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마르크스에 정면 대응한 한국의 자생철학 ‘주체사상과 인간중심 철학’

  • 글: 권용혁 울산대 교수·철학 yhkwon@mail.ulsan.ac.kr

    입력2004-03-30 15: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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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에 정면 대응한 한국의 자생철학 ‘주체사상과 인간중심 철학’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 통일정책연구소 엮음 / 예문서원 / 382쪽 / 2만원

    1997년 황장엽 망명사건은 남한 지식인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주체사상의 창시자이면서 북한 최대 이데올로그로 알려진 그가 남한을 선택하다니? 북한이 그토록 강조해온 주체사상에 사망선고가 내려진 것인가? 북한이 곧 붕괴하는 것은 아닐까? 한동안 호사가들에게는 이것이 최대의 사회적 의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7년 가까이 흘렀다. 가끔 그의 정치적 발언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긴 했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이나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에 대해 남한의 언론과 학계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분위기다. 이는 정치가로서 그의 비중이 줄어든 만큼 그것과 반비례해서 사상가로서의 면모가 차분하게 평가될 수 있는 분위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체사상과 인간중심 철학을 논할 때 그것에 덧씌워진 정치적인 색깔을 지워버리면 사람들은 흥미를 잃어버린다. ‘북한’이라는 개념에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아직도 북한 사상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는 데 익숙해 있다.

    황장엽과의 대화가 남긴 것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지 못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주체사상과 인간중심 철학의 내용을 학문적으로 풀이한 글쓴이들의 태도가 그렇고 그 사상의 내용에 접근하는 방법도 그렇다.



    이 책은 특정 이념적 성향과는 거리가 먼 철학 전문가들이 인간중심 철학에 대한 학문적 토론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임을 서문만 보아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서평자도 굳이 이 책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자들에게 누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단순한 논문 모음집이 아니다. 필자들은 대부분 황장엽이 망명한 이후 그와 함께 집단 세미나에 참가했던 사회철학 전문가들이며, 장기간에 걸친 대화를 통해 인간중심 철학으로 일컬어지는 황장엽의 사상 체계와 구체적인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1부와 2부의 내용은 논의가 필요 없을 정도로 정확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정리된 글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주체사상이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한 후, 주체사상이 김일성주의하되면서 통치 이데올로기로 변환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와 대비해서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을 비교 설명했다.

    특히 주체사상 중 김일성주의화한 부분과 원래 의도했던 부분을 구분하고, 그 중 원래의 부분을 되살리려는 체계적인 작업을 ‘참된 주체사상으로서의 인간중심 철학’이라 설명한다.

    2부는 남한에서 황장엽이 집필한 인간중심 철학의 중심내용들을 소개했다. 북한에서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못한 부분을 이곳에 와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황장엽 고유의 핵심 사상 체계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인간중심 원리와 인간중심 철학의 체계, 그 철학적 근본문제, 그 변증법적 구도, 민주주의론, 생명론 등이 요약 정리되어 있다.

    3부는 다양한 관점에서 인간중심 철학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김귀룡은 인간중심 철학의 몇 가지 구조적 특징을 잡아내고 있고, 한승완은 인간중심 철학의 민주주의 철학이 나름대로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계승한 포괄적 민주주의론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지만 시민사회론의 부재로 인해 현재적 상황에서 한계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김석수는 박종홍과 견주어 황장엽의 역사적 이력을 추적하면서 박종홍의 현실 인식과 사상적 편향 사이의 괴리에 대해 비판하듯이, 황장엽에 대해서도 그의 현실 인식과 철학사상 사이의 간격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인간중심 철학, 한국에서도 통할까

    그렇다면 인간중심 철학에 대한 이러한 소개와 비판적 평가 작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먼저 그것이 현재적 시점에서 제기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한국의 자생적인 철학체계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성장해온, 따라서 그 뿌리를 ‘여기, 지금’에 두고 있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현실과 연관된 분석과 평가가 가능하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철학과의 정면 대응을 통해서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도 그 철학적 위상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서 그 광범위한 체계가 갖는 의의를 들 수 있다. 인간중심 철학에서는 세계관, 사회역사관, 인생관 등이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일관성 있게 정리되어 독특한 총체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이는 현대의 철학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매우 독특한 보편주의, 포괄주의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인지 여부는 학계의 주목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서평을 서평답게 하려면 서평자의 입장을 어느 정도는 밝혀야 할 것 같다. 인간중심 철학을 강의하면서 느낀 나름대로의 소감은 이 철학이 우리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였다.

    다른 서구 현대철학과 비교할 경우 어느 정도 그 적실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사상은 태생부터 남북한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데올로기적인 논쟁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철학적 의미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철학에 담겨 있는 세계관과 우주론은 자연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학제적인 토론을 통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논의의 초점을 사회철학적인 면으로 국한시킨다면 보충돼야 할 부분들이 꽤 있어보인다. 가장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은 인간중심 철학에는 유감스럽게도 시민사회론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이 책의 3부에서 지적되고 있듯이 인간중심 철학의 민주주의론은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인간중심 철학을 포함한 북한 사상 전반에 근대 이후 사상계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시민사회론이 없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북한의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황장엽 자신도 이 부분이 보충돼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문제를 좀더 명확히 하자면 남한 전체를 포함해서 시민사회가 어느 정도 발달해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이론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부분은 전체 체계 안에서 일관성 있게,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재구성돼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중심 철학이 구체적인 토론의 장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지 않고 있는 이면에는 이런 문제가 놓여 있기에 더욱 그렇다.

    민족·국가에 밀린 개인

    어쨌든 이 문제는 황장엽 개인에게만 비판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속한 사회에서 그러한 인식의 지평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평이 없는데 상상만 동원한다는 것은 공허한 작업이 될 것이다. 20~30년 전 우리 사회도 시민사회와 다양한 시민문화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소적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다.

    또한 인간중심 철학이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을 과도하게 단일화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인간중심 철학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비판적 거리두기에 사용된 가장 중요한 논거가 북한의 주체적 상황이며 민족이며 국가였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는 국민국가와 남북한 통일에 대한 관점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민족통일의 우선성 앞에서는 통일에 대한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르는 시민사회 구성원들의 주장들이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은 채 단순화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국가와 민족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기 전에 이들이 다양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다원적인 그물망의 고리들이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인간중심 철학은 민족 공동체의 구상에 만족하지 않고 인류 공동체로의 도약을 강조하고 있다. 생명의 평등성과 인권이론에 기초한 민주주의 원칙 아래에서 민족 통일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평등성과 인권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있게 만드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현실적으로는 다양한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 및 선호도 등에 대한 보다 자세한 분석을 바탕으로 현실과의 비판적 대화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인간중심 철학은 사회과학과의 부단한 학제적 대화를 통해서 그 원칙과 현실사이의 간격을 메워가야 한다. 이 또한 이 땅에서 학문하는 사람들의 몫이 될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의 출판으로 인간중심 철학이 학계에서 진지하게 토론되고 평가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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