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농가 맏아들로 태어나, 평범보다 못한 삶을 살다 오십 다 돼 가수가 됐다. 내 몸 같은 시를 골라 마음으로 읊조리며 ‘열에 아홉은 헷갈리며 사는’ 고달픈 인생들과 함께한다. 북한산 자락 높은 집에서 독공중인 그를 보았다.
- 풀이 있고 돌이 있고, 새 한 마리 높이 날았다.
살면서 혹 그리 가슴 막힐 때마다 불현듯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때론 그 소리에 힘을 얻고 때론 어깨 꺾이며 어찌어찌 홀로 사는 법을 배웠다 했다. 그런데 오늘 또 그이가 날 부른다. 한 사내의 목소리를 타고, 그 소리를 빌어 손짓을 한다. 문 열어라, 문 열어라.
‘산 설고 물 설고 낯도 선 땅에 / 아버지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 얘야, 문 열어라! /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 잠긴 문 열어 제치니 / 찬바람 온몸을 때려 뜬눈으로 날을 샌 후 / 얘야, 문 열어라! /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허영만 시, 장사익 곡 ‘아버지’)
5월2일 대전 충남대 정심화홀. 그득 들어앉은 사람들 새로 강이 흐른다. “얘야! 문 열어라-!” 호통치듯 애원하듯 목청이 터질 때마다 청중들은 흑 하고 숨이 멎는다. 앞자리 앉은 두 아저씨, 아닌 척 눈가를 찍어내느라 손이 바쁘다. 그들도 제 어미 아비의 아득한 부름을 들었는가. 차마 못 잊을 그 때 기억이 사마귀처럼 돋아나는가.
노래가 끝나자 돌연 팽팽한 침묵. 문득 박수가 터진다. 누군가 와-, 악- 고함도 마구 내지른다. 말로만 듣던 장사익(55)의 뜨끈한 한판 소리굿이다.
그의 노래는 그의 알몸
그렇게 2시간 반. 무대 안팎은 내내 같이 울고 웃었다. 서로의 호흡을 넘나들며 등도 두드리고 춤도 추었다. 장사익은 그의 말대로 참 잘 ‘까불었다’. 장아찌 같은 설움도, 묻혀 있던 신명도, 칼칼한 듯 청아한 듯 찰진 목청에 한껏 실려 바다로도 달려가고 하늘로도 날아올랐다.
사람들은 그의 소리에서 ‘내 얘기’를 보는 듯했다. 노래 간간이 “맞다, 맞어” 하는 한 아낙의 희한한 추임새가 하나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갈수록 장사익은 작아졌다. 가수가 아니라 그저 사람으로, 팬터지 아닌 생활 속의 맨 얼굴 맨발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 무대에서 ‘특별함’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그가 아이로 뵈고 아마추어처럼 느껴졌다. 나이를 쉰다섯이나 먹고, 소름이 돋도록 노래 잘하는 그가.
알고 보니 그의 노래는 그의 알몸이었다. 무방비, 상처투성이, 오래 짐 져 어깨 무너진 이 땅의 보통 아버지 아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소리 한 자락에 제 인생을 죄 걸어 버리는가. 그 모습이 안쓰럽고 또 고마워 사람들은 어느새 그를 믿고 있었다. 척추로 노래하는 그에게 척추로 숨을 맞춰주었다. 스타는 사라지고 그 자리, 한 무더기 찔레꽃 피어 있었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 별처럼 슬픈 찔레꽃 /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 …아 노래하며 울었지 / 아 춤추며 울었지 / 아 당신은 찔레꽃’(장사익 시·곡 ‘찔레꽃’)
아파트 화단, 장미 더미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찔레꽃. 그래도 향기는 가장 알싸하고, 그러나 빛 보기는 아주 틀려 뵈는 꽃. 이 노래를 만들었을 때 장사익은 마흔여섯이었고 아직 가수가 아니었다. 태평소 연주자로 밥벌이가 힘겹던 그는, 그 이태 전에는 카센터 직원이었고, 또 그 전에는 독서실 사장, 가구점 총무, 전자회사 직원이었다. 그런 그가 마흔일곱 살에 가수가 됐다. 되자마자 장안에 뚜르르 이름이 났고, 이제쯤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장사익 류(類)’ 창법과 가락으로 나라 안팎 넘나들며 절정의 소리꾼으로 살고 있다.
네 장의 음반을 냈지만 아무래도 그는 현장 가수다. 돈이 되건 되지 않건, 가고 싶은 자리에 가서 부르고 싶은 노래를 한다. 술 담배를 않는 그는 그래도 맘 맞는 이들과의 ‘뒤풀이 자리’를 가장 좋아하며, 그마저 갈 일이 없을 때는 세검정 집에 앉아 산을 본다. 곁에는 늘 아내가 있고 창 밖에는 봄비 맞아 토끼풀 꽃망울이 몽글 맺혔다.
장사익의 집을 처음 찾았을 때, 2층 툭 트인 통유리창 밖 풍경을 보곤 한동안 입을 못 다물었다. 서울에 이보다 더 풍취 좋은 집이 있을까. 인왕산이 겸재의 ‘인왕제색도’ 꼭 그 모양새대로 앞을 비껴 우뚝 서 있고, 탕춘대성 이끼 낀 옛 성곽이 마치 울타리인 양 둘러쳐 있다. 내려다 뵈는 뜰로는 집채만한 바위가 쳐들어와 뒷심을 든든히 받쳐주고, 지천인 민들레 토끼풀 강아지풀 사이로 풍경(風磬)이 울고 잔돌맹이가 구른다. 무엇보다 성곽 뒤, 사람 키 열다섯 곱은 족히 될 아카시아나무 세 그루가 ‘그림’의 중심에 서 완벽한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너무 좋지유. 근디 우리 집선 볼 게 얘덜밖엔 없어요. 이거 하나 보구 집을 샀는디…. 내 인생 최고, 최대 사치지유.”
