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호

화차이·웨이차이·파차이의 花樣年華

[김채희의 시네마 오디세이] 우리를 몸달게 한 중화권 영화 이야기 ①

  • 김채희 영화평론가

    lumiere@pusan.ac.kr

    입력2023-11-0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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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할리우드는 여전히 위세가 당당했다. 한국 영화는 일각에서 ‘코리안 뉴웨이브’라 불리는, 주목할 만한 흐름이 존재했으나 대부분 지리멸렬한 고난의 시기였다. 중화권, 즉 홍콩 영화계엔 한국보다 먼저 뉴웨이브 바람이 불었다. 술에 취해 ‘취권’을 선보이는 성룡이 이소룡의 빈자리를 메우면서 서서히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한 시절이다.
    주윤발(왼쪽), 유덕화(오른쪽), 양조위(아래). [동아DB]

    주윤발(왼쪽), 유덕화(오른쪽), 양조위(아래). [동아DB]

    연재에 들어가며 6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재를 정리하는 일, 그것은 오랫동안 숙제처럼 내게 다가왔다. 사실 서재라고 해봤자 대단할 것도 못 됐다. 책 스무 권 남짓,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잡지, 일기와 비망록, 꽤 오랫동안 모아둔 영화 티켓 뭉치가 전부였다. 나는 어찌 된 일인지 처음엔 제법 이 공간을 드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횟수가 줄어들었다.

    스스로 무심한 자식이라는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공간이 내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허락’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멜랑콜리가 점점 희미해지자 송구스러움을 모면하고자 찾은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식으로 시나브로 아버지를 잊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두 명의 감독(오민욱, 김지곤)의 영화를 본 후 오민욱 감독과 대담을 나눌 기회를 얻었다. 독립영화 감독으로 사는 두 사람. 그것도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는 그들이 내겐 너무도 대단해 보였다.

    오민욱 감독의 ‘해협’(2019)은 일본과 한국 사이 대한해협, 대만과 중국 사이 대만해협, 이 두 해협 사이에서 벌어진 과거사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역사책에서 탈각된 미시사를 섬세하게 직조하면서 이를 현재진행형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한다.

    김지곤 감독의 ‘리틀보이 12725’(2018)는 2005년 사망한 반핵운동가 ‘김형률’에 대한 회고적 다큐멘터리다. 김형률의 어머니는 여섯 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됐지만 특별한 외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낳은 자식 가운데 유일하게 막내아들 김형률이 2세대 피폭자로서 힘겨운 삶을 살다 35세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생전에 단 하루도 건강하게 산 적이 없다고 한다. 삶을 비관하던 그는 20대가 지나 자신이 불행해진 원인을 알게 되면서 사회활동가로서 나머지 삶을 살았다.



    ‘리틀보이 12725’에서 ‘리틀보이’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이름이자 자신의 가녀린 육체를 그리고, 숫자는 그가 이승에서 살았던 날을 의미한다. 김형률이 사망한 지 13년 후 김 감독은 이 영화를 완성했다. 앞서 언급한 오민욱 감독의 영화가 실험적이라면, 이 작품은 정공법을 택해 관객에게 직접 호소한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꽃다운 나이에 한 번도 제대로 피어보지 못하고 사라져간 김형률의 삶을 생각했고, 시간이 나면 합천에 있는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 꼭 들러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김지곤 감독의 ‘리틀보이 12725’를 보는 내내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어딘지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는 김형률의 일기장이 화면에 비친 순간이었다. 그 안에는 존재에 대한 고민, 성치 못한 몸에 대한 분노, 그리고 짝사랑에 대한 아픔이 알알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화면을 차마 응시할 수 없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자격으로 사자의 서(死者之書)를 볼 수 있단 말인가. ‘리틀보이 12725’는 사실을 각색한 픽션이 아닌, 사실 자체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그러므로 나는 망자의 내밀한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권리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세계를 훔쳐본 셈이다. 김형률의 절절한 고백은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깨달았다. 내가 아버지의 서재를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를….

