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이중적 여인, 팜므 파탈의 원형질 김지미

“매맞을 각오하고 평생 내 감정에 충실했다”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03-10-28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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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적 여인, 팜므 파탈의 원형질 김지미
    김지미씨와의 인터뷰는 이제까지 필자가 해본 인터뷰 중 제일 어려운 것이었다. 미국에서 막 귀국한 그녀는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상태였고, 담당기자와 필자가 여러 차례 전화를 한 끝에야 겨우 인터뷰를 승낙했다.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은 해야 한다는 사전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만나자마자 “한 시간밖에 없다”고 못박았다. 김지미. 이 당대의 최고 여배우는 할리우드 영화 ‘선셋대로’의 사라진 스타 노마와 달리 지금도 바쁘고 활기찬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내게, 전성기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을 ‘본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른 스타들처럼 따로 포즈를 취하는 대신 인터뷰하는 도중 자신의 얼굴을 그냥 찍어달라고 사진기자에게 부탁했다.

    그랬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은 지금도 당당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름다움과 도도함은 그녀를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카리스마 넘치는 스타로 자리잡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인터뷰 내내 그녀에게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에너지와 자의식이 넘쳐흘렀다.

    도대체 누가 그녀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열일곱에 데뷔해 열아홉 살에 첫 결혼을 했고 스물세 살에 재혼하여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던 삶. 그리고 이어지는 아들의 죽음과 두 번째 남편 최무룡씨의 영화 제작 실패, 이혼 재혼을 반복하며, 월세와 대저택을 오가던 삶, 입도선매격으로 수입한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로 흥행 대박을 터뜨리고, 남편에게는 그렇게도 말렸던 영화제작을 시작해 지미필름의 대표와 영화인협회 이사장이란 공직을 맡았던 그녀의 삶.

    이제 63세인 그녀는 다시 한번 이혼해 또다시 세간의 눈길을 받고 있다. 보통 여인네라면 그 절반의 삶조차 감당키 어려웠을 질풍노도 같은 삶을 견디며 지탱해온 이 철의 여인의 삶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녀는 인터뷰 도중 자주 “나는 어제 일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슬며시 다른 주제로 방향을 바꾸곤 했다. 필자가 느끼기에 그녀의 망각은, 현재를 살게 하는 거의 유일한 방어기제이자 미래로 향하는 마지막 출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대 여배우는 과거를 흘려보내며 자신 앞에 닥친 현재의 삶을 부단히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배우로서, 연기자로서 김지미를 연구하는 일은 인간 김지미를 인터뷰하는 일보다 더 어려울 듯싶다. 그녀 자체가 자신의 영화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데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가 무려 700편에 달한다는 사실에 압도되었는지 세상의 많은‘김지미론(論)’에도 그녀의 연기 자체에 대한 세세한 분류나 언급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그녀의 연기 세계를 요약하자면, 영화 속의 김지미는 가부장제에 짓눌리거나 무조건 순종하는 가련한 여인네보다는 현대적인 이미지의 여성이었다. 팜므 파탈, 단순히 악녀라고 번역할 수 없는 강인한 의지와 품위로 독립적인 기질이 강한 주체적인 여성상을 체화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김지미란 여배우는 영화판을 열렬히 그리고 평생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과거 인터뷰에서 “출연을 못하면 스태프로 뛰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고, 이번 인터뷰에서는 “좋은 역할이라면 이빨이라도 다 뽑고 맡겠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그녀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그녀가 어떤 남자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던 불꽃, 오직 영화하고만 가능했던 평생 지속된 김지미의 단 한 개의 연애담이기도 하리라.

    -한동안 외국에 나가 계셨죠? 얼마 만에 들어오신 건가요.

    “3개월 만이에요. 자주 드나들어요. 미국에 식구가 많거든요. 그래서 한번 나가면 몇 개월씩 있게 돼요. 가려고 그러면 식구들이 자꾸 더 있다 가라고 그러니까요.”

    -인터뷰를 준비하다 보니 김지미씨는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많은 인생체험을 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17세에 데뷔해서 결혼을 하고 곧 이혼, 23세에 재혼을 하셨잖아요. 저는 곧 마흔이 되는데, 당시 김지미씨의 절반도 인생을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김지미씨의 운명이었을까요 아니면 의지에 따라 살아온 삶이었을까요.

    “글쎄요. 팔자타령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것이 일종의 운명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한번도 거부할 수 없었던 입장이었거든요.”

    김지미는 1940년 7월 충남 대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 직후 서울에 올라와 성장한 그녀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발발한 한국전쟁을 피해 다시 대덕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신탄진국민학교와 대전여중을 졸업한 그는 서울이 수복된 후 귀경해 덕성여고를 다녔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무렵 김기영 감독에게 픽업되어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그의 성장시절은 끝이 난다.

    “원래는 미국에 갈 계획이었어요. 서울대 문리대를 나온 저희 큰오빠가 미국에 유학가면서 저를 데려가려고 했거든요. 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한 상황이었죠. 그러는 와중에 김기영 감독님이 저를 보고는 끈질기게 캐스팅했죠. 저희 집으로도 여러 번 찾아오셨고요. 그 분은 자기 눈에 드는 사람은 어떻게든 데뷔를 시켰어요.”

