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지 시기의 ‘가난하고 못난 나’는 민족과 동일시된다. ‘우리는 패배한 민족이며 가난하고 못난 민족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처럼 일어서야 한다.’ 이것이 지난 100년을 규정하는 한국인의 결정적인 정서이자 생각이었다.
제7대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그가 숭배했던 나폴레옹의 초상화.
영화의 한 장면임에 틀림없을 듯한 이런 종류의 대단한 임종은 아무나 맞는 게 아니다. 조폭 두목쯤 되면 혹 모를까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이렇게 죽기란 무척 어렵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죽고 싶어도 잘 안 된다. 일단 부하직원들이 권총을 찬 채 회식 자리에 들락거리는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한 국가의 넘버1, 즉 대통령이나 수상이 이렇게 죽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물론 국가 지도자들도 가끔은 테러리스트나 정신이상자의 위협을 받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넘버2나 넘버3인 총리, 여당 당수, 국방장관는 평소에는 권총을 휴대하지 않는다(일반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다. 소지품 검사를 안 해봤으니 내가 어찌 알겠는가?)
아무튼 자기가 키운 부하에게 32구경 총알로 확인사살까지 당하고 여가수의 품에서 영영 밥숟가락을 놓은 넘버1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다. 박정희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비록 감옥을 다녀온 일은 있지만 대략 천수를 누릴 것 같다.
박정희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과대평가하려는 어이없고도 음험한 시도와 무관하게, 약간만 깊이 들여다보면 박정희의 삶과 생각은 한껏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민족주의자였지만 일본군 장교였고, 좌익이었다가 파시스트로 생을 마감했다. 청렴한 듯했지만 일찍부터 출세와 권력을 밝혔고, 웅대한 포부를 가진 듯했지만 내성적인 좀팽이였고, 지도자였지만 열등감에 가득 차 있었다.
꽤나 복잡한 생의 앞자락을 들여다보니 나폴레옹과 이순신이라는 만고(萬古) 영웅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독재자 박정희가 청년시절부터 숭배하고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그들, 나폴레옹과 이순신이었던 것이다.
영웅과의 동일시
어린 박정희는 영웅 숭배심에 불타는 소년이었다(박정희의 이력에 대해서는 이기훈 ‘일제하 식민지 사범교육-대구사범학교를 중심으로’ 등이 실린 역사문제연구소 편 역사문제연구 제9호 2002년 특집 ‘식민지 경험과 박정희 시대’와 ‘박정희 전기’가 수록된 조갑제 씨의 개인홈페이지를 주로 참고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던 시절, 전체적으로 성적이 나빴다. 특히 수학·과학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역사 과목만은 성적이 좋았는데 특히 서양 영웅 전기 읽기를 좋아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플루타르크 영웅전’ ‘나폴레옹 전기’가 그것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나폴레옹 전기’를 가장 열심히 읽었다. 소 꼴을 먹이면서도 읽었을 만큼 경북 벽지 출신 소년 박정희는 영웅 나폴레옹처럼 되고 싶었다.
“코르시카의 조그마한 섬에서 태어나 군대에 들어간 이름 없는 시골청년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로웠습니다. 눈보라 치는 알프스 산맥을 백마를 타고 넘을 때의 모습! 정희 소년은 이 세상에 이같이 멋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 감탄했습니다.”(김종신 ‘박정희 대통령-농민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조갑제씨 홈페이지에서 재인용)
박정희의 나폴레옹 숭배에는 가히 사이코적이라 할 만한 면이 있었다. 사범학교 다닐 때는 물론이고 졸업 후 문경초등학교에 근무할 때도 하숙집 책상 위에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두었다는 것이다. 학교 숙직실에까지 붉은 망토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말을 탄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였다 한다. 박정희는 나폴레옹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나폴레옹 숭배를 그의 개인적 성향이나 전기적 사실과 연관시킬 만한 근거는 많다. 나폴레옹에 결부된 상식적인 이미지를 박정희의 캐릭터와 결부시켜보자. 한 예로 ‘키가 작고 열등감에 가득 차 있으며 야심을 내성적인 태도 속에 숨기고 있는 시골 출신’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통점을 가진 듯 보인다.
