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열혈 논객으로 필명 날리는 1인 경제연구소장들

‘한국의 그린스펀’에서 ‘디비보기 도사’까지

  • 글: 허 헌 자유기고가 parkers49@hanmail.net

    입력2004-03-29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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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광수, 최용식, 이종관, 공병호, 구본형….
    • 자신의 이름을 내건 경제·경영연구소를 차려놓고 지식탐험에 나선 ‘독립군’들이다. 이들은 제도권에 안주하며 온실 속 이론을 되뇌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필마단기로 강호에 뛰어들어 시장과 독자들의 냉엄한 심판을 자청한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검증받는 싸움터에서 얼치기는 살아남을 수 없다.
    유오성이 주연한 영화 ‘챔피언’은 1981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 챔피언 레이 맨시니와 싸우다 숨을 거둔 김득구 선수를 그린 것이다. 개봉된 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김득구가 동양챔피언이 된 뒤 체육관 위층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권투라면 가난하고 못 배운 청년들이 하는 운동쯤으로 여겼던 그녀는 김득구와 사귈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끈질긴 구애가 이어지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녀는 김득구의 운동복 등판에 ‘김득구’라는 이름 석 자가 박음질돼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한다. 하루는 데이트를 하다가 “옷에 이름이 쓰여 있으면 창피하지 않아요?” 하고 물었다. 김득구의 대답은 이랬다.

    “옷에 이름이 쓰여 있으면 게으름을 피울 수 없잖아요. 사람들이 ‘저 친구가 김득구 선수구나’ 하면서 보고 있는데 어떻게 게으름을 피워요….”

    열혈 논객으로 필명 날리는 1인 경제연구소장들

    김광수

    김광수경제연구소(www.kseri.co.kr) 김광수(金光洙·45) 소장은 보기 드물게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경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일반인에겐 낯설지 몰라도 정부 경제부처 주변과 재계엔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있을 때 김광수 소장의 경제 보고서는 금감위 직원들의 필독서였다. 일부 경제부처 고위 관료들도 그의 보고서를 강독했다.

    1997년 12월에 불거진 외환위기 직후 그가 펴낸 보고서는 동아시아 외환위기 분석, 국민연금 재정문제, 동북아 경제공동체 구상, 부동산 투기, 신용카드 버블의 경제적 영향 등 관련 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에게 꼭 필요한 주제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보고서는 정부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관가와 학계의 세미나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한국엔 ‘江湖’가 없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경제연구소 설립(2000년)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5월 ‘현실과 이론의 한국경제’라는 책을 펴내자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등의 직원들이 앞다퉈 구입했다. 권당 3만원이란 ‘거금’을 지갑에서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짧은 시간에 1000부가 팔려나갔다.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지난해 여름 “‘현실과 이론의 한국경제’를 읽으며 휴가를 보내겠다”고 말한 바 있다. 단 한 번도 추천사를 써본 적이 없다는 이헌재 부총리가 이 책의 추천사를 썼고,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도 추천의 글을 썼다.

    이 부총리는 추천사에서 “전환기의 한국경제가 직면한 구체적인 사례들에 관해 날카로운 통찰과 논리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문제 해결의 실용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며 “적은 인력의 연구소지만 역량이나 수준으로 볼 때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연구소”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79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 석사까지 마친 김 소장은 자신만만한 경제학도였다. 석사 과정에서 공부할 때는 한눈 팔지 않고 전공(금융학)에만 정진해 지도교수를 비롯해 주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패기 넘치던 김 소장은 일본 도쿄대 경제학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 난다 긴다 하는 전문가들이 득실대는 ‘강호(江湖)의 세계’로 발을 내딛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만난 한 도쿄대 교수의 면모를 보고 “천재가 여기 있었구나” 하며 무릎을 쳤다. 그는 복잡하고 어려운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만큼 명쾌한 논리로 문제를 풀어냈다. 김 소장이 보고서나 책을 펴낼 때 늘 ‘했습니다’ ‘이런 점 때문입니다’라며 경어를 쓰는 것도 어디에나 강자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몸을 낮추기 위함이다.

    6년 동안 일본에서 공부하며 그는 일본 사회를 이끌어가는 힘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미국의 힘과 일본의 힘을 이렇게 비교한다.

