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호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皖 ‘와호장룡’ 무대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5-07-22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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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강남과 강북을 잇는 요충지 안후이성은 ‘삼국지’의 주요 무대였다. 이곳 사람들은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황산과 닮아 생존의지가 투철하면서도 유학을 숭상했다. 중국 근대의 문을 연 리훙장을 배출한 땅이지만, 개방 이후에는 상하이 등 인근 도시에 저임 농민공을 공급하는 배후 지역으로 전락했다.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무협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 무대로 유명한 안후이(安徽)성 훙춘(宏村)에 오니 개성적인 옷차림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검정 재킷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흰 블라우스와 핑크 손가방으로 포인트를 줬다. 홍춘의 동선은 무척 단순해서 그녀와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경하다 한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

    그런데 그녀가 잠시 전화통화를 하더니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휴지가 금세 다 떨어졌길래 내 휴지를 건넸다. 중국에서 흔한 10장들이 휴지 한 통에서 2장을 쓰고 8장이 남아 있는 거였다. 그녀는 8장의 휴지를 단숨에 다 써버렸다. 한국에서라면 한두 장쯤 빼서 눈물을 닦고 돌려줬을 텐데, 역시 대륙의 기상이 다른가보다. 휴지 한 통을 놓고 한중 간 문화 차이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마칠 때쯤 그녀도 울음을 그쳤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남자친구랑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남자친구가 바쁘다며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했단다. 어딜 가나 남녀의 일은 비슷하구나.

    안후이는 청대(청代) 정치의 중심 안칭(安慶)과 경제의 중심 후이저우(徽州)를 합친 말이다. 안후이성의 약칭인 ‘땅 이름 환’ 자는 안칭의 옛 이름. 이곳은 삼국시대 최고의 미녀 자매 대교 · 소교의 고향이다. 천하를 통일하고 대교와 소교를 얻으려던 조조의 야심은 적벽대전으로 좌절됐다. 적벽의 불길은 이미 오래전에 사그라졌지만 남녀상열지사의 불길은 ‘휴지녀’에서 보듯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태산보다 황산!

    안후이는 강남과 강북, 중원과 동부 해안 지역을 잇는 요충지다. 유방과 항우의 최후 결전인 해하전투가 여기서 벌어졌다. 한신은 십면매복(十面埋伏)으로 항우의 군대를 격파했고, 장량은 한 자루 퉁소로 초나라 병사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부르게 했다. 항우와 우미인은 죽음의 작별[패王別姬]을 나눴다.



    삼국시대 안후이 북부는 난세의 간웅 조조, 신의(神醫) 화타, 일급책사 유엽을 낳았고, 남부는 오나라의 대도독 주유, 노숙, 여몽을 배출했다. 안후이의 성도 허페이(合肥)에서 조조와 손권은 몇 차례나 격전을 벌였다. 허페이는 ‘강남의 머리이며, 중원의 목구멍(江南之首 中原之喉)’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안후이는 원술이 황제를 참칭한 수춘, 장강을 낀 요충지 여강 · 환 등 삼국지의 팬들에게 친숙한 지역이 많다.

    격동의 현장 안후이는 판관 포청천, 명태조 주원장, 청나라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 등 선 굵은 인물을 여럿 배출했다. 후진타오 전 주석, 주룽지 전 총리는 안후이 출생은 아니지만 본적지가 이곳이라 안후이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곤 했다.

