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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 계승 둘러싸고 분열된 이슬람 갈등의 영원한 불씨

혈통 계승 둘러싸고 분열된 이슬람 갈등의 영원한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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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라크 인구의 65%를 차지하면서도 수니파인
  • 후세인 정권에 의해 정치적 박해와 경제적 박탈을 당해왔던 시아파들이 이라크전쟁 이후 권력 전면에 나서면서 두 세력간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여기에 ‘해방군’ 미국이 개입, 더욱 복잡한 양상을 연출하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어떻게 다르며 왜 대립과 반목의 역사를 거듭하는 것일까.
혈통 계승 둘러싸고 분열된 이슬람 갈등의 영원한 불씨
이라크전쟁으로 인해 지난 25년 동안 온갖 권력과 부를 독점했던 수니파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 그간 억눌렸던 소외계층과 종파 그룹이 일제히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인구의 65%를 차지하면서도 후세인 정권에 의해 정치적 박해와 경제적 박탈을 당해왔던 시아파들이 급속히 결속하면서 권력 전면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사담 후세인 제거를 반기면서도 강력한 반미투쟁을 전개하고 있어 미국을 당혹케 한다.

대다수 중동전문가들은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인들의 뿌리깊은 반미정서가 폭발할 것으로 예측해왔다.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냄으로써 미국이 이라크 내에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사실 후세인의 장기독재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 중 하나는 그가 미국에 대항해 싸운다는 이미지를 이라크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고 이로 인해 이라크 국민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후세인의 권력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즉 이라크 국민들은 후세인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횡포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에 그를 대안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후세인을 영웅시하는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이라크 국경을 넘어 아랍 전체에 퍼져 있는 일반적인 정서다. 1991년 걸프전쟁 직후 후세인의 무차별 공격으로 대량학살을 경험한 남부 지방의 시아파들이 이라크전 이후 강력한 반미데모를 벌이고,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서방통 세속주의자 찰라비를 과도정부 구성 책임자로 임명했다. 사실 그의 선택은 대단한 모험이다. 그가 시아파이고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임명됐지만 찰라비는 이라크 내 지지기반과 대중적 영향력이 미약하다. 바그다드 중심의 아랍인 수니파와 꾸준히 독립을 추구하고 있는 북부 쿠르드족 수니파, 남부 아랍인 시아파의 각기 다른 요구들 사이에서 그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라크라는 한 지붕 아래서 각 종파들이 권력을 분점하면서 연방국을 구성할 수 있을까. 아니면 레바논 내전과 같이 종파간 분열의 길을 갈 것인가. 우선 수니파와 시아파의 성격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봄으로써 그 윤곽을 가늠해보도록 하자.

후계자 갈등이 결별의 시초



현재 이슬람권의 90% 정도가 수니파이고 10% 정도가 시아파다. 하지만 두 종파로 구분하기 애매한 소수 종파도 적지 않다. 시아파는 지금의 이란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는 반면 수니파는 세계에 골고루 퍼져 있다. 시아파의 최대 종주국은 이란이고, 시아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나라는 이라크와 오만, 예멘, 레바논, 바레인 등이다.

시아는 ‘시아트 알리(Shiat Ali)’의 약칭으로 이슬람의 4대 칼리프(정교일치의 최고 통치자) 알리를 추종하는 종파 집단이다. 처음부터 수니 종파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아파가 주류집단을 박차고 떨어져나가자 예언자의 언행인 순나(Sunnah)를 따르는 집단이란 의미로 기존 집단을 수니로 불렀다. 알리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로 무하마드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또 그는 두 번째 이슬람 개종자로서 탁월한 용맹성과 지혜를 가졌으며 시종일관 무하마드의 곁에서 성실하게 그를 보필했다.

632년 무하마드가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이슬람 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누구를 후계자인 칼리프로 정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리의 추종자들은 예언자의 혈육이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알리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랍 부족장 회의 슈라(shura)에서는 아부 바크르(632~634)를 초대 칼리프로 선출했다. 슈라에서 만장일치 합의제(이즈마)로 칼리프를 선출하는 방식은 초기 이슬람 사회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2대 칼리프 우마르(634~644), 3대 칼리프 오스만(644~656)이 이 방식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우마르와 오스만 모두 예배 도중 반대세력에 의해 무참히 피살됐고 이후 알리가 4번째 칼리프로 등장했다. 그런데 알리가 오스만의 살해세력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자, 무하마드의 부인이자 오스만을 지지했던 아이샤의 비난과 공격을 받게 됐다. 두 세력간의 알력은 전쟁으로 비화됐고 656년 최초 이슬람 내전이라 할 수 있는 낙타전투에서 알리가 승리한다. 그러자 오스만의 사촌이었던 무아위야가 알리에게 대항했다. 창 끝에 코란을 달고 돌진하는 무아위야의 군대를 향해 알리는 화해를 요청했고 협상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화해 협상에 대해 불만을 품은 알리의 강성 추종자는 661년 알리를 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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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 lee20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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