    “미국은 세계의 천재들이 모여들어 경쟁하는 나라다. 최고만 살아남는 시스템이라 어떤 문제가 생겨도 뚫고 나가는 힘이 있다. 미국이 경제대국이 된 것은 정보를 쥐고 있어서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 회계법인, 법률회사뿐 아니라 미국반도체협회 등 분야별로 최고의 정보기관들이 미국에 있다. 국가 신용도를 평가하는 회사도 미국에 있다.

    반면 일본에겐 그만한 힘이 없다. 미국만큼 천재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본에선 사기(詐欺)가 통하지 않는다. 전문가랍시고 TV에 나와 헛소리를 해댔다간 수많은 마니아들에게 혼쭐이 나서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 두텁게 형성된 실력파 전문가층은 세계 2위 경제대국이라는 일본의 저력을 실감케 한다. 일본은 얼치기 지식을 철저하게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나라다. 특히 언론과 사회가 얼치기 전문가를 걸러내는 전문적 역량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얼치기들이 설쳐대는 곳이다. 한국은 지식으로 검증받는 사회가 아니라 타이틀(사회적 지위)로 인정받는 사회다. 자신의 역량과 능력이 ‘강호’에서 걸러지지 않는다. 이는 전문가가 부족한 탓이고, 전문가를 길러내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탓이다. 특히 경제 전문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으려고 생경한 전문용어를 남발하며 보이지 않는 막을 쳐놓아 경제는 일반인들과 동떨어진 분야가 됐다.

    외환위기 원인 분석해 주목

    한국 사회에 전문가가 부족한 것은 ‘전문가 시장’이 왜곡돼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 시장을 경쟁체제로 바꿔놓지 않으면 한국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김 소장의 생각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전문가에는 대학교수와 정부 관료들이 포함된다.

    미국은 대학간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술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대학끼리 사이가 좋은 사회는 후퇴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일본도 대학사회의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오는 4월1일부터 모든 국립대학을 문부과학성 소속에서 완전 분리해 독립법인으로 전환시킨다. 미국식 경쟁주의를 도입한다는 뜻이다. 정부 보조금 지원을 중단하고, 대학에 기부하는 기업 또는 지역유지들로 대학 이사회를 구성해 총장을 선임하고 교수를 채용할 계획이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을 2만달러로 끌어올리려면 “한국 기업이 어떻게 세계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축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기업의 의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대학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신기술 개발에 나서 이를 기업에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는 교수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교수는 권위 있는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는 경우도 드물거니와 자신이 배운 학문을 현실과 접목시키려는 노력도 미흡하다. 현실과 이론을 접목하려면 전문가들로부터 실력을 검증받겠다는 용기가 필요한데, 대개의 교수들은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김광수 소장은 자신의 견해와 해결 방안을 현실에서 인정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가 일본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노무라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1997년 말 한국사 초유의 외환위기가 터져나왔지만, 누구도 사태의 원인과 해결책을 내놓지 않자 자신이 그 일을 해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해 12월부터 ‘김광수 경제보고서’라는 제목으로 재경부, 금감원, 청와대, 산자부, 한국은행 등의 과장급 이상 공무원들에게 10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돌렸다. 그렇게 자신의 역량을 시험했던 것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시 외환위기 사태를 맞게 된 원인으로 핫머니의 공격 등 음모론, 재벌기업의 과잉투자 등 재벌 무용론 따위가 지목되고 있을 때 그는 외환 보유 및 거래에 관한 규제 완화와 금리 자유화 또는 환율 자유화를 병행해서 추진하지 못한 정책적 과오가 외환위기의 근본 원인임을 밝혀냈다. 환율이 안정적인 상태에서는 외화 차입과 관련된 환위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국내외 금리차를 이용한 외화 차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한국의 종금사와 은행들은 외국 금융기관의 저금리를 이용해 단기 차입금을 경쟁적으로 들여왔고, 이것이 결국 외환위기를 불러온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외환위기의 원인을 분석한 보고서를 접한 재경부 관료들은 노무라경제연구소에 전화를 걸어 “도대체 김광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노무라경제연구소는 일개 연구원이 경제부처에 그런 보고서를 돌렸다는 사실에 놀라 일본 본사에서 사람을 급파, 김 소장의 의도와 그가 펴낸 보고서를 검증했다. 그는 본사 직원들과 3시간 동안 격론을 벌였다. 그 결과 연구소측은 그가 펴낸 보고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후로도 자유롭게 보고서를 낼 수 있도록 허락했다.