장사익은 마치, 너무 좋은 집에 살아 죄송하다는 듯 코를 찡그리며 수줍게 웃었다. 곁에 섰던 아내 고완순씨가 말을 거들었다.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셔오고 싶었는데 살던 집이 너무 좁아 이사를 해야 했어요. 한번 구경이나 하자 하고 올라왔다가, 그만 이 경치에 홀딱 반해 웃돈까지 주고 계약했지 뭐예요. 근데 막상 이사를 오려 하니 문제가 한둘이 아닌 거예요. 보일러부터 골조까지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어요. 아이고, 말도 마세요. 집값만도 불감당이었는데 수리비까지 엄청나게 들어가고…. 그러니 어쩌겠어요. 이이가 저리 좋아하는걸.”
“쟤들이 다 제 스승이예유. 하루 종일 이 창 앞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흘러가는 구름도 보구, 산도 보구 풀꽃도 보구. 잘 놀 궁리만 해도 하루 해가 짧기만 해요. 집을 이고 갈 건가 지고 갈 건가, 참말 더 큰 욕심은 이제 없시유.”
장사익이 말을 받았다.
그는 “풀들에게 미안해 잔디를 심지 못했다”고 했다.
“전번에 이이가 한번 호미를 들고 나선 적이 있거든요. 싹 정리한 담에 잔디 심겠다구요. 그런데 한참을 그냥 앉아있다 들어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했더니, 풀들마다 꽃망울이 맺혔는데 맘이 아파 도저히 못 캐내겠더래요. 그래서 그냥 놔두기로 했어요. 근데 저 상태로도 이쁘죠. 전 아주 맘에 들어요.”
다시 아내의 설명이다.
이들 부부는 뜰에 가득 깔린 풀들을 잡초라 부르지 않았다. 풀들도 다 생명인데 ‘잡스럽다’ 하면 얼마나 섭섭하겠냐는 것이었다. “쟤들도 하나하나 이름이 있다, 이름대로 불러줘야 마땅하다”고 했다. 부창부수다.
서울 생활이 벌써 40여 년을 헤아리건만, 장사익의 말투는 갈데 없는 ‘충남도민’이다. 그 중에서도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
“지가 서울 생활 한 지가 1965년부터, 그러니께 벌써 몇 년이여, 38년인디, 지가 서울 말을 못 허는 게 가족들이 여기 다 있응께. 동생애덜은 인자 거의 안 혀유. 나는 발전이 안 되는 것 같어. 만날 개구락지 우는 소리, 소쩍새 우는 소리, 낙엽 지는 소리… 그런 것만 생각하며 사니께. 거기 그냥 꽉 하고 단단히 묶여 있응께….”
“고래 같구 태산 같은 우리 아부지…”
그는 맏아들이다. 위로 누나 한 명이 있고 밑으로 남동생 둘, 여동생 셋이 있다. 집안 형편은 “그냥 시골에서 밥 먹고 사는” 정도였다 했다.
“아부지가 뭔 사업을 하시다가 1950년대에 쫄딱 망해가지구, 그 담부터는 가축 장사를 허셨어요. 소 장사, 돼지 장사. 젤 핫빠리 직업이지유. 그걸 가장 하찮게들 봤는디, 그래서 밥만 먹고 살았는디, 그래도 재미있었지유 뭐.”
그의 아버지는 부지런했다. 자전거를 타고 하루 50리, 70리 길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지가 가끔 공연할 때 하얀 두루매기 입고 중절모 눌러 쓰고, 자전거 따릉따릉 하믄서 무대에 오를 때가 있어요. 다 아부지 생각 나서 그러는 건데, 참 목가적이고 좋잖여유.”
어린 시절 그는 모범생이었다. 하나 하라면 꼭 그것만 하는 착한 아들.
“아부지가 농악을 치셨시유. 광천 쪽에서는 우리 동네 농악대가 젤로 쎄거든유. 아부지가 장구를 허셨는데 그게 전 되게 자랑스러웠시유.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걸립이라 해서 하루 종일 마을을 돌거던요. 그걸 매일 쫓아다녔는데 동네 애들 중에 거기 취미 있는 애는 지밖에 읍었시유.”
동네에서 신망 받던 아버지는 썩 훌륭한 장구잽이였다. 그래서일까, 그가 아주 풍류길로 나서마 했을 때도 아버지, 어머니는 “잘 되았다” 박수를 쳐주었다.
“우리 부모님이 신명 있는 분들이셨거든유. 지가 잘 노는 게 그냥 좋은겨. 우리 엄마는 그러잖여요. ‘점을 봤는디 니가 전생에 기생이었디야’. 그 날 그 얘기를 들으믄서 ‘그려, 나는 어릿광대다. 넘들 앞에서 참 즐겁게 해주고 그러는 게 내가 세상에 난 이치고 이유다’ 그렇게 생각을 확실히 가졌지유.”
아버지는 맏아들을 무척 예뻐했다. 초상집, 잔치집 할 것 없이 자전거에 싣고 다니며 인사를 시키곤 했다. 장사익은 그런 과정을 통해 “어른헌티 인사하는 법이라던가, 초상 치르고 밥 먹는 예절이라던가” 그런 것들을 아주 제대로 배웠다 했다.