물론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박정희’라는 복잡다단하고 모순적인 정신과 그 형성과정을 들여다보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폴레옹 숭배와 관련해 박정희는 결코 특별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폴레옹, 즉 나파륜(拿破崙, 那破崙, 羅破崙 등으로 표기됐음)을 존경하거나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 작고 가난하며 내성적인 시골 소년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더구나 박정희가 서양사에 이끌린 것은 대구사범의 일본인 역사 선생 사쿠마(佐久間)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시골 벽지에서 자란 그가 발견할 수 있는 문화적 선망의 대상은 결코 독창적이거나 세련된 것이기 어려웠을 터이다. 1920~30년대 조선인들은 누구나 나파륜을 잘 알고 있었고 박정희 정도의 이해 수준을 갖고 있었다.
박정희가 여덟 살이던 1925년 1월1일자 ‘동아일보’ 어린이란에는 편지글 형식의 동화 한 편이 실려 있다. 물론 경북 산골에서 자라난 박정희가 신문에 실린 동화를 읽었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하지만 동화는 박정희나 그 동년배들의 의식 형성에 끼친 당대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줄 만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동화의 제목이 ‘편지 왕래-‘워싱턴’이 되려는 수남, ‘나파륜’이 된다는 복동’이다. 장래 희망이 미국의 아비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라는 부잣집 아들 수남이와, 장래 희망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세라는 가난한 집 아들 복동이가 계층을 뛰어넘어 우정을 나눈다는 이야기다.
인력거꾼 아들 복동이의 장래 희망
동화 속에서 나이가 예순이라는 복동이의 아버지는 인력거꾼이다. 효심 깊은 어린 복동이는 고생하시는 늙은 아버지가 인력거채를 놓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잡으며 열심히 공부한다. 만날 반에서 1등이다. 그런 복동이에게 친구 수남이가 “너는 왜 나폴레옹이 되고 싶니?”라 묻는다. 그러자 복동이는 “나파륜도 되려니와 인력거채도 잡아야 하지 않겠나?”고 답한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동이의 결심을 더 단단하게 굳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못된 술 취한 일본인 손님이 복동이 아버지와 시비가 붙었다. 질이 좋지 않은 오늘날의 취객들이 가끔 택시기사들에게 그러듯, 인력거 요금도 내지 않고 심지어 폭행까지 했다. 착한 아들 복동이는 이야기를 듣고 분하고 슬퍼서 밤새 울었다. 그리고 동화의 결미에서 워싱턴에게 “내가 기어이 성공하마. 인력거채를 잡는 나폴레옹이 되마”고 다시 다짐한다.
이 짧은 동화에는 실로 첨예하고 중요한 몇 가지 코드가 있다. 그것은 곧 인력거꾼의 아들 복동이가 조선의 나폴레옹이 돼야 할 이유와 이어진다. 풀어보면 이야기에는 두 가지 모티프와 두 가지 해결 방안이 있다. 계층의 모티프, 즉 ‘가난의 설움’과 대중적 민족주의가 이야기를 만든 동력이다. 그리고 이는 영웅주의와 출세주의로 해결가능한 문제로 되어 있다.
