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삼 정부 때 이형구 노동부 장관이 산업은행 총재 시절 대출 커미션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김 검사의 수사 ‘작품’을 당시 동아일보 양기대 기자가 1면 톱기사로 특종 보도했다. 현직 장관을 구속하는 것을 청와대가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러나 김 검사는 오랜 내사를 통해 증거를 완벽하게 찾아냈다. 공직자 재산 등록을 비롯, 공직사회 정화를 추진하던 김영삼 정부로서는 비리혐의가 드러난 마당에 장관의 구속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구지검장으로 있던 2003년 건국대에서 ‘공직부패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와대에서 그에게 논문을 몇 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있다가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부패방지위원회(현 청렴위원회) 사무처장직을 제의했다. 그러나 검찰을 떠나기 싫어 사절했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불러 부패척결 의지를 강조하면서 부방위 사무처장직을 맡아 효율적인 반(反)부패 운영체계를 만들어달라고 강권했다.
“5000년 역사에 부패 청산이 제대로 된 적이 없습니다. 논문을 봤는데 논문 내용을 현실 정책으로 옮겨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부방위에서 일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직 검사장이 대통령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고 김포공항으로 가고 있을 때 라디오 뉴스에서 부방위 사무처장 내정 발표가 나왔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못을 박는 것 같았다. 그 후 검찰총장 후보 물망에 두 번씩이나 올라갔으나 비켜갔다. 노 대통령은 문재인 전 수석을 법무부 장관에 앉히려다 좌초하자 김성호 카드로 선회했다.
‘나가레(ながれ)’ 발언의 전말
▼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왜 ‘공직 부패’로 잡았습니까.
“내가 아는 게 그것밖에 없지요. 특수부 검사로 잔뼈가 굵었으니까요. 공직자 비리, 대형 경제사건 수사를 주로 하다보니 적발해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단계 뛰어넘어 제도적으로 부패를 축소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오래 전부터 잘못된 제도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놓았다가 논문으로 발표한 거죠.”
▼ 박영복씨는 대출사기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람인데, 지금은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검사로서 처음 맡았던 특별수사죠. 원래 그 사람이 1974년에 사고를 쳐서 구속됐죠. 그러다 형집행 정지로 밖에 나와 있으면서 두 번째로 부정대출을 받았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척하면서 병원 바로 밑에 요정을 차려놨어요, 거기에 유령회사를 여러 개 만들어놓고 은행대출 사기를 치고 있었어요. 해외에 유령회사를 만들어놓고 캄프리 원액을 수출한다면서 사실은 한강 물을 실어 보냈죠. 그렇게 신용장을 만들어 시중 금리보다 엄청 싼 금리로 은행에서 수출지원 금융을 받은 거죠. 수사를 진행해 1982년 형집행 정지를 취소하고 기소했습니다. 몇 달 걸려서 수사를 진행한 힘든 사건이었어요. 그 사건이 마무리돼가는 도중에 건국 이후 최대 어음 사기라는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져 그 수사에 차출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