“장날이면, 한 서너 시쯤 장이 파하는데, 남동생하고 저하고 마을 어귀 다리목에 서서 아부지를 기다려요. 그럼 아부지께서 술이 얼큰해가지고 기분 좋게 오시거던요. 동생이랑 양쪽 손을 꼭 잡고 그 200미터, 300미터 들길을 걸으며 아부지 좋으신 말씀을 가만가만 듣는 거예유. 그 두꺼운 손, 가축 냄새, 술 냄새…. 아부지가 내 쪽말고 동생 쪽만 보고 얘길 허시면 얼매나 서운한지. 고래 같구 태산 같은 아부지…. 그 때 아부지헌테 배운 것이 살면서 아주 큰 힘이 됐시유.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유.”
봄이면 개구락지 울어대는 둑방길에 앉아 흰 돌로 땅에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찰랑찰랑한 논물 위로 벚꽃잎이 우수수 내려앉는, 그 풍경 속에서 클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행운이라 했다.
“왜요, 일도 많이 했지요. 똥지게도 지고 모도 심고 두레 일도 나가고. 그래두 싫단 말은 안 했어요. 장남이잖여유.”
생뼈를 만지듯 절실한 리얼리티
초등학교 5학년 때 웅변을 시작했다. 발성이 좋아야 한다기에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비 오는 날만 빼곤 매일 뒷산 중턱에 올라 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가 고지식혀가지고, 한번 해야 헌다 하면 끝까지 혀야허거던요. 눈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지는 날도 가차없이 가는 거여. 그때 목청 틔운 게 여적 오는 거예유.”
중학교 시절은, 그의 말대로라면 “국민핵교 때처럼 고지식하지는 않았다.”
“국민핵교 때는 공부를 제법 혔는디 중학교 때부터는 50명에 20등 안짝이나 할까…. 그때 동네서 태평소, 그러니께 쇄납을 잘 부는 이가 있었는디, 그 분이 꼭 노을 지는 저녁만 되믄 뚝 끝에 앉아 태평소를 부는 거예유. 그 소리를 지만 그렇게 열심히 들었시유.”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선린상고로 진학했다. 대학은 생각지도 않았다. 취직해 서울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출세라 생각했다. 은행원이 됐으면 했다. 고교 시절 내내 자취집과 학교 사이만 왔다갔다했다. 술도, 담배도 배우지 않았다. 고향 떠나올 때 아버지 당부를 틀림없이 지켰다.
“지는 술 담배 안 먹어두 재미있시유. 사람들은 꼭 술 빌려서 즐기려구 하는디, 지는 안 먹어도 잘 놀아유. 친구들이 아주 제껴놨어. 군대 다니면서도 담배 주면 사탕이랑 바꿔 먹고.”
하나 특별한 것이 있다면 노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었다. “너 참 노래 잘한다”는 얘기를 종종 듣게 됐다. 가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새 꿈이 생겨났다.
“에이 그래도 멍청했지유. 강단두 읍구. 그냥 눈에 안 띄는 애였어요. 그러니 세상 이치가 참 오묘하지요. 꽃도 필 때가 다 따로 있잖여유.”
고등학교 2학년 때 취직이 됐다. 보험회사의 내근직 사원이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서울 낙원동 음악 학원에서 가수 수업을 시작했다.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예를 들어 ‘가슴 아프게’다, 그럼 이 노래 하나를 가지고 1주일을 연습혀유. 그렇게 한 3년 하니 제법 기초가 탄탄하지 않겄어요? 지가 음반 낼 때나 공연할 때, 앞서 반은 의미 깊은 노래로 좀 무겁게 가고, 뒤로 가면 꼭 옛날 가요 불르믄서 속풀이를 허는디, 젊은 시절 갈고 닦은 그 공력이 엄청 도움이 되지유. ‘동백아가씨’고 ‘봄비’고 ‘대전블루스’고, 세월 흐르는 동안 국악 산조처럼 농익은 내 노래가 돼 버렸거던요. 새 생명을 넣는 거지유, 내 호흡으로.”
아닌게아니라 어떤 노래든 그가 부르면, 이 노래가 그 노래였던가 고개 갸우뚱거려질 만큼 새로운 의미, 새로운 감성으로 가슴을 친다. 장사익은 이에 대해 “정말 그 노래는 내 노래, 새 노래이기 때문”이라 답했다.
“세상에는 노래를 위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구, 또 무슨 운동이나 그런 일의 수단으로 쓰는 사람두 있어요. 지는 지 느낌대로 불러요. 세상에 마흔일곱 먹어 노래 시작한 가수가 몇이나 되겄시유. 다른 가수들이 노래를 위한 노래를 한다면은, 지는 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경험해온 여러 것들, 내 인생 얘기를 풀어낸다 하는 심정으루, 증말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아 0.001초 절박하게 불러유. 그냥 유명 가수가 박자 맞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께 단어 하나하나에 엄청난, 생생한 느낌과 공력을 담아서, 지 노래에 그런 게 있는 건 사실이에유.”
그의 공연에서 느껴지던 미묘한 아마추어리즘, 분명 매우 세련되고 잘 부르는 노래임에도 생뼈를 마주한 듯 절실하던 그 리얼리티는, 어쩌면 바로 그런 태도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대중 음악은 3분 예술이라고 하잖여유. 그러니께 3분짜리 활동사진 같은 거예유. 끝나고 나면, 뭐였지? 텔레비전에서 요즘 꼬마덜 노래하는 거 보면, 어, 뭐였지? 남아 있질 아녜. 근데 어떤 사람 노래를 들으면 나랑 일치하는 거, 그래, 바로 저거여, 저건 내 얘기여. 같이 울고 같이 막 감동하면서, 맞아, 내 사는 재미가 바로 저것이여. 지는 그런 노래를 부를라고 하는 거지유.”
