시신 처리 과정을 보자. 당시 사건으로 사망한 기간병들은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생존자들은 아직까지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반면 31명 전원이 사망한 공작원들의 시신이나 유해의 행방은 아직까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신동아’ 는 지난 3월11일 실미도 내에 있는 당시 공작원 조석구씨의 무덤을 35년만에 최초로 확인한 바 있다. 31명 시신 확인 작업의 신호탄인 셈이다. 실미도 부대 기간병들의 모임인 실미전우회가 ‘신동아’에 최초로 공개한 실미도 희생자 조석구씨의 무덤은 실미도 남서쪽 맨끝,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 속에 숨겨져 있었다.
조씨는 1949년 충남 부여생으로 68년 당시 충남 논산에서 편물기계 대리점을 운영하다가 대전으로 돈 벌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 뒤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 이병례(84)씨와 7남매 등 조씨의 가족들은 여태까지 행방을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실미도 기간병들을 통해 석구씨의 이름과 사진이 공개되자 국방부측에 사실 확인을 요청하고 무덤 확인 작업을 펼쳐왔다.
지난 3월11일 실미도를 찾은 당시 기간병들이 35년만에 처음 공개된 공작원 조석구씨 무덤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그러나 실미도 부대원의 무덤이 처음으로 발견돼 공개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측이 적극적인 사실 확인 작업에 나서지 않아 가족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조씨의 동생 달구씨는 “무덤이 확인된 지 사흘이 지나 국방부측에 시신 발굴 등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려 했지만 국방부는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더이상은 답변할 수 없다’는 무성의로 일관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조씨는 “국방부가 가족 몰래 시신을 은닉하려는 것 아니냐”며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나마 조씨의 무덤이 발견된 것을 제외하면 공작원들의 시신과 유해, 그리고 부대 운영과 관련한 증거를 찾는 작업은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당시 오류동 정보부대로 불렸던 공군 제2325부대 공작과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 관계자는 “사건 직후 내가 실미도 관련 서류를 모두 파기했다”고 증언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2325부대 각 파견대에서는 보통 분기에 한번씩 보관기한이 지난 서류를 파기하는데 그 당시 상부의 지시에 따라 기한이 되지 않았는데도 실미도 관련 서류를 모두 파기해버렸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관계자와의 일문일답.
관련 서류 모두 소각
-실미도 사건 당시 어디에 근무했습니까?
“1970년 11월 당시 10명이 차출돼서 3개월간 실미도에 있다가 인천 207 파견대로 나온 뒤 실미도 사건이 난 후 2325부대 공작과로 들어와 근무했습니다. 사건 이후에는 공작선을 타고 현장에 들어가 사건 처리를 담당했습니다.”
-시신 처리도 직접 담당했나요?
“그래요. 내가 다 했습니다.”
-정보부대 공작과에서 근무했으면 공작원 희생자들의 시신 처리 과정을 알고 있을텐데요.
“나는 실미도에서 현역병들의 시체 처리만 했고 노량진에서 발생한 시체는 내가 직접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관련 서류는 사건 다음달인 1971년 9월경 내가 모두 소각해 버렸습니다.”
-소각한 서류는 주로 어떤 것들이었나요?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각종 계획서, 현장 보고서 등이었던 것 같습니다.”
-파기 일자도 안 된 서류를 일개 사병이 처리할 수 있습니까?
“책임자가 있으니까 지시를 받아서 파기한 겁니다.”
-그 밖에 생각나는 것은 없습니까?
“실미도에서 훈련받던 사람들에게도 봉급이 나왔었습니다. 일반 사병 봉급에 준해 돈이 나왔는데 정작 훈련병들한테는 하나도 안 주었었어요.”
-그럼 그 돈은 중간에 어떻게 했단 말인가요?
“위에서 먹어 치운 것으로 압니다.”
-부대 창설 초기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제대로 지급해줬는데 나중에는 그걸 그냥 다 착복해 버렸어요. 보급품으로 지급되는 기름도 위에서 착복해 버리고 훈련병들은 나무를 베어다 때면서 겨울을 났으니까요.”
