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파 떠나 약진하는 개그맨들
유머 코드는 ‘하이퍼 리얼리즘’
세계관·캐릭터 갖고 논다
웃긴 영상 보는 이유? 알고리즘이 추천하니까!
[유튜브 캡처]
요즘 뜨는 채널, 숏박스와 너덜트
요즘 유튜브에서 급성장 중인 유머 채널, ‘숏박스’를 검색해 ‘장기연애’ 시리즈를 시청해 보길 권한다. 아마 댓글까지 훑어본다면, 자연스럽게 영상을 다시 한번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감탄하며 쓴 댓글들 속에서, 놓쳤던 장면과 대사들의 웃음 포인트를 발견할 것이다.‘장기연애’는 오래 사귄 연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재물이다. 모처럼 기념일에 같이 밥 먹는데 각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무심한 척 간헐적 대화를 나누는 모습부터가 현실 인증이다. 그리고 대화 내용에서 싸울 만한 얘기도 적당히 알아서 피해가고, 비용 분담도 알아서 척척 하는 등 실제 연인 모습을 그대로 담아 언뜻 짧은 웹드라마 같기도 하다.
가장 조회수가 높은 편은 ‘모텔이나 갈까?’로 704만 회를 웃돌며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마지막에 일어나면서 ‘키스 할꺼야?’ 하니까 ‘몰라~ 상황 봐서’ 이러는 거에 빵터짐. 아 왜케 현실성있어 ㅋㅋ”(JinJus)
“9년차 커플입니다. 남자 분께서 이지엔(생리통약) 건네시는 장면에서 넘나 공감돼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킬포(킬링 포인트)가 쉬지 않고 몰아치네요”(kim)
이렇게 장면과 대사 하나하나가 ‘차지고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칭찬에서 채널 급성장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숏박스의 웃음 코드는 ‘하이퍼 리얼리즘’이다. 최대한 현실감 있게 담아내고자 최선을 다하는 영상이다. 그런데 보고 나면 웃음이 ‘빵빵’ 터지는 ‘코믹 영상’이다. 개그맨 김원훈과 조진세 두 사람이 시작했고, 개그우먼 엄지윤이 가세해 다양한 상황극을 펼치고 있다. 채널 개설은 2021년 10월 말에 했지만 연말부터 본격적으로 운영했고 5개월이 된 3월 말 현재 영상은 30여 개, 구독자 수는 120만 명을 웃돈다.
‘너덜트’ 채널. [유튜브 캡처]
‘당근마켓 남편들’ 영상이 특히 화제가 됐다. 아내의 지시(?)를 받고 ‘당근’(중고거래)을 하러 나온 남편들의 스토리를 담았다. “와 이런 일상 소재로 이런 긴장감과 몰입감을 가져올 수 있다니~”(밀덕아재)와 같은 댓글처럼 리얼함 그 자체 덕분에 영상을 보는 재미가 생긴다는 게 시청자들의 견해다.
이렇게 요즘 뜨는 유튜브 세상의 첫 번째 유머 코드는 ‘리얼리즘’이다. 자, 그러면 이러한 유튜브 유머 세상의 요즘 트렌드를 조감도처럼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해 본다면 어떨까? 필자 나름대로 정리해 보자면, 웃음을 끌어내는 방식에 따라 4개의 놀이 문화로 묶어볼 수 있을 듯하다. 참고로, 다른 카테고리와 달리 유머 영역에선 일반인보다는 개그맨들의 역할이 돋보이는 상황이다.
앞서 설명한 리얼리즘적 특징을 ‘현실놀이’라고 한다면, 이외에 ‘세계관 놀이’와 ‘캐릭터 놀이’, 그리고 ‘몰카 놀이’가 있는 듯하다. 현실 놀이, 즉 리얼리즘 흐름은 앞서서 설명이 된 듯하다. 그럼, 세계관과 캐릭터, 몰카 등에 충실한 유튜브 놀이 문화를 하나씩 풀어보자.