    -집안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꽤 부자였어요. 아버지께서 사업을 크게 하셨거든요. 초등학교 때 뷰익이라는 자가용을 타고 학교를 다녔으니까요. 흔히 옛날 연예인들은 집이 가난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데뷔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좀 달랐죠.

    내가 데뷔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가 심했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거죠. 형제가 8남매였는데 다들 인물이 좋고 공부도 잘했어요. 그 중에 ‘이화여고 대표미인’ 소리를 듣던 둘째언니가 6·25 전쟁이 나기 전에 ‘나라를 위하여’라는 영화에 가족 몰래 출연했대요. 집안이 발칵 뒤집혀서 난리가 났었죠. 덕분에 제가 배우 한다고 나섰을 때는 거부반응이 좀 덜 했던가 봐요.”

    -그렇게 시작한 데뷔작이 김기영 감독의 1957년작 ‘황혼열차’였습니다. 당시 영화계 상황을 좀 설명해주세요.

    “그때는 배우가 많지 않았어요. 이름있는 여배우로는 조미령 주증녀 노경희 양미희씨가, 남자배우로는 이민 박암 김진규 최무룡 윤일봉씨가 활동하고 있었어요. 김승호씨는 조금 연세가 많았고요. 영화도 1년에 두세 편 정도 제작되면 많다고 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영화계에 나온 게 계기가 되어 한국영화가 전성기를 맞았다, 그런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데뷔 이듬해부터 제작편수가 10편, 20편, 30편 막 늘어나는 거예요. 전쟁 직후 혼란하고 황폐한 시대에 국민들이 애환을 달래기 위해 극장을 찾았던 거겠죠. 슬프면 가서 실컷 울고 즐거우면 실컷 웃고. 그래서 영화가 갑자기 붐을 맞았던 것 같아요.”

    흔히 1958~64년을 한국영화의 중흥기로, 1965~70년을 황금기로 평가한다. 이승만 정권은 1958년 4월 ‘국산 영화 제작 및 영화 오락 순화를 위한 보상 특폐조치’를 실시했고 이에 따라 영화수입은 쿼터제가 되어 국산영화 제작이 장려되었다.

    그녀의 말처럼 1957년 이전에 국산영화가 한 해에 한두 편 제작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데뷔 직후였던 1958년에 급격한 양적 성장을 거둔 것은 분명하다(1955년 제작된 한국영화는 15편, 1956년 30편, 1957년 37편, 1958년 74편, 1959년 111편). 본인의 말 그대로 그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간 운 좋은 배우였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김지미씨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사각(死角)이 없는 배우’, 어느 쪽에서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죽은 구석이 없는 배우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최무룡씨의 회고담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고 촬영기사도 그렇게 말했던데, 정작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자신의 얼굴에서 불만족스런 부분이 없는지.

    “나는 나를, 내 모든 것을 굉장히 사랑해요. 외모는 물론 성격까지. 제 성격이 좀 모질고 괴팍스럽다는 건 저도 잘 알거든요. 싫은 것은 굉장히 싫어하고 좋은 것은 굉장히 좋아하는 스타일이죠. 한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건이든 사람이든 영원히 안 보는 식이에요. 그걸 내 스스로 알면서도 ‘아,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다른 사람하고 똑같을 수는 없지 않느냐, 나는 나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생각하죠.”

    아마도 김지미가 스크린에서 내뿜는 카리스마의 많은 부분은 그녀의 타고난 외모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 평하던 시절도 있었다. 최무룡씨 외에도 촬영기사 대다수가 증언하듯, 그녀는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는 제대로 갖추어진 모양새’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중적 여인, 팜므 파탈의 원형질 김지미

    ① 김지미의 20대 시절 ②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5년) ③ 김기영 감독의 ‘렌의 애가’(1969년) ④ 정창화 감독의 ‘장희빈’(1961년)<br>(자료제공·한국영상자료원)

    -스스로에 대해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전혀 없었다는 거네요.

    “단 하나 키가 조금 마음에 걸렸어요. 키가 160cm거든요. 당시에는 내 키가 작은 건 아니었어요. 보통 여자로는 괜찮은 키였어요. 그래도 늘씬한 사람 보면 ‘아, 나도 저렇게 늘씬해 봤으면’ 하는 생각은 했죠. 그런데 그것도 생각해보면, 감독들이나 촬영기사 분들이 여배우의 키는 160cm가 가장 적합하다고 하거든요. 여자가 체격이 크면 러브신을 할 때 남자 품에 안겨들어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몸무게 50kg에 키 160cm. 열일곱 살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아요. 지금도 처녀 시절하고 1kg도 차이가 안 나요. 한번 살이 빠졌던 적은 있었어요. 내가 재작년에 이종구 박사와 이혼할 그 무렵에. 예전에는 이혼에 대해 별 부담을 안 느꼈어요. 어렸으니까. 지금은 사회적인 책임도 있고, 환경도 많이 바뀌어 고민이 적지 않았거든.

