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청빈의 성인 숨결 어린 아시시(Assisi)

르네상스 도래 알린 이탈리아 미술 聖地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4-03-30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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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자 프란체스코는 말보다 행동으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고향이자 주 활동지였고 유해가 묻힌 아시시는 800년이 지난 지금도 종교의 경계를 초월한 성지로 순례자들의 발길을 끈다. 민중에게 다가서려 한 성자의 땅답게 이곳의 성화(聖畵)들은 살아 있는 인간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아내 인문주의 부활의 격랑을 예고했다.
    청빈의 성인 숨결 어린 아시시(Assisi)

    성 프란체스코 성당 하원(下院)의 제대. 벽면의 프레스코화는 치마부에가 그린 것이다.

    많은 이가 ‘한탕’과 ‘대박’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요즘 세상에 청빈(淸貧)을 입에 올린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자의 허튼 소리로 치부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대박이라는 게 마음먹는다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설령 운 좋게 대박을 잡았다고 반드시 행복해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가진 것 모두를 자기보다 못 가진 사람에게 나눠주고 빈털터리가 되어도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한번쯤 귀를 쫑긋 세워봄직하지 않은가.

    필자는 지난해 유럽 여행길에 그렇게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그들의 환희에 찬 노래를 두 귀로 직접 들었다. 800여년 전 청빈을 몸소 실천한 성인 프란체스코(St. Francesco·1182∼1226)의 고향이자 주된 활동지였고 또 그의 유해가 묻힌 이탈리아의 아시시(Assisi)란 곳에서였다.

    오전 8시30분, 로마의 테르미니역을 출발한 페루자행 열차가 로마 시내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움브리아 지방 특유의 구릉과 초지가 펼쳐졌다. 대도시 로마나 원색의 남부에서는 못 보던 목가적 풍경이라 눈길이 자주 창 밖으로 향했다. 승객들도 늘상 재잘대는 남부인들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모션도 작아 창 밖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로마를 떠난 지 꼭 2시간 만에 아시시역에 닿았다. 함께 내린 승객들 중에는 한국의 대학생 배낭족도 섞여 있었다. 남자 셋, 여자 셋 모두 여섯 명으로 한 팀이었다. 그들은 “서울을 떠날 때는 초면이라 어색했지만 여행을 계속하다 보니 피차 선입견도 없고 뒷걱정할 필요도 없어 오히려 편안해졌다”고 했다.

    성(聖) 프란체스코 성당(Basilica di Santa Francesco)은 역 앞의 마을에서 4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해서 역사(驛舍) 가게에 짐을 맡겨놓고(짐 보관소가 따로 없다) 역 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열차 시간과 연계되어 있는지 우리가 타자 곧바로 떠났다. 차는 옥수수와 해바라기가 자라는 밭 사잇길로 달렸고, 성당이 있는 마을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도 잘 보였다. 사이프러스와 올리브나무가 푸른색을 발하고 성당과 종탑, 가옥들은 옅은 핑크빛을 띠고 있어 마치 우리를 반기는 듯했다.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에 쓰인 핑크빛 대리석은 인근 수바시오산(山)에서 캐낸 것이었다. 대리석의 나라 이탈리아에선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이 생산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시시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고도(古都)는 대부분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중세에 굳이 이렇게 높은 곳을 택해 마을을 조성한 것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흉내내서가 아니라 말라리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습기가 많은 저지대에는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가 많아 고지대로 삶터를 옮겼다는 것이다.

    750세 성당의 건강한 자태

    버스가 멈춘 곳은 성당 입구의 성 피에트로 광장. 크고 작은 차량이 그 넓은 광장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일단 거기에서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고 목을 축인 다음 상승램프를 따라 성당으로 다가갔다. 웅장한 성당 앞은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아무래도 유럽인이 가장 많았으나 한국과 일본에서 온 순례자와 관광객도 더러 눈에 띄었다.

