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파는 알리의 장자인 하산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직적 군대를 가졌던 무아위야는 스스로가 칼리프임을 선포했고 하산에게 칼리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하산은 다음해 갑자기 목숨을 잃는다. 시아파들은 무아위야가 하산을 독살했다고 믿고 있다.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은 현실적 상황을 받아들여 무아위야가 살아있는 동안 칼리프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한다. 이는 무아위야의 사후 칼리프직을 후세인에게 물려주겠다는 묵시적 선언이었다. 그런데 680년 무아위야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야지드는 약속을 깨고 칼리프직을 찬탈했다. 후세인은 즉각 야지드에 대항했다. 이렇게 해서 680년 시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카르발라 전투가 벌어졌다.
군사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장렬하게 싸웠다. 하지만 모두 처참히 살해당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후세인의 어린 아들 알리만 겨우 피신해 시아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르발라 전투 후 이슬람 세계에서 정통 칼리프 시대는 끝나고 왕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시아파들은 통한의 응어리를 안고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별도의 둥지를 틀었다. 이후 예언자의 혈통인 후세인이 무참하게 도륙당한 680년 이슬람력 1월10일은 시아파에게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후세인의 묘당이 있는 카르발라는 시아파 최고의 성지가 됐으며 1월10일은 그의 무덤을 순례하는 가장 의미 있는 날이 됐다.
모든 시아파 순례객들은 예리한 칼로 자신의 몸을 난자하며 피를 뿌리는 끔찍한 행진을 한다. 당시 후세인의 고통을 직접 체험한다는 종교적 동일체 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동시에 예언자의 혈족을 살해하고 종교적 신성함을 훼손한 수니파에 대한 역사적 원한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칼리프직을 찬탈했던 무아위야가 창건한 우마이야조는 750년 아부 알 압바스 장군에 의해 멸망한다. 이때 무하마드 가문 출신인 압바스는 시아파의 절대적인 협력을 받으며 시아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후세인의 증손자인 자파르 알 시디키를 자신의 후계자이자 칼리프로 옹립하려는 구상을 했다. 하지만 754년 압바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알 만수르가 자파르를 살해하고 자신이 칼리프로 취임했다. 시아파로서는 두 번째 배반을 당한 셈. 이 왕조가 압바스 제국으로 1258년 몽골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거의 500년간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다. 시아파는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몇몇 시아파 왕조를 건설했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다. 하지만 16세기 현재 이란 지역에 시아파인 사파비 왕조가 들어선 후 대다수 국민들이 시아파로 개종했다. 이것이 현재 최대 시아파 국가인 이란의 모태다.
이처럼 수니파와 시아파는 교리적 논쟁이 아닌 계승권 분쟁을 둘러싼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갈라졌다. 혈통 계승을 주장하는 시아파에게 유일한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사촌인 알리뿐이다. 그 전 세 명의 칼리프는 찬탈자로 간주한다. 이런 정치적 견해 차이를 제외하면 두 종파간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 코란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마지막 예언자 무하마드를 따르는 기본적인 코드는 서로 같다.
결정적 의식의 차이 ‘아슈라의 날’
그럼에도 두 종파는 의식의 실행과 종교적 관점, 이슬람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왔다.
가장 뚜렷하고 결정적인 의식의 차이는 ‘아슈라의 날’에 나타난다. 아슈라는 후세인이 순교한 이슬람력 1월의 열흘간을 의미한다. 카르발라 전투에서 후세인이 처참하게 전사한 고통을 기억하는 의식이다. 사이파는 자신의 가슴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칼로 긋는 행위(마아탐)를 통해 당시 후세인의 죽음을 방치한 나태함에 대한 참회(타으지아)를 한다. 후세인의 순교 정신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나누는 것. 시아파는 이런 참회 의식을 행하면 최후 심판의 날에 후세인이 중재자로 등장해 자신들을 천국으로 이끌어줄 것으로 믿고 있다. 이에 대해 수니는 역사를 왜곡하고 알리와 후세인에 대한 그릇된 종교의식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이 행사의 과격성과 시아파의 수니파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두 종파간에 마찰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부분적인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이슬람의 기본 의무인 예배에 있어 수니파는 시간에 맞춰 하루에 다섯 번씩 예배 보는 것을 철저히 지킨다. 하지만 시아파는 상당한 융통성을 부여한다. 예배를 묶어서 한꺼번에 보기도 하고 하루 다섯 번의 예배를 세 번으로 줄이기도 한다. 선 자세에서 두 손을 배 위에 올리지 않고, 절을 할 때도 바로 바닥에 이마를 대는 것이 아니라 카르발라에서 가지고 온 작은 돌 조각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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