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국사는 경북 경주에 가는 사람들이 빠짐없이 찾는 곳 가운데 하나다. 거기 국보 20호 다보탑과 국보 21호 석가탑이 있다. 사람들은 특히 다보탑의 화려하고 정교한 디자인에 찬사를 보낸다. 다보탑 모양은 다른 전통 석탑과 확연히 다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왜 저렇게 특이한 모습일까.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동아DB]
법화경을 탑으로 구현하다
경북 경주 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가탑(왼쪽)과 다보탑. [동아DB]
다보여래는 평소 “내가 부처가 된 뒤 누군가 법화경을 설법하는 자가 있으면 언제라도 그 앞에 탑 모양으로 솟아나 그 내용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서원(誓願)했다. 다보여래는 훗날 석가모니가 ‘법화경’의 진리를 설파하자 정말로 그 앞에 화려한 탑으로 불쑥 솟아났다. 그 탑의 높이는 500유순(由旬)이요 평면 넓이는 250유순이다. 온갖 보물과 5000개의 난순(欄循·난간), 1000만 개의 감실(龕室)로 장식돼 무척이나 화려했다. 옆으로 깃발이 나부끼고 줄줄이 구슬이 늘어져 있고, 보배로운 방울들이 달려 있다. 또한 사방으로 아름다운 향이 풍겨 세계에 가득 찼다.
법화경 견보탑품 내용을 요약하면, 석가탑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내용을 표현한 탑이고, 다보탑은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가 불법을 증명하는 것을 상징하는 탑이다. 다보탑은 따라서 다보여래가 머무는 환상적인 궁전인 셈이다. 다보여래는 석가여래와 한 쌍을 이루기에 다보탑은 석가탑과 한 쌍이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법화경의 이 내용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기단부의 계단과 난간(현재는 난간 기둥만 남아 있다), 네 마리의 사자상, 4각과 8각의 난간 장식, 연꽃잎과 그걸 받치는 대나무줄기 모양의 기둥, 뒤집힌 신발 모양의 기둥 등 일반적인 석탑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장식을 넣어 화려하게 꾸민 것도 법화경 내용을 충실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다보탑은 마치 노련한 목조건축물을 보는 듯하다.
다보탑 석가탑은 불교건축이고 불교미술이다. 불교미술, 기독교미술 같은 종교미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격식과 틀이 중요하다. 작가의 창의성보다 종교 이념을 중시하고, 종교 이념과 교리를 드러내기 위한 규칙이 있다. 종교미술은 모두 그 규칙을 따라야 한다. 지나치게 감각적이어서는 안 되고, 지나치게 인간적이어서도 안 된다. 창의성보다 규칙이 우선이다.
그런데 다보탑은 무척 독특하다. 이런 모양의 탑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 경전 내용을 탑으로 표현한 적도 없다. 게다가 사찰에 쌍탑을 배치하면서 이렇게 서로 다르게 조성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사찰 건축의 핵심이 되는 탑을 조성함에 있어 새롭고 파격적인 형식을 보여줬다. 이렇게 새로운 형식이 어떻게 신라 땅, 경주에서 나타난 것일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경주
천년고도 경주의 고분. [동아일보 양회성 기자]
이탈리아 로마, 일본 교토(京都), 중국 시안(西安) 등 세계 어느 곳을 다녀도 도심 한복판에 이처럼 대형 무덤이 즐비한 곳은 없다. 우리의 고도(古都) 역시 마찬가지다. 설령 고분이 있더라도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근교 쪽, 평지가 아닌 구릉지대에 조성돼 있다. 경주처럼 도심 한복판 평지에 무덤을 조성한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주 사람들은 21세기 첨단 디지털 시대에도 무덤 사이로 출근하고 퇴근하고, 유모차를 끌고 고분 옆에서 휴식을 취하고, 죽은 자를 바라보며 차를 마신다. 대릉원(大陵苑) 무덤 옆에 ‘황리단길’이 생겨 이제는 젊은이들이 신라인의 무덤 옆에서 낭만을 논한다. 경주에서 살고 경주를 즐기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 참으로 대담하고 파격적이지 않은가. 묘한 매력이다. 신라 사람들은 이처럼 성찰적이었고 경주는 이미 철학적인 공간이었다.