    ‘연구소 전쟁’ 벌어져야

    이후 김 소장은 2000년 8월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경제연구소를 설립하기까지 3년여 동안 ‘김광수 경제보고서’를 발행·배포하면서 고위 관료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 고건 당시 서울시장 등이 그의 보고서를 보고 “놀러오라”고 청했으며, 금감위 직원 400여명은 그의 보고서를 텍스트 삼아 강독회를 열었다. 그는 이런 인연으로 고건 총리의 경제보좌관과 서울시 외자유치자문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 소장은 “공무원 세계에 경쟁체제를 도입하기 위해 공무원 임금을 현실화해야 하며, 공무원 임금을 현실화하려면 헌법에 보장된 공무원의 신분보장제를 폐지하고 과감한 정부 구조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전자정부 구현을 통해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겠다며 막대한 투자를 했지만, 신분보장제 때문에 과잉인력 해소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작고 효율적인 정부도 실현하지 못했다. 기업은 정보화의 진전을 통해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나, 정부 부문에선 눈에 띄는 변화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

    최근 김 소장이 공무원 인사체계의 문제점을 파헤친 보고서를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앙부처 공무원은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지만,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없을 뿐 아니라 인사체계에서도 전문성에 입각한 경쟁원리가 작동되지 않는다. 또한 갖가지 정책들이 거의 매일 쏟아져나오지만, 정책시행 성과에 대한 평가나 보고는 전무하다. 정책에 대한 성과평가를 하게 되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책 실패는 구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소장은 기회가 되면 컨설팅을 통해 이 문제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김 소장은 “고도의 전문지식을 가진 그룹은 항상 경쟁에 노출돼야 하며 그래야 뛰어난 지식이 살아남게 된다”며 “전문가들끼리 경쟁하기는커녕 오히려 보호막을 쳐놓고 기득권에만 매달려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를 양성하지 않는 패거리주의를 청산하고, 현실에서 통용되는 지식을 연마하지 않는 한국 엘리트들의 분위기를 쇄신하려면 각 분야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연구소들이 쏟아져나와 오로지 실력으로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이는 문화가 이식돼야 한다.

    통계와 수치의 미덕

    열혈 논객으로 필명 날리는 1인 경제연구소장들

    최용식

    21세기경제학연구소(www.taeri.org)를 사실상 혼자 운영하고 있는 최용식(崔用植·51) 소장은 얼치기들을 혼내주는 또 한 사람의 경제 논객이다. 그가 운영하는 연구소는 웹사이트에만 존재할 뿐 오프라인 공간은 없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조그마한 사무실은 웹사이트에서 만난 네티즌들과 경제 세미나를 갖는 곳으로만 이용된다. 그는 일주일에 2∼3일은 새벽 2시에 일어나 경제 칼럼을 쓴다. 짧은 글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쓴다.

    그가 쓴 글이 네티즌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는 웹사이트의 인기도를 측정하는 랭키닷컴(www.rankey.com)에 접속해보면 안다. 이곳에서 경제연구소 분야를 클릭해 순위를 보면 21개 기업형 경제연구소 가운데 그의 웹사이트가 6∼7위를 오르내린다. 수십 명의 연구원들을 거느린 내로라하는 경제연구소들을 제치고 최 소장 혼자 이끄는 사이트가 이만한 입지를 확보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의 칼럼을 게재하는 정치 포털 사이트 서프라이즈(www1.seoprise.com)에 들어가보면 그의 글을 읽은 조회수가 통상 5000∼1만건에 이른다.

    경제 현상을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가공해주는 것이 인기 비결이다. 그의 글들은 일견 낯설어 보인다. 때로 그는 산업공동화 현상을 찬양하는가 하면, 국부(國富)가 유출돼야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신문 경제면에 자주 등장하는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해서는 오히려 ‘고용 있는 성장’을 해왔다고 반박한다. 한국사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을 오히려 한국이 발전하는 데 필요한 과정이라고 뒤집어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주장만 하지 않는다. 실제적인 데이터를 인용하면서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경제현상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한다. 또한 그는 경제문제를 쉽게 풀어 쓴다. 어려운 경제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좋은 차일수록 운전이 쉬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그의 주장은 선이 분명하다. 애매한 양비론이 없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기존 세력을 정면으로 비판해 네티즌들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주요 일간지에 실리는 이름난 경제학 교수들의 글이 최 소장에겐 좋은 표적이 된다. 만약 팩트(fact)를 제대로 인용하지 않는다거나 엉터리 지식으로 사실을 호도했다간 그의 가차없는 ‘난도질’을 피할 수 없다. 최 소장에게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유력 일간지에 절필을 선언한 경제학 교수도 있다고 한다.