    출입구에서는 복장검사를 했다. 반바지나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한 사람은 출입을 금했다. 우리 일행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 어쩔 수 없이 혼자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성당이 많은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에는 반바지 차림을 삼가는 것이 좋은데, 그 친구는 그걸 깜박해 귀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성인이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228년 수도사 엘리아(Elia)의 설계에 따라 공사가 시작되어 1253년 완공됐고, 기초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 임시로 안치돼 있던 성인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됐다. 그러니 성당의 나이도 750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시간의 무게를 힘겨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때라면 우리 역사에서 고려 중기에 해당되는데, 당시의 건축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수덕사 대웅전 등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이탈리아에는 그 정도 건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남아 있다. 그것도 아주 건강한 자태로. 나무(木)의 문화는 지구력에서 돌의 문화를 이길 수 없는 모양이다.

    청빈의 성인 숨결 어린 아시시(Assisi)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총본산인 성 프란체스코 성당 상원(上院). 1253년 헌당됐다.

    프란체스코는 포목상으로 큰돈을 번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와 프랑스 프로방스 출신의 어머니 피카 사이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프랑스까지 판로를 개척해 장사를 해서인지, 아니면 프랑스인 부인을 지극히 사랑해서였는지(‘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는 몰라도 피에트로는 이 아들을 프란체스코라 불렀다.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어는 물론 프랑스어, 라틴어까지 배웠고, 음악과 시도 공부했으며, 아버지를 이어 장사에 종사할 것에 대비, 계산법도 익혔다.

    그는 이렇듯 배우는 데 열심이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데도 빠지지 않았다. 어울린다기보다는 보스 흉내를 내고 싶었다고 해야 할 정도로 그는 친구들에게 한턱 ‘쏘기’를 즐겨했다. 용돈의 규모가 자연 늘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더구나 이 점에선 어머니가 아버지를 앞섰다. 정말 그는 행운아였다.

    “가서 너의 집을 고쳐라”

    그러던 그에게 삶의 전기가 찾아왔다. 18세 되던 해 아시시와 이웃 도시 페루자 사이에 전쟁이 터지자 참전했다가 아시시가 패하는 바람에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던 것. 그러다 중병에 걸려 1년 만에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는데, 그 어려웠던 시간이 그를 변화시켰다. 육체적으로 괴롭힌 병고와 수용소 생활이 그에게 정신적 개안(開眼)의 계기로 작용한 셈이다. 그때껏 자신이 매달리고 탐닉해온 것들이 갑자기 의미를 잃고 그는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다시 교황의 군대에 들어가 남부로 원정의 길을 떠났다가 또다시 병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 그를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마태복음 19:21)는 그리스도의 말씀이었다. 그 말을 따라 길에서 만난 나병 환자에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는 등 적선을 베풀며 살던 어느 날 그는 아시시 교외의 다 허물어진 작은 성(聖) 다미아노 성당을 지나다가 문득 어떤 충동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때 그의 귓가에 이런 말씀이 들려왔다. “프란체스코야, 가서 너의 집을 고쳐라. 이렇게 쓰러져가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느냐?”

    그는 가진 것 모두를 바쳐 성당을 손보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프란체스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뒀다간 가산을 탕진할 것 같아 아들을 찾아 교회로 달려갔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란체스코는 우선 아버지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비밀동굴에 몸을 숨기고는 하느님께 박해자로부터 자신을 구해달라며 기도했다.

    그러나 곧 자신이 비겁자라는 것을 깨닫고 동굴에서 나와 마을로 향했다. 아버지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야위고 초췌한 모습을 보고 미쳤다며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으나 그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쇠사슬로 묶어 가둬버렸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에 고무되는 계기만 만들어줬다. 게다가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어머니가 그를 풀어줘 자유의 몸이 됐다.

    집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안 피에트로는 아들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달래볼 생각으로 교회로 갔으나,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신변을 책임진 관구(管區) 주교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향해 “이제까지 나는 당신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거리낌없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것입니다”라며 육신의 아버지와 결별 선언을 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요구대로 그가 가진 물질적 재산을 ‘아버지’에게 모두 되돌려줬다. 스물네 살 때(1206년)의 이 ‘출가’로 그는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 되면서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성 다미아노 성당에 이어 성 베드로 성당,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포르치운콜라 성당 등을 차례로 수리했다. 특히 포르치운콜라 성당은 후일 프란체스코가 수도회 운동을 시작한 곳으로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청빈의 성인 숨결 어린 아시시(Assisi)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상원 내부. 지오토 디 본도네의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 제단에서 기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일행 중 가톨릭 신자라는 두 학생이 곧 그 대열에 합세했다. 규모도 크지 않고 사람도 많지 않았으나 열기만은 대단했다. 아치형 벽과 궁륭형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 그림이 뜨거운 열기를 얼마간 식혀줬다.

