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호

민주·공화 당내 정치로 들여다본 ‘2008 美 대선’

‘폭풍’과 ‘이단자’의 맞대결…“당을 넘어야 당이 산다”

  • 김동석 뉴욕뉴저지한인유권자센터 소장 dongsukkim58@hotmail.com

    입력2008-10-07 11: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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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대선이 양당 후보지명을 끝마치고 열전 레이스에 돌입했다. 미국 내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강화를 위해 15년간 활동해온 김동석 뉴욕뉴저지한인유권자센터 소장이 양당의 전당대회를 비롯, 현장에서 지켜본 대선전 분석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장악하고 있던 민주당 당내조직을 ‘외부에서의 돌풍’과 케네디 가문의 지지로 돌파한 버락 오바마 후보, 사회 이슈에서 공화당 변방에 서 있다 네오콘 그룹의 지지로 후보지명을 거머쥔 존 매케인 상원의원. 이들은 과연 워싱턴 내부정치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흐름은 11월 대선에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들여다본다.
    잠시 옛이야기부터 해보자. 1992년 대선전에서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의 재선을 의심하는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냉전 해체의 주역이자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그는 분명 영웅이었다. 무명이나 다름없던 빌 클린턴 당시 아칸소 주지사가 도전장을 던질 무렵만 해도 빌 클린턴의 도움 요청을 받은 컨설턴트들이 모두 고개를 저었을 정도로 판세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힐러리 클린턴은 당시 선거의 쟁점이 외교 안보가 아니라 민생문제가 될 것임을 간파하고 남편의 승산을 점쳤다. 클린턴의 정치컨설턴트인 제임스 카빌이 “멍청아, 문제는 경제야!”라는 유명한 홍보문구를 내놓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힐러리 클린턴의 영민한 판단이 있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턴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냉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구현할 ‘새로운 리더십’이 그의 핵심 주제어였다. 2000년 대선이 이 ‘새로운 리더십’을 화두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양당의 후보인 앨 고어와 조지 W 부시가 모두 이 문제에 초점을 맞췄고, 그 가운데서도 앨 고어는 환경에, 조지 W 부시는 도덕적 가치에 중점을 두었다. 새로운 세기를 위한 미국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이때의 선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야말로 박빙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가 왔다. 9·11테러는 워싱턴 정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나라가 된 미국은 이제 리더십에서도 ‘힘의 논리’를 최우선으로 삼게 됐다. 초강경 패권논리가 지배한 ‘테러와의 전쟁’ 후폭풍은 2004년 부시 대통령을 재선시켜주었지만, 거꾸로 엄청난 반대세력을 양산했다. 형편없는 대통령 지지도가 그 가장 뚜렷한 지표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다시 한번 ‘미국의 리더십’을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됐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 혹은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됐다. 바로 그 열망이 한창 속도를 내고 있는 2008년 미국 대선을 읽는 키워드다.

    미국 민주당에 1960년대는 의미심장한 시기였다. 케네디 대통령과 당시 민주당이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하고 소수인종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는 태도를 확고히 한 이래, 민주당의 당권은 북동부 지역의 케네디계 혹은 케네디 가문이 쥐게 됐다. 잠시 남부 출신의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민주당 내부의 가장 큰 계보는 줄곧 케네디계였다.



    케네디계와 클린턴계

    그러나 미국 정치의 보수화가 심화돼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 재임 12년 동안 공화당 보수세력이 판도를 주도하자, 민주당 내부에서 백악관 티켓을 위해서는 당내 남부세력이 후보가 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이 당내 남부 출신들을 모아 중도적인 이념을 강조하는 ‘민주주의리더십회의(Democratic Leadership Council)’를 결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권에 도전했다. 그의 성공은 클린턴계가 민주당 내에서 케네디계에 맞서는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민주당 내부의 두 대표 정치세력은 2000년과 2004년 대선에서 각각 후보를 냈다. 2000년 클린턴계의 앨 고어, 2004년 케네디계의 존 케리가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대선에서 패했고, 2008년 대선을 위한 민주당의 균형추는 일찌감치 힐러리 클린턴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 중도파에 기울었다. 누가 봐도 클린턴계가 상황을 리드하는 형국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행보는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달라졌고 기금모금 행사는 늘 초만원을 이뤘다. 뉴욕과 LA 일대의 한인사회에서도 힐러리 클린턴 기금모금 유행이 번졌다. 특히 200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한 것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2007년 미 의회의 제110회기 개원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상원 의원회관의 가장 고급스러운 회의장에 자신을 지지하는 뉴욕 주 당원들을 초청했다. 지지자들은 함께 등장한 클린턴 부부를 향해 ‘힐러리 대통령’을 외치기도 했다. 바야흐로 클린턴계의 전성기였다.