먼저 나폴레옹과 결부된 계층의 모티프(가난의 설움)를 보자. 청소년이 어릴 때부터 ‘기어이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할 이유가 없다. 부잣집 소년들은 시골뜨기 나폴레옹을 비웃었던 육군사관학교의 동료처럼 되기는 쉬워도 열렬히 나폴레옹처럼 되려 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중심의 문화와 행동양식을 배우고 익히고, 학벌과 유산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인 양 그것(성공이나 출세)을 성취(어쩌면 성취라는 말조차 부적당하다)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소년들은 이를 악물고, 혼자 측간에서 눈물을 짜면서, 멸시와 분노를 이기며 ‘출세’에 다가가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그들은 책상 귀퉁이에 나폴레옹의 금언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따위를 써 붙여놓는다(‘하면 된다’가 박정희 시대 한국의 국시였음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이 ‘하루 3시간밖에 안 잤다’는 사실조차 가난한 청년들에게는 자극이 된다. 1929년 1월14일자 ‘동아일보’에는 ‘3시간밖에 안 잔 영웅 나폴레옹도 반드시 낮잠으로 보충하였을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나폴레옹이 3시간밖에 안 잤다는, 확인하기 어려운 사실도 이미 1920년대 대중에게 상식이었던 것이다.
아니 노인도 아닌데 매일 3시간만 자고 어떻게 버티겠나? 그리고 불가능이 없기는 왜 없나? 불가능이 없기는커녕 오히려 가난하고 ‘빽’ 없는 청년의 앞길에는 온통 불가능투성이인데 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없는 척, 졸리지 않은 척해야 한다. 인력거꾼이거나 농투성이인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또는 홀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비스마르크, 워싱턴, 마르크스, 레닌
어쨌거나 나폴레옹의 키는 5.65피트, 즉 172cm 정도로 작기는커녕 당시 프랑스 남성의 평균보다 조금 컸다 한다 (나폴레옹의 사이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갑제씨는 나폴레옹의 키가 168cm였다 한다). 한편 박정희의 키는 165cm(이 역시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한다). 과연 이 것이 사실이라면 왜 두 사람이 키 작고 도전적인 남자의 전형으로 꼽히는지 알 수가 없다. 결코 작은 키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려진 대로라면 노무현 대통령의 키는 168cm, 아들이 너무 키만 커 낭패를 본 이회창씨의 키는 164cm, 박정희 따라잡기를 하다 번번이 실패한 이인제씨는 165cm에 불과하다.
둘째, 이야기의 이념적 모티프는 민족주의다. 동화는 기본적으로 선과 악의 이분법을 상정하고 만들어진다. 어른들의 이야기보다 동화의 교훈성과 계몽성은 훨씬 간명하고 노골적이다. 1925년의 동화에서 아버지를 때리고 괴롭힌 악인이 일본인이라는 것은 작지만 결정적인 설정이다.
1920년대 중반 조선사회의 ‘식민화’의 정도와 이 동화는 관계가 있다. 만약 1930년대 중반쯤이었다면 이처럼 일본 민간인이 일상적 공간에서 명백히 나쁜 놈으로 등장하는 동화를 창작·발표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프랑스령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이 박정희뿐 아니라 조선의 복동이들과 연결될 이유는 너무 많고, 그 연결은 자연스럽다. 나폴레옹은 본국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던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고, 임신한 어머니가 잘 먹지 못해 조그맣게 태어나 조그맣게 자라났다. 그러나 그는 잘나가는 귀족 집안의 자제들과 함께 파리의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 계급적·민족적 차별을 견디며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다.