    프레스코화(畵)로 장식된 제단은 그곳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왼쪽으로 90도 방향을 틀자 거기에서 프레스코화가 나타났다. 다행히 그곳은 예배 공간으로 쓰이고 있지 않아 건축의 구조와 벽면을 장식한 프레스코화를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일생과 프란체스코의 활동상을 그려놓은 벽화는 한눈에 봐도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알고 보니 당시 로마, 피렌체, 시에나, 피사 등지에서 활동하던 조반니 치마부에(Giovanni Cimabue·1240∼1302)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7∼1337) 등 대가들의 작품이었다.

    치마부에는 과거의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들은 “이제 그만”이라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주시하라”고 외쳤다. 그것은 그가 이미 신의 권위와 경건성을 강조하던 비잔틴 미술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스러운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물증이다.

    프레스코화는 원래 빛이 잘 들지 않는 묘실 내부에 주로 쓰였는데 이를 본격적으로 성당 내부 장식에 끌어들인 것이 치마부에다. 프레스코는 ‘습하다’는 원래의 뜻대로 벽면에 젖은 회를 바르고 그 위에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물감이 벽면에 서서히 스며들게 하는 형식으로, 운필(運筆)의 속도와 힘이 그림의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

    치마부에가 프레스코화를 성당 장식에 끌어들인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종전의 로마네스크화는 작은 밑그림을 먼저 그리고 그것을 확대해서 벽에 옮기는 것이라 틀에 박힌 느낌을 주는 데 비해 프레스코화는 벽에다 직접 그리므로 작품의 생동감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 그 하나였다. 그런데다 수정이 불가능했다. 두 번째 이유는 제작비가 싸고 단기간에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경제성이었다.

    프레스코화가 등장하게 된 데는 창조의 위대함,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프란체스코의 영향이 무엇보다도 컸다.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그리는 데 프레스코화보다 더 나은 형식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 전역으로 보급된 프레스코화는 14∼15세기 들어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고 이는 마침내 르네상스를 불러왔다. 그러므로 아시시는 르네상스의 도래를 알린 이탈리아 미술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제단 정면 한가운데에 그려진, 천사와 성도들에 둘러싸인 프란체스코의 머리 위엔 ‘프란체스코의 영광(Glorios Francesco)’이란 글자가 보인다. 알고 보니 이건 지오토 디 본도네의 작품이다. 치마부에가 그린 ‘성모를 경배하는 성 프란체스코와 천사들’에 나오는 프란체스코 초상화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치마부에의 작품에선 등이 굽고 체구가 작으며 검은색 망토를 걸치고 있어 청빈을 실천한 성인의 모습이라면, 지오토의 작품에선 천국의 프란체스코를 그렸는지 곤궁스럽다기보다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여유롭고 영광스런 모습이다. 치마부에보다 후대에 그린 것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눈부신 벽화를 보고는 지하로 내려가 성인의 유해를 모신, 돌무덤 앞에 섰다. 누군가가 놓고 간 붉은 장미 다발이 눈길을 끌었다. 수도사의 길로 들어선 이래 누더기 한 벌로 살았던 성인에게 돌집을 마련해준 것도 그렇지만, 그 돌집 위에 크고 화려한 성당을 세운 것이 어쩌면 그의 뜻에 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인 스스로도 생전에 ‘작은 형제회’ 가족들에게 돌과 벽돌로 짓지 말고 나무와 진흙으로만 지으라고 일렀다. 그런데도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이런 성당을 지어 그에게 바쳤다.

    성당이 완성되자 치마부에와 지오토 등은 로마나 피렌체 등 잘나가는 도시들을 제쳐두고 이 성당을 찾아와 혼신의 힘을 다해 벽화를 그렸으니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성당이 많은 이탈리아에서도 보물 중의 보물이 됐고, 200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청빈의 성인 숨결 어린 아시시(Assisi)

    누더기 옷 한 벌로 수도생활을 마감한 성자 프란체스코. 치마부에가 1280년경에 그렸다.