    최 소장의 가방에는 늘 두 가지 책자가 들어 있다. 한국은행에서 발간하는 ‘국제월보’와 통계청에서 발간하는 ‘월간 통계’다. 그가 하루도 빠짐 없이 챙기는 것이 바로 통계. 10여년 동안 통계를 살펴보며 살았기에 웬만한 수치는 다 외울 정도다. 그래서 경제현상을 분석할 때는 과거의 역사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별해 문제의 원인을 찾아낸다. 그는 “한국경제에서 문제투성이로 보이는 것도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양호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즉 문제를 하나의 시점에서만 보는 폐쇄적 시각은 늘 비관주의로 흐르게 되고 시장에 쓸 데 없는 불안감을 던져준다”고 꼬집는다.

    최 소장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71학번이다. 그에 앞서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지만 친척 중에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있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이념을 탐구하기 위해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지만 곧 경제학 공부에 빠져들었다. 이념 뒤에는 경제논리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통합하는 논리를 개발한다면 이념이 사라질 것이라는 ‘당돌한 포부’를 갖고 경제학 공부에 전념했다. 그래서 직장생활도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서 시작했다.

    5년쯤 근무했을 무렵,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통합하는 경제이론을 만들어내겠다는 대학 시절의 꿈이 다시 꿈틀댔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있었지만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7년 동안 책에 파묻혀 연구에 몰두했다. 골방에 처박혀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를 써대느라 아이들에게 용돈도 못 주는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펴낸 책이 ‘사상과 경제학의 위기’(한울刊)다. 원고를 완성하고 이를 책으로 펴내기까지도 약 2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의 글을 출판하겠다는 출판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991년 책이 나왔지만, 그가 품은 원대한 꿈에 비하면 판매량은 초라할 만큼 적었다.

    격렬하게 표출되는 내공

    이런 상황에 처하자 그는 가족을 돌볼 생각으로 국회에 들어갔다. 고정적인 월급도 필요했지만, 자신의 경제관을 국회에서 검증받고 싶었다. 국회는 학력과 지위로만 통하는 곳이 아니다. 치열한 논리 대결이 펼쳐지는 곳이다. 인정받지 못하는 논리는 금세 수명을 다하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이런 분위기에서 단련됐기에 그의 글은 세련되지 않다. 주장이 강할 뿐더러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1991년 유인학 의원 보좌관으로 시작해 1999년 강운태 의원 보좌관을 할 때까지 그는 주로 정책을 담당하는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국회에서 그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한화갑 의원실의 정동석 비서관은 “국회에서 최 소장만큼 내공이 깊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는 1996년 10월 한국의 경제위기를 예측하는 보고서를 만들어 국회 본회의에서 지대섭 의원을 통해 문제 제기를 하도록 했다. 보고서 제목은 ‘경제 파국이 눈앞에 닥쳤다’. 당시 외환위기는 상상도 못했던 지 의원은 제목이 너무 과격하다며 “한국은행 조사부 임원에게 한번 보여주고 나서 괜찮다고 하면 예정대로 질문하자”고 했다. 최 소장은 한국은행을 찾아갔고, 한은 임원은 하루 종일 보고서를 검토한 뒤 “의미 있다. 이런 경고는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 내용을 담은 대정부 질문은 ‘상투적인 대(對)정부 공세’로 심각하지 않게 취급됐다. 그러나 이듬해 초 한보사태가 터지자 그의 예측은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외환위기까지 전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경제위기는 분명히 경고했던 것이다.

    그는 정부가 재정팽창을 고집해 경기를 띄운 것이 경기침체를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초과수요가 발생하면서 물가가 올랐고 수입이 급증했으며 이에 따라 국제수지가 악화됐다. 재정팽창 탓에 기업 부문에서 가져다 쓸 재화가 부족해 기업의 대외 경쟁력이 떨어졌다.