-시신 처리 과정을 알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당시 서울에는 공군 사격장이 오류동 부대 밖에 없어서 이 곳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부대원들을 다 내보낸 상태에서 사형을 집행했기 때문에 증언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관계자가 밝힌 내용은 북파 계획이 무산될 조짐이 보이면서 실미도에 미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의 이야기이다. 부대 창설 이후 몇 달 동안은 각종 보급품이며 군수 지원이 웬만한 간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해빙 무드로 돌아서면서 실미도 부대의 활용 가치가 상실될 기미가 보이자 각종 보급 지원 수준은 형편없이 떨어졌던 것이다.
더더욱 실미도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보급품이 아니라 인원 배치였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공작원들은 최고의 훈련으로 단련돼 있는 상황인데 군 내에서는 실미도가 점점 기피 부서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시간이 흐를수록 공작원들과 기간병들의 수준이 역전되는 경우도 나타났다”고 전했다.
1970년 12월말까지 실미도에 근무했던 이준영씨는 “훈련 과정에서 실탄 사격이라고는 4발 밖에 하지 못한 이등병을 느닷없이 실미도에 차출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이씨는 “그런 의미에서 실미도 기간병들이야말로 억울한 희생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실미도에서 근무했던 기간병들의 모임인 실미전우회는 얼마전 사건 이후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며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청와대와 국방부 등 5개 기관에 제출한 바 있다.
기자는 당시 군 관계자의 입을 통해 당시 오류동에서 사형을 집행한 후 이들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시신을 벽제 화장터까지 실어날랐다는 예비역 하사관 L씨를 찾아낸 것이다. 다음은 L씨와의 일문일답.
-오류동에서 사형 집행한 후 벽제 화장터까지 수송을 맡으셨죠?
“예”
-기억나시는 대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군에서도 조사하러 왔었는데요. 화장터에 가서 화장한 걸로 알고 있어요.”
-어떤 지시를 받고 어떻게 가게 되었나요?
“배차실에서 트럭을 갖고 오류동으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사형 집행장은 가보지도 못한 채 집행이 다 끝나고 난 뒤 관을 싣고 벽제 화장터로 간 것 밖에 없어요.”
사형장에서 벽제 화장터로
-배차실에서 어떤 차를 끌고 나가셨나요?
“M60 트럭이요.”
-옆자리에는 누가 선탑했습니까?
“군에서도 와서 물어보던데. 위관 장교인데. 그 양반은 (자기는) 아니라고 한다던데요?”
-수송대 위관 장교였나요?
“그 당시 헌병 대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김 대위라고 하던 것 같았는데…”
-벽제에 도착한 뒤의 상황은요?
“뒤에 탑승했던 헌병들이 관을 내리고 나는 차에 있었습니다.”
-화장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까?
“우리는 근처에도 못 가게 했어요. 차에서 1시간 정도 기다렸습니다.”
-화장했다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벽제 화장터까지 태워줬으니까 그런 걸로 알고 있죠.”