    제대 옆에는 또 하나의 작은 방이 있었다. 그곳에는 성인이 입던 옷 한 벌과 몇 가지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우리네 두루마기같이 생긴 그 옷은 조각을 오려 곳곳에 붙여놓은 것이라 말 그대로 누더기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몇해 전 성철 스님이 열반했을 때 TV를 통해 일반에게 공개됐던 누더기 장삼이 떠올랐다.

    성인은 “전대에 금,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 자루나 여벌의 옷, 지팡이도 가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성경(마태복음 10:9∼10) 말씀을 좇아 어떤 종류의 돈이나 재물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단지 겉옷 하나만 입었고, 가죽 혁대는 띠로 바꾸어 맸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모태가 된 ‘작은 형제회(Ordo Fratum Minoram)’는 탁발(托鉢) 수도사들의 자발적인 공동체다. 베네딕트회 등 기존의 수도회에서도 청빈과 노동, 명상 등을 철저히 지켰으나 면세 혜택을 받았고 자급자족의 형태로 살림을 꾸려갔다. 다시 말해 일반 시민들과는 절연된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은 형제회는 면세 혜택을 받으려 하지도 않았고 무엇을 소유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먹는 문제는 탁발로 해결하고 나머지 시간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동물을 사랑하는 데 바쳤다.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청빈, 복종, 순결을 모토로 삼았으나 시민들에게 보다 가까이 가려고 했다. 그러므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탄생을 이해하려면 도시화의 진척이라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빼놓을 수 없다.

    유럽 사회에 본격적으로 도시가 들어선 것이 바로 그 시기였고,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그런 도시민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다. 또한 시민들에겐 탁발 수도사들을 도울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으니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이처럼 여유로운 시민의 존재를 전제로 성립됐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되면서 기독교는 물론 불교에서도 탁발이 사라졌으나 대신 ‘십일조’나 시주 등으로 지탱되고 있으니 역시 도시화와 종교활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탁발 수도사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요구된다. 성도들을 감화시킬 수 있는 능력 같은 것 말이다. 이런 점에서 성 프란체스코는 천재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대단한 말재주가 있었거나 설득의 기교가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말, 나아가 성경의 말씀을 말에 그치지 않고 몸소 행동으로 실천했다. ‘믿을 신(信)’이란 한자의 자형에서 알 수 있듯이 행동은 말보다 더 큰 감화를 주지 않는가.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종교가 서 있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성인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도 가졌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를 알고 그걸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는 설교 중에 노래를 집어넣는 등 듣는 이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했는데 그때에는 간단한 악기도 동원했다. 마치 영화 ‘시스터 액트’에 나오는 수녀들의 합창처럼.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극히 적었던 그 시절 노래나 그림만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환희의 송가

    성당은 특이하게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2층 구조의 성당은 극히 드문 예에 속한다. 2층이지만 아래층(下院)에서 위층(上院)으로 곧장 올라갈 수는 없다. 밖으로 나와 문밖의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가 한번 방향을 틀어야 위층으로 갈 수 있다.

    상원의 정면은 3단 구성이다. 문은 아치형이며, 하단은 옆으로 길다랗고, 중앙단에는 둥근 장미창이 나 있다. 장미창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상단은 삼각형이다. 거기에도 둥근 창이 그려져 있다. 그 뒤엔 높다란 종탑이 마치 보초처럼 서 있다. 수도원은 종탑이 있는 성당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엔 수도공간, 생활공간, 묘지 등이 모여 있다. 외진 산속에 자리한 여느 수도원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청빈의 성인 숨결 어린 아시시(Assisi)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하원 입구. 방문객들로 혼잡스럽다.

    성당은 마을의 서쪽 끝을 차지하고 있어 주위에는 별다른 건물이 없다. 덕분에 밝은 핑크빛 성당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어 무척 성스럽다. 안으로 들어서자 키가 매우 큰 기둥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꺽다리 수목들이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친 것만 같다. 기둥의 상단 부분은 팔을 쭉 뻗은 사람처럼 천장에 아치 형상을 만들어냈다.

    여기서도 미사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제단 가까이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예배가 끝나기만 기다려야 했다. 어느새 설교가 끝나고 누군가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에는 한국인의 이름도 있었다. 무슨 이유로 호명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입구의 통역부스에 사람이 앉아 있고 그 앞에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등의 팻말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사로운 설교가 아닌 듯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동양인이 한 둘이 아니다.