조선 소년들이 스스로의 자의식적 이미지를 ‘키 작고 가난한 시골 소년’으로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런 자아상은 단지 사춘기나 그 언저리의 소년들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열등감과 관계 깊을 것이다. 아마 요즘도 상당수 청소년들이 스스로 ‘돈 없고 못생긴 나’를 자아상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민족적이며 집단적인 채색을 하거나 그렇기에 ‘꼭 출세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청소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시기의 ‘가난하고 못난 나’는 민족과 동일시된다. 못난 민족과 내가 동일시되게끔 가르쳤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가르쳐서만이 아니라, 조선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근거도 많았다. ‘우리는 패배한 민족이며 가난하고 못난 민족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처럼 일어서야 한다.’ 이것은 지난 100여년을 규정하는 한국인(내지는 그 주류)의 결정적인 정서이자 생각이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는 민족주의
청소년기에 수행되는 민족주의 교육, 특히 ‘국민교육’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국민교육헌장’이나 ‘애국가 4절’을 외게 한다거나 교련교육을 받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
청소년기에는 패거리 의식과 패거리 문화에 자연스럽게 젖는다. 청소년은 또래끼리, 동네끼리, 학교끼리 모여 놀고 패싸움을 벌이기를 좋아하고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왕따’ 같은 ‘배타’행위로 자기정체성을 실행해보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
이 시기에 주입되는 민족의식과 국민적 귀속감은 ‘애국심’이 아니라, 이러한 패거리의식과 본질상 일치한다고 보인다(전인권 ‘남자의 탄생’3을 보라). 따라서 청소년기의 교육은 민주적 인권의식이나 시민의식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고 우선돼야 한다.
박정희 같은 1920년대의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저 커서 나폴레옹같이 될래요”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들·조카에게 나폴레옹이 되라고 주입했으며, 그것이 당대 민족주의가 현상하는 방식이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자료가 있다.
방정환이 만든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아동잡지 ‘어린이’ 1928년 1월호에 실린 글을 보자. ‘상무적 소년이 되라’가 제목인 이 글은 애꾸왕 궁예의 어린 시절 일화를 들어 ‘상무(尙武 : 무력을 숭상함)’를 주장하더니 느닷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13세의 소년으로서 불란서 아이와 이태리 아이를 차별한다는 이유로 파리 육사 교관을 죽으라고 때린 바로 그 소년이 뒷날에 세계의 저 유명한 나폴레옹이 된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글쓴이가 누구나 잘 아는 나폴레옹 이야기를 통해 어린이 독자들에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결코 남에게 눌리지 말고 남이 나를 한 대 때리면 두 대를 때려 보복하라는 것이었다. 직접 인용해 본다.
“그렇게 세상에서 큰일을 한 사람들의 소년시대를 살펴보면 대개 8~9세 때부터 패기가 발발하야 결코 남에게 눌리어 지내지를 아니하였습니다. 여러분! 조선의 소년 소녀 여러분에게 특히 바라는 것은 이 패기를 가지라는 말씀이외다. 나는 잘났다! 나는 굳센 사람이다! 네가 한 대를 때리면 나는 두 대를 도로 때려주리라!”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한다는 것은 ‘조선 사람이 밤낮 큰소리나 치고 붓이나 들 줄 알았지 용기 있게 선뜻 나서는 백성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오늘의 경우를 당한’ 것이라는 역사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저항적 또는 전투적 민족주의 교육에 동원된 대중적 표상이 나폴레옹이었던 것이다. 결국 나폴레옹 숭배자 박정희는 남다른 소년도, 사이코도 아닌 것이다. 단지 역사교사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여느 청소년들처럼 숭배하는 사람을 가진 젊은이였을 뿐이다.
오히려 ‘촌놈’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인물을 우상으로 모셨는지도 모른다. 특히 스무 살이 넘어서도 계속 그러했다는 것은 그의 정신발달이 좀 늦었거나 균형감각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기, 질투 때문에 영웅이 없다
현재 확인되는 공식 기록으로 국내에서 가장 먼저 나폴레옹이 언급된 문헌은 ‘한성신보’다. ‘한성신보’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정복을 위해 창간한 일제의 신문이었다. 독자가 일부 지식인층에 한정되었고 일본어판과 국한문판이 같이 발행된 신문이기에 중요성은 낮다. 1895년 11월7일부터 1896년 1월26일 사이 발행된 이 신문에 ‘나파륜전’이 실렸다.
이를 통해 일본 열도에는 이미 나폴레옹이 상륙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나폴레옹을 좋아했던 것은 정복욕에 불타는 이웃의 제국주의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이제 막 시작된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적인 서양사 교육의 주요 소재이기도 했다.