    아버지의 서재엔 그의 비망록과 일기, 젊은 시절 취향이 집약된 잡지들, 어머니와 연애 시절 주고받았던 편지들도 있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그의 과거를 들여다볼 권리를 허락받았는가. 유언으로라도 그 권리를 허락해 줬다면 고마웠겠지만, 아버지는 환갑을 코앞에 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기에 주변을 정리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께 그런 바람을 갖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내가 이렇게도 윤리적인 사람이던가. 아마도 김지곤 감독은 김형률의 내밀한 글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가졌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인생을 오롯하게 재현해서 관객 앞에 좋은 영화로 보답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열람하는 데에는 그만큼 책임감이 따른다.

    내가 아버지가 남긴 ‘그것들’에 접근하길 망설였던 것은 아버지를 객관화된 인간으로서가 아닌 나의 아버지로만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의 과거로 들어간다는 것이 버거웠던 진짜 이유는 바로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데 따른 용기의 결여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리틀보이 12725’의 감독처럼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약간의 죄스러움과 흥분을 안고 아버지의 인생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영화 티켓은 정확히 62장이었다. 가장 오래된 영화는 1979년 상영한 ‘깊은 밤 깊은 곳에’였다. 티켓 가격은 1070원. 대략 1980년대 초반은 2000원 내외, 중반은 3000원 내외였다. 어머니와 결혼한 1980년대 후반 이후로 영화표는 한 장도 찾을 수 없었다. 잡지 ‘스크린’은 1984년 3월 창간호부터 1987년까지 37권이 있었고 1989년 ‘로드쇼’는 창간호 한 권만 남아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걸쳐 잡지를 광고까지 전부 정독했고, 아버지가 모은 티켓의 영화를 모두 조사했다. 그리고 내가 찾을 수 있는 모든 경로를 동원해 그 시절 아버지가 본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놀랍게도 대부분 작품을 지금도 파일 형태로 볼 수 있었고, 서너 작품이 비디오테이프로만 존재했다. 몇몇은 영어 자막판을 구해야 했다.

    신춘문예 당선 이후,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단 지 4년째가 됐다. 그동안 나는 몇 군데 기고하면서 이른바 ‘상업영화’라고 불리는 대중 영화에 대한 글을 쓴 적이 거의 없다. 상업영화에 대한 리뷰를 멋지고 능숙하게 하는 평론가가 이미 많은데, 나까지 그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가 망설여졌다. 더구나 나는 영화를 학술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자못 ‘예술’ 영역으로만 치부해 왔다. 그래서 대중 영화에 대한 담론은 시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여겼다. 그러나 아버지의 오래된 티켓은 인식 전환을 유도하고, 시간 영행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본 40년 전 영화들을 ‘절충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여기서 21세기를 살아가는 30대 비평가의 눈, 그리고 1980년대를 산 아버지의 눈을 빈번하게 교차시키고자 시도할 것이다. 때로는 영화의 배경과 사회적 함의를 전달하기 위해 학문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도 있을 것이다. 독자는 고인이 된 필자 아버지의 1980년대와 그의 딸이 사는 40년 후를 왕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중국 영화’란?

     영화 ‘열혈남아’(1988) 스틸컷. [(주)디스테이션]

    영화 ‘열혈남아’(1988) 스틸컷. [(주)디스테이션]

    1980년 TV드라마로 데뷔한 이래로 영원한 청춘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유덕화(劉德華), 비슷한 시기에 연예계에 진출해 중화권에서 가장 세계적인 배우 가운데 한 명으로 성장한 양조위(梁朝偉), 그리고 이들보다 선배이면서 영원한 ‘따거(大哥)’로 여전한 인기를 누리는 주윤발(周潤發)을 모르는 30대 이상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 ‘중경삼림’(1994) 스틸컷. (주)디스테이션

    영화 ‘중경삼림’(1994) 스틸컷. (주)디스테이션

    우리는 그들을 유덕화, 양조위, 주윤발로 부르지만 중국 본토에서는 ‘류더화’, ‘량차오웨이, ‘저우룬파’로 부른다. 그리고 그들의 고향인 홍콩에서는 광둥식으로 ‘라우 딱 와’, ‘렁 치우 와이’, ‘쪼우 윤 파’로 호명한다. 중국공산당이 ‘하나의 중국’ 정책을 천명하면서 많은 정치·사회·문화적 변화가 뒤따랐고 이 여파가 홍콩 연예계마저 휩쓸고 지나갔다. 원래 광둥식으로 불리는 것을 선호하던 홍콩 출신 연예인들은 이제 대세에 순응해 대륙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세 배우는 존재감도 막강하지만, 대중에 대한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전설적 인물이다. 대륙에서는 그들 이름 끝 간체자, 华(華), 伟(偉), 发(發)에다가 친근함이나 어린아이를 뜻하는 자(仔)를 더해 각각 화차이(华仔), 웨이차이(伟仔), 파차이(发仔)라는 별칭으로 부르면서 차원이 다른 대접을 한다.

