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는 국악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상당한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며 고마워하는 인간문화재급 명창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 모두 내가 장성한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아버지 故 황태문 선생이 생전에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사명당이 점괘를 짚어보니 뱀 사(巳)자가 나왔다. 그래서 사명당은 점괘대로 국수가 나올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서산대사는 빙긋이 웃으며 국수가 아니고 밀개떡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잠시 후 주인이 상을 내왔는데 보니 정말로 밀개떡이었다. 사명당이 깜짝 놀라서 스승에게 뱀 사자를 어떻게 밀개떡으로 풀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서산대사는 ‘뱀이 평상시에는 국수처럼 가늘고 긴 모양이지만 지금 같은 한밤중에는 기어다니지 않고 똬리를 틀고 있을 터이니 밀개떡 모양이 아니겠냐’고 했다고 한다.
이 얘기는 내가 50년대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야담 중의 하나다. 저녁 식사 후에 사랑방에 가면 아버지는 혼자 읽고 있던 신문이나 책을 덮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는데 이따금 이런 신기한 야담도 들려주셨다. 이 야담은 필시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뱀 사자를 보면 누구나 길고 가는 것을 연상하게 마련인데 뱀의 형상을 시각까지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내용은, 사실의 진위야 어떻든 다른 인생사도 이처럼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가 들려주신 말씀은 은연중에 나의 몸 속에 스며서 일생 동안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결혼한 지 21년 만의 아들
1973년 황씨 중앙종친회에서 펴낸 ‘황씨명현록(黃氏名賢錄)’을 보면 두 페이지에 걸쳐 아버지의 약력과 사진이 실려 있다. ‘황씨 중앙종친회장 황태문(黃泰汶) 선생’에 대한 소개는 ‘1903~1972년, 사업가, 본관 우주(紆州), 고려 중윤(中尹) 민보(旻甫)의 후손으로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출생하였다’는 글귀로 시작된다. 아버지는 어려서 한문공부를 했고,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 독학으로 교원 시험에도 합격했지만, 막상 사회에서는 실업가로 일관한 분이다. 처음에 군산에서 정미소를 시작하여 사업이 꽤 번창했다고 하는데,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평택에서 개간사업, 영월에서 금광사업 등을 벌여 사업의 폭을 넓혀가면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가 서른네 살 되던 해에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3대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열세 살, 어머니가 열일곱 살에 혼인한 지 21년 만에, 그리고 하나뿐인 나의 누나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내가 태어난 것이다. 내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감초의 재배, 가공,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선만무역공사를 설립하고 만주의 북표에 약초 농장, 장가구에 감초정액 공장, 청도에 아교 공장을 경영하는 등 사업 범위를 크게 넓히고 있었다.
1945년에 해방이 되면서 아버지는 만주 여러 곳의 재산을 잃었지만, 여전히 사업을 하면서 주식회사 광덕상회, 태흥광업주식회사, 태흥화학공업주식회사 등을 창설했다.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표면에는 절대로 나서지 않았고 막후에서 정치자금을 댔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야당 편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막대한 피해를 본 실업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송진우, 김성수, 조병옥 같은 한민당 지도자들과 각별한 사이였는데, 야당 인사 여럿을 암암리에 후원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을 지나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까지도 경제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1963년에 전국 황씨 중앙종친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그 인품과 지도력 때문이었겠지만, 전혀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는 황씨 종친의 불편부당한 어른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왔다. 당신의 일생을 통해 집에서 쉰 날은 하루도 없었던 듯하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도, 일이 있건 없건, 아침을 드시고 나면 반드시 밖으로 나갔지 집에 계시지는 않았다. 