즉 1898년 11월4일, 학부(현재의 교육부)가 공립소학교에 내린 역사교육 관련 지침에 보면 “법국은 무슨 이유로 대란(大亂)하며 나파륜 제일황(第一皇)은 무엇 때문에 영웅인가?”라는 언급이 있다.
만약 1907~08년쯤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은?’ 같은 인기투표를 했다면 나폴레옹은 분명히 워싱턴·비스마르크 등과 함께 수위 경쟁을 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일본을 원수로 알던 ‘대한매일신보’에 포진한 민족주의자들도 나폴레옹을 좋아하고 ‘조선의 나폴레옹’을 기다려 마지않았다.
그중 특히 ‘대한매일신보’가 나폴레옹의 대중적 보급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최석하가 쓴 논설 ‘한국이 희망하는 인물’(1907년 10월4일), 단재 신채호가 쓴 논설 ‘영웅을 길러내는 기계’(1908년 8월18일) 등에서 나폴레옹은 논증의 중요한 재료로 등장한다.
신채호는 1900년대의 대표적 민족주의 논객이며 영웅대망론의 주창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이 글에서 영웅을 만드는 것은 결국 영웅을 필요로 하는(해야 하는) 국민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나라 안에 영웅이 될만한 재목, 즉 ‘웅재(雄材)’가 있다 해도 시기·질투해서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 문화라면 나폴레옹 같은 영웅이 나올 리 없다고 했다. 이 또한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 아닌가. 조선 사람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인재를 못 키운다는.
또한 1907년에 대한매일신보사는 ‘법황나파륜전(法皇拿巴倫傳)’을 단행본으로 묶었으며 박문서관에서 역시 1907년에 나온 ‘나파륜 전사(戰史)’도 꽤 넓은 범위의 독자를 갖고 있었다. 이 책은 1894년 일본에서 나온 동명의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매체와 책에 실린 것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주로 읽힌 것들이지만, 나폴레옹이라는 표상의 사용이 계몽주의에 매혹된 지식인들만의 것이 아닌, 상당히 대중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가 있다.
나폴레옹은 판소리 대본 ‘토끼전’에도 등장한다. 용궁의 각종 어패물들이 서로 충성을 뽐내며 용왕의 약재로 지목된 육지 토끼를 잡아오겠노라고 재주 자랑을 할 때 주인공 자라는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지나(支那)에서 세상을 주름잡던 초패왕(楚覇王)도 해하성(垓下城)에서 패하였고 유럽에서 각국을 응시하던 나파륜(拿破崙)도 해도(海島) 중에 갇혔는데 요마한 네 용맹을 뉘 앞에서 번쩍이며, 또는 무슨 지식이 있노라고 내 지혜를 헤아리느냐.”
‘토끼전’에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사례는 하나의 새로운 문화 코드가 어떻게 전통적인 것과 결합하며 대중에게 수용되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이 판소리를 들었던 사람은 판소리 창본을 정리한 사람이나 프랑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히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낯선 인물인 나폴레옹을 초나라 패왕, 즉 항우에 연결시킨다. 그렇게 이해하고 ‘한국화’하는 것이 1900년대 단계의 대중적 앎인 것이다.
두 왕은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했다. 면모도 달랐다. 항우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는 말을 낳을 정도의 천하장사였지만 나폴레옹은 아담한 남자의 상징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천하를 호령한 정복자이며 결국 실패한 비극적인 영웅으로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하여 20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동양의 영웅 초패왕은 수입된 지 불과 2~3년밖에 안 된 나폴레옹이라는 전혀 새로운 표상과 아무 무리 없이 병치될 수 있다.
그렇게 거리낌없이 병치하는 것 자체가 대중적 앎의 형식이기도 하다. 앎은 맥락하에서만 성립하는데 익숙한 맥락을 조정하는 작업이 일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앎은 성립되지 않는다.