    한편 2004년 11월 일리노이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 의원은 그해 보스턴에서 열린 전당대회 연설로 국민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부터 상원 선거를 돕던 전략가들과 함께 은밀히 차기 대권도전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던 그는, 서부의 캘리포니아와 동부의 뉴욕이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세가 강한 이들 두 지역의 민주당 조직은 이미 힐러리 클린턴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오바마는 당 밖에서 세력을 만드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대학을 졸업한 뒤 시카고의 슬럼가에서 지역운동을 이끌었던 경험이 한몫을 차지했다. 기존 민주당조직 내부에 머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민운동을 일으키는 게 더 힘 있고 빠른 전략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가 민주당 내 개혁적인 정치신인들을 두루 접촉하고 특히 동부 뉴욕 일대의 소수인종 후보들을 열성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 2005년 무렵의 일이다.

    그해 9월 뉴저지 주 에디슨 시 시장직에 출마한 한인 2세 최준희씨를 지원 유세한 것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는 이 자리에서 흑인, 남미계, 아시안들이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고 역설했고, 3000여 관중은 열광했다. 당시 그의 도움을 받은 소수인종 정치인 상당수가 당선된 후 오바마의 동부지역 핵심 측근이 됐다. 지난 민주당 예비경선 당시 누구보다도 일찍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고 나선 것도 바로 이들이다.

    중간선거가 한창이던 2006년 8월쯤엔 필자가 책임을 맡고 있는 뉴욕의 한인유권자센터에도 오바마 캠프로부터 연락이 왔다. 뉴저지 주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한 로버트 메넨데즈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러 뉴저지를 방문하는데 한인들에 관해서 알고 싶으니 만나자는 제안이었다. 이는 시민운동 경험이 없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제안이었고, 언제나 선거자금책을 통해 커뮤니티 단체를 접촉하는 힐러리 캠프와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당 밖에서 당을 접수한다’

    미국 대선의 당내 경선은 전통적으로 각 주의 오래된 당 간부들을 통해 대의원들을 접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오바마는 무당적자, 정치무관심층, 정치 혐오층, 아직 유권자등록을 하지 않은 시민권자 등을 타깃으로 삼고 이들을 통해 먼저 ‘오바마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당 밖에서 정치세력을 만들어 당으로 들어가 당권을 쥔다는 것이다. 이는 2006년 중간선거 직후에 오바마의 평생 동지인 데이비드 액슬로드와 그가 끌어들인 데이비드 플루프가 입안한 방식이었다(데이비드 플루프는 현재 오바마 캠프의 선거대책위원장(campaign manager)이고, 데이비드 액슬로드는 수석전략가를 맡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진영의 경선운동 방식 차이로 이어졌다. 힐러리는 늘 동네를 찾아다니며 ‘타운홀 미팅’ 방식으로 유권자를 만났지만, 오바마는 각 도시의 가장 큰 운동장에서 대규모 군중대회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세를 몰아갔다. 오바마의 전략은 적중했고, 바람은 폭풍이 됐다. 전국에서 온라인을 통해 자원봉사자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특히 20,30대 유권자들이 열광했다. 2007년 9월 힐러리의 안방인 뉴욕시 맨해튼 한복판의 그리니치빌리지 워싱턴스퀘어파크에 나타난 오바마는 “이것은 선거운동이 아니라 사회운동이다. 캠페인이 아니라 무브먼트다”라고 선언했다. 이번 대선에 임하는 ‘오바마 정치’의 기본전략을 보여주는 연설이었다.