    그들 가운데 주윤발은 연배가 있는 영화팬들에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며 두 사람과 달리 정치적 소신을 가감 없이 밝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중국내에서 주윤발은 ‘파차이’라는 친근한 별명 이외에 ‘연기의 신’ ‘도박의 신’과 같이 그가 가진 능력이나 영화 속 캐릭터를 빗댄 별명으로도 불린다.

    이와 달리 주윤발이 한국에서 ‘따거’라고 불리는 이유는 영화 ‘영웅본색’을 비롯해 그가 지금까지 소화한 의리와 정의감 넘치는 캐릭터, 그에 걸맞은 ‘신념’ 때문이다. 주윤발은 ‘큰 형님’ 정도의 의미를 가진 이 자랑스러운 별명에 어울리는 생각과 이를 실천하는 행동을 통해 따거의 진정한 의미를 몸소 재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후 전 재산(8000억 원) 기부, 대중교통 이용, 홍콩 민주화에 대한 찬성 발언, 수많은 선행 등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행적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다. 또 여타 대륙화된 홍콩 배우들과 달리 여전히 자신을 광둥식인 ‘쪼우 윤 파’로 소개하는 강단과 소신은 그를 더욱 존경스럽게 만든다.

    영화 ‘영웅본색’(1986) 스틸컷. [조이앤시네마]

    영화 ‘영웅본색’(1986) 스틸컷. [조이앤시네마]

    배우들의 이름이 다양한 발음으로 불리는 에피소드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그 시절 우리가 보던 홍콩 영화의 ‘정체성’ 에 있다. 중국에는 수많은 방언이 존재하고 그중에서 우리가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광둥어다. 홍콩은 광둥 지방에 인접해 있기에 당연히 광둥어로 모든 영화를 제작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실제로 광둥어·표준어가 번갈아 가면서 영화의 주도권을 잡던 시절이 있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대륙 시장을 잃은 홍콩으로선 굳이 본토 관객을 위한 표준어 영화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때부터 광둥어로 된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사가 발흥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1950년대에는 어느 한쪽이 완벽하게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표준어로 영화를 만들던 이른바 좌파 영화사 봉황(鳳凰)·장성(長城)·신련(新聯)이 건재했고, 광둥어로 영화를 제작하던 우파 영화사 대중화(大中華)·영화(永華) 등도 그 나름대로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도래한 때는 홍콩 영화의 주요 시장이던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제작 자본이 선수금 형태로 영화계에 유입되면서, 이를 재빨리 흡수한 광둥어 제작사들이 시장을 점유하면서부터다. 표준어 영화사는 일반적으로 영화제작에 공을 들였기 때문에 광둥어 영화보다 제작비와 제작 기간이 두 배 가까이 소요됐다.

    1960년대 들어서 싱가포르에서 홍콩으로 제작사를 이전한, 그 이름도 유명한 쇼브라더스와 전무 영화사가 직접 홍콩 시장에 개입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이들 대규모 제작사가 홍콩에 둥지를 틀면서 그동안 적은 제작비로 싸구려 B급 영화를 만들던 관행이 점차 사라졌고, 다시 표준어 시장이 우세를 점하게 됐다. 여기에 1957년 개국한 홍콩 최초 TV 방송국 RTV가 광둥어로 송출을 결정하면서 광둥어 영화팬들이 TV에 흡수됐고, 동남아 국가에서 민족주의 바람이 불며 더는 광둥어 영화 수요가 예전과 같지 않은 사회적 상황도 표준어 영화제작 열풍에 한몫을 하게 됐다.

    따라서 우리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즐겼던 장철(張徹), 이한상(李翰祥), 호금전(胡金銓)의 영화는 모두 표준어로 제작된 영화다. 하지만 표준어 영화제작의 선봉장 쇼브라더스는 이소룡을 앞세운 추문회(鄒文懷)의 골든 하베스트의 방식처럼, 스튜디오 없이 유동적으로 영화를 만들던 제작법에 밀려 1970년대 중반부터 영화보다는 방송사 ‘TVB’로 집중하게 됐다.