    호명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오르간 선율에 맞춰 찬송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손뼉을 치며 장단까지 맞췄다. 환희에 넘쳐 부르는 송가, 바로 그것이었다. 가진 것 없이, 그리 길지도 않은 삶을 산 성 프란체스코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 각지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찾아와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고 노래 부르게 하니 그는 세상에 결코 작지 않은 것을 남기고 간 셈이다. 청빈이 돈을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물론 여기에서 돈이란 사회를 제대로 움직이게 하는 돈이 아니라 악의 근원이 되곤 하는 그런 돈을 말한다). 그 순간 ‘돈에 환장한 듯 처신하는 오늘의 우리가 떠난 다음에는 과연 무엇이 남겨질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聖畵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

    찬송이 끝나자 미사도 끝났다. 사람들도 하나 둘 그곳을 빠져나갔다. 한가해진 상원을 한바퀴 돌면서 벽면과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 그림을 살펴봤다. 색상과 운필이 무척 부드러운 벽화에는 남루한 차림의 백마 탄 기사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는 성인의 모습, 십자가상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광경, 성당으로 찾아온 아버지에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건네주며 혈연을 끊는 장면, 교황 인노젠티우스 3세로부터 수도회 회칙을 인가받는 장면, 라 베르나 산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가 친히 양손과 발, 옆구리에 오상(五傷)을 박아주는 모습, 작은 새들에게 설교하는 장면, 탈혼(脫魂) 중의 프란체스코, 천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들어 있는 임종 장면 등 성자의 일생이 28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그려져 있다.

    그리하여 이 연작 그림에는 ‘성 프란체스코 전(傳)’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작가는 지오토 디 본도네와 그의 제자들. 16세기의 화가이자 미술사가의 원조인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에서 지오토를 일컬어 “비잔틴 양식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근대 회화의 길을 열었다”며 최대의 찬사를 바쳤다. 지오토는 치마부에로부터 그림을 배웠으나 단테가 ‘신곡’에서 “치마부에는 미술계에서 명성을 떨쳤으나 지오토가 등장하자 그의 명성은 곧 희미해지고 말았다”고 했듯이, 청출어람(靑出於藍)의 표본적인 인물이었다.

    지오토는 현실을 외면한 모든 현상은 무의미하다며 살아 있는 인간, 그것도 온갖 역경을 헤쳐나가다 마지막에 가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는 역동적인 인간을 주로 그렸다.

    그때까지 성화라고 하면 하느님이나 그리스도, 성인들의 근엄한 모습을 그렸으나 치마부에와 지오토는 그 자리에 역동적인 인간, 살아 있는 인물들을 배치했던 것이다. 르네상스가 추구했던 인문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던가. 성 프란체스코야말로 그들이 찾는 적격인물이었으니, 로마나 피렌체 등 큰 도시를 마다하고 아시시에 한동안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연 르네상스가 청빈을 모토로 삼은 프란체스코를 기리는 성당 건축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종교개혁이 회화의 혁신을 가져왔다고 한다면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높고 긴 벽에 아래 위로 길다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신비한 빛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 빛은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의 빛(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빛이 생겨라!’ 하자 빛이 생겨나 낮과 밤으로 나누어졌다고 한다)이요, 그리스도의 빛을 상징한다. 성당은 분명 성스러운 공간이다.

    청빈의 성인 숨결 어린 아시시(Assisi)

    성녀 클라라를 위해 지은 산타 키아라 성당. 1265년 완공됐다.

    프란체스코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그의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예수에게 열두 제자가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열두 명의 형제가 생겼다. 본격적인 수도회 활동은 그때(1209년)부터 시작됐다. 형제들이 많이 모여들어 공동생활의 필요성이 생겨나자 간단한 회칙을 만들어 교황 인노젠티우스 3세로부터 인가를 얻었다. 후일 프란체스코 수도회란 이름을 갖게 된 작은 형제회의 출발은 이러했다. 장소는 성인이 수도했던 포르치운콜라 성당. 후일 성녀 클라라도 동굴같이 생긴 이곳에서 클라라 수녀회를 수립했다.