    황산 등산의 전초기지 툰시(屯溪)에서 마트에 들렀다. ‘참이슬’ 소주가 매장 한 코너를 가득 채웠다. 작은 마을에 이토록 많은 소주라니, 한국인이 얼마나 많은 소주를 마셔대는 걸까. 다음날 황산에 가자 관광버스 단위로 온 한국 등산객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안후이에는 산의 지존 황산과 4대 중국 불교 성산 중 하나인 구화산이 있어 등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황산의 가파른 바위와 소나무, 구름이 어우러진 풍경은 속세에서 벗어난 듯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황산이 없으면 하늘의 신선들이 내려올 곳이 없”으며, “오악(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을 보고나면 다른 산을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고, 황산을 보고나면 오악마저 보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구화산은 중국 불교의 성지로 청말 전성기에는 300개의 절과 4000명의 승려가 있음을 자랑했다. 신라 성덕왕의 장남인 교각대사가 지장보살로 추대된 곳이라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러나 황산과 구화산은 안후이의 많은 산 중 일부일 뿐이다. 중원의 평야는 장강을 넘지 못한다. 험한 장강을 기껏 건너면 거친 산이 겹겹이 놓여 있다. 한족에게는 그다지 매력이 없는 땅이었다. 후한말 전란을 피해 강남으로 내려온 한족 이주민은 거칠고 야성적인 원주민을 만난다. 한족은 그들을 ‘산속에서 살아가는 야만인’, 즉 산월족(山越族)이라고 불렀다.

    산월족은 장쑤 · 안후이 남부부터 장시 · 저장 · 푸젠 · 광둥에 이르는 광대한 산악지대에서 살았다. 이 영역이 어디인가. 바로 손권의 오나라 땅이다. ‘천하의 3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하지만, 실상 오나라는 통치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다. 위로는 토착 호족세력이 강했고, 밑으로는 산월족 등과 민족갈등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미개척지를 개발해야 했고, 군사적으로는 위와 촉에 대비하는 것 말고도 산월족의 내란을 토벌해야 했다. 220년 위 · 촉 · 오 삼국이 정립된 후에도 오나라는 산월족에 시달렸다. 234년 제갈각이 단양군(안후이 쉬안청)의 산월족을 토벌하겠다고 했을 때, 오나라의 신하들은 모두 단양군 평정을 만류했다.

    리훙장의 고군분투

    “외지고 깊은 산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 모두 들녘에서 무기를 쥐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수풀 속에서 늙어 죽습니다. 도망자나 오랫동안 사악한 행위를 한 자는 모두 함께 이곳으로 달아나 숨어 있습니다. (…) 그곳 습속은 무예를 좋아하고 싸움을 익히며 기력을 높이 숭상합니다. 그들이 산을 오르고 험난한 곳을 넘으며 가시덤불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연못 속에서 질주하고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 그들은 싸울 때는 벌이 이르는 것처럼 하고 지면 새처럼 사방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 진수, ‘정사 삼국지 : 오서’, 민음사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산월족이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언이다. 제갈각은 300명의 토벌대를 4만 명의 정병으로 불렸지만, 이는 제갈각이 제갈양의 조카답게 재주가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예외적 성공이다.

    안후이인의 강인함은 청말에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중국 남부를 석권했던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것이다. 허페이인 리훙장이 조직한 안후이 의용군인 회군(淮軍)은 증국번의 후난성 의용군인 상군(湘軍)과 쌍벽을 이뤘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 전쟁영웅이 된 리훙장은 청의 군권을 장악한 북양대신이 되어 양무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청을 되살리기란 쉽지 않았다.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리훙장을 제외한 다른 성과 세력들은 수수방관했다. 일본이 류궁다오를 점령했을 때 광둥 수군 소속의 배를 접수하자, 광둥에선 청일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배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정황을 보고 어느 서양 평론가는 말했다.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리훙장 한 사람과 전쟁을 한 것이다.”

    비록 절반의 성공만을 거뒀지만 리훙장은 중국의 근대를 열었다. 그가 주도한 양무운동은 개화의 출발이었다. 무기와 기계의 도입만으로는 중국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 청일전쟁으로 밝혀지자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났고, 그조차 실패하자 아예 신체제 신국가를 수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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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유착으로 ‘官商’ 별명

    또한 리훙장이 무능한 관군을 대신해 조직한 회군은 근대 군벌의 시작이었다. 전란의 시기에 각 지역에서 군벌들이 등장해 일제의 침탈을 견뎌냈고, ‘현대판 초한지’였던 국공내전을 거친 이후에는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국민당이 대만을 차지하게 됐다. 청나라를 안정시키려고 조직한 사병(私兵)이 훗날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현대 중국과 대만을 만들어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영화 ‘와호장룡’에서 수련(양자경)은 표국을 운영한다. 표국은 산적 등으로부터 물건과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며 목적지까지 운송하는 업체다. 경호업체와 물류업체가 합쳐진 격이다. 물류업에 종사하는 수련은 강호인인 동시에 후이저우 상인, 즉 휘상(徽商)이다.