    이제 손자손녀도 있는 나이에 또 헤어져야 되나, 내 체면과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 고민을 하다 보니 4.5kg 이상 체중이 줄었어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이혼을 결심하고 나니 다시 원상으로 돌아오더군요.”

    -제가 볼 때 김지미씨의 전성기는 1961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해에는 여러 작품을 하셨죠. 이 때 촬영한 작품들이 ‘춘향전’ ‘에밀레종’ ‘마부의 딸’ 그리고 정창화 감독의 ‘장희빈’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등이었습니다.

    “‘춘향전’은 선민영화사에서 찍었죠. 그 무렵 영화계에는 전속제가 있었어요. 크게는 임화수 사단과 선민영화사로 나뉘어 소속되어 있었죠. 나는 선민영화사 전속배우였고요. 선민영화사 전속배우는 김지미와 최무룡밖에 없었어요. 다른 배우들은 대부분 임화수씨가 하는 영화사 전속이었죠. 선민영화사는 지금 광화문 동화면세점 자리에 있었던 국제극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도 상당히 튼튼했어요. 그 영화사에서 작품을 많이 찍었죠.”

    이 대목은 약간의 보충설명을 해야 할 듯하다. 영화사에 기록된 당시 상황과 김지미씨의 이야기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비약적인 성장은 제작회사의 난립을 가져오기도 했다. 홍성기 감독이 속해있던 선민영화사 외에도 안양영화사(홍찬), 현대영화사(정화세), 한국연예주식회사(임화수), 서울영화사(신상옥, 후에 신필름으로 개칭), 한흥영화사(최관두) 등 무려 72개의 영화사가 간판을 걸었다.

    그러나 1961년 5·16 이후 정부는 영화사를 16개로 통폐합했다. 이 과정에서 1963년까지 살아남은 영화사는 4개에 불과했다.

    악녀와 성녀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많은 영화를 찍었다는 것은 오히려 위기인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양이 많은 만큼 연기에 몰입하는 정도는 낮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음, 나 개인을 두고 말하기보다는 한국영화의 당시 흐름을 우선 살펴봐야죠. 그 무렵 촬영을 많이 한 것이 내 뜻은 아니었으니까. 첫 영화가 성공하자마자 시나리오가 산더미처럼 몰려오는 거예요. 한꺼번에 37편을 겹치기 촬영한적도 있어요.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어요? 하자면 무조건 하는 식이었지.

    전국 극장에서 다 와서 매달리고, 영화사, 프로덕션, PD마다 모두 ‘이거 출연해주셔야 제가 살겠습니다’ 하고 사정하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그러니 영화가 제대로 될 리가 있나. 영화는 많아도 정작 이거다 하고 내놓고 연구할 만한 영화는 별반 없을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렇다고 당시의 제작관행을 욕할 수 있느냐, 그것도 아니라고 봐요. 그때는 예술성보다는 전쟁에 상처 입은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게 더 중요했거든. 내가 식모부터 왕비까지 마다하지 않고 영화에 출연한 것은 달리 말하면 헌신적이었다는 거예요. 흔히 내 다음세대로 ‘트로이카 시대’가 왔다고 하잖아요. 나는 경쟁대상이 아무도 없었어요. 대한민국 영화를 십수 년 동안 혼자 끌고가야 했어요.

    그 때만 해도 감독이나 제작자가 자기 집 팔아서 영화 만들던 시절이에요. 지금처럼 어디 벤처에서 남의 돈 몇백억씩 끌어다 쓰는 식이 아니었죠. 그렇게 영화 만든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영화의 밑거름이라고 봐요. 그들을 이해했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작품에도 억지로 출연했던 거죠.”

    -당시 출연했던 영화 가운데 우선 궁금한 작품은 정창화 감독의 ‘장희빈’입니다. 이 작품에서 김지미씨는 장희빈의 완전히 다른 두 캐릭터를 인상 깊게 연기하셨는데요. 임금님한테 그지없이 헌신적인 성녀의 모습과 나인의 뺨을 치는 표독스러운 악녀의 모습을, 마치 아예 다른 인물처럼 보이도록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두 통의 편지를 써서 보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흡사 두 편지에 두 명의 다른 여인이 깃들여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더군요.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장희빈’을 초기 작품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때의 연기나 인상적인 장면에 대해서 하실 얘기가 있다면….

    “‘장희빈’에서의 연기에 대해서라…. 나는 기본적으로 배우는 감독의 소품이라고 생각해요. 그 순간에 원작이 요구하는 감정을 감독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끄집어내느냐, 그게 배우의 역할이지 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장희빈’에서의 연기가 좋았다면 다행이지만, 솔직히 그건 감독이 원하고 이끌어간 것이지 개인 김지미에게는 답이 없어요. 나는 이제 내가 출연한 영화를 한 장면도 기억 못해요. 분량만 해도 어마어마해요. 영화 한 편에 담긴 컷이 수천 개는 될 텐데, 그 가운데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골라낸다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죠.”