    2008년에 들어서자 힐러리와 오바마의 대결은 당내의 당권과 비당권, 주류와 비주류의 대결이 됐다. 2008년 예비경선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국적으로 유권자등록 운동이 일어났으며 민주당 예비경선에 참가하려고 당적을 바꾸는 현상마저 일어났다. 2008년 1월3일 시작된 아이오와 코커스는 필자가 보기에는 힐러리의 유급 직원과 오바마의 무급 자원봉사자들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오바마는 다수의 예측을 뒤엎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적극적인 개입과 전통적인 지지층의 결집으로 힐러리가 뉴햄프셔에서 신승하는 등 몇 번의 엎치락뒤치락이 있었지만, 오바마의 새로운 정치 전략은 최소한 당내경선에서는 성공작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오바마에 주목해 떼를 지어 민주당에 등록한 기존의 무당적자들이 그 핵심이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소름이 끼치는 선거”라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26세의 까까머리

    정치 혐오자들을 끌어들이는 오바마의 연설 전략 뒤에는 그의 연설문 담당 보좌관인 존 파브라우가 있다. 2004년 오바마는 보스턴 민주당 전당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존 케리 진영으로부터 캠프의 연설문 작성 자원봉사자 대학생을 소개 받았다. 그가 중앙정치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하는 계기가 된 보스턴 전당대회의 연설 역시 이 까까머리 백인청년의 도움으로 탄생했다.

    ‘변화, 희망, 비전(Change, Hope, Vision)’이라는 가장 평범한 세 단어를 갖고 지금 거대한 변혁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보좌관이 바로 이 26세의 존 파브라우다. 그의 강력한 연설문 덕택에, 당내 조직을 못 본 체하고 당 밖의 지지세력을 민주당원으로 만드는 오바마의 이른바 ‘풀뿌리(grass root)’ 경선전략은 투표가 무엇인지도, 어떻게 투표를 하는지도 모르고 투표를 해본 적도 없는 시민들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정치’ 혹은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오바마 참모들의 감각은 정치자금 부분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인터넷을 통해 선거자금을 조달하는 ‘기적’이 바로 그것이다. 인터넷 모금과 풀뿌리 조직의 결합이 오바마 바람의 원동력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마크 펜, 톰 빌삭, 매기 윌리엄스 등 몸값이 엄청난 민주당 계열의 최고 선거 전문가들을 영입하고 당내 클린턴계를 총동원해 기금을 조성하는 힐러리 캠프와는 전적으로 달랐다.

    민주당의 정치자금은 크게 뉴욕의 월가와 할리우드에서 나온다. 전통적으로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은 사실상 유대계가 유일했다. 힐러리 측은 예전 선거에서처럼 이 유대계 자금줄을 찾아 나서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오바마 측에서는 뉴욕 금융가와 할리우드의 안방에서 직접 바람을 일으켜 힐러리에게 몰릴 자금줄을 차단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힐러리의 아성인 뉴욕의 맨해튼과 뉴저지의 뉴어크에서 대규모 군중유세를 강행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특히 오바마 측은 뉴욕을 움직이는 하버드 인맥을 조직해 ‘힐러리의 예일계 vs 오바마의 하버드계’라는 전선을 형성하는 데 주력했다. 이때 오바마를 위해 하버드계를 동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오바마의 하버드 동창인 중국계 테렌스 양 변호사다. 테렌스 양은 한인 1.5세대 활동가인 라이언 김을 오바마 측에 소개해 그가 한국 문제와 한인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의 할리우드에서는 일찌감치 오바마의 손을 들어준 오프라 윈프리가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자금조달 방식 구축에 힐러리 측의 전통적인 자금조달 방식을 차단하는 전략이 결합되면서, 그의 선거운동은 폭발력을 발휘했다. 만일 힐러리 측의 자금 조달이 원활했다면 민주당 경선 전세는 역전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자금에 쪼들린 클린턴 전 대통령이 개인 주머니에서 500만달러를 내놓고 개인재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은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숨어 있는 뇌관

    오바마 폭풍은 결국 민주당 내 주도권 경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남부 지역의 클린턴계가 수년간 대선전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북동부 지역의 케네디계는 오바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오바마가 흑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대선을 앞둔 민주당 안팎에서 인종문제는 매우 민감한 이슈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앞서 얘기했듯 1960년대의 케네디계가 인종문제를 계기로 당내 주류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월26일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을 앞두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발언 사건’이 터진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의 민권법 통과와 존 F 케네디의 민권운동을 비교하며 케네디 대통령과 제시 잭슨 목사의 공적을 낮추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한 일이었다. 케네디계의 좌장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발끈했고, 그가 오바마 지지로 돌아서면서 모든 케네디계가 뒤를 따랐다. 이는 오바마가 케네디계의 ‘축복’을 받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고, 오바마의 경선 승리가 눈에 들어오게 된 계기였다.