직장 생활 3년 만에 군대에 갔다. 문선대에 배치돼 노래를 했다. 남진, 나훈아 노래를 너무 기막히게 부르는 선배가 있어 언감생심 그 쪽으로는 욕심을 낼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 막 등장한 ‘모던 가요’ 쪽이었다. 이용복, 조영남, 신중현의 노래들을 죽어라 연습했다. 탐 존스나 조용필도 그때 만났다. 결과는 대성공. 그는 문선대가 자랑하는 ‘대표 카수’가 됐다. 그는 이를 두고 “히트 깠다”는 표현을 썼다.
“군대 생활은 그냥저냥 흘러갔지만 제대 후가 문제였시유. 고민이 많았지유, 내가 워디로 가야 헐 것인가. 집안도 가난하고, 성격도 소심하고, 막상 가수 길로 나서자 하니 제약이 많더라구유. 무엇보다 가수 도전할라면 돈이 있어야 하는디, 장남이라는 게 지 좋은 거 헌다고 논 팔고 집 팔 수는 없잖여유.”
직장 생활 열심히 해 맏아들 노릇 제대로 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봤다. 군대 가며 휴직한 전 직장으로 복귀하려 했으나 회사 주인이 바뀐 바람에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그는 “거기서부터 내 인생이 꼬였다. 그 직장만 놓치지 않았으면 가수 할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가 1년 남짓 근무했을까, 1차 석유 파동이 터졌다.
“내 잊어버리지도 않어요. 1리터에 12달러 하던 석유가 삽시간에 24달러가 돼버렸어요. 그 때문에 지 모가지가 날라가버렸잖유. 고등핵교만 나왔으니께. 진짜 좌절했고 그담부턴 살기가 참말 힘들었구만유.”
이후 20년 세월은 방황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회사도 여러 곳 다녀보고, 친지 일도 도와보고, 자영업에 회사 운영, 노점 비슷한 것도 다 해봤다.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야간대학도 다녔다. 하지만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었다. 결혼을 했고 아이들은 커가는데 살림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내리막길이었다.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 / 우리는 늘 하나라고 건배를 하면서도 / 등 기댈 벽조차 없다는 생각으로 / 나는 술잔에 떠 있는 한 개 섬이다 / 술 취해 돌아오는 내 그림자 / 그대 또한 한 개 섬이다’(신배승 시, 장사익 곡 ‘섬’)
“지 성격이 자발머리없어 그런가, 일체 거짓말 안 하고 진짜 열심히 사는데도 뭐가 잘 안 되는 거예유. 그나마 좀 안정적이었던 게 금성알프스전자라고 거기 영업부 다닌 건데, 5~6년 하고 나니 지방 발령이 나서 더 버티기가 힘들드라고. 지 이름이 생각 사(思)에 날개 익(翼)자잖여유. 늘 생각이 날개를 타고 돌아다니는겨, 내리지 않고. 나도 몰르게 그러고 살았던 거예유….”
그는 직장생활에 잘 맞는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전자회사 영업직이면 기술도 좀 알고 해야 허는디 지는 맹탕이구, 그저 연구실이나 어디 가서도 순 기냥 인정으루, 그쪽에서 오히려 지를 갈켜주구 감싸주구…. 이성이 아니고 감성적으로다가 살다 보니께 꼭 부품 중에서 뭘 하나 빼먹고, 그러다 보니 납품 기일두 어기구. 하여튼 아주 성실하게 고지식하게 산다 했는데두 뭐가 자꾸 꼬이고 그랬시유.”
게다가 속 맘 못 숨기고, 융통성 없고, 술 실력까지 형편없었으니 동료들 사이에서라면 몰라도 상사 예쁨 받기가 쉬웠겠는가.
“그래도 지 가장 친한 친구들이 옛 회사 동료들이예유. 내 옛날을 속속들이 알고 그렇게나 친하게들 지냈으니께. 아무래두 노래 불른 담에 만난 사람들은 뭔가 계산이 있고 그렇잖여유. 근데 그때 친구들은 허물 없구 속 편하구….”
끝내 놓지 않았던 음악의 끈
1984~86년에는 서울교대 뒤에서 독서실을 운영했다. “진짜 열심히, 아주 열심히”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지가 참말 성심성의껏 뒷바라지를 했거던요. 1년에 S대를 5명씩 보내기도 했어요. 근디 3년이 탁 되고 보니, 이러다간 아주 꼬마 대장이 될 것 같어. 이건 아닌데, 딴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독서실 관두고 쬐끄만 무역회사를 차렸지유.”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다. 150석이 늘 꽉 차기에, 옳다구나 싶어 100석을 더 만들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그는 “원래 그 동네 수험생 수가 150명이 다였나봐유” 하며 허허 웃었다.
지인들과 어렵게 차린 무역회사 역시 잘 되지 않았다. 회사 문을 닫고 1년을 놀았다.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다 싶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그가 안쓰러웠는지, 카센터를 하는 매제가 ‘사무장’ 자리를 마련해줬다. 손님들이 오면 차 대주고 커피 타주고 수다도 떨어주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1990년에 시작해 3년을 그리 살았어요. 말이 사무장이지 직원 서너 명 있는데 그거 뭐…. 매달 50만원, 60만원. 그것도 황감하고 매제헌테 엄청 미안했시유. 제 집에 갖고 갈 것 떼서 지헌테 주는 상황이었시니께.”
당시 그의 막막한 상황을 엿보게 하는 노래가 있다. 정성균 시에 그가 곡을 붙인 ‘귀가’다.