    환자와 축구선수

    한보사태가 불거진 후 최 소장은 지대섭 의원을 통해 18조원의 한보 부도로 180조원이 사라지는 이른바 ‘신용수렴’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한은 직원들은 최 소장에게 항의전화를 걸어댔고, 언론은 “저런 국회의원은 사라져야 한다”고까지 비난했다. 최 소장은 한은에 “나는 내가 한 말에 목숨을 걸 테니, 당신들이 지면 사과만 하라”고 맞섰다. 결국 한국은 위환위기를 맞게 됐지만, 한은 직원들의 사과는 받아내지 못했다. 최 소장은 “경제 전문가들은 댐이 무너지기 전에 막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그러나 우리 사회는 댐 붕괴를 사전에 막은 사람보다 댐이 무너진 뒤 수습책을 마련한 사람을 더 대우해준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최 소장이 언제나 비판적인 글만 쓰는 것은 아니다. 연초에는 그해의 경제성장률을 예측하는 글을 쓰거나 분기별 경기예측 보고서를 내놓기도 한다. 몇몇 증권사들이 그의 글을 자사 사이트에 게재하는 것을 보면 그의 예측기법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하다. 실제로 다른 경제연구소나 정부기관보다 정확한 예측치를 내놓았다. 그는 자신의 경제예측 방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병상에 누워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건강한가. 대개는 축구를 하는 사람이 더 건강할 것이다. 하지만 축구를 하는 사람은 속병으로 건강이 나빠지고 있고,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은 회복중이라면 누가 더 건강하다고 봐야 할까. 경제도 마찬가지다. 경기를 예측할 때는 호황인가 불황인가를 따지기보다 경기가 상승하는가 하강하는가를 따져야 한다. 경기가 상승 혹은 하강하는지를 알려면 지난해 같은 기간의 성장률이 아니라 바로 직전 기간의 성장률과 비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하 7층에서 지하 1층으로 갔다면 올라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지하에 있기는 해도 틀림없이 올라간 것이다. 하지만 지상 8층에서 지상 5층으로 옮겨갔다면 여전히 지상에 있지만 실제로는 내려간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7%에서 -1%가 됐다면 비록 체감경기는 낮다 해도 경기가 상승한 것으로 봐야 한다. 단순히 체감경기 타령만 할 게 아니라 통계가 뒷받침된 판단으로 경기를 예측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경기예측 기법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물리학 이론, 운동에너지, 벡타 등 일반인에게 낯선 용어들 때문이다. 그의 글은 아주 읽기 쉽다. 다만 그가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 글은 읽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의 경기예측 기법과 관련, 미국 MIT 경제학과 양신규 교수는 “최용식 소장은 한국의 앨런 그린스펀”이라며 “그의 경제지식과 예측방법은 학자들이 깊게 검토해볼 가치가 있다”고 치켜세웠다. 양 교수는 “만약 최 소장이 20~30대에 미국 명문대 박사과정에 지원했더라면 서로 장학금을 주면서 데려가려 했을 것”이라며 “한국 경제학계 풍토에선 최 소장이 주류 대접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경제읽기’ 카페가 낳은 스타

    열혈 논객으로 필명 날리는 1인 경제연구소장들

    이종관

    국내 최다 회원(3만여명)을 확보한 다음카페의 ‘경제읽기’엔 뛰어난 경제논객들이 많다. 이곳에선 조만간 경제전문가로 떠오를 예비 주자들이 서로 견해를 주고받으며 실력을 연마하고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질문과 답변들이 올라오고, 특정 이슈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면 순식간에 수십 개의 댓글이 따라붙는다.

    이들 논객 중에서도 호주국립대 경제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이종관(李鍾官·34)씨는 젊지만 단연 돋보이는 실력파. 이씨는 성균관대에서 경제학 석사를 마친 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근무하면서 통신경제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박사과정에 진학한 그는 호주에서 네트워크 발달이 국가 경제와 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규제가 심한 한국, 일본, 대만이 상대적으로 규제가 약한 호주나 영국에 비해 광대역 통신과 인터넷이 더 발전하게 된 원인 규명 등이 그가 매달리고 있는 과제다.

    그의 글은 카페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경제위기를 디비보자’ ‘통신경제학을 디비보자’ 등의 디비보자(‘자세히 보자’는 뜻의 은어) 시리즈나 ‘일본의 20세기 경제’ 등이 네티즌들로부터 특히 박수를 많이 받은 글이다(그의 글을 읽으려면 카페에 접속한 뒤 검색어에서 ‘Paribus’를 치고 검색대상을 글쓴이로 하면 볼 수 있다).