    그러나 외부의 시각과 달리 인종문제는 민주당 당내경선을 규정하는 핵심이슈는 아니었다. 예비경선만 해도, 인종문제가 이슈화하면 민주당은 망가지고 만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당 지도부가 그러한 상황을 크게 우려했기 때문에 힐러리와 오바마 양측이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흐르는 것을 철저히 막아섰다. 경선이 인종문제 위주로 흘러가면 힐러리나 오바마나 똑같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선에서는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흑백 대결이기 때문에 선거전이 본격화하면 인종관련 전략이 위험수위에 다다를 공산이 크다. 장기적으로는 효과가 부정적이지만, 네거티브 전략은 항상 민감한데다 일격에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를 일이다.

    미국의 대통령선거전에서 인종문제가 늘 불거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욱이 이번에는 유색인종 후보가 지지율에서 앞서는 상황이므로 그 민감성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이제까지 오바마는 이 문제를 겨우겨우 넘겨왔지만, 앞으로도 계속 ‘과연 흑인이 대통령이 되겠나’라는 질문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특히 가장 큰 위험은 백인으로부터 당하는 공격이 아니라 흑인 과격 활동가들로부터 나온다. 예비경선에서도 보았듯 백인들로부터의 네거티브 공세는 오히려 오바마에게 동정표를 유발할 수 있지만, 그가 과격 흑인그룹과 가깝다는 식의 네거티브는 파괴력이 클 수밖에 없다. 오바마가 이슬람교도라거나, 코란 앞에 선서를 했다거나, 인도네시아에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품은 채 성장했다는 식의 네거티브다.

    주지하다시피 미국 내 흑인조직은 크게 양분돼 있다. 1960년대 민권운동 시기 온건파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계와 분리주의를 주장했던 말콤 엑스계가 여전히 양대 세력을 이룬다. 오바마 후보는 대통령후보 출마를 선언하기 전까지 이 두 그룹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정치권과 시민사회, 특히 백인 주류사회는 킹 목사계를 주류로 인정하고 말콤 엑스계는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평가한다.

    전통적으로 킹 목사계가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다면 말콤 엑스계는 이슬람교를 기반으로 한다. 현재 말콤 엑스계를 이끌고 있는 파라칸 역시 이슬람교도다. 오바마 후보와 이슬람교에 관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 것은, 미국과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불편한 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흑인 세력 내부의 구도와 관계가 깊다. 파라칸을 중심으로 하는 흑인그룹이 얼마 전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가장 불리한 징후다. 만일 이들이 백인에 대한 증오심을 바탕으로 선거전에 본격 개입한다면 오바마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대선가도에 놓인 가장 위험한 복병이다.

    다시 네오콘이 움직이다

    ‘새로운 정치’라는 키워드로 보자면 공화당의 경선과정이나 대선 캠페인은 상대적으로 눈이 덜 간다.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존 매케인 후보 측도 이 부분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존 워싱턴 질서의 비주류임을 강조하거나, 중앙정치무대에서 신인이나 다름없는 새라 페일린 부통령후보를 지명하는 등의 움직임이 모두 이를 반영한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선출직 선거에서는 늘 현직이 우선권을 가졌다. 현직의 연임 출마가 아니라면 부통령이 거의 자동적으로 후보가 되곤 했다. 그러나 2004년 조지 W 부시의 러닝메이트로 다시 부통령이 된 딕 체니는 일찌감치 차기 도전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공화당의 인물난이 드러났다. 2000년 대선후보로 나와 초반에 바람을 일으켰으나 조지 부시의 전략가 칼 로브에게 맥을 못 추고 패한 ‘공화당의 이단자’ 존 매케인이 거의 유일했다. 간간이 거론되는 유일한 대항마는 9·11의 영웅인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 정도였다.