‘기진한 몸 텅 빈 가슴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 부스스 잠 깨어 강아지들처럼 기어나오는 / 아이들을 보고야 텅 빈 가슴이 출렁 채워집니다’
그가 꼭 그랬다. 매일이 까맣고 힘에 겨웠다.
“이것을 어찌 산다고 헐 수 있겄나…, 그러면서도 여기가 바로 밑바닥이다 하니 오히려 평정이 되더라구유. 1992년 말, 그러니께 한 12월20일 그쯤 돼서 새 결심을 했어유. 그려, 내가 입때껏 40년 삶을 살아왔는디,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냐. 밥만 먹고 똥만 싸고, 기차 타고 마냥 어디로 떠다닌 거여. 좋다, 진짜 내가 3년만 아주 죽을힘을 다해 살아보리라. 그때 생각난 게 태평소였어유.”
당시 이미 그는 국악판에서 제법 이름 알려진 연주자였다. 생활에 쫓기면서도 틈틈이 공부를 계속한 덕분이었다. 그가 처음 국악을 시작한 것은 1980년. 산다고 살아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에게는 탈출구가 간절히 필요했다.
“많이 힘들었어유, 마음적으루. 근디 어린 시절 태평소 소리가 막 몸 속에서 나는 거예유. 아, 그 소리를 좀 배우자, 허고 있는데 전봇대에 붙은 단소 강습 포스터가 보이데요. 옳다구나 싶어 공부를 시작했지유.”
태평소에 한 몸 맡기고
1년 동안 단소를 배우고, 이후 5년 간은 피리를 익혔다. 1986년부터는 태평소를 불었다. 선생님에게 사사받은 기간은 3개월 남짓. 나머지는 잘 분 소리 듣고 또 들으며 독학하다시피 정진했다. 질곡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끝내 놓지 않았던 음악의 끈이 그를 마침내 새 삶의 지평으로 인도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했었나봐유. 그 둘이 전혀 맞지가 않았던겨. 그 와중에도 지는 음악을 버리지 않았거던요. 힘들고 힘든 인생도 다 그놈으로 달래가믄서.”
그는 마흔 넘어 내린 자신의 결단에 대해, 아무것도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기득권 있는 사람은 힘들지, 더 힘든 거여. 윷놀이 헐 때 넉 동이 다 잡혔어요. 그러고 나면 이제는 기냥 막 가게 되잖여유. 더 내려갈 땅이 없다, 그게 그런 거여. 그때 젤로 중요헌 게, 큰 선생님덜 하시는 말씀 있잖여유. 몸을 벗어라, 가볍게 해라, 욕심을 버려라….”
그는 “태평소는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악기”라고 말했다. “농악 할 때 쓰긴 하지만 꼭 필요한 거는 아니거든유. 그래도 한번 소리를 내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지요. 또 즉흥적이고 지 생각대로 요리할 여지가 많구유.”
작심하고 달려들면 밥은 먹고 살지 않을까 싶었다. 1993년 새해가 열리자마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물놀이 대가 이광수, 김덕수씨 등에게 “시켜만 달라, 따라다니게만 해달라”고 졸랐다.
“아부지가 시골서 쌀은 보내니 그냥 먹고만 살았지유. 그때 생각이, 한 해에 35% 이상씩만 목표를 달성하면 되는 거여. 결심 단단히 헌 게 결실을 볼라 그랬는지 자꾸 상도 받게 되고 찾는 사람들도 많아지구. 노력한 보람이 있었지유.”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으로 장원을 수상했다. 같은 해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는 ‘결성농요’로 대통령상을 탔다. 이듬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도 ‘금산농악’으로 또 장원이 됐다. 어느새 그는 태평소에 있어서만큼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명인이 되었다.
1993년 대사습놀이는 그에게 국악 연주자로서의 자신감을 심어준 동시에, 시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우연히 금산좌도시인동호회원들의 모임에 갔거든요. 거기서 시집 몇 권을 선물로 받았시유. 읽다 보니 저도 모르게 노래가 툭툭 튀어나오드라구유. 시인을 보고 원래 ‘노래한다’ 허잖여요. 딱 그 말이 맞드라구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이 ‘귀가’ ‘섬’ ‘꽃’이다. 양해남 시인의 시를 빈 ‘꽃’은 이런 노래다.
‘나에게 꽃이 있었지 / 어느 별 어린 왕자처럼 / 매일매일 물을 주고 / 항상 바라봐줘야 하는 / 꽃 한 송이 있었지’
같은 해 그는, ‘장사익 마니아’들이 ‘찔레꽃’ 다음으로 좋아하는 노래 ‘국밥집에서’를 만들었다.
“인사동에서 시 쓰는 친구눔 하나를 만났는데, 이노무새끼가 아주 그지여. 그눔이랑 들어간 술집에서 누가 벽에 연필로 좌악 옮겨놨드라구. 읽으며 가슴이 먹먹했지요. 바로 지 얘기였어유.”
‘노래를 부른다 / 허리가 굽은 그가 탁자를 타닥 치며 /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가 / 희망가를 부른다 / 이마의 깊은 주름은 세상을 덮고 / 눈길 머무는 나를 본다 / 그렇다 / 저 노인은 가는 길을 안다 / 끝내 흙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다’(최산 시, 장사익 곡 ‘국밥집에서’)
이렇게 그의 노래는 모두 시를 바탕 삼고 있다. 그가 직접 가사를 쓴 몇몇 곡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시다. ‘1년 가야 책 한 권 안 본다’는 그가, 사실은 가장 많이 읽는 책이 시집이다. 신문을 읽다가도 맘에 번쩍 띄는 시가 있으면 잊지 않고 오려두었다 읽고 또 읽는다. 그러면 그냥 운율이 붙고 곡조가 슬슬 따라나온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쓴 곡들에 대해 ‘작곡가 누구’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몽땅 그저 ‘장사익 엮음’이다. 하늘 아래 다시없는 새 곡조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세상 어딘가를 휘휘 떠돌던 한 노래가 좋은 시를 만나, 알아주는 풍류객을 만나 소리 되어 나오는 거라고, 그는 그리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쓴 거는 아니어도, 어떤 시를 읽으면 아 저것이 바로 내 마음이다, 내 인생이다 하는 것이 있어요. 그럼 그건 내 시지요. 그냥 노래가 되는 거예유.”