    정창화 감독은 1960~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로 불리던 인물이다. 한때 임권택의 스승이었던 그는 1969년 홍콩으로 건너가 오우삼 감독의 스승이 되었다.

    ‘장희빈’은 그가 홍콩으로 가기 전인 1961년 만든 작품. 이 영화에서 김지미는 권력과 영화의 노예가 된 장희빈과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 장희빈을 보여주는 이중적인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장희빈’은 그녀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기록된다.

    ‘춘향전’의 실패

    -그렇지만 ‘춘향전’은 기억하시겠죠? 이 영화는 선민영화사와 신필름, 또는 김지미씨와 최은희씨의 라이벌 대결이라고 해서 당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죠.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같은 시기에 개봉해 맞대결을 했었죠. 결국 이 대결에서 김지미씨가 출연하신 홍감독의 작품이 흥행에 실패해 진 셈이 됐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작품이 나빴으니까 흥행이 안 됐겠죠, 뭐. 이유는 없어요. 두 작품이 같은 시기에 같은 소재를 갖고 만들어서 성패가 엇갈렸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재미없는 작품을 돈 줘가며 보라고 한들 누가 보겠습니까? 안 봐요, 관객은 정확해요.”

    -혹시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김지미씨의 출연작을 죽 살펴보면 청순가련형보다는 본인의 페르소나가 인물에 투사되어 있는 역할에 강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렌의 애가’처럼 지고지순한 역할도 하셨지만, 강인한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는 여인을 연기한 경우가 훨씬 많았거든요. 반면 춘향은 말그대로 지고지순, 김지미씨에게 안 맞는 역이었다는 거죠.

    “제가 볼 때도 ‘춘향전’의 캐스팅은 잘못된 것이었어요. 김지미도 잘못 골랐고 제작도 잘못 했고 연출도 잘못한, 모든 게 엇박자인 영화가 아니었나 해요. 관객은 영화만을 두고 평가하지 환경을 감안해 주지는 않아요. 결국 영화의 완성도에 따라 관객의 반응도 나오는 거예요. 예술성은 있는데 흥행이 안 됐다, 그런 건 억지예요.”

    ‘춘향전’과 ‘성춘향’의 대결은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신상옥 감독과 홍성기 감독의 운명을 가른 사건이었다. 홍감독의 ‘춘향전’은 장편영화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였다. 아내였던 김지미를 주연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의심할 바 없는 당대 최고 화제작이었고 누구나 흥행을 점쳤다. 당시 홍감독은 ‘실낙원의 별’(1957), ‘별아 내 가슴에’(1958), ‘청춘극장’(1959) 등 히트작을 쏟아내며 승승장구하고 있던 까닭에, ‘춘향전’에는 지방 흥행업자들의 사전 투자가 잇달았고 언론은 연일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을 비교하기 바빴다.

    두 영화는 1961년 1월18일 구정 대목을 겨냥해 만들어졌다. 제작기획은 ‘성춘향’이 빨랐으나 개봉은 ‘춘향전’이 10일 앞섰다. 그러나 결과는 서울에서만 74일간 38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성춘향’의 압승. 홍성기 감독은 이 영화에서 컬러의 선명함을 살리지 못하고 긴박감도 부족한 지루한 정극 스타일의 연출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반면 신상옥 감독은 ‘성춘향’을 일종의 풍자극으로 연출했고, 컬러의 느낌을 제대로 살린 선명한 화면에 기술적 완성도도 불어넣었다.

    무엇보다도 ‘성춘향’은 김지미 외에는 이렇다 할 스타가 없는 ‘춘향전’과 달리 이도령 역의 김진규, 방자 역의 허장강 등 조연들의 해학적 연기에서 큰 힘을 얻었다. ‘춘향戰’이라고 불렸던 두 감독의 자존심 대결은 결국 홍감독의 몰락과 홍성남(홍감독 본명)-김지미 커플의 이혼으로 이어졌고, 반면 신상옥 감독은 ‘성춘향’의 성공으로 자신의 영화사 신필름의 산업적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를 얻었다.

    -이후 1963년에서 1969년까지는 겹치기 출연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김지미씨 스스로도 ‘그저 얼굴을 내민 수준이었다’고 말한 작품도 있고. 어쨌든 이 무렵에는 강인한 여자 역을 많이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육체의 길’에서 보여준, 김승호씨를 꼬여서 파멸로 이끄는 소매치기 여인 역할이 대표적이죠. 또 남의 남편을 유혹해 빼앗는 역할도 많았고요. 당시만 해도 한국영화에는 ‘악녀’와 ‘청순가련형’이라는 양극단의 여성만 존재할 때인데, 김지미씨는 연기 영역을 훨씬 넓힌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에 그런 캐릭터가 많았다는 것은 그 시대를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겠죠. 영화는 시대와 사회의 거울이에요. 사회가 청순가련을 원하면 영화도 청순가련을 보여주고, 여성이 사회적으로 힘을 얻는 시대에는 영화에서도 강하고 자기주장이 센 캐릭터가 많아지는 식이죠. 그 때는 사회적으로 억압받던 한국 여성들이 남존여비의 틀을 깨려고 용틀임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영화가 계속 나오지 않았나 싶네요.