    종종 그는 우리 주변에서 자주 쓰이는, 그러나 사실과 다른 경제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되짚어준다. 예컨대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란 말이 유행할 때 그는 자본가의 입장에서 쓰는 유연성과 노동자들이 쓰는 유연성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유연성이 효율성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게 왜 잘못됐는지 등을 놓고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다. 경제읽기 카페의 또 다른 운영자 이피션트(Efficient)는 “경제학에서 배우는 이론들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적용될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상당수 경제학자들에게 결여되어 있는데, 이종관씨는 이론과 현실의 접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카페 회원들의 질문을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쉽고 감칠맛 나는 문장으로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금리, 환율, 부동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어디 하나 막히는 곳도 없다. 일가를 이룬 전문가라 하기엔 아직 적은 나이지만 그의 내공은 탄탄하다. 호암 청년논문상 경제부문상, 매일경제신문사 경제 논문상을 받았고,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선 우수 연구원으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씨는 “경제는 생활의 일부이므로 인간의 삶과 경제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일부 경제학자들이 현학적이고 자기 과시적인 글을 쓰다 보니 일반인들은 경제를 어렵게만 여긴다”고 지적했다. 경제이론은 어려워 보이지만 막상 그 내용을 생활에 적용하면 바로 내 주변에서 무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 학자들이 경제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탓에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또한 학자들의 글은 경제 전체를 하나의 시각이나 관점으로 보도록 하게 하는 등 편협한 측면이 많다. 따라서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경제가 발전한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이씨처럼 헌신적인 사람이 경제 문제에 관해 때로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때로는 자상한 선생님처럼 설명해준 덕분에 경제읽기 카페는 3만여명의 회원을 모을 수 있었다. 지식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으로 살 수 있다면 대기업들이 굵직굵직한 경제연구소를 수십 개는 만들었을 것이다. 지식의 축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현실에 적용해보고 시행착오를 거듭해갈 때 가능하다.

    열혈 논객으로 필명 날리는 1인 경제연구소장들

    공병호

    자기 이름을 걸고 자신의 지식을 유동화하는 전문가 중엔 낯익은 이들도 있다. 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원 원장을 역임한 공병호(孔柄淏·44)씨와 변화관리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구본형(具本亨·50)씨가 그런 인물.

    공병호씨는 1인 경영연구소인 ‘공병호경영연구소’를 설립하고 일반인에게 와닿는 글을 써 인기를 끌고 있다. 그의 저서 ‘3040 희망에 베팅하라’ ‘주말 경쟁력을 높여라’ ‘두뇌가동률을 높여라’ 등은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라 있다. 그는 자유기업원장으로 시장주의를 외치다가 어느날 벤처기업의 대표이사가 됐고, 그러다 이마저도 그만두고 1인 기업가, 1인 연구소장이 된 돈키호테 같은 인물이다.

    그는 딱딱한 경제논객 대신 부드럽고 친근한 경제평론가로 나섰다. 자기계발에 관해 책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그는 어느덧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됐다. 새벽 2시면 일어나 글을 쓰는 부지런한 글쟁이다. 공씨는 지난해 3억원 가량의 수입을 올렸다는 후문이다. 인세와 강연료, 그리고 각종 매체에 기고해 받은 ‘글 값’이 이 정도면 꽤 괜찮다. 그의 재주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가 기업형 연구소장을 맡았더라면 수입은 지금보다 좀 못해도 훨씬 더 명망 있는 경제학자가 됐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자신의 역량을 시험하기 위해 독립한 용기는 대단하다. 그래서 시장과 독자들의 목소리를 보다 가까이에서 듣게 됐을 것이고, 이는 다시 그의 경제지식을 갈고 닦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됐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삶은 일종의 탐험여행이다.

    열혈 논객으로 필명 날리는 1인 경제연구소장들

    구본형

    구본형씨 역시 잘나가던 외국계 기업을 박차고 나와 자신의 이름으로 제 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냈고, 여전히 저자와 강연가로 성가가 높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의 생각이 어느덧 몸 속으로 파고드는 듯하다. 당장 그대로 실천하고픈 아이디어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타인의 변화를 유도해내는 노하우를 제대로 체득했다는 얘기다.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변화를 유도하는 그의 글은 ‘독립 선언’ 이후 더욱 세련돼졌다. 역시 시장에 나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나름의 ‘임상실험’을 하면서 체험한 지식이 글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한국에 자신의 이름을 따 만든 민간연구소들이 100개쯤 더 생겨난다면 한국의 지식 인프라는 한층 견고해질 것이다. 앞서 소개한 ‘경제 독립군’들이 지적했듯 그렇게 되면 얼치기 전문가들이 활개를 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강자들이 나타나서 더 센 강자를 만들어내고, 그런 강자들이 경제정책을 만들어내고 실행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우리 사회는 좀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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