세계관 놀이와 캐릭터 놀이
피식대학 세계관 총정리. [취미부자수토리 blog]
각기 별개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나름의 스토리가 이어진다. 그런데 각 포맷의 주인공들이 혈연이나 친분으로 엮이는 걸로 장치를 만든다. 그래서 ‘피식대학 유니버스’가 형성되는 식이다. 물론 시청자들은 그런 세계관과 그 속에 설정된 캐릭터의 허구성을 알고 있지만, 세계관 자체에 대해 즐겁게 호응해 주는 분위기다.
최근 새롭게 시작한 연재물은 ‘우리 통화할래?’다. ‘썸’을 타거나 여사친 남사친으로 오랫동안 지내온 남녀 사이의 묘한 감정이 섞인 통화를 담은 클립이다. 통화음성, 즉 오디오에다 자막만 덧씌워서 나온다. SNL 주기자로 떠오른 신인배우, 주현영의 생활 연기가 돋보인다는 호평이 많다.
‘세계관’은 원래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뜻하는 철학 용어다. 그런데 게임 쪽에서 이 용어를 중요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게임의 시나리오를 이루는 시간적, 공간적, 사상적 배경을 뜻하는 말로 쓰기 시작한 것. 게임 속 세상 자체가 새롭게 창작된 하나의 가상현실이다 보니, 게임 기획자들에겐 이용자의 몰입감을 일으키기 위해 게임 환경과 스토리텔링을 오밀조밀 제대로 짜는 것, 즉 ‘세계관’을 제대로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그러다 영화 쪽에서 ‘세계관’ 논의가 많아지면서 대중적 단어가 됐다. 영화에선 스타워즈 시리즈와 마블 유니버스가 대표적 사례인데 유튜브 세상에선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김준수와 최준의 ‘니곡내곡’ 촬영 장면(왼쪽). 롯데백화점에 설치된 김갑생할머니김의 팝업스토어. [유튜브 캡처]
캐릭터 놀이가 현실이 되기도 한다. 개그맨 이창호의 ‘이호창본부장’ 캐릭터가 그런 사례다. 설정은 김갑생할머니김을 만드는 시총 500조 원 대기업의 미래전략실 이호창본부장 캐릭터였다. 인기가 높아지다 보니 식품회사의 제안으로 실제로 ‘김갑생할머니김’을 만들어 현재까지도 시중에서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
매드 몬스터의 KBS ‘유희열의 스케치북’ 출연 장면. 방송엔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왔다. 왼쪽 아래 사진이 필터 적용한 모습. [유튜브 캡처]
MBC ‘놀면뭐하니’에서 유재석이 ‘유산슬’ ‘지미유’ ‘유고스타’ ‘유야호’ 등의 다양한 ‘부캐’로 변신하며 예능을 이끌었다면, 유튜브에선 개그맨 이창호가 ‘이택조’ ‘이호창본부장’ ‘제이호’ 등의 부캐를 선보이며 팬덤을 만들어간 셈이다.
유튜브에서 약진하는 개그맨들
이러한 유튜브 놀이 문화 속에서, 또 하나 특기할 점은 공중파방송에서 개그 무대가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유튜브 기반으로 유머 채널을 키워가고 팬덤까지 얻어가는 개그맨이 늘어났다는 것이다.앞서 살핀 김해준(최준, 쿨제이)과 이창호(이호창본부장, 이택조, 제이호)가 그런 사례다. 그리고 좀 더 앞서 유튜브를 선점해 간 개그맨들이 제법 있다. 흔한남매와 강유미, 유병재 등이 대표적이다. 흔한남매는 SBS의 ‘웃찾사’ 출신 한으뜸과 장다운이 운영하는 채널이다. 2012년 개설한 이 채널은 구독자가 234만 명에 이르며 영상 240여 개에 총 조회수도 24억 회를 넘는다. 유머 채널 중 정상급이다.
2019년 여름에 올린 ‘으뜸이 태어나 처음 워터파크에 가다!?’ 영상은 조회수가 1800만 회가 넘는데 “재밌어서 몇 번이나 다시 본다”는 댓글처럼 충성도 높은 어린이 시청자가 많다. 채널 파워가 강하다 보니 의류회사와 협업해 잠옷을 출시하는 등 ‘미디어커머스’ 실험도 하며 수익을 늘리고 있다.