    민주·공화 당내 정치로 들여다본 ‘2008 美 대선’

    미네소타 세인트폴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인 9월4일, 후보지명을 공식수락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행사에 참석한 자신의 노모 로버타 매케인(96) 여사를 포옹하고 있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줄리아니는 건강상의 이유로 상원 출마를 포기하고 차분하게 2008년 대권 도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공화당 내 새로운 주류로 자리매김한 네오콘의 역할이 있었다. 이라크전쟁의 실패로 공화당은 중간선거에서 참패했고, 책임을 면치 못한 네오콘들은 부시 행정부에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레이건 행정부 시기에 등장해 클린턴 연임 기간 야인(野人)의 세월을 보낸 그들에게 2008년 대선 권력의 향배는 도저히 자신들에게 유리할 수 없는 구도였다.

    이 무렵 네오콘 주요 인사들은 자신들의 최초 근거지인 뉴욕으로 다시 모여들었고, 이탈리아 출신답게 화끈하고 거칠 것 없는 마초 스타일의 줄리아니와 접촉하게 된다. 낌새를 눈치 챈 정치 컨설턴트들이 줄리아니 캠프에 합류했고, 2007년 초반에 들어서자 줄리아니의 이름이 공공연히 공화당 차기주자로 거론됐다.

    그러나 남의 말을 안 듣기로 유명한 줄리아니의 경선 전략은 지나치게 경솔했다. 아이오와와 뉴햄프셔를 건너뛰고, 대의원 수가 가장 많은 플로리다를 석권한 다음 뉴욕과 캘리포니아가 걸려 있는 2월5일 ‘슈퍼 화요일’에서 경선을 끝장내겠다는 그의 선거 전략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줄리아니의 전략을 맡고 있던 네오콘들은 그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크 허커비 목사, 프레드 톰슨 상원의원 등 후보가 난립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뉴햄프셔의 추억

    반면 초반 존 매케인의 성적은 초라했다. 1월3일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매케인은 3위에 머물렀다. 전통적인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이끌고 있는 아이오와 공화당은 당내 비주류로 낙인찍힌 매케인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다. 간부들만 참가하는 코커스의 성격 자체가 자신에게 유리할 수 없음을 일찌감치 간파한 매케인은 최초의 예비경선이라 할 수 있는 뉴햄프셔를 첫 목표로 삼았다. 뉴햄프셔는 2000년 대선 도전 당시 그를 1등으로 밀어준 지역이었다.

    조지 W 부시와 존 매케인이 맞붙은 공화당의 2000년 뉴햄프셔 예비경선은 여러모로 사연이 많은 경험이었다. 당시 조지 부시의 전략가였던 칼 로브는 매케인에게 사상 최악의 네거티브 공세를 퍼부었고, 매케인의 오른팔이었던 마크 샐터는 거의 전면전 수준으로 이를 받아쳤다. 이때의 경험은 매케인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대통령비서실장 1순위’로 거론되는 샐터에게 끔찍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1996년 대선 당시 밥 돌 후보의 지원유세로 히트를 한 매케인의 당시 연설이 바로 샐터의 작품이었고, 이 일로 정치 컨설턴트 업계의 스타가 된 샐터는 매케인과 자서전을 공동으로 집필할 만큼 측근 중의 측근이다).

    최근 들어 로브가 매케인의 러닝메이트 지명에 관한 미디어 전략 수립에 기여하면서 로브와 샐터도 서서히 관계를 회복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공화당 선거 전략가들 사이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2000년 예비경선 당시 칼 로브는 매케인의 약점을 지나치게 들춰냈고, 이 약점은 8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매케인의 발목을 잡고 있다. 11월 본선거전을 앞두고 오바마의 전략가인 데이비드 엑셀로드는 “우리는 네거티브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렇게 공격이 오면 신속하게 맞받아칠 것이다. 상대의 네거티브는 얼마든지 확보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더욱이 2000년 예비경선 당시 부시 진영은 “결과가 있어야 개혁이다(Reform with Result)”라는 구호로 매케인이 개혁의 적임자가 아니라고 공격한 바 있다. 오바마와 매케인 후보가 모두 변화와 워싱턴의 개혁을 외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고 보면, 매케인은 이러한 게임에서 이미 패배한 경험을 갖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주지하다시피 매케인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선거자금을 들고도 뉴햄프셔에서 승리했고, 미시간 네바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거쳐 1월29일 플로리다 경선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2월5일 슈퍼 화요일에 확정된 그의 승리는, 그러나 요란스럽게 진행된 민주당 경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했다.

