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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투철한 소명의식으로 개척한 ‘미국 정신’의 요람

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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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이주를 준비하면서 온갖 고난을 겪고 광막한 바다를 건너왔으나, 여기에는 그들을 맞아주는 친구도 없고 비바람에 시달린 몸을 풀고 활력을 되찾을 숙소도 없었다. 그리고 찾아들 집도 없었으며, 도움을 청할 집이나 마을 같은 것은 더더구나 있을 리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은 다만 야생 짐승과 야만인으로 가득 찬 무시무시하고 황량한 황야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비스가 산처럼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 황야를 내려다보면서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살펴봄으로써 희망을 지필 수 있는 산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그들이 건너온 바다가, 이제 그들을 문명 세계로부터 절연하는 장애물이요 심연이 되어버린 그 광막한 바다가 보일 뿐이었다.

400년 전 삭풍이 몰아치는 이 황량한 바닷가에서 브래드퍼드를 휘감은 비장한 숭엄미를 통해 빛나는 것은 결국 청교도로서 그의 뜨거운 종교적 열정이다. 180t에 불과한 작은 목선에 의탁해 대서양을 건너오게 한 그 치열한 신앙의 실체는 무엇인가. 브래드퍼드 일행으로 하여금 정든 고향 땅을 떠나 이방을 전전하다가 급기야 이곳 신대륙 땅, ‘야생 짐승과 야만인으로 가득 찬 무시무시하고 거친 황야’로 찾아오게 만든 신념과 결단의 본질은 무엇인가.

소명감과 선민의식

이 물음은 물론 청교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의문과 이어진다. 그러나 그런 원론적 질문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왜냐하면 여기에 이 순례자들을 이끈 원동력이 무엇인지 꽤 분명히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주위를 살펴볼 비스가 산도 찾아볼 수 없다는 한탄이 바로 그것이다. 비스가(Pisgah) 산이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죽기 전에 여호와의 계시로 등정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봤던 산이다. 다시 말해 브래드퍼드는 고난에 찬 그들의 순례 여정을 이스라엘 종족의 애굽 탈출에 견주고 있는 것이다. 신(神)의 선택을 받아 애굽 땅을 탈출해 가나안에 정주한 이스라엘 종족처럼 그들 또한 신대륙에 기독교 복음의 왕국을 건설하라는 소명을 받아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이곳 신대륙으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이 순례 청교도들의 뜨거운 신심의 근원은 바로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 부름 받은 책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소명의식, 따라서 신이 어떤 곤경에서도 그들을 인도해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기에 고난과 시련은, 느헤미야가 그렇고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오히려 선택받은 증거로써 그들의 소명감을 더욱 뜨겁게 타오르게 만들 뿐이다.

청교주의 연구가 페리 밀러는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이런 소명의식을 ‘황야로의 심부름(errand into the wilderness)’으로 표현한 바 있다. 밀러에 따르면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에게 식민지 건설은 수세기에 걸친 숱한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이뤄내지 못한 참다운 기독교 공동체의 모델을 세우라는, 다시 말해 종교개혁 운동을 완수하라는 신의 엄숙한 심부름으로 비쳤다. 밀러는 본래 이 소명의식이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고자 한, 존 윈스롭을 주역으로 한 매사추세츠 만 식민자들에게서 두드러지고, 플리머스 순례자들의 경우는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내몰린 타율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종교적 열정이나 비전의 순수성에서는 오히려 플리머스 식민자들이 앞선다. 매사추세츠 만 식민자들이 국교회에 남아서 내부 개혁을 통해 그들의 목표를 완수하자는 온건한 입장이었던 데 반해 플리머스 순례자들은 내부로부터의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국교회와 분리해 그들 자신의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유랑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이 과격한 분리주의 원칙으로 인해 이들에겐 ‘분리주의자(Separatists)’라는 낙인이 찍혔고, 국교회는 물론 같은 청교도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이런 시련을 순교자적 자세로 받아들이고 신의 왕국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매진했다. 시련이 오히려 그들의 소명감과 선민의식을 더욱 깊게 한 것이다.

스크루비 청교도들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플리머스에 도착한 이듬해인 1621년부터 1657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30번이나 지사로 선출됐다.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지사로 선출되어 종신토록 식민지의 지도자로서 순례자 회중을 이끌었으니 스스로를 모세에 견준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해 대서양의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1588년,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50마일 떨어진 요크셔의 오스터필드에서 태어났다. 주민이 200명가량이던 이 소읍에서 브래드퍼드가는 농토를 제법 많이 소유한 유족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네 살 때 어머니가 개가하자 브래드퍼드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여섯 살 때 할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개가한 어머니 집으로 들어갔으나, 이듬해에 어머니도 사망해 고아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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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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