판소리 창본에서 두 영웅의 ‘고난’이 병치된다. 두 영웅은 ‘해하성에서 패하거나’ ‘해도에 갇힌다.’
이런 식의 연결을 보여주는 예는 또 있다. 1908년 ‘소년’ 창간호에 실린 최남선의 유명한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3연의 나폴레옹도 매우 오랜 영웅과 함께 등장한다.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通寄)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파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이 시에서 나폴레옹은 또 다른 통일 중국 최초의 공식적 황제이며 대정복자인 진시황과 나란히 놓일 인물로 포착된 것이다.
그러니까 판소리 ‘토끼전’이나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나폴레옹은 정복자이며 영웅으로서, 조공국의 신민으로 살다 급기야 이웃나라의 식민지가 된 조선인들이 머릿속에 막연히 그려보는 ‘황제’나 ‘대제’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있을 수 없는, 그러나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는 대단한 정복자가 나폴레옹이다.
전쟁 천재, 입신출세의 화신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이 지닌 다양한 면모는 근대 한국인들에게 미묘하게 다른 맥락에서 해석되었다. 먼저 영웅대망론의 시대인 1900년대 후반의 ‘법황 나파륜전(法皇拿巴倫傳)’이나 ‘나파륜 전사(戰史)’ 등에서 나폴레옹은 군사 영웅 그 자체이다. 망해가는 나라의 지식인들은 군사 영웅이 필요하다고 간절히 생각했다.
1907년판 박문서관본 ‘나파륜 전사’를 펴보면 상당히 당황하게 된다. 나폴레옹을 처음부터 ‘천성(天成)의 전투아(戰鬪兒)’, 즉 하늘이 낸 전쟁 천재라 지칭하고 나폴레옹의 전쟁 기록만 따로 떼어내 매우 상세하게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어디서 나서 어떻게 성장했고 어떤 드라마틱한 과정을 겪으며 황제의 자리에까지 등극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당장 군사 천재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정벌 전쟁부터 시작한다.
앞의 인력거꾼 아들 복동이나 박정희의 경우에서 보듯이, 즉 1920~30년대의 나폴레옹은 1900년대 한국인에게 포착된 나폴레옹과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저 어린이들에게 나폴레옹은 계층적·민족적 차별과 분노를 입신출세로 푸는 자의 의미를 지닌다. 입신출세는 1920~30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삶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기어이 성공하여’ 나폴레옹 같은 이가 되고자 한 복동이나 박정희 같은 아이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그냥 훌륭한 사람도 많은데 왜 굳이 나폴레옹만큼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영웅이 되려 하는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박정희는 나폴레옹처럼 긴 칼을 차고 싶어서 육군사관학교에 갔다고 한다.
문제는 당시의 영웅주의로 돌아간다. 역사를 영웅의 창조물로 해석하는 것, 그리고 영웅이 되어야 민족을 구하고, 동시에 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20세기 초반의 사고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경우에도 나폴레옹이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혁명 정신의 전파자라는 것, 그리하여 당시 민주주의 후진국이던 독일의 헤겔이나 베토벤이 그를 위해 헌사를 바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선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의 1920년대 신청년들이 혁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음에도 대중은 프랑스혁명의 근대정신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평등·박애의 메신저라는 모순 자체가 너무 복잡한 것이었을 수 있다.