    그러니까 김지미가 영화를 바꿨다, 캐릭터의 폭을 넓혔다, 그런 말보다는 그런 류의 영화가 많았기 때문에 나 또한 그런 인물을 많이 연기했다고 보는 게 맞아요. 김지미의 연기가 바뀐 게 아니에요.”

    -그러다가 1970년대를 맞이했습니다. 이 때는 겹치기 출연도 더 이상 없었고 작품 수도 많이 줄었습니다. 이 시기 한국영화는 굉장한 암흑기였죠. 거의 ‘토속 에로’만 존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요. 이런 상황에서 영화출연을 자제하고 범람하던 에로물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전성기가 지났다는 점이나 이미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다는 이유도 있었으리라 보는데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작편수가 급감했죠. 유신 이후에는 영화사를 만드는 일이 신고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었어요. 게다가 사회적인 주제에 대한 검열도 굉장히 심했습니다. 사회성 있는 영화는 하나도 못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늘 매춘 같은 획일적인 주제를 다룬 영화만 넘쳐났어요. 정부비판은커녕 조금이라도 껄끄러운 게 있으면 안 됐죠. 변호사도 검사도 심지어 학교 선생님도 영화에 등장시키기 어려웠어요. 별수 있나요. 창녀하고 도둑이 나오는, 한바탕 재미만 쫓는 영화밖에 못 만들었죠.

    그러니 우리 같은 사람은 발판을 잃은 거죠. 발가벗지 않으면 할 게 없었어요. 많은 영화인이 그 때 좌절했어요. ‘아, 이젠 영화를 못 하겠구나’ 그런 위기감이 팽배했죠. 작품도 안 만들고요.

    그렇게 자연도태된 거지, 전성기가 지나서라든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겨서는 아니었어요. 사실 인기라는 것은 배우가 연기생활을 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일종의 활력소죠.”

    -이 시기에 김지미씨가 대종상을 탄 작품으로 김수영 감독의 ‘토지’(1974년)가 있었습니다. 박경리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죠. 이때가 35세 무렵이었는데 놀랍게도 여주인공 서희의 할머니 역할을 연기했어요. 저는 이게 참 아쉬웠습니다. 30대 중반이면 여배우가 연기를 알아갈 무렵인데, 이때 이미 할머니 역할을 맡았다는 건 여배우에게 ‘조로’를 강요한 한국 영화판의 일면을 보여준 것 아닌가 싶어요.

    “그보다 먼저 찍은 ‘마지막 황후 윤비’에서는 늙은 상궁 역도 했어요. 분장이 잘 안 돼서 아주 이상한 모습으로 나오죠. 그렇지만 배우된 입장에서는 이렇다저렇다 불평할 수는 없다고 봐요. ‘토지’에서도 젊을 때부터 늙은 후까지 모두 소화해야 했거든요. 젊은 시절은 내가 찍고 늙었을 때는 딴 사람을 쓸 수는 없잖아요.

    열여섯 살에도 할머니 역을 할 수 있어야 해요, 배우는. 요즘 한국영화는 타깃이 20대 전후의 관객이니까 등장인물이나 소재가 모두 거기에만 맞춰져 있잖아요. 그렇지만 ‘토지’ 같은 작품은 다르죠. 대하드라마다 보니까 한 인물의 인생 전체를 연기해야 하거든요. 그런 작품을 해야 배우도 성장해요. 늙은이 역할이라도 좋은 역할이 있으면 막말로 이빨이라도 빼고 나가야지.”

    -이후 1976년부터 83년까지는 출연한 작품이 없습니다. 그 공백기에 어떻게 지내셨어요?

    “감독들이 안 썼으니까 못 했죠. 내가 일부러 안 할 이유는 없죠. 에로물 일색의 영화만 제작되는 현실에 나도 무척이나 짜증이 났어요. 제안이 와도 의욕도 안 생기고. 한마디로 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었죠. ‘영화판이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그렇게 개탄하며 보냈죠.”

    -개인적으로는 뭘 하면서 보내셨어요.

    “개인적으로 뭘 했나…. 나는 솔직히 어제 일도 잘 모르거든요. 아침에 뭘 했나 생각하려 해도 한참 걸려요. 그 때는… 뭐 그냥 놀러다녔겠죠. 별다른 취미도 없으니까요. 그냥 일상적으로, 다른 여자들 사는 것과 똑같이 살았어요. 집에서 청소하고 밥해먹고 시장도 가고.

    나는 집에서는 배우 분위기를 안 풍기려고 애써요. 사람들이 와서 보면 놀랄 만큼 평범해요. 전혀 영화배우의 집이라는 생각이 안 들죠. 전세계 연예인들이 모두 겪는 일이겠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본인보다도 가족이 굉장히 피곤해져요. 집에서는 그저 누군가의 아내이고 형제이고 어머니일 뿐인데, 밖에서처럼 대우받으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죠.