    안후이 남부 후이저우는 산이 많아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다. 땅은 적고 인구는 많으니 농사 아닌 길로 먹고살아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후이저우는 산으로 막혔으면서도 강으로 트여 있었다. 신안강은 전당강으로 이어져 저장성 항저우로 갈 수 있고, 창강(창江)을 통해서는 장시성 파양호로 갈 수 있었다. 또한 후이저우에는 질 좋은 삼나무와 대나무가 많고, 차를 재배하기도 좋았다. 후이저우인은 고향의 특산물인 삼나무, 대나무, 차를 배에 싣고 다른 지역에 가서 장사했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장사하는 후이저우인들은 중국의 대표적 상인인 휘상이 됐다. 물론 이런 성장과정은 만만찮아서 “전생에 덕을 쌓지 않으면 후이저우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지를 떠돈다”는 속담이 생겼다.

    휘상은 고향 특산물을 내다 파는 보따리 장수로 시작했지만, 자본금과 경험이 쌓이면서 방직, 소금, 금융 등 다방면에 손을 뻗쳤다. 명대(明代)에 “휘상이 없으면 도시를 만들 수 없다[無徽不成鎭]”는 말이 생겼고, 휘주 방언은 중국 금융업계의 공용어가 됐다.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휘상은 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유상(儒商)이라고도 불렸다. 휘상들의 꿈은 큰돈을 벌고 은퇴해서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닦고 좋은 집과 사당을 지어 가문을 빛내는 것이었다. 휘주가 배출한 최고의 학자는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朱熹, 주희의 고향은 오늘날 푸젠성이지만 당시 휘주는 푸젠성의 일부 영역까지 포함했다). “진상(晉商, 산시 상인)은 관우를 섬기고, 휘상은 주희를 추앙한다.”

    휘상이 학문을 장려한 것에는 실용적 목적도 깔려 있었다.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관리들과 교제하며 친분을 쌓았다. 친해지다보면 작게는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크게는 이권을 챙기거나 불리할 때 보호받을 수도 있다. 이처럼 휘상은 정경유착을 일찍부터 실현해 관상(官商)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휘상이 건륭제에게 화려한 생일상을 바치자 건륭제는 “부유하도다, 휘상들이여, 짐도 그대들에게 미치지 못하겠노라!”라며 감탄했다.

    휘상의 경제력은 휘주 문화도 활짝 꽃피웠다. 휘주 건축양식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영화 ‘와호장룡’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졌다. 안칭의 가극인 황매희(黃梅戱), 휘주의 가극인 휘극이 탄생했다. 문방사우 생산도 발달해 쉬안청(宣城)의 종이, 서현의 먹과 벼루는 선지(宣紙), 휘묵(徽墨), 흡연(흡硯)으로 불리는 명품이다.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도시 위해 희생하는 농촌

    농촌의 가난은 단순한 생산력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다. 비대한 관료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세금을 거두고,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농촌을 희생시켰다. 농산물 가격은 싸게, 공산품 가격은 비싸게 책정해 부가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가게 했다. 호구제를 통해 도시와 농촌을 나누는 일국양책(城향分割 一國兩策)을 썼다. 이에 따라 농민공은 도시에서 불법 체류자가 돼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성상(聖商) 호설암은 휘상의 절정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줬다. 호설암은 청 300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황마괘(黃馬괘)를 하사받고 종2품에 오른 상인이다. 자신만만했던 호설암은 서양 열강의 자본과 한판 승부를 벌였다. 1882년 호설암은 생사(生絲)를 매점매석하고 1200만 냥의 이윤을 줘야만 외국 자본에 팔겠다고 했다. 외국 자본은 호설암에게 굴복하면 가격결정권을 잃을까봐 타협하지 않았고, 호설암은 호설암대로 중국 상인들을 설득해 생사를 모두 매점매석했다. 중국 자본 대 외국 자본의 중외대전(中外大戰)이 발발한 것.