    민주·공화 당내 정치로 들여다본 ‘2008 美 대선’

    공화당 부통령후보로 지명된 새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8월30일 펜실베이니아 주 워싱턴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기억해둘 것은, 이 무렵 경선을 포기한 줄리아니와 롬니를 접촉해 매케인 지지를 선언하도록 독려한 것이 바로 네오콘 진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네오콘은 자연스럽게 매케인 진영의 외교안보 전문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단자와 영웅

    1990년대 이래 미국의 정치권, 특히 공화·민주 양당은 사회적 가치에 관한 이슈에서 이념적으로 심각한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동성결혼, 낙태, 총기규제, 유전자 연구, 사회복지, 이민법안 등에서 점점 더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워진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남부지역의 종교적 보수세력과 외교안보 분야의 네오콘들이 결합했던 2000년 대선은 그 정점이었다. 이후 8년 동안 사회적 가치 이슈를 둘러싸고 미국 사회가 보여준 양극화는 실로 엄청났다.

    이러한 공화당 내 종교적 사회적 이념구도로 볼 때 존 매케인은 변방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레이건을 추종하는 공화당내 정통 보수세력은 그를 ‘공화당의 이단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강경한 매파에 속하지만 사회가치 이슈에서는 거의 민주당에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04년 공화당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당에 무제한의 정치자금을 기부하는 소프트머니 금지 법안을 민주당의 파인 골드스타인 의원과 공동으로 상정해 통과시켰다. 불법체류자에게 영주권을 부여하자는 불법체류사면법안 역시 공화당원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과 공동 발의, 상정하기도 했다. 존 매케인이 당론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철학과 신념에 따라 의정생활을 해온 배경에는 앞서 등장했던 그의 정치적 동반자 마크 샐터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네오콘 그룹이 매케인 후보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에는 그가 대외정책에서 이라크전쟁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이 한몫을 차지했다. 북핵 문제에 대한 태도 역시 단호하고 강경하다. 필자는 6월2일부터 3박4일 동안 워싱턴에서 열린 유대인 로비단체 AIPAC의 정책회의에 참가해 외교정책에 관한 그의 견해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인권을 중심에 놓고 북한 문제를 보고 있었다. 그는 2003년 북한 인권법이 의회에서 통과될 때 샘 브라운백 의원과 함께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경력도 갖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잘 알려져 있듯이 베트남전쟁의 영웅이라는 그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베트콩의 석방 제의를 거부하고 6년간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그가 미국으로 돌아올 당시 닉슨 대통령이 직접 영접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9월1일 미네소타 세인트폴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그의 이러한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 참석한 모든 재향군인, 애국심에 불타는 보수성향의 백인 남성들은 그의 영웅적인 기록이 영상물로 상영되자 말을 잊은 채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매케인 캠프의 이러한 분위기는 앞으로 진행될 선거에서도 네오콘 그룹이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미 매케인 캠프의 외교안보 분야는 거의 네오콘 인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네오콘의 황태자로 불리는 윌리엄 크리스톨과 제임스 울시, 로버트 케이건 등이 그들이다.

    윌리엄 크리스톨은 헤리티지재단과 함께 양대 보수 싱크탱크로 불리는 미기업연구소(AEI)의 기관지 ‘위클리스탠더드(Weekly Standard)’의 발행인이다. 흥미롭게도 크리스톨은 2000년 경선에서 매케인을 지지했고, 이 때문에 한동안 부시 대통령과는 소원한 사이였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하고 네오콘이 그 중심에 서자 크리스톨과 매케인 참모들의 관계도 소원해졌다가, 이번 선거전을 계기로 관계가 복원되고 있다.

    제임스 울시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초당적 인사를 정보핵심에 기용한다’는 취지로 CIA국장에 임명됐다가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기조에 동의하지 못해 뛰쳐나온 인물이다. ‘낙원과 권력에 대해’라는 저서로 이름이 알려진 로버트 케이건은 9·11 직후 부시 대통령에게 사담 후세인 제거를 역설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며 유명세를 탔다.