이번엔 바닷가로 나가보자. 경주 감포 앞바다에 가면 대왕암이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년)의 수중릉(水中陵)이다.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 유언에 따라 동해 가운데 큰 바위에 장사를 지낸 곳이다. 문무왕은 죽고 나서도 용이 돼 나라를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바다에 장사 지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에 따라 동해 바위틈에 유골함을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역사에 수중릉은 없다. 그런데도 수중릉을 만들 생각을 했다니, 이 또한 파격적이고 도발적이다.
경주에서 울산 쪽으로 가다보면 큰길 옆으로 괘릉(掛陵)이 있다.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년)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다. 능 앞에는 좌우 두 줄로 무인, 문인, 사자를 형상화한 돌조각이 세워져 있다. 모두 무덤 주인공을 지켜주는 상징적인 존재다.
서역인과 신라인이 격구를 즐기던 곳
경주 괘릉을 지키는 무인석. 얼굴이나 옷차림으로 보아 이 무인은 서아시아 아랍계 사람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라왕의 무덤을 신라인이 아니라 서역인 무사가 지키고 있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무덤 앞 무인상을 서역인으로 표현한 걸 보면 무덤 주인공은 살아 있을 때 서역인과 특별한 관계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고 나서 그의 무덤 앞에 서역인 조각상을 세울 까닭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원성왕이 살아 있을 때, 원성왕을 경호하는 호위무사가 서역인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서역인이 왕의 경호실장을 맡았던 셈이니, 파격이 아닐 수 없다.
경주에는 이외에도 서역인 조각상이 여럿 전해온다. 헌덕왕릉 무인상(9세기), 흥덕왕릉 무인상(9세기), 서악동 고분(8, 9세기)의 묘실 문 서역인상, 구정동 석실분의 서역인상(9세기) 등. 이 가운데 구정동 석실분의 모서리 기둥에 조각된 서역인상이 특히 흥미롭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돼 있는 이 돌기둥엔 방망이를 어깨에 걸친 무사 한 명이 조각돼 있다. 그런데 그 방망이를 잘 들여다보면 끝 부분이 폴로 혹은 하키 스틱처럼 휘어 있다.
폴로는 통일신라시대 인기 스포츠의 하나였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격구(擊毬)다. 그럼 왜 서역인이 폴로 스틱을 쥐고 있는 것일까.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폴로가 실크로드와 중국을 거쳐 통일신라 당시 한반도에 상륙했고, 많은 신라인이 외국의 신종 스포츠에 열광했음을 일러준다. 이 무덤 주인공은 생전에 격구를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무덤에 이런 모습을 조각해 넣었을 리가 없다. 무덤 주인공은 이란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서역인과 함께 격구를 즐겼음에 틀림없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경주 용강동 석실분(8세기)에서는 문관상 토용(土俑)이 출토됐다. 홀(笏)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긴 턱수염과 얼굴 모습이 분명 서역인이다. 이 토용의 모델, 즉 서역인은 8세기 신라의 문관 공무원으로 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번 상상을 해본다. 8, 9세기 서역인들은 경주에 들어와 왕의 호위무사로 일했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이도 있었다. 퇴근 후 그들은 경주 사람들과 어울려 대형 고분 옆에서 격구를 즐겼다. 그러곤 틈틈이 불국사 나들이도 했을 것이다. 그 대담한 개방성과 파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8, 9세기 신라 땅 경주는 이런 곳이었다.
8세기 경주의 여유와 파격
신라의 문화 수준을 알려주는 석굴암, 성덕대왕신종, 다보탑 사자상(왼쪽부터). [사진 제공·경주시, 동아일보 이광표 기자, 동아일보 김병기 기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70여 년이 지난 8세기 중반, 그 석공은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을 느꼈을 것이다. 기존 석탑 양식을 과감히 깨뜨리고 이제껏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형태를 시도하고 싶었을 것이다. 경전에만 있는 것, 실제로 볼 수 없는 것, 마음에만 있던 것을 눈앞에 실물로 펼쳐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건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과감하고 창의적인 시도였다.