    쌍방 모두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이탈리아의 생사가 풍년이 들었다. 생사는 쉽게 썩기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없다. 결국 호설암은 1000만 냥의 손해를 입고 생사를 처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호설암이 생사전쟁에서 참패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호설암의 전당포에 돈을 맡겨둔 사람들이 일제히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호설암의 사업은 연쇄부도를 맞았다. 성상(聖商)이라는 별명이 무색한 몰락이었다. 호설암은 결국 근대 산업자본의 시대를 넘지 못한 전통 자본가였다. 그의 파산은 중국 경제의 허약함을 드러낸 일이었다.

    오늘날 치루이(奇瑞, Chery) 자동차의 인퉁야오(尹同耀) 회장 등 휘상의 후예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 치루이 자동차는 중국 최초로 해외 수출에 성공한 토종 자동차회사다. GM대우가 Chery QQ 자동차를 ‘마티즈를 베낀 짝퉁’이라고 고소해 유명세를 탔다.

    1990년 가난한 안후이 진자이(金寨)현의 농촌 마을에서 한 사진작가가 똘망똘망한 눈망울의 일곱 살 소녀가 등교하는 것을 본다. 작가는 교실에서 공부하는 소녀의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은 소녀의 인생을 바꿨다. 가난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이 소녀가 바로 ‘공부하고 싶어요(我要독서(讀書)’ 캠페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왕눈이(大眼睛)’ 쑤밍쥐안(소明娟)이다. 훗날 소녀는 안후이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원이 됐다.

    ‘중부굴기’가 영광 재현할까

    그러나 이런 미담은 녹록지 않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다. 쑤밍쥐안의 사례도 가난하고 낙후한 안후이 농촌의 현실을 반영한다. 천구이디 · 우춘타오의 ‘중국 농민 르포’는 2000년대 초 안후이 농촌을 고발해 금서(禁書)가 됐다. 2001년 겨울 ‘안후이의 시베리아’라고 불리는 푸양의 대로변에서 천구이디는 파와 배추를 파는 농민을 본다. 파 1근에 6펀(10원), 배추 1근에 1자오(18원)였다. 정작 채소를 파는 농민은 맨밥만 먹었다. 채소를 저토록 싸게 팔면서 왜 먹지 않느냐고 묻자 농민은 답했다. “내가 한 근을 먹어버리면 그 값만큼 덜 벌게 되잖소?” 이토록 가난하니 “작은 병은 견디고, 큰 병에 걸리면 죽기만 기다릴 뿐”이다.

    오늘날 상하이, 장쑤, 저장 지역의 풍요는 안후이에 크게 빚지고 있다. 인근 지역인 안후이의 많은 농민이 장강삼각주 지역으로 옮겨가 저임 농민공으로 일하며 경제를 발전시켰다. 노동력뿐만이 아니다. 회하가 홍수로 범람하려 할 때면 장강삼각주 지역의 도시 · 철도 · 시설 등을 보호하기 위해 안후이의 제방을 폭파시켜 ‘홍수가 지나가는 길’을 만들었다. 덕분에 중하류 지역은 평온을 누리지만 안후이 회하 주변의 농촌은 물바다가 되곤 했다.

    장강삼각주의 풍요를 위해 안후이가 희생을 강요받은 것처럼, 중국의 성장을 위해 9억 중국 농민은 희생을 강요받았다. 이런 성장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덩샤오핑의 문제 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중국의 경제에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면 아마 농업에서 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은 가장 홀시되기 쉬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해결하려고 생각할 때는 이미 커다란 문제가 돼 있을 것이다.”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김용한

    1976년 서울 출생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중국 정부로서도 지역격차와 빈부격차는 매우 신경 쓰이는 문제다. 성장의 한계가 드러난 동부 연해 지역을 대체하려는 신성장 전략으로 중부굴기(中部굴起) 정책이 제시됐다. 중부지역의 6개성, 즉 안후이 · 장시 · 산시 · 허난 · 후베이 · 후난을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고난 속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남아 휘상의 번영을 이룬 옛 영광을 안후이가 재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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