    그래서 우리 집에 오면 트로피 하나 진열해놓은 게 없어요. 영화 스틸 사진도 없어요. 그게 가족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라고 생각해요. 덕분에 내가 상을 몇 개 탔는지도 모르고 지금 그 트로피들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잘 몰라요. 남들이 들으면 건방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트로피라는 게 그 때뿐이에요. 그게 무슨 신주단지라고 대대로 보관하겠어요. 그 시대, 그 시간에 내가 타게 된 것뿐이지.

    나는 굉장히 심플하게 살아요. 가족들하고 놀러다니는 게 제일 좋아요. 이번에도 잠깐 갔다온다고 생각했는데 석 달이나 있다 왔잖아요. 형제들 좋아하고, 자식들이나 손자들하고 어울리기 좋아하고…. 이제까지 수십 년 못 했던 것, 그런 것 보충하며 지내는 게 굉장히 행복해요.”

    첫 동시녹음의 기억

    -1980년대 들어서는 또 하나 중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까지 성우의 목소리를 더빙하는 식이었는데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에서 처음으로 김지미씨 본인 목소리로 바뀌었죠. 첫 동시녹음이었을 겁니다. 김지미씨 목소리가 굉장히 허스키해서 장안의 화제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전부 후시녹음이었죠. 기술적으로 동시녹음이 어려웠어요. 일부러 안 한 게 아니라 아예 불가능했어요. 실감나는 연기를 생각하면 큰 마이너스였죠. 대신 대종상 같은 상을 받으려면 자기 목소리가 들어가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서 대개 한 롤 정도는 직접 녹음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나는 그것도 내키지 않았어요. 상이야 안 타면 그만이지, 원래 안 되는 걸 억지로 끼워넣고, 만약 그런 걸 내가 했다? 그건 위선이고 가식이죠.

    동시녹음을 해보니 굉장히 긴장됐지만 ‘이것은 완벽한 내 거다’ 하는 흐뭇함도 있었어요. 거칠고 과격한 장면에서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나오면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자연스럽고 리얼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건 배우의 연기에는 큰 플러스였죠.”

    김지미의 첫 동시녹음 작품이었던 ‘길소뜸’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수작이다. 이 작품에서 신성일과 김지미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김지미가 맡은 역할은 일제강점과 분단이라는 역사의 비극을 몸에 새기고 있는 여인. 한마디로 근대적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해 엄청난 세파에 시달리는 여자였다.

    그 중에서도 필자에게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신성일과 김지미가 오랫동안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해후한 뒤 다시 발길을 돌리는 장면이다. “3일 후에 다시 봅시다”라는 대사와 함께 30년 동안 잡지 못했던 손을 마주잡는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 두 사람의 꽉 잡은 손. 신성일이 손을 놓자 김지미의 손이 쫙 펴졌다가 다시 오므라들며 미세하게 떨린다. 두 사람의 감정상태가 200% 이상 전달되는 이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명장면이다.

    이 장면에 대한 필자의 설명을 한참 듣고 있던 김지미씨는 “다시 봐야겠네” 하면서 웃음을 지어보였다.

    -‘길소뜸’에서의 연기가 좋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으셨죠?

    “그렇다고들 하시더군요. 아마도 내가 그 시대를 다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었겠죠. 해방도, 6·25도, 혼란스러웠던 이데올로기도 다 직접 체험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지만 덕분에 영화에서는 리얼한 연기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겪은 것처럼 무서운 게 없거든요.”

    -이후에 영화 ‘티켓’을 직접 제작하셨어요.

    “지미필름이라는 영화사를 만들었죠. 영화인이라는 긍지를 갖고 살고 있는데,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안되겠다 싶었어요. 노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제 막 미성년을 벗어나는 애들만 데려다 재미만 좇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나이 든 김지미를 써 줄 리가 있나요.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티켓’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 주제를 처음 생각하게 된 것이 ‘길소뜸’ 촬영을 할 때였어요. 속초에 가서 여관을 잡고 1박을 하게 됐죠. 상의를 하느라 다방에 커피를 시켰더니 배달이 안된대요. 티켓을 끊어야 된다는 거지.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건 그 때 처음 알았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정일성 촬영기사하고 송길한 작가, 임권택 감독, 저까지 네 사람이 귀가 번쩍 뜨였어요. 티켓이 15분짜리가 있고 밤을 새면 얼마고 어쩌고 해서 한참을 설명하더라고요. 좀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싶어 계속 티켓을 끊어가며 아가씨들한테 이야기를 들었죠.

    ‘이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사회고발성 영화를 만들자고 의기투합은 했는데 제작자가 없잖아요. 그러니 그냥 내가 한 거죠. 그랬는데 영화를 만들고 나니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상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때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코앞이라 안 된다는 거였지요. 결국 공윤에서 열두 군데가 잘렸어요.”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연기인생을 통틀어 (김지미씨가) 처음으로 옷을 벗었다는 거죠. 그 장면이 상당기간 인구에 회자됐습니다.