저녁에는 어쩌다가 늦는다고 미리 전화를 하신 날이 아니면 틀림없이 집에서 저녁을 드셨다. 술을 드시고 늦게 오는 날이라도 술주정 비슷한 것조차 한 일이 없다. 집에 오면 바로 손발을 씻고 식구들과 함께 안방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식성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서 밥이 질건 되건 탔건 설었건 아무 상관이 없었고, 반찬은 소금만 있으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것질은 전혀 하지 않았고, 주스, 청량음료, 커피, 차도 거의 즐기지 않으셨다. 그저 찬물이나 숭늉, 보리차면 충분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바로 사랑방으로 가서 신문을 읽고 책을 보다가 주무셨다. 그래서 어머니를 비롯하여 식구들이 아버지에게 얘기할 것이 있으면 사랑방으로 가야 했다. 아버지는 식구들이 오는 것을 반기는 표정이었지만, 우리가 옆에 앉아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당신이 꼭 얘기해야 될 때에만 책을 엎어놓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남의 말은 많이 듣고 자신의 말수는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기발한 발상과 해학이 넘치는 표현으로 사물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셔서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웃음을 자아냈다. 어느날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어머니를 보고 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돌아보면서 “너희 어머니는 이제 제주도 뱃사공이 점심 잘 먹었는지도 알아보고 다닐 것”이라고 해서 어머니조차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들 칭찬을 하고 싶어했다. 아버지를 되도록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루는 어머니가 “병기는 요즈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요” 하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무엇보다도 부지런한 자식을 대견스럽게 생각할 것이라고 짐작해서 한 말씀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대뜸 “그럴 테지, 다른 사람이 열흘 걸려서 할 일을 하루에 해야 할 테니까. 게으른 놈은 언제나 바쁜 법이야”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식구들은 다 같이 폭소를 터뜨렸다.
“젊은 녀석이 대낮에 하품을 하다니”
스스로도 내가 부지런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어느날 부지런함과 게으름에 대한 아버지의 척도에 깜짝 놀란 일이 있다. 무심코 하품을 하다가 아버지께 단단히 꾸중을 들었을 때다. 아버지는 어떻게 젊은 녀석이 대낮에 하품을 할 수 있느냐고 야단을 치셨다. 게으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씀이셨다. “너, 내가 하품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느냐?”는 말씀에 새삼스럽게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하품하는 모습이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집에서 아버지는 자신에 관한 모든 일을 몸소 하셨다. 옷을 갈아입거나 이부자리를 펴는 일상사까지도 어머니나 누나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방바닥을 닦을 일이라도 생기면 누구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 걸레를 가져다 닦고는 반드시 제자리에 도로 가져다놓았다. 필요한 물건은 언제나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갑자기 정전이 되더라도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사소한 부탁이라도 깜박 잊었다고 한 적이 없고, 약속 시간에는 단 1초도 늦은 일이 없었다.
오락은 일절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은 말할 것도 없고 라디오 소리도 싫어했기 때문에, 집안 식구들조차 아버지만 나타나면 얼른 텔레비전을 꺼야 했다. 아버지는 평생 영화관에 꼭 세 번을 갔는데 번번이 재미가 없어서 중간에 나왔다고 한다. 대중잡지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소설 역시 잔소리가 많아서 읽을 수 없다고 했다. 소설가인 며느리(필자의 부인은 소설가 한말숙 여사임-편집자 주)의 작품조차 한 쪽도 읽지 않았다. 그러나 신문은 매일 자잘한 광고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읽었다.
운동은 맨손 체조밖에는 안 했지만, 걷기를 무척 좋아해서 틈나는 대로 산책을 즐겼고, 자가용을 놔두고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올 때도 많았다. 공휴일에는 대체로 혼자서 산간의 절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자식들과 장난이나 놀이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외식을 하거나 관광을 하는 법도 없었다. 그래서 내게는 아버지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한 장도 없다.