    ‘형제회’란 명칭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발성을 기초로 한 수평적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위계조직을 갖춘 여느 수도회와는 달랐다. 단 한 벌의 옷만 허락하는 회칙에 따라 작은 형제회 수도사들은 엄격한 고행으로 자신을 지켰으며, 특히 정신과 육체의 완전한 순결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런 수도방식은 미혼 여성들에게도 깊은 감화를 주어 따르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는 귀족 가문 출신의 클라라(Clara·1194∼1253)도 끼여 있었다. 명문가 규수라 처음에는 명성 있는 베네딕트 수녀회에 입문했다가 작은 형제회로 옮겼으나 종교적 열정만은 어느 누구 못지않았다. 성 프란체스코도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고 전한다. 프란체스코의 전기를 쓴 보나벤투라 수도사는 클라라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청빈의 성인 숨결 어린 아시시(Assisi)

    아시시 순례자 중에는 수사도 있다.

    “그녀는 프란체스코의 정원에 핀 첫 꽃송이였으며 마치 빛나는 별처럼 반짝였고 봄철에 희고 순수하게 핀 꽃과 같이 향기로웠다.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딸이었으며 가난한 클라라회의 창설자였다. 이제 그녀는 하늘에서 영광을 입고 있으며 땅에서는 교회가 그녀에게 합당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

    아시시를 떠나기 전에 성녀 클라라를 위해 지은 산타 키아라 성당(Basilica di Santa Chiara)을 찾아보고 싶었다. 지도를 보니 마을의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어 꽤 멀어 보였으나 다행히 마을에서 제일 크고 긴 성 프란체스코 가로(街路)가 직선으로 이어져 있어 찾아가기는 쉬울 듯했다.

    프란체스코 가로는 회색과 황색이 뒤섞인 돌로 지은 둔중한 건물, 꽃과 하얀 레이스로 장식한 창, 그리고 순례자들의 차분한 발걸음으로 인해 중세 분위기가 완연했다. 그 길을 혼자 걸었다. 일행이 성당을 관람하다 각자 취향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곳곳에 들어선 기념품 가게들에 눈길을 주다 코뮤네 광장(세차게 물을 뿜어대는 분수가 있다)에 이르러선 세수도 하고, 그에 이웃한 로마시대의 미네르바 신전(지금은 성당)까지 둘러보고는 산타 키아라 성당에 닿았다.

    정면의 외관은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상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좌우에 날개(실제로는 고딕성당을 지탱하는 플라잉 버트리스)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원래 이곳에는 프란체스코가 어린 시절 공부를 했고 대성당이 건축되는 동안 그의 유해가 임시로 안치됐던 성 지오르지오 성당이 있었다. 그 위에 성녀 클라라를 위해 지금의 성당을 세운 것이다.

    아치와 장미창이 인상적인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옮겨놓은 커다란 십자가상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그것만으로도 성당은 성스러웠다. 성녀의 유해는 지하 석실에 안치돼 있다고 해서 내려가 보니 성녀 클라라는 수녀복을 입은 채 영면하고 있었다. 그녀의 누더기 옷 한 벌도 모셔져 있었다. 그녀 앞에서 오랫동안 묵상하는 한 여성도의 모습을 보고 클라라가 남긴 향기가 아직도 진하다는 것을 느꼈다.

    성 프란체스코와 클라라가 하늘나라로 떠난 뒤 몇 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시시는 아직도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성인들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고 전할 테니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삶의 변증법’이라고 하는 걸까.

    산타 키아라 성당을 나와 마당의 경계를 이루는 담벽에 기대 그 아래로 펼쳐진 마을과 푸른 들녘을 조망하고는 피에트로 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지나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는 배낭족 대학생들도 도착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구경한 것들을 이야기하다 버스가 도착하자 그걸 타고 다시 역으로 향했다. 나는 그 속에서 보나벤투라가 쓴 성인의 전기에 기록된 성 프란체스코의 임종(1226년 10월3일 저녁) 광경을 떠올렸다.



    “성 프란체스코의 임종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린 뒤였는데 종달새떼가 건물 위로 날아들었다. 그들은 보통 낮의 빛을 더 좋아하고 밤의 어둠을 피하는 데도 그렇게 모여든 것이다. 그들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알 수 없는 기쁨에 차 노래하며 그 감미로운 노래로 그들에게 그렇게 자주 하느님께 찬미하라고 일렀던 그 성인의 영광을 분명히 증거하면서 거기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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