    “벗기는 걸 목적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었어요.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벗는다고 흥밋거리가 되겠어요? 작품의 흐름상 그 장면이 꼭 필요하니까 벗은 것뿐이죠. 지금에 와서 얘기지만 저는 감독에게 자꾸 끊으라고 했어요. 괜스레 선정적인 걸 노린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감독이 계속 가더라고요. 솔직히 나는 별 감정도 없고 감각도 없었어요.”

    “모든 작품은 나의 분신”

    -수많은 출연작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혹은 가장 중요한 작품을 꼽는다면 어떤 영화였을까요. 또 함께 일한 감독 중에서는 누구를 최고로 꼽으시겠어요.

    “글쎄요, 출연한 작품은 전부가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나는 아무리 바빠도 개봉 날에는 꼭 극장에 갔어요. 물론 그 중에는 ‘내가 그걸 왜 했나’ 싶은 영화도 있죠. 그렇지만 결국은 모두 내가 내 일부를 나눠준 작품들이니까요.

    그래도 참 잘했다 싶은 영화는 역시 ‘티켓’이에요. 자기 스스로 세상을 개선하기에는 힘겨운 여성들을 대변할 수 있어서 좋았고, 알려지지 않았던 그늘을 사회에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죠. 작품성이나 흥행 여부를 떠나 잘했다고 생각해요.

    감독은 다들 유형이 달라서 누가 낫다 못하다를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죠. 단 배우의 내면에서 뭔가를 굉장히 섬세하게 끄집어내는 능력은 김기영 감독님이 탁월했죠. 임권택 감독도 훌륭했고요.”

    맞지 않는 퍼즐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만, 김지미씨는 지금까지 있을 수 있는 모든 남성상과 살아보거나 연애해 봤습니다. 연상의 남자 홍성기 감독, 연하의 남자 나훈아씨, 유부남이었던 최무룡씨, 똑똑하고 지적인 이종구 박사. 그 가운데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이던가요.

    “다 좋지 않으니까 이혼했겠죠.”(웃음)

    -예를 들어 딸이나 후배가 있는데 결혼을 하겠다 한다면 어떤 남자랑 살아보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어떤 남자라는 게 따로 없어요. 딱부러지는 답은 없는 거예요. 인간은 맞춰가면서 사는 거거든요. 그런데 서로 노력해 맞춰봐도 안 맞는 수가 있어요. 퍼즐을 맞출 때도 안 맞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는 포기해야죠. 안 맞는 퍼즐은 밤새도록, 며칠을, 몇 년을 해도 해결이 안 되죠.”

    -퍼즐처럼 딱 맞는 커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없죠. 말하자면 얼마만큼 근사치로 맞춰가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성간에 순간적인 호감은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걸로 그 사람의 모든 걸 다 아는 것은 아니에요. 아무리 관찰해봐야 모르는 건 평생을 살아도 몰라요. 그러면 왜 그렇게 여러 사람하고 연애하고 데이트하고 결혼하고 다 했으면서 성공을 못 했느냐? 결국 내가 부족한 거죠. 내가 적응을 못했다고 볼 수 있죠.”

    -팝스타인 마돈나가 출연한 영화 중에 ‘진실 혹은 대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누군가가 마돈나한테 질문을 던지죠. 누구를 가장 사랑했느냐고. 그러니까 마돈나는 딱 잘라서 그래요. ‘숀펜.’ 자기 전 남편인 숀펜을 사랑했다고 아주 대담하게 말합니다. 김지미씨도 그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있습니까?

    “마땅한 사람이 없네요. 굳이 누구를 꼽자고 한다면 그래도 자식을 같이 낳은 최무룡씨. 그 분 인간성이 참 좋아요. 대신 맺고 끊고 자르는 부분이 좀 부족하죠. 그런 부분을 내가 제일 싫어했거든요. 성격 좋고 동료애 많은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요즘에는 ‘인간성 좋다’는 말이 남의 말 거절 못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라죠. 거절 결핍증 걸린 사람이지.”

    -최무룡씨가 작고하기 전에 한국일보에 연재를 하신 게 있어요. 굉장히 자세히, 솔직히 연재해서 깜짝 놀랐어요. 김지미씨하고는 홍콩에서 첫 밤을 보냈다, 이런 것까지 쓰셨거든요.

    “아니에요. 서울이었어요. 여기서 처음 남녀관계가 이루어졌지.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홍콩에서 만났다는 건 그 사람 얘기고, 제 기억은 달라요.”

    1963년 김지미는 유부남인 최무룡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 최씨의 아들민수씨가 백일무렵의 일이었다. 이미 최무룡에게는 10년 동안의 결혼생활에 세 딸과 아들이 있었다. 당시 부인이던 강효실씨보다도 장모이며 눈물의 여왕으로 불리던 배우 전옥씨가 더 진노했다고 한다. 1962년 10월31일 김지미 최무룡 두 사람은 간통죄로 구속되었고, 수갑을 찬 손을 맞잡고 그 유명한 ‘악마의 미소’를 흘린다. 훗날 최무룡씨는 당시의 미소가 회심의 미소가 아니라, 카메라 앞에만 서면 흘러나오는 ‘습관성 미소’였다고 술회했다.