    회심의 카드

    민주·공화 당내 정치로 들여다본 ‘2008 美 대선’
    이처럼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섰던 네오콘 인사들의 캠프 합류로 인해, 이번 대선에서 이라크전쟁은 결코 빠질 수 없는 이슈가 됐다. 2003년 3월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한 뒤 미국에서 실시된 각종 선거 때마다 이라크전쟁은 단골 메뉴였다. 2004년 대선 당시에는 이라크의 전황이 상대적으로 양호했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가능했지만, 2년 뒤인 2006년 중간선거에서는 전황이 수렁으로 빠져든 까닭에 민주당이 12년 만에 상하 양원에서 모두 다수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덧붙여 경제는 어느 대선에서나 가장 위력적인 주제다. 11월 대선을 두 달여 앞두고 실시되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들은 가장 관심을 끄는 이슈로 경제문제를 꼽고 있다. 장기적인 고유가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 대출) 사태, 그로 인한 신용경색 등이 겹치면서 경기침체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눈여겨볼 것은 유권자의 70% 가까이가 ‘경제불안이 이라크전쟁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라크전쟁과 경제문제라는 두 이슈가 11월 대선에서 한몸으로 엮여 있는 셈이다.

    이러한 구도 때문에 오바마 측에서 준비하고 있는 본선 전략의 핵심에는 ‘존 매케인이 집권하면 부시가 또 한 번 집권하는 격’이라는 구호가 자리 잡고 있다. ‘부시 3기’가 되면 미국은 거의 망하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공격하는 전략이다. 오바마 바람이 폭풍이 되고 아직까지 그 열기가 식지 않은 것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신과 염증이 반영된 결과라는 게 한결같은 분석이다. 오바마가 외치는 ‘변화’와 ‘희망’이라는 구호가 계속 유효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면 양측 모두 경기 활성화에 대한 뾰족한 대안이나 정책이 없다. 경기침체의 원인을 따지고 책임을 묻는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차별성은 ‘국민의 현실적인 어려움에 공감하는 능력을 누가 더 갖추고 있는가’로 모아진다. 워싱턴에서 잔뼈가 굵은 기존 정치인들로서는 당연히 이런 차별성을 갖기 어렵다.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매케인 후보가 43세의 젊은 여성 페일린을 러닝메이트로 삼은 것 역시 이러한 구도를 반영한 것이다. 이를 통해 매케인과 공화당은 그간 오바마와 힐러리에게만 집중돼 있던 미디어의 시선을 끄는 데 일단 성공했다.

    일린과 오바마가 대비된다면

    힐러리의 패배로 전국의 중산층 여성 유권자들의 허탈감이 높다는 여론조사가 있다. 매케인 측에서는 당분간 가장 숫자가 많은 중산층 여성 유권자를 겨냥해 ‘최초의 여성부통령이 먼저인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먼저인가’를 강조해서 물을 것이다. 여기에 ‘다운증후군이 있다는 걸 알고도 아이를 출산한 페일린의 투철한 낙태반대론자’이미지는 사회가치 이슈에서 당내 소수파에 해당하는 매케인의 입지를 보강해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페일린과 오바마가 대비되는 구도가 그려진다면 매케인은 자연스럽게 그보다 상위의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필자가 공화당 전당대회 둘째 날에 캠페인 전략 브리핑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민주·공화 당내 정치로 들여다본 ‘2008 美 대선’
    김동석

    1958년 강원도 화천 출생

    춘천고 졸업, 성균관대 입학

    1985년 도미, 뉴욕시립대 수학(정치학)

    現 뉴욕뉴저지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공화당이 꺼내든 회심의 카드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럴듯했고, 페일린이 부통령후보 토론회에서 노장 존 바이든을 상대로 무난한 대결을 펼칠 수 있을지가 관건으로 작용할 것이다. 여기에 TV 토론에서 오바마 후보가 매케인 후보에게 지난 8년간 부시 행정부의 ‘실패’를 어떻게 따지고 몰아갈지, 매케인은 이를 어떻게 방어해낼지가 두 달여 남은 2008년 미 대선의 분수령이 된다. 대선후보들의 TV 토론은 9월26일 미시시피대, 10월7일 테네시 주 벨몬트대, 10월15일 뉴욕 호프스트라대에서 열리고, 부통령후보 토론회는 10월2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대에서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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