쌀과 연탄만은 넉넉해야
아버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먹을 것과 땔감이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쌀과 장작 또는 연탄만은 집안에 넉넉히 저장해두어야 한다는 것을 신조로 삼았던 듯하다. 돈이 생기면 무엇보다도 먼저 쌀과 땔감부터 장만해두어야 직성이 풀리셨다는 것이다.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던 아버지는 ‘다방의 커피 한 잔 값이 연탄 넉 장 값과 맞먹는 마당에 연탄 넉 장을 물 한잔으로 마셔버리는 짓을 뭣하러 하느냐’고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력의 얇은 종이를 한 장씩 뜯어서 가위로 자른 뒤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휴지로 썼다. 물론 코 풀어버리는 데까지 구태여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쌀과 땔감이 넉넉한 우리 집에는 항상 객식구가 많았다. 어머니가 워낙 사람을 좋아했고, 아버지는 먹을 것이 있는 동안에는 누구든지 와서 실컷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문 가까이에 있던 바깥 사랑방에는 청년들이 줄잡아 서너 명씩 몇 달, 심지어 해를 넘기면서까지 지내다 갔는데, 그들 중에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온 ‘운동권 청년’들도 꽤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께선 경찰서에 쫓아가서 체포된 청년을 빼내느라고 애쓸 때도 많았다. 그 젊은이들은 화투도 치고, 장기도 두고, 노래도 부르고, 씨름도 하고, 역기도 들고, 때로는 밤이 깊도록 열띤 토론도 했다. 덕분에 나는 이들 사이에 끼여 정말 재미있고 행복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친척은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 친구들 중에는 아예 부부가 함께 우리 집에 딴살림을 차려놓고 살다가 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들에게 집세나 밥값을 받은 일이 결코 없었다. 집세는커녕 평생 돈을 꾸어준 사람에게 이자를 받은 일도 없었다. 아버지 자신이 사업을 하는 동안 채권자에게 혹독한 시달림을 많이 받아보았기 때문인지 빚진 사람에게는 유달리 너그러웠다. 빌려준 돈이야 물론 다시 받는 것이 좋겠지만 아버지는 ‘없어서 못 갚으면 깨끗이 포기하고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아버지는 구미(歐美)는 물론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해방 전에는 사업 관계로 만주와 몽골 여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가끔 기이한 경험담을 들려주곤 했다. 이를테면 몽골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밤에 주인이 자기 부인을 보내서 같이 자게 하는데, 그때에 손님이 거절하면 주인에 대한 큰 모욕이 된다는 것이다. 주인이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부인을 손님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골에서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목욕을 자주 하지 못해서 냄새가 대단하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 말씀을 신기하게 듣기만 했을 뿐, 그런 경험을 직접 하셨느냐고 여쭈어보지는 못했다.
‘죽어서까지 남보다 잘살려고 해서야’
아버지의 말씀 가운데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내세에 관한 말씀이었다. 어느날 어머니가 사람이 어떻게 내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느냐면서 우리도 예수교를 믿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내세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살아서 남보다 잘살려고 하는 것도 나쁜데, 어떻게 죽어서까지 남보다 잘살려고 마음을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식구들은 아버지가 ‘내세가 정말 있느냐’ ‘예수를 믿는다고 내세에서 잘살 수 있느냐’ ‘영생이란 무엇이냐’ 등의 말씀을 할 줄만 알았다가, 어안이 벙벙해서 웃었을 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주위 사람들, 특히 지위가 낮거나 손아랫사람들에게 친절하다 못해 공손할 정도로 대해주었다. 언제나 그들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충복처럼 따랐지만, 몹시 어렵게 생각한 나머지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기보다는 오히려 피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언성을 높이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일 또한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 앞에만 서면 공연히 죄 지은 듯 두렵고 떨려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들 했다. 사실은 자식인 나부터도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중국집에서 혼자 자장면을 먹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우연히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나를 발견하고 몹시 반가워하시면서도 다른 식탁에 따로 앉아 자장면을 잡수셨다. 내가 먼저 먹고 나자 아버지는 자기를 기다리지 말고 빨리 나가서 볼일을 보라고 명령하듯이 말씀하셨다. 또 어느날은 집 가까이에서 귀가하는 아버지를 보고 총총걸음으로 따라가서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이제 오느냐고 활짝 웃으시며 인사를 받자마자, ‘어서 너부터 앞서 가라’고 하셨다. 