‘오체투지’의 강렬한 공양
그래서 그는 노래를 만들 때 악보를 적지 않는다. 그냥 속에서 나오는 대로 흥얼거리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함께 공연하는 연주자들 앞에서 몇 번이고 불러본다. 그는 화성이니 음정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그 모두 서양식 규칙이 아닌가. “누구나 똑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우리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지는 그런 게 아니라 더 원초적인거, 왜 우리 엄마들이 애기 업고 웅얼웅얼 시에미 욕도 하고, 아이고 다리 아프다 푸념도 허고, 그렇게 애환과 눈물이 담긴 노래를 하고 싶어유. 그냥 흘러가면 되는 것을, 조바뀜도 박자 따지기도 필요 없지유.”
예를 들어 ‘국밥집에서’를 보면, 앞머리는 대금산조 풍이다가, ‘희망가’ 부분은 원래 곡을 살리고, 뒷소절로 가면 진도아리랑 가락이 굽이굽이 풀어져나온다. 이를 두고 장르를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저 한 남자의 신산한 일생이다. 연극 같은 노래다.
“지 노래는 박자 없이 호흡으로 가유. 그렇게 해야 노래에 담긴 메시지가 고대-로 전달돼요. 가사랑 감정이랑 호흡이랑 표현이 꼭 마치맞게 일심동체로 움직이니께. 봄여름가을겨울을 봐유. 그게 어디 딱딱 끊어져 찾아오든감유. 사람 맥박은 또 워뗘유. 기분 따라 달라지잖여유.”
시 고르기부터 시작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노래에서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다. 장사익은 그 메시지를 가장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죄 한 지점에 모아 맞춘다. 가사, 감정, 표현, 들숨날숨을 관객 앞에 한덩이로 묶어 던지는 ‘오체투지’의 강렬한 공양이다.
“그래서 지 공연 보믄 반주가 간단하잖여유. 기타, 모듬북, 때에 따라 사물놀이, 트럼펫, 해금. 전부 즉흥 연주가 가능한 것들이예유. 또 우리끼리 참말로 호흡이 잘 맞으니께. 우리는 악보 보고 반복해 연습허고, 그런 것은 잘 안 혀요. 그냥 서로서로 보듬어가믄서, 목청이 좀 딸리면 기타가 받쳐주구, 기타가 또 딸리면 북이 우다다다 힘 넣어주구. 그렇게 한데 어울리면서 평생 갈 거예유. 참말로 좋은 인연이지요.”
흔히 ‘장사익 사단’으로 불리는 일단의 연주자들은, 사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독보적 명성을 쌓은 장인들이다. 기타리스트 김광석은 옛 ‘들국화’ 멤버다. 자기 이름으로 창작 음반을 내고 개인 콘서트를 열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 3000장 이상의 음반에 세션으로 활동한, 가수들이 새 판을 낼 때마다 꼭 ‘모시고’ 싶어하는 이름난 기타리스트다. 모듬북을 치는 김규형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지도위원이다. 오정숙, 김동준, 김명환, 정화영, 김청만의 문하에서 고법을 사사했다. 제6대 ‘품바’로 활동한 고수이자 소리꾼이다. 트럼펫과 해금은 재즈연주가인 최선배, 국립국악관현악단 소속 김은영씨가 맡고 있다. 사물놀이패인 ‘노름마치’도 800여 회의 국내외 공연으로 이름 높은 차세대 대표주자다.
이들을 한데 묶는 건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잘 맞는 짝이라는, 함께 어울릴 때 가장 흥이 나고 좋은 소리가 뿜어져 나온다는 확신이다. 장사익은 공연중 연주자들이 자신의 기량과 특색을 한껏 뽐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실히 보장해준다.
그에게 또 한 사람 중요한 이는 ‘무박(無拍)’의 개념을 처음 심어준 타악기 주자 김대환이다.
“그 형님이 어느 날 지헌테 ‘산토끼’를 박자 없이 불러보라고 시켰어요. 그래 박자 무시하고 부른다고 불렀는데, 아 대뜸 ‘너 속으로 세고 있잖아’ 하시는 거예유. 그려! 이거구나! 무릎을 탁 쳤지요.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좋은 일 있으면 소리 지르고, 그렇게 기분 가는 대로 맘 따라 소리내다 보면 그게 진짜 노래 아니겄어요?”
실제로 그의 노래는 딱딱 박수치며 따라 부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 어깨를 으쓱이거나, 허리를 살살 흔들어대거나, ‘얼쑤’ 무릎을 두드리며 몸 자체로 운율을 타야 더 신명이 난다. 장사익의 노래에서 참 자유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노래가 맘과 더불어 이렇듯 몸마저 폭신폭신 풀어주기 때문일 게다.
이제 다시 그가 가수 된 사연으로 돌아가 보자. 1994년 여름이었다. 태평소 주자로 나선 지 1년 반이라, 공연 후 뒤풀이 자리가 자연스런 일상이 됐다. 술 한 모금 못 넘기는 그이지만 무대보다 신명나는 그 자리를 마다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를 원했다. 그는 이미 소문난 최고의 ‘뒤풀이 카수’였다.