    김지미는 최무룡과의 결합을 위해 그때 가진 모든 것을 강효실측에 주었다. 그들의 이혼과 재혼은 언론의 커다란 화젯거리였고, 간통에 대한 비난 여론 못지않게 솔직한 이들의 사랑을 지지하는 팬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14년이 지난 1976년, 당시 36세의 김지미와 20대 후반인 나훈아의 결혼은 다시 한번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최고의 인기가수이자 연하남인 나훈아와의 결혼에 대해 당시 언론은 ‘돈과 육체와 섹스로 합성된 것’이며 부도덕의 대표적 케이스라는 맹비난을 퍼부었다. 동시에 ‘김지미의 사랑이야기’라는 특집호를 찍었던 것도 바로 언론이었다.

    -촬영이 있을 때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셨어요?

    “경제적으로 여유로웠으니까 유모를 두긴 했지만 아이들이 외롭게 컸어요. 거기에 대한 죄책감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아주 잘해요. 예전에 못했던 부분을 이제라도 하려고요. 가족들한테 영화배우 티를 안 내는 것도 그 때문이죠.”

    매맞을 각오를 하고

    -상당히 이른 나이에 첫 결혼을 하셨는데, 왜 그러셨어요?

    “열일곱 겨울에 데뷔해서 열여덟에 영화가 흥행했고 그 다음해에 홍성기 감독하고 ‘산너머 바다 건너’부터 일을 같이 했죠. 1959년, 한국 나이로 스무 살 때죠. 그때 그 사람은 완전히 한국 영화계에서 군림하고 있는 감독이었고 나는 신인배우였어요. 그가 끈질기게 결혼하자 그러니까 결혼해야 되는 건가 보다 했겠죠. 스무 살이라고 못 하란 법은 없잖아요, 성인이니까. 너무 일찍이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왜 결혼했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그때 만남이 잘못된 거겠죠. 너무 일찍 만났다는 것, 그거겠죠.

    솔직히 나는 지금 결혼식에 관한 기억도 안 나요. 너무 경황 없이 바쁜 상황에서 했기 때문에, 결혼도 이게 촬영인지 진짜 결혼인지 혼동할 정도였어요. 아마 그때 결혼식 끝나고 그 예식장에서 바로 영화촬영을 했을 거예요.”

    -최무룡씨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이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무렵 내가 접하는 남자는 온 세상에서 최무룡씨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여기서 촬영이 끝나면 같이 이동해 저기서 다시 촬영하고, 저기서 끝나면 또 그 다음 장소로 같이 가는 거예요. 가족보다도,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를 제일 많이 이해했고 나도 그 사람을 많이 알게 됐죠. 좁은 활동반경 속에서 오랜 세월을 같이 보내다 보니까, 컴컴한 촬영소 안에서 밤낮없이 얘기하고 러브신하고 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친해졌던 것 같아요.”

    초반에 한 시간으로 못박았던 인터뷰는 어느샌가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밖에는 그녀를 기다리는 손님이 앉아 있었다. 마지막 질문을 고를 시간이다.

    예전에 그녀는 어느 인터뷰에서 “평생 매 맞을 각오하고 나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았다”고 말한 바 있다. 결혼도 이혼도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에는 언제든지 실행에 옮겼다. 젊었을 때나 나이든 후나 마찬가지였다. 고민의 시간은 길어졌을지 몰라도 언제나 결론은 한결같았다.

    -김지미씨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아왔습니다. 감정을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았고요.

    “나는 나 자신에 충실해요. 처음에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나는 행동이나 말이나 거짓이 없어요.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에요. 참고 속이고 위선 떨고, 나는 그런 것 못 해요. 인간으로서 가장 나쁜 게 위선이거든요. 나는 그걸 제일 싫어해요.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싫으면 싫다고 해야죠. 많은 사람이, 많은 남녀가 적당히 살면서 위선적으로 구는 거, 이거 속 울렁거리는 일 아닌가요? 확실하게 자기가 책임져야죠. 책임 못 지면 손 들어야 하는 거고.”

    그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의 연속이었다. 감히 누가 저렇게도 도도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누가 그렇게 마음껏 살 수 있단 말인가. 열일곱 살에 데뷔해 수십 년 동안 숭배의 시선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여배우, 김지미만이 뿜어낼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녀는 최무룡씨와 헤어질 때,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얼마 전의 인터뷰 기사에는 그녀가 몇 달 전 한 언론인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아주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는 구절도 있다. 결혼도 한 번만 하고 아이도 적게 낳고, 편안하고 평범하게 살면서 고만고만한 스트레스를 받는 동네 아줌마로 살고 싶다고…. 문득 전혀 다른 두 캐릭터가 함께 담겨 있던 영화 ‘장희빈’ 속의 그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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