늙어서 더디 걷는 아버지와 같이 가느라고 젊은 녀석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해서 중학교 3학년 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심하게 반대했고 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는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걱정스러워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못마땅하지만, 네 인생은 네 스스로 책임지고 네 방식대로 살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가야금도 사주고 월사금도 꼬박꼬박 내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생을 통하여 아들의 연주를 무대에서나, 방송에서나, 레코드로나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내가 집에서 연습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들으셔야 했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버지는 전축이나 라디오 같은 것을 전혀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휘파람 한번 불지 않았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한 것은 ‘고요함’이었다. 그러나 내가 음악으로 생업을 삼게 된 것이 아버지와 반대되는 기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아버지와 다른 점이 많지만, 닮은 점도 많다. 특히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점에서 똑같다. 나는 사는 집의 전망이나 교통보다는 조용한 것을 훨씬 중요시하며, 집안에서 라디오나 전축 소리가 나는 것도 싫어한다. 본격적으로 음악에 몰두해서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얘기하거나 책을 보면서 건성으로 틀어놓는 음악은 질색이다. 나도 책을 읽고 산책하는 것말고는 이렇다 할 취미나 오락이 없다.
아버지는 예술과 거리가 멀고 특히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아버지가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었고 음악을 사랑했다는 몇 가지 증거를 댈 수 있다.
아버지는 장식을 싫어해서 방 치장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동양화 몇 점은 꼭 걸어두고 감상했다. 또 아버지 평생에 가족들이 몇 번밖에는 못 보았지만, 한국 춤을 기막히게 잘 추었다. 아주 중요한 잔치 때에, 이를테면 누나가 시집 갈 때나 내가 장가 들 때에 느닷없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는데 온몸에서 멋이 넘쳐흘렀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라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무릎을 쳤다.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는지 알 수 없으나, 춤을 그 정도로 추기 위해서 음악을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훗날 내가 장성해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아버지는 국악인, 특히 민속음악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 상당한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면서 “참, 멋을 제대로 아시는 분이었지” 하고 감탄하는 인간문화재급 명창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미국 무대에서 받은 아버지의 편지
깊이 생각해보면 내가 아버지와 같은 시대, 같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아버지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고, 반대로 아버지가 나와 같은 시대, 같은 환경에서 살았다면 음악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음악을 하는 것을 아버지가 꼭 한번 격려해준 일이 있다. 1965년 처음으로 미국에 초청받아 호놀룰루,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을 순회하며 독주회를 하고 여름 학기에 3개월간 워싱턴주립대학교에서 한국음악을 강의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네가 음악을 하는 것을 미워했던 일을 후회한다. 나는 지금 너를 장하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아들에게 보내주셨다.
아버지의 종교관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아버지 방에는 조그마한 관세음보살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자식에게조차도 폐가 되는 것을 무척 꺼리는 성품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생전에 자신의 묘소와 어머니의 묘소를 경기도 금곡의 산속에 미리 마련해두었는데, 지금 두 분이 모두 그곳에 계신다.
나는 제사 때나 차례를 지낼 때면 신위(神位) 대신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을 모신다. 아버지는 69세에 돌아가셨으니 내년이면 내가 바로 그 나이가 되고, 내가 바라보는 아버지 사진은 현재의 나보다도 훨씬 젊을 때의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사진을 볼 때마다 아버지는 여전히 어른이고 나는 변함없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을 아버지께서 아신다면, ‘너는 여전히 유치한 놈’이라고 말씀하시겠지만 그러나 못 쓰게 하지는 않으실 것 같다. 아버지는 애틋한 사랑의 표시를 한 일은 없지만,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따르도록 강요한 일이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