    골든 하베스트의 등장은 홍콩 영화에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쇼브라더스와 같은 기존 영화제작사는 할리우드의 메이저 회사들이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수직 통합한 영화제작 방식을 그대로 차용했는데, 골든 하베스트로 대표되는 외주 제작사 시스템으로 제작 방식이 변화하면서 그동안 영향력을 과시하던 시기의 영화제작사가 영화 배급업으로 대부분 돌아섰기 때문이다.

    홍콩 뉴웨이브의 약동

    RTV, 쇼브라더스가 매진했던 TVB, 그리고 1975년 개국한 가예(佳藝)TV가 만든 삼각구도는 홍콩 TV 산업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시청률 과당경쟁으로 인해 가예TV는 개국한 지 4년 만인 1979년에 도산했다.

    TV로 밀려들던 인재들이 새롭게 영화 현장으로 돌아오면서 홍콩의 첫 번째 뉴웨이브가 시작됐다. 골든 하베스트를 비롯한 뉴웨이브 제작사들은 광둥어로 송출된 TV 프로그램의 팬들을 다시 영화로 수용하면서 광둥어 영화 시장의 부활을 시도했다. ‘최가박당’을 만든 제작사 신예성(新藝城)은 골든 하베스트에 이어 홍콩 뉴웨이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이하게도 이 새로운 제작사는 배우와 감독이 중심이 돼 꾸려졌다. ‘최가박당’의 배우로도 출연했지만 원래는 유명 감독인 맥가, 수많은 영화의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홍콩 영화인의 대부로 존경받던 황백명(黃百鳴), 그리고 ‘취권’(1978)에서 성룡을 코믹하게 조련하고 ‘영웅본색 2’(1987)에선 실질적으로 극을 이끌던 ‘용사’로 등장했던 석천(石天)이 이 그룹의 원년 멤버였다. 이후에 ‘최가박당’을 감독했을 뿐 아니라, 한국에선 ‘첨밀밀’(1996) 속 장만옥을 사랑한 ‘미키마우스남’으로, ‘무간도’(2002) 속 양조위와 유덕화를 쥐락펴락하는 조직의 보스로 널리 기억되는 증지위가 가세했다. 1년 후엔 서극까지 이 그룹에 합류하면서 시네마 시티(Cinema City)라고도 불리던 신예성은 홍콩 영화계의 큰손으로 자리 잡아갔다.

    1980년에 출범한 신예성은 몇 차례 거둔 성공을 기반으로 대작 ‘최가박당’을 준비했다. 당시 TV 시리즈로 제작된 ‘상해탄’(1980)으로 주목받던 신예 주윤발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낙점됐지만, 일정이 겹쳐 허관걸(許冠傑)로 대체됐다. 1970년대 초 데뷔하자마자 인기를 구가했던 허관걸은 1970년대 최고의 프랜차이즈로 기억되는 ‘미스터부’ 시리즈를 형인 허관문(許冠文)·허관영(許冠英)과 함께 만들면서, 이소룡(李小龍)의 급사로 인해 발생한 골든 하베스트의 위기를 슬기롭게 메웠다. 이후 승승장구하다가 마침내 신예성의 대작에서 진짜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요즘 중화권에선 장학우(張學友)가 가신(歌神)으로 불리지만, 사실 이 명칭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허관걸에게 붙은 칭호였다. 최고의 스타 허관걸을 캐스팅하면서 ‘최가박당’은 1982년 설 연휴에 홍콩에서 개봉돼 2700만 홍콩달러의 수익을 달성하는 파란을 연출했다.

    ‘최가박당’은 1989년까지 총 다섯 편의 시리즈로 출시됐다. 엽천문(葉蒨文), 허관영, 장국영(張國榮), 이수현(李修賢)에 이르기까지 홍콩 영화의 전설과도 같은 배우들이 출연하면서 지금도 홍콩 코미디 영화 계보 맨 위를 장식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최가박당’을 통해 본격적으로 홍콩 영화를 탐구·소개해 보려 한다.

    김채희
    ● 1990년 출생
    ●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 부산대 대학원 박사
    ●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등단
    ● 現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및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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