그러나 다른 관계자의 설명은 달랐다. 벽제 화장터까지 시신을 싣고 가보니 이미 인근 야산에 구덩이 네 개가 파져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물론 벽제 화장터를 관리하는 서울 장묘사업소에 확인한 결과 당시 사형당한 4명의 명단은 확인할 수 없었다. 장묘사업소 관계자 역시 “무연고 시신의 경우 구청 등 행정기관의 확인이 없으면 화장할 수 없다”고 말해 적어도 이들이 화장으로 처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화장터까지 시신을 날랐다고 하더라도 화장터 주변에 가매장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취재 과정에서 이 날 서울에서 숨진 18구의 시신에 대한 시신 인도 증명서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국방부 조사단이 경기도 고양시 벽제 시립묘지관리소를 방문해 이 서류를 근거로 조사작업을 벌인 것이 드러난 것이다. 벽제 시립묘지관리소는 벽제 화장터에서 멀리 떨어진 시립묘원이다. 벽제 시립묘지관리소 김동희 소장은 ‘신동아’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 2월쯤 국방부 조사단이 시신 인도 증명서를 들고와 18구의 시신에 대한 매장 여부를 확인하고 갔다”며 “국방부가 제시한 시신 인도 증명서에는 18구 시신의 명단이 적혀 있었고 서류 하단에는 시신을 인도한 당시 영관급 장교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고 밝혔다. 그동안 “실미도 사건의 유해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국방부의 발표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그러나 국방부 조사단은 물론 시신 매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벽제 시립묘지를 찾은 실미도 사건 유족들도 시신은 커녕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현장을 돌아본 실미도 유족회 이광석 회장은 “18구의 시체를 산 위쪽까지 들고 가지 못했을 때는 큰길 가 옆에 묻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럴 만한 장소가 전혀 없다”며 “국방부의 관련 서류에 시신 가매장 장소로 벽제 시립묘지가 적시되어 있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현장을 돌아본 직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배상을 위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기자는 전직 군 관계자를 통해 실미도 사건 당시 서울에 위치한 모부대 인사책임자를 지낸 예비역 중령 A씨가 당시 수사팀으로부터 사망자들의 시신을 인도해 갔다는 제보를 받았다. 시신 처리는 정보나 헌병이 아닌 인사 분야에서 맡아야 하기 때문에 충분히 설득력있는 분석이었다. 또 국방부 조사단이 이 예비역 중령을 만나 조사를 벌인 사실도 확인했다. 그러나 A씨는 전화통화에서 자신이 이들의 시신 처리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인했다. 다음은 예비역 중령 A씨와의 일문일답.
-실미도 사건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나한테 묻지 말아요, 나는 관계가 없으니까.”
-당시 00부대 인사처가 이 시신을 직접 처리한 곳 아닌가요?
“뭘 처리해요? 거기에 대해서 나한테 묻지 말아요, 미안해요.”
-다른 데서 저희가 듣기를요...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을 오해하지 마시고. 나는 전혀 관계없고.”
-그 때 담당하셨던…
“뭘 담당해요, 이 양반이…”
-한가지만...
“아니, 관둬요.”
전화는 여기서 끝나 버렸다. 다음날 A씨의 집을 찾았다. 집앞에서 기다렸지만 A씨를 만날 수 없어 증언을 부탁하는 메모만 맡겨놓고 돌아왔다. 그날 밤 A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기자에게는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메모 내용을 하나하나 반박하기 시작했다.
“당신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수사관이야, 뭐야, 날 상대로 뭘 짚어달라는 말이야? 현역 한 명이 죽더라도 인사참모나 부대장 확인만 갖고는 안됩니다. 공군본부 인사근무처에서 다 확인해서 하는 거예요.”
A씨는 증언에 나서주면 신원을 밝히지 않겠다는 기자의 메모 내용도 문제 삼았다.
“협조해주면 신원을 밝히지 않겠다니? 공군에서도 다 조사해 갔고 내가 일단 대답은 했어요. 근데 왜 자꾸 이러는 거야? 내가 당신 아버질 어디 묻어버렸나? 이 사람아! 함부로 전화 걸면 가만 안 두겠어!”
A씨는 국방부가 조사 과정에서 본인의 도장이 찍힌 서류를 내밀었지만 ‘자신이 찍은 도장이 아니다’라고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공작원들의 시신 처리에 대해 당시 수사 관계자 중 한명은 “시신 인도 서류를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사실일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시신 인도 서류를 만들어 놓아야 수사 기록을 검찰에 보내 송치 절차를 마칠 수 있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는 완벽하게 꾸며놓았을 수 있지만 실제 시신 처리는 극비 절차를 거쳐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한 관계자는 “야산 지역에 묻었더라면 뒤늦게 발굴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작원 시신을 묻은 자리에 건물이라도 들어섰다면 보상문제 등에 휩싸여 시신 발굴 자체가 미궁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기억이 없다’
게다가 정작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알 수 있을 법한 당시 관계자들은 대부분 ‘기억이 없다’거나 ‘자신은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증언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진상조사 작업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적어도 국방부가 정당한 군사재판 절차를 거쳐 사형을 집행한 4명의 시신을 매장한 장소라도 속시원히 밝히기 전에는 서해 외딴 섬을 떠돌던 ‘실미도 원혼’들은 여전히 구천을 떠돌 수밖에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