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 부장은 도착 즉시 항만청에 사고 선박의 출항 정지를 요청하고 법원을 통해 선박 감수보전 조치를 받아냈다. 그의 말이다.
“우리 업무 중 선박 관련 사건은 특수한 경우다. 대응이 늦어져 사고 선박이 출항하면 공해상까지 잡으러 가야 한다. 도주 선박이 10층 건물 높이의 대형 배면 작은 통선 위에서 흔들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실제 그런 경우가 있었다. 외국 배였는데 일단 배에 오르면 선박국적증서부터 확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말이 통하지 않고 실랑이를 벌이는 등 위험한 순간을 겪기도 했다.”
대형 로펌에 근무하는 송 부장의 직책은 ‘패러리걸(Paralegal).’ 우리말로 ‘법률가 보조원’ ‘변호사 사무원’ 등으로 해석되는 이 직종은 변호사 자격증은 없지만 그들의 법률 업무를 돕는 일을 한다.
선진국에선 유망 직종
미국 등 선진국에서 유망 직종으로 알려진 패러리걸은 소송에 기초한 자료 수집부터 증거 확보, 목격자 면담, 서면 작성 등 변호사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을 맡는다. 다만 법률적 조언이나 법정에서 직접 소송을 수행하는 건 변호사의 영역이다.
국내에선 패러리걸이 법무사,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과 유사한 일을 하지만 법무사처럼 자격증은 없다. 증거 조사 및 수집도 미국의 패러리걸과 달리 국내에선 재판 등을 통해 일반적으로 공개된 범위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주민등록법 등 법률로 정한 요건에 해당하는 경우 외엔 증거 조사 및 수집을 할 수 없다.
일반인에게 낯선 패러리걸이 최근 관심을 끄는 이유는 외국계 로펌이나 국내 대형 로펌의 직원 모집 때 패러리걸이란 명칭을 쓰는 곳이 늘면서다. 그럼에도 국내에선 흔히 패러리걸을 통·번역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국내 패러리걸의 업무 영역은 통·번역, 법무, 송무 세 분야로 나뉜다.
번역 분야 업무는 영문으로 된 판례나 비즈니스 계약서 등을 한글로 옮기고 한글 문서를 영어로 옮기는 식이다. 외국 변호사로 국내 로펌에서 패러리걸로 활동 중인 여성 성영아(가명) 씨는 “통·번역 패러리걸이라고 해서 단순히 번역 업무만 하지는 않는다. 기업 고객인 의뢰인을 면담하는 것도 우리 일이다. 또 기업 간 거래에서 한국 기업이 영문으로 작성한 계약서와 미국 기업이 영문으로 쓴 계약서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관련법도 양국 간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계약서를 쓸 때 미국 법과 한국 법 중 어느 법을 적용하는 게 고객에게 유리할지 조언도 한다. 그뿐 아니라 외국환거래 규정은 사례마다 다르기에 금융감독원과 시중은행, 한국은행 실무자들과 접촉해 관련법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판단해서 법률자문을 하기도 한다. 기업 고객의 양해각서(MOU) 체결, 매매, 주식양수도 같은 계약서를 리서치해서 금감원 등 관련 기관에 확인하고 필요한 자료를 알아보는 등의 업무도 한다”고 말했다.
법무 분야 패러리걸은 법률 관련 사무를 주로 본다. 대형 로펌의 법무 패러리걸 팀장인 김선무(가명) 부장은 “법무 패러리걸은 주로 국내 법무사가 처리하는 업무인 법인 설립부터 청산까지의 업무, 부동산 업무 등을 한다. 예를 들면 외국 기업이 국내 투자를 고려할 때 투자자들이 입지, 환경 등을 사전 검토하는데 우리나라 사정을 잘 모르니 우리가 특정 지역을 선정해 임대가계약을 해주고, 외국인투자촉진법에 따른 투자 신고와 투자자금 들여오기, 외국인투자법인 설립과 등록 업무를 해준다. 그 과정에서 외국 임원이 입국할 때 비자를 발급받아주는 일도 한다”고 했다.
투자, 상표권, 특허, 사업자등록, 인허가 사업 등도 법무 분야 패러리걸의 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