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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그리스·이집트·이탈리아風 공존하는 제국 賢帝의 小우주

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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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하는 미소년 안티노스의 돌연한 죽음.
  • 슬픔에 빠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아름다운 별궁을 지어 그를 기렸다. 해상극장과 대(大)욕탕, 나일강을 상징하는 고즈넉한 못, ‘이탈리아 정원의 표본’으로 불리는 그림 같은 정원이 탄성을 자아낸다.
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빌라 하드리아누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카노푸스. 미소년 안티노스의 죽음을 기려 세운 이 못의 한쪽 변에는 이오니아식 원주와 그리스 신상, 그리고 악어 조각이 세워져 있다.

서기 125년 어느 날 밤, 소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76∼138, 재위 117∼138)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몇 번을 뒤척이다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달빛이 교교한 정원을 거닐다 재스민색 살결을 지닌 한 소년을 보았다. 얼굴은 물론 어깨선과 손발까지 소녀 같았는데, 달빛을 받아 더욱 매혹적으로 비쳤다. 황제는 그만 소년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안티노스(Antinous)란 이름을 가진 이 소년의 나이는 열다섯 전후. 그리스 전래의 미소년다운 매력을 한껏 흘리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는 도시국가(폴리스)들의 집합체였다. 각 폴리스는 늘 외부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일종의 전시체제 아래 놓여 있었다. 따라서 남성들은 병영생활을 주로 했고, 그러다 보니 성인남성들은 15세 전후의 미소년을 애인으로 삼아 동성애를 즐기는 일이 빈번했다. 그들에게 동성애는 ‘특수하고’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이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미모의 젊은이를 사랑했다고 하니까.

이에 비해 로마는 제국답게 동성애를 떳떳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황제였기에 미소년을 가까이 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날 이후 황제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개를 끌고 다니듯이 안티노스를 자신의 순방 길에 데리고 다녔다. 안티노스와의 만남이 앞으로 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모른 채.

1100년에 이르는 로마제국 역사에서 최고의 태평성대였던 오현제(五賢帝) 시대(96∼180). 그 중에서도 제국의 판도가 최대에 이르고, 또한 이렇다 할 전쟁도 없었던 시대를 이끈 하드리아누스는 역대 황제들과는 여러 모로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 중 하나는 여행을 즐겼다는 점이다. 그는 재위 21년 동안 무려 12년간, 그러니까 절반이 넘는 시간을 마차와 배 위에서 보냈다.

시간적으로만 최다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니라 제국의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기에 지역 범위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3차례에 걸쳐 이뤄진 그의 대순행 중 첫 번째(121∼125)는 갈리아(프랑스와 그 북부), 게르마니아(독일), 브리타니아(영국), 히스파니아(스페인), 판노니아(헝가리), 다키아(루마니아), 트라키아(불가리아 및 흑해 서부) 등 유럽대륙을 훑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하, 잠깐 그리스에 들러 그리스 문화에 젖어본 것이다. 두 번째(126)와 세 번째(128∼134) 여행에선 소아시아, 터키의 흑해연안,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제국의 남서쪽을 둘러봤다.



그는 자기 현시욕도 대단했는지 방문지마다 자신의 왕림을 알리는 기념물을 세우곤 했다.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에 세운 하드리아누스 신전, 아테네에 옛 도시와 신도시를 가르는 경계임을 나타내기 위해 로마 스타일로 축조한 하드리아누스 기념물, 요르단의 캐러밴 도시 제라시에 세운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축조한 하드리안 장벽, 이집트에 그리스식으로 건설한 신도시 안티노폴리스 등 그 수는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다.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삼는 예루살렘에선 옛 이름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엘리아 카피토리노’라 부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의 행차는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로마 문화를 속주에 전파하고 속주의 이방 문화를 로마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후일 서아시아에서 태어난 기독교를 로마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하드리아누스의 이런 문호개방 정지작업에 힘입었다 할 수 있다.

원래 로마의 황제들은 영내 시찰여행을 자주 떠났다. 대개는 제국의 안보를 도모하기 위한 민심 파악 차원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경우는 이와 조금 달랐지만 스스로 이국문화에 젖어들고 싶어 잠시도 쉬지 않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렇다고 황제의 직분에 소홀했던 것도 아니다. 늘 민심의 동향을 살핀 것은 물론, 문제가 있으면 현지에서 즉각 처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원로원에 이를 알려 황제의 부재로 인해 로마가 동요하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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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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