혹시 독자 여러분 중에 나폴레옹을 존경하는 분이 계시는지? 혹 ‘그렇다’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상당히 위험한 경우라 사료된다. 직업이 정치인이거나 국적이 프랑스가 아닐 경우라면 말이다. 정치인은 아무나 존경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1997년 프랑스에서 막스 갈로의 나폴레옹 전기가 출간되자 온 프랑스 사회가 나폴레옹 재조명 열기에 들떴다 한다. 그러나 건전한 한국의 생활인일 경우, 이제 나폴레옹을 존경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현장검증을 하고 있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아이가 18세기말 코르시카섬에서 태어난 야심가를 존경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지 묻고 싶다. 한국의 아이들이 보는 ‘세계 위인전’ 속에 나폴레옹은 여전히 건재하다. 현재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아이들 책 중에 나폴레옹을 소재로 한 것이 대충 세어봐도 약 30종은 된다. 나폴레옹의 성공담은 보편성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20세기 한국의 영웅이 만들어졌는지 살피면 대중과 지도자가 서로 엇갈려 작용하며 만들어온 한국 근현대사의 궤적이 달리 보일 수도 있다. 어떤 면모를 지닌 인물이 진정한 영웅인가를 묻는 대신에 어떤 인물이, 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영웅으로 받들어져왔느냐를 물어야 한다. 이는 당대인의 이념적 지향뿐 아니라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속 깊은 욕망까지 보여줄 수 있다.
영웅시대의 들머리는 1900년대였다. 나라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그래서 영웅주의가 만개했다. 20세기 조선의 젊은이들이 숭배하던 외국의 위인은 단지 나폴레옹만은 아니었다. 영웅대망론이 풍미하고 영웅주의적 역사관이 형성되던 20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다양한 맥락에서 여러 역사적 영웅들이 한국인 앞에 부각되었다.
죽 일별해보자. 제일 먼저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워싱턴이 있었고 링컨과 카필드 같은 미국 대통령, 잔다르크와 가리발디 같은 유럽의 국가 영웅들이 있었다. 또한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이순신 같은 장군님들이 우리의 영웅으로 크게 뜨기 시작한 것도 1900년대였다.
남의 나라 잘난이들 이야기
혁명사상과 사회주의가 전 조선사회를 풍미했던 1920년대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인물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1925년 1월1일자 ‘동아일보’ 어린이면 특집은 ‘남의 나라 잘난 이들, 어렸을 때 하던 일’이었다. 이 자리에 세 사람의 어린 시절과 업적이 소개되었는데, 다름아닌 장자크 루소와 마르크스 그리고 레닌이었다. 1920년대는 이념의 시대였던 것이다.
1930년대가 되자, 이광수를 비롯한 민족개량주의자들이 한국사의 다양한 인물을 부각하여 문화민족주의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순신을 필두로 세종대왕, 수양대군이 재조명되었고, 이들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 활발하게 창작되어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이때도 사극 붐이 일어나 당시 역사소설로부터 만들어진 대중 사극의 이야기 기법은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1930년대에는 히틀러, 무솔리니, 장제스, 스탈린 같은 엽기적인 지도자들이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이번호 이야기는 영웅이 되고 싶었던 1960~70년대 한국의 넘버1, 박정희 대통령으로 끝을 맺어보자.
강의 시간에 대학 1~2학년생들에게 삽교호 방조제가 준공되던 1979년 10월26일 밤의 희비극적 파티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학생들이 그렇게 좋아라, 재밌어라 할 수가 없다. 특히 기록만 보면 성격이 상당히 좋지 않은 걸로 되어 있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문제의 여가수에게 “넌 얼굴이 안 되니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불러라”(2003년 10월 김용옥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그 가수는 이 사실을 부인했다)라고 했다거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했다는 수사적인 대사, “이 버러지 같은…”이나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같은 대사를 곁들이면 거의 자지러지는 분위기가 된다.
왜 그렇게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지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예상치 못했던 답이 돌아온다. 1980년대 초중반에 태어난 그들은 박정희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는 봤지만 한번도 그 군국주의자의 최후와 전두환 정권의 탄생에 관한 역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호 통재. 조갑제씨나 진중권씨 같은 민간인들이 그렇게 침을 맞고 뱉어가며 열심히 노력했는 데도, 이 대목은 공교육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근현대사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시험에 안 나오기 때문에요,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거든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