“‘봄비’ 그게 18번이구, ‘님은 먼 곳에’ 그것도 자주 불렀지유. ‘열아홉 순정’ ‘동백아가씨’도 불르구, 아주 끝내줬어요.”
간혹 직접 만든 노래들도 섞어 불렀다. 그걸 들은 ‘재야 피아니스트’ 임동창씨가 “판 한번 제대로 벌여보자”는 권유를 했다. “싫다, 이제 와서 뭔 소용이냐” 거절을 했는데도 집에까지 쫓아와 “꼭 해야 한다”고 질리게 졸라댔다. 이어 타악주자 김규형씨가 합류했다.
25년을 돌아 가수가 되다
“그래 결국 노래를 하게 됐지유. 1994년 11월, 신촌 예극장에서 첫 공연을 혔어요. 그냥 아는 사람덜 알음알음 연락혀서, 그 중엔 표 산 사람도 있구, 안 산 사람도 있구. 근데 100석 자리가 다 차고 한 300명은 서서 본 거예유. 반응이 너무 좋아 지들이 더 깜짝 놀랐지요.”
단 한 차례의 공연만으로도 그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정말 할 일이, 하늘이 날 세상에 낸 뜻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시유. 드디어 갈 길을 찾은 거잖아유. 고등핵교 졸업허구 뺑뺑 돌아 여기까지 온 거지. 그러고 보니 지가 몸은 딴 짓을 해도, 늘 노래 속에 살았던 것 같드라구유. 카센타에서 일할 때도 손님이 싣고 다니는 테이프들을 보면 그 사람 인생이 한눈에 쫙 보여요. 공부는 얼마나 했나, 나이는 어떤가, 성격은 어떠한가. 얼매나 재미있어유.”
그에게, 그토록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누구 눈에도 도드라지지 않고 특별히 챙김 받을 것 없는 ‘민초’로 살아가는 삶이 못내 갑갑하지는 않았냐고 물었다. 예술가로서의 끼를 타고난 사람은 어려서부터 주목받는 삶에 익숙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에게선 ‘특별 대접’을 받아본 사람다운 면모가 거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지는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시유. 평범하니 안 하니 그런 말 자체를 할 필요가 없는 게, 지는 평범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평범혀유. 물론 무대에 서면 100%, 200% 특별한 노력으로 애를 쓰지만, 그래서 무대 위의 나는 뭔가 특별해 보일지 모르지만, 거기서 내려오면 지는 정말 암것두 아니예요. 언젠가 한 ‘운동권 가수’가 그러드라구유. ‘나는 15년 동안이나 현장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지금의 자리를 다졌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당신이 어떻게 한순간 민중음악의 대안이고 상징이 될 수 있느냐’. 그래서 지가 말했지요. ‘난 모른다, 그러나 뭔가 있다면 그건 내가 정말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거다’라구유.”
그는 “원래 그렇다” 하지만, 사실 평범함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음악에 임하는 그의 보루이자 삶의 핵심이다. 이미 유명인이 된 그가, 그 유명세를 활용하려 마음먹으면 누구와도 교통할 수 있고 마음껏 잘난 체도 할 수 있는 그가, 굳이 주목받지 않는 삶을 살려 애쓰는 것은 청중과의 거리낌 없는 어울림,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평범함은 내 노래의 보루”
“지가 이렇게 티샤쓰 입구 추리닝 입구 밖에 나가믄 사람들이 아무두 몰라봐유. 얼매나 행복한지. 이게 장사익이다 할라 치믄, 개량 한복 쫙 빼입고 유명한 사람들이랑 쓱쓱 어울리고 다니믄, 지가 아무리 텔레비전 안 나갔다 해도 몇 사람은 알아보지 않겄어유? 그런데 그러면 안 되거든요. 초심으로 가야지유. 관객들하고 똑같은 키, 똑같은 감정으루 똑같이 울고 웃고. 가장하면 안 돼유. 진짜 모습이 그래야지유.”
그렇다면 좀더 많은 사람에게 내 노래를 알리고 싶다는, 더 많은 음반을 팔고 싶다는 욕심 같은 것도 없을까.
“어쩜 욕망 있겄지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노래는 지 혼자 하는 것이지 누구한테 알리고 자랑할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거던요. 열 명이 듣건 백 명이 듣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어요. 나는 오히려 한 사람만 앞에 놓고 불렀으면 좋겄어.”
그는 노래가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꿈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나훈아계 알어유? 아줌마들이 그걸 한다는 거예유. 1년 동안 한 달에 만원, 이만원씩 모아서 나훈아 디너쇼 하면 그걸 보러 가는 거예유. 얼매나 멋있어유. 한 사람의 노래가 누군가의 1년 시름을 한번에 덜어주다니. 공연 끝나고 음반에 싸인 해주다 보믄 우리 엄마가, 우리 친구가 지금 암 투병중인데 당신 노래로 힘 주고 싶으니 꼭 그 사람 이름 써달라고 신신 당부허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게 뭐겄시유. 노래의 힘, 공감의 힘 아니겄시유?”
가장 순정한 공감을 위해 그는 한번 노래할 때마다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를 쥐어짠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를 만난 이들은 볼 때마다 주름이 깊어지고 몸피가 줄어든다며 걱정이 대단하다. “어쩌겄어요. 그러질 않으면 똥 싸고 밑 안 닦은 것처럼 개운치가 않은디.”