불교미술의 틀을 벗어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하면 파문(破門)까지 당할 일이다. 하지만 8세기 신라 불교는 석공의 도발에 가까운 창의성을 받아들였다. 대담한 발상을 하는 것도, 그 대담함을 받아들이는 것도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다. 다보탑 석가탑은 그 파격의 절정이다.
이처럼 자유로운 창의성은 자신감에서 왔다. 삼국 가운데 후발 주자였음에도 삼국을 통일하고 주도권을 잡은 8세기 신라의 그 당찬 자신감일 것이다. 명작은 이렇게 파격에서 온다. 그것은 개인의 역량, 종교의 포용성뿐 아니라 시대의 힘이 응축돼 이뤄진다. 다보탑 석가탑은 이렇게 불교건축 종교미술의 획일성을 보기 좋게 날려 보냈다. 그것이 8세기 신라와 경주였다.
이런 점에서 8세기 전후는 남다른 시대가 아닐 수 없다.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석굴암,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 등이 탄생했다. 이들은 모두 해당 장르에서 우리 전통미술의 전범이 됐고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모두 8세기 신라의 문화적 종교적 자신감의 산물이다. 8세기학(學)을 논해야 할 정도다.
다보탑은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건 8세기 신라 경주만의 석탑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의 두 탑이 모두 석가탑처럼 생겼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생동감이 넘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명작은 이렇게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과감하고 도발적인 파격으로, 참신한 안목으로 새로운 미를 개척한다.
다보탑은 몇 층 탑인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다. 그럼, 다보탑은 몇 층인가. 2층탑, 3층탑, 4층탑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아직 명쾌한 답은 없다. 일반적인 탑과 모양이 너무 달라 층수를 헤아리기 쉽지 않다.다보탑 맨 아래쪽 계단이 있는 부분이 기단부(받침 부분)라는 점에는 전문가들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그 윗부분을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기단부 위쪽의 사각 기둥 있는 부분을 기단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이것을 하나의 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탑 중간의 난간 부분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4각 난간과 8각 난간 부분을 각각 하나의 층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이와 달리 4각 난간과 8각 난간 부분을 합쳐 하나의 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난간 위부터 8각 옥개석(지붕돌) 아래 부분을 또 하나의 층으로 보는 전문가도 있다. 이렇게 보는 각도에 따라 다보탑은 2층탑, 3층탑, 4층탑이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무급(無級)의 탑, 즉 층이 없는 탑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견해는 난간 안쪽에 숨어 있는 8각 기둥에 주목한다. 이 8각 기둥이 다보탑의 탑신(몸체)인데, 이것이 난간에 의해 가려져 있다는 점에서 탑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견해다. 즉 다보탑의 탑신은 있으면서 없는 것이며, 탑신이 없다는 것은 층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무급탑, 무층탑이라는 말이 나온다.
다보탑이 과연 몇 층인지, 영영 그 답을 찾아내지 못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에 다보탑은 더 매력적이다. 8세기 중반 다보탑을 세운 신라의 석공에게 몇 층 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보탑을 통해 한국 석탑 미술의 미래를 활짝 펼쳐 보였다. 모든 것이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런 석공에게 기존 석탑의 층수 개념은 별 의미가 없었다.
신라 땅 경주는 도처가 파격이다. 도심 한복판 대형 고분이 그렇고, 서역인 조각과 토용이 그렇고, 대왕암이 그렇고, 다보탑 석가탑이 그렇다. 8세기 경주는 과감하고 도발적이었다. 다보탑은 그 파격의 절정이다. 사유와 성찰과 욕망을 탑으로 시각화하다니, 그것도 화려하고 세련된 미술로 탄생시키다니. 다보탑은 이 시대에 여전히 신비와 미스터리를 남긴다. 명작은 미스터리를 낳고 그 미스터리는 명작의 가치를 더해준다. 이제, 불국사에 가면 다보탑이 과연 몇 층 탑인지 헤아려볼 일이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