유병재 또한 2011년부터 일치감치 유튜브 채널을 시작한 경우다. 현재 104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했으며 기발한 기획성 콘텐츠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유병재 채널에서 ‘카피추’의 코믹 노래를 소개하는 영상. [유튜브 캡처]
강유미는 채널 콘셉트를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자율감각 쾌락반응)로 잡고 2015년부터 운영 중인데 구독자 수가 91만 명을 넘어서는 인기 채널이다. 그리고 홍윤화와 김민기의 ‘꽁냥꽁냥’ 채널(구독자 수 48만 명)도 있고, 개그맨 이상준의 ‘주간이상준’ 채널(54.5만 명)과 개그맨 양세형과 양세찬 형제가 운영하는 ‘양세브라더스’ 채널도 있다. 양세브라더스는 구독자가 55만 명을 넘어서지만 두 사람이 방송 출연으로 바빠 최근에는 영상 게시가 뜸한 상황이다.
‘꼰대희’ 채널의 신봉선이 출연한 ‘밥묵자’ 영상의 한 장면. [유튜브 캡처]
최근 KBS는 ‘개승자(개그로 승부하는 자들)’라는 이름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다시 선보이고 있지만, 시청자들은 예전만큼의 환호를 보내지는 않고 있다. ‘개승자’도 유튜브 채널이 꾸준히 약진 중이다. 시청 시간의 가성비를 따져볼 때 TV로 본방 사수하는 것보다 재미있다고 평가된 것 위주로 유튜브에서 골라 보는 게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개그 흐름의 한 줄기가 유튜브로 전환되는 상황에서 개그맨이 코믹이 아닌, 유튜브에 최적화된 새로운 방식으로 진출한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개콘에서 맹활약한 이상훈은 취미 생활로 하던 피규어 수집을 유튜브 채널 콘셉트로 잡고 꾸준히 성장했다. ‘키덜트월드 이상훈’을 슬로건으로 내건 ‘이상훈TV’ 구독자는 42만 명이 넘는다. 레고와 액션피규어는 물론 다양한 핫토이와 테크 리뷰도 곁들이고 있다.
개그맨이 출신이 아닌데도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예능 채널을 키워낸 사례도 있다. 아빠가 바쁜 일상 속에서 딸과의 추억을 만들고 기억하기 위해 시작한 ‘리월드’ 채널은 33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확보한 메가 채널이 됐다. 절로 웃음 짓게 하는 일상 속 공감 영상이 많다. 그리고 일반 크리에이터들의 예능 채널로 웃소(wootso)가 있다. 웃소는 웃음코뿔소를 뜻하는 채널 이름이자 크리에이터 회사 명칭이다. 다양한 상황에서 공감을 끌어내는 영상을 기본으로 챌린지와 눈치게임 등 기발한 아이디어 영상이 많다. 고탱을 중심으로 여러 크리에이터가 협력 중이며 구독자가 151만 명에 달한다. 코믹북도 펴내고, 굿즈도 제작해서 판매한다.
몰카 놀이
‘동네놈들’ 채널의 ‘헬스장 몰카’의 한 장면. 오른쪽 여성이 ‘희생양’ 역할을 했다. [유튜브 캡처]
‘동네놈들’에선 헬스장에서의 몰래카메라가, ‘낄낄상회’에선 ‘목사님 스님이 부랄친구라면?’이란 영상의 인기가 단연 압권이다.
두 채널 모두 개그맨이 주도해 운영 중이며 브이로그와 먹방 등 유튜브 내 인기 포맷을 코믹하게 비튼 영상도 일부 제작한다. 몰카 놀이는 오래전 ‘이경규의 몰래카메라’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예능 프로그램 포맷인데 유튜브에서 더 확장된 셈이다.
이런 놀이 문화가 유튜브에서 잘 먹히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재미있으니까 많이 볼 테지만, 플랫폼의 알고리즘과도 맞물려 있다. 유튜브에서 추천해 주기 때문에 많이 보는 것이다. 유튜브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추천 영상을 클릭하거나 자동 재생되는 영상을 끊임없이 시청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추천 영상에는 ‘오락형’ 영상이 많이 들어간다. 시청 시간을 늘리려는 플랫폼의 이기심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잠자기 전 잠깐 한두 개 봐야지’ 했다가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기도 한다. 결국 유머 채널은 유튜브 플랫폼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다만 시청자 처지에선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