예극장 공연이 있은 얼마 후 1집 음반 ‘하늘 가는 길’을 냈다. ‘찔레꽃’ ‘귀가’ ‘하늘 가는 길’ 같은 창작곡 외에 ‘님은 먼 곳에’ ‘빛과 그림자’ ‘열아홉 순정’ ‘봄비’까지 불러 넣었다. 그의 꽉 차 찐득한 목청, 장르를 구분하기 힘든 대안적 음악세계는 곧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1996년 ‘자유’ 공연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군중 앞에 섰다. 가요평론가 강헌씨의 표현대로라면 ‘노래가 마악 끝났을 때 대극장은 바늘이 떨어져도 들릴 정도로 순간적인 정적이 감돌았고, 약 1초 후 지붕을 들썩이는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오는’ 감격을 경험했다. 무대 가수로 본격 데뷔한 것이다.
그러나 2집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1집의 큰 성공을 함께 이끌었던 임동창과 음악적 결별을 한 것이다. 둘이 함께 하기엔 임동창의 피아노가 너무 거셌던 걸까. 그렇게 나온 2집은 1집만큼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아버지의 병이 깊어진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는 폐암으로 거듭 밭은 기침을 토해내는 아버지 곁에서 표제작 ‘기침’을 만들었다.
‘돌아누워도 돌아누워도 찾아오는 / 환장할 기침은 언제나 끝이 나려는지 / 밥그릇의 천길 낭떠러지 속으로 / 비굴한 내 한몸 던져버린 오늘 / 삶은 언제나 가시박힌 손톱의 아픔이라고 / 아무리 다짐을 놓고 놓아봐도 / 별자리마저 제집을 찾아가는 새벽녘까지 / 나의 마른 기침은 멈출 줄을 모른다’(신배승 시, 장사익 곡 ‘기침’)
“녹음을 했는디 너무 아닌 거예요. 세상에 내놓을 수가 없어 방구석에 처박아놨지유. 근데 가을 낙엽 지는 걸 보믄서, 부족하고 형편없지만 그래도 저게 내 모습 아닌가, 개칠해서 내놓으면 뭐 또 그리 좋겠는가…. 그런 생각에 그냥 부끄런 줄 알면서도 내놨시유.”
3집 ‘허허바다’는 장사익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음반이다.
‘파도를 보면 / 내 안에 불이 붙는다 / 내 쓸쓸함에 기대어 / 알몸으로 부딪치며 으깨지며 / 망망대해 하이얗게 / 눈물꽃 이워내는 파도를 보면 / 아, 우리네 삶이란 / 눈물처럼 따뜻한 희망인 것을’(허형만 시, 장사익 곡 ‘파도’)
그가 부르는 ‘파도’는 정말 듣는 이의 가슴에 불을 붙인다. 쓸쓸함에 기대어 희망을 부를 수밖에 없는 인생살이를 아프게 눈물나게, 그러나 청승맞지 않게 다독여준다.
얼마 전에는 4집 ‘꿈꾸는 세상’을 냈다. ‘아버지’란 곡도 담겨 있는 이 음반은 앞의 세 것을 합친 것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대꽃 피우러 1백년 길을
너무 슬픈 노래만 부르는 것 아니냐고 하자, 그는 “내가 할 몫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사람 열에 아홉은 헷갈리며 살어유. 사는 게 참 퍽퍽하잖여유. 그런 사람들 맺힌 속을 노래로 풀어주고 싶은 거예유. 즐거운 사람헌테는 즐거운 노래를 해줘야 기분이 더 좋아지는 거고, 슬픈 사람헌테는 슬픈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상수라고 지는 봐유. 왜 시집살이 독허게 헌 며느리들이 시어무니 초상 치르며 되게 쎄게 울잖여유. 그럼 동네사람덜이 그러지유. 저 집 며느리 참 곡 잘허네, 쌍 꺼. 며느리 입장에선 뭐것시유. 시어매 돌아간 것이 슬퍼 우는 게 아니라 지 설움에 겨워 한바탕 풀어내는 거지유. 그런 게 바로 생산적 슬픔 아니겄어유?”
나고 자라 짝 만나서 애 키우다 또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유전 갈피갈피, 그의 노래에 다 들어 있어 와달라는 자리가 적지 않다.
“초상집에 가면 ‘질 땐 지리 뚝 뚝 / 필 땐 피어 하늘 한 번 보고 / 은근한 향기 바람에 날려보내고…’ 하는 ‘낙화’를 부르구유, 혼례식에 가면 ‘나 무엇이 될까 하니 / 그리운 그대 꿈속까지 찾아가 / 사랑하는 그대 귀 씻어주는 빛 고운 솔바람소리…’ 하는 ‘나 무엇이 될까 하니’를 부르구유.”
이렇게 말하는 그도 어느새 육십이 낼모래다. 인생사 구비구비 멀고 먼 길을 혹은 웃으며 혹은 흐느끼며 예까지 왔다. 1998년, 2001년에 아버지, 어머니를 떠나보냈고, 목원대 국악과를 나와 국립국악관현악단 피리 주자가 된 큰아들은 국악 하는 좋은 짝 만나 잘 살고 있다. 역시 피리를 전공한 둘째 아들 하나 데리고, 백만불짜리 창이 있는 마루에서 뒹굴거리며, 그는 종일 아내와 친구와 끝내주게 잘 놀 궁리를 한다. 풀꽃을 보고 별을 본다.
‘여기서부터, -멀다 / 칸칸마다 밤이 깊은 / 푸른 기차를 타고 /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 백년이 걸린다’(서정춘 시, 장사익 곡 ‘여행’)
대나무는 백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죽는다 했나. 그려, 뭔 말이 더 필요하겄능가. 장사익은 매일 기차를 탄다. 핏줄 선 목청으로 대꽃 피우며, 간난신